13. 미셀스웨이트


1939년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40대를 목전에 둔 메리 레녹스는 인생의 가장 바쁘면서도 안정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대공황의 여파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지만 메리는 루이즈 존스의 빈자리를 안정적으로 메우며 유제니 크루를 이끌었다. 어린이 문학 작가로서의 사라 크루의 명성도 견고했다. 여자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 단편으로 시작한 [시간의 문] 시리즈는 두 차례나 연극 무대로 옮겨져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38년 어린이 도서관 사서들이 뽑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여자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다고 판단했던 많은 이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어린 독자들은 현실감 있고 재치 있는 기숙학교의 묘사와 과거로 이어지는 문을 열어 모험을 떠난다는 흥미로운 설정에 열광했다. 학생인 주인공들이 부분적인 역사 지식으로 혼란을 일으키면서도 과거를 손상하지 않고 현재로 돌아온다는 설정은 후대의 SF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었던 [시간의 문]을 처음 접하고 빠져들었던 일을 기억했다. "([시간의 문]은) 많은 훌륭한 어린이 문학들이 그렇듯이 어딘가 허무하고 쓸쓸한 면이 있었다. 주인공은 어느 순간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다시는 같은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런 점이 나를 열광하게 했다."

2차 대전의 발발은 이 모든 것의 잠정적인 중단을 의미했다. 1939년 정부의 지시가 있기 전부터도 사라 크루와 메리 레녹스는 유제니 크루의 학생들을 시골로 대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런던 대학에서 물리를 전공한 후 유제니 크루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던 25살의 이디스 밋포드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아이들을 가족에게서 떼어내 낯선 곳으로 보낸다는 발상이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레녹스 양이 학교를 통째로 요크셔의 황무지로 옮긴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반발은 상당했다. 나 역시 VAD에 가입할 생각이었지만 존스 양과 크루 양의 간곡한 설득에 남기로 했다. 그들의 선견지명은 놀라운 것이었다. 후에 그들은 그것을 일종의 '감'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나는 두 사람에게 1차 대전의 경험을 반추할 수 있는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발 빠르게 움직인 덕에 대규모 피난이 시작되었을 때 유제니 크루의 교사들과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 후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바빴지만 보람찬 시간이었다." 이디스 밋포드는 3년을 미셀스웨이트에서 보낸 후 블렛츨리 파크에서 암호 해독가로 일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유제니 크루로 돌아와 메리 레녹스의 뒤를 이어 교장이 되었다.

메리 레녹스와 사라 크루의 계획은 어니스트 쿡의 관리하에 미셀스웨이트가 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1937년 다소 독특한 교육관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 재벌 캐서린 도너휴는 미셀스웨이트를 임대한 후 자유로운 분위기의 실험 학교인 "비어트리스 홀"을 설립한다. 39년 비어트리스 홀의 교장은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 엘렌 소어비였다. 

도너휴 부부는 미셀스웨이트를 다룬 수전 앤 소어비의 뛰어난 지역사 책을 읽은 후 그곳에 매료되어 장기 임대를 했지만 학교 운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소어비 자매에게 일임했다. 엘리자베스 엘렌 소어비는 37년 메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나는 우리의 친절한 미국인 친구가 자신의 수많은 재산 중 미셀스웨이트도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돼. 우리는 조금씩 전통을 다시 도입시키고 있지. 얼마 전에는 건방진 말대꾸를 금지했어. 조만간 암기와 시험도 부활시킬까 해." 도너휴 부부는 2차 대전이 일어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고 종전 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소어비 자매는 60여명의 유제니 크루 학생들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고 건물을 번갈아 가며 쓰는 대신 교육과정과 교사들을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본격적인 정부 주도 피난이 시작되자 런던 시티 여학교 학생 50명도 합류하여 미셀스웨이트는 종전까지 약 150명의 여학생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과정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유제니 크루의 학생 회장이었던 캐서린 빌링엄은 학생들 사이의 팽팽했던 갈등을 어머니에게 적어 보냈다.

