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린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는
새벽 두시를 가리키는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온다.


“ 하아. 술맛 더럽게 없네.”


진우는 입에 털어 넣은 알콜이 오늘따라 너무 써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부터였지.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많이지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이 맛이 없어지기 시작한게.



누군가가 그랬다.
혼자 마시는 술이 쓰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이제 그만 둬야 할때라고.


진우는 먹던 술잔을 정리하고는 쇼파에 앉았다.
보지도 않으면서 틀어 놓은 텔레비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소리라도 가득 찼으면 해서 틀어놓았던것이었는데, 그 소리가 가득 채워지는 이 공간이 싫어지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남들은 불금이라고 하는데 나는 왜 이런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금요일 밤을, 아니 토요일 새벽을 맞이하고 있는 걸까.

나의 저녁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무료하고 꼴사나운 시간들이 되어버렸을까.


진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을 뿐.



그때였다.
쇼파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한건.


-징..지잉...



이 새벽에 왠 전화?


진우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고는 폰을 집어 들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라 숫자들만 화면이 가득하다.


아니다.
진우의 마음에는 저장되어 있는 번호.



송민호.



그와 헤어지고 매몰차게 전화기에서 그의
모든 흔적을 지웠다.
전화번호, 사진,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작은 메모 하나하나까지 모두.


그런데 지워지지 않았다.
숫자들의 조합을 봤을 뿐인데 누군지 안다는 건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다는 것일테지.


이럴줄 알았으면 호기롭게 지우지나 말걸.
어차피 지울수도 없는거.



전화기를 든 손이 덜덜 떨린다.



몇개월 만이더라.
하루가 멀다하고, 한 시간이 멀다하고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는데.


너와 나는 그랬는데.


그 시간들이 없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개월이나 흘렀어.



진우는 망설였다.
이 시간에 그에게서 몇 개월만에 걸려온 전화.



받을까.
말까.




누군가가 또 그랬는데.
낮 2시의 전화는 사랑이고
새벽 2시의 전화는 미련이라고.


미련?
이제와서?


진우는 꽉 깨문 아랫입술에서 녹슨 쇠 맛이 났다.  

지금 진우의 마음처럼.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그래.
걸어놓고는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마음이 활활 타오른적이 없을테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늦은 시간 진우의 머리속을 헤집어 놓은 전화기를 진우는 쇼파로 던지려고 했다.


그때 다시 손끝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받아버렸다.



귓가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우는 그냥 끊어버릴까 생각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 손가락은 너에게 미련이 남았던 걸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깊고도 낮은 목소리.
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진우가 늘 좋아했던 그 목소리가.



- 오랜만이야.


대답하지 않았다.
진우는 폐 깊숙한 곳까지 그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침투해 자신을 집어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잘지냈어? 아픈데는.. 없지?


과호흡이라도 온 듯 숨쉬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다.


너때문에 잘 못지냈다는 걸.


아직도 네가 떠오를때면 심장 한 귀퉁이가 뜯겨져 나간듯한 아팠다고.



- 우리 안본지 진짜 오래됐다.


“ 왜 전화했어.”


겨우 만들어낸 목소리.
진우는 힘겹게 차가운 말을 풀어놓고는 숨을 하아 하고 쉬었다.
진우의 목소리에 되레 전화기 너머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 앉는게 느껴졌다.


입술을 달싹이는 소리가 들렸다.




- 그냥.. 니 생각나서. 그래서 전화했어.



내생각이 났다고?

이제서야?

우리 헤어진지 벌써 반년이 넘었는데.

넌 이제서야 생각났어?


한참의 정적 후에 먼저 말을 꺼낸건 민호였다.




- 진우야. 나 방정리 하다가, 뭐 찾았는지 알아?




“ 뜬금없이 무슨말이야.”



- 사진. 우리 사진. 예전에 스키장갔다가 찍은 사진 말이야. 없어졌다고 네가 속상해했었잖아.


아.


- 침대 옮기는데 그 끝에 껴 있더라. 네가.. 그렇게 찾았는데 말이야.





“ 미노야. 그 사진 못봤어?”

급하게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말을 뱉고는 집안 여기저기를 뒤진다.


민호는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바삐 움직이는 진우를 가만히 보고 있다. 도와주지 않는 민호가 야속한지 진우는 민호의 발을 가볍게 밟았다.



“ 아야.  무슨, 무슨 사진?”

“ 스키장에서 찍은 사진말이야. 우리집에 없어서. 며칠전에 너랑 같이 봤잖아.”



스키장에 갔다가 스키 강사가 찍어줬던 폴라로이드 사진. 민호는 진우를 한팔에 끌어안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진우는 그저 하얀눈밭에 마냥 신난 강아지처럼 해맑게 찍었던 사진.


“ 아.. 그거? 그게 왜 우리집에 있겠어.”

“ 힝.. 그거 딱 한장밖에 없는건데. 우리집 다 뒤졌고, 도서관 사물함도 다뒤졌는데 없어.”

“ 어디 있겠지. 나중에 찾아보자.”

“ 지금 찾아보자. 좀 같이 찾자. 야, 우리 사진인데 넌 너무 설렁 설렁 찾는거 아냐?”


진우는 그때 엄청 속상해했었다.

그에 비해 민호는 그들이 서로 같이 찍은 사진 그거밖에 없는것도 아닌데라며 건성으로 시늉만 했고 그래서 둘은 다투기도 했었다.





그 사진.
내가 엄청 찾았었는데.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추억이라서.

그날 스키장에서 넘어져서 우리 둘다 폰이 박살나서 그 사진 한장 밖에 없었는데.


난 송두리째 우리 추억이 없어진 기분이었는데 넌 너무 덤덤하더라.

그래서 너무 속상했었어.


늘 그랬어. 나는 너에게 안달복달하고, 넌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지 늘 허허실실.

그래서 우린 헤어진거겠지.



- 좀 더.. 열심히 찾아볼걸. 그랬으면 우리... 아, 아니다.



무슨 말을 삼킨거야.
이제와서.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 근데.. 오랜만에 네 얼굴 보니 좋더라. 환하게 웃는 네 모습. 우리 둘다 웃고 있더라. 정말 행복해 보였어.




우리가 웃었다고?

우리가 행복했다고?



왜... 내 기억속의 너와 나는 이렇게도 슬플까.

다정한듯 하지만 늘 나에게 100퍼센트가 아닌듯한 너의 모습.
늘 거기에 속상해하고 조급해하고 울고 매달리던 내 모습.


내 기억은 이렇게 눈물 그늘 뿐이었는데.



- 우리 처음 만났을때 기억나?


“ 도서관.”


- 응. 그때 도서관 내 앞자리에 앉은 널 보고 난 깜짝 놀랐었는데. 그때 너 참 예뻤어.