그리니(런던 시티 여학교의 교복이 초록색이었기에 이렇게 불렸다.)들은 괜찮지만 B.H. 아이들은 우리를 미치게 해요. 그 애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혼나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데 제발 B.H.의 아이들과 짝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애들은 늘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기만 해요. 레녹스 양은 세 학교 대표들이 화합하기를 바라지만 L.C. 회장은 어제 눈물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비어트리스 홀 애들이 계속 연극 연습 얘기만 꺼내는 바람에요...

비어트리스 홀의 학생들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에 유명한 극작가가 된 릴리안 웨더포드는 전시 경험을 세밀하게 기록했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L 교장은 너무 엄격하다... 힐다 B가 당장 폭탄이 떨어지면 모두 죽을 텐데 라틴어 변화격은 알아서 뭐하냐고 질문했더니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나라도 더 알고 죽겠구나."라고 받아쳤다. 나는 사실 이게 멋진 대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E.C 아이들은 입만 열면 '레녹스 양이 이걸 하라고 했다', '레녹스 양이 저걸 하라고 했다'는 말만 한다... L.C. 아이들은 별 다른 개성이 없다. 크루 양은 런던을 오가야 해서 매일 볼 수는 없지만 좀 더 멋지고 융통성이 있다. 그녀는 연극 연습으로 불어를 가르쳐 준다. 저렇게 유명한 작가가 우리와 함께 있다니 이상한 기분이다. 

41년이 되자 미셀스웨이트는 어느 정도의 일상을 되찾는다. 학생들은 응급 처치 훈련과 작물 가꾸기(메리와 콜린의 아름다운 화원은 전시 기간 중 ‘빅토리 가든’으로 사용되었다.), 공습 대피 훈련 사이사이에도 계속되는 학업에 익숙해졌다. 메리는 콜린에게 피난 학교의 하루에 대해서 적어 보냈다. 

미셀스웨이트는 이제 200명의 여자아이들의 집이야. 정원에는 순무와 감자가 가득하지. 네가 이 모습을 봤으면 좋겠어. 여기저기에 바느질거리가 떨어져 있고 누군가는 꼭 눈물을 터뜨리고 있지만 이곳은 살아있어. 나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정신이 없고 너는 폭탄으로부터 식물 표본들을 지키느라 박물관에서 먹고 자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조앤과 릴리는 용감하게 버티고 있지만 노라와 너를 그리워 해. 나와 사라가 아무리 옆에 있어 줘도 부모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 게다가 그 애들은 우리를 다른 아이들과 공유해야 되니까 말이야. 공습이 곧 끝날 거라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아. 완전히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이 점에 관해선 완벽한 독재자야. 너와 노라도 여기로 오면 좋겠어. 우리는 언제나 일손이 부족해. 너희는 큰 도움이 될 거야. 

콜린은 메리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노라와 친구들이 모두 미셀스웨이트를 방문했을 때도 그는 런던에 머물렀다. 콜린 크레이븐은 전쟁 동안 자연사 박물관에서 연합군을 위한 정부의 비밀 무기 제작을 도왔다. 마치 007을 연상시키는 이 극비 프로젝트는 동물 박제 안에 총을 숨기거나 동물 배설물 안에 폭탄을 숨겨 전장으로 보내는 작업이었다. 영국 정부는 비밀 유지를 위해 박물관의 일부를 폐쇄해서 관리했고 공간이 줄어든 직원들은 시골 가정집을 임대해가면서 폭격으로부터 소중한 자료들을 지켜내느라 고군분투했다. 식물관 책임자였던 콜린에게는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메리의 죽음 후 콜린은 친구인 에이드리언 뉴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언제나 더 용감한 쪽은 메리였고, 나는 달라진 미셀스웨이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게 메리와 내가 그곳에서 함께 할 마지막 기회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하지만 언제나 깨달음은 뒤늦게 오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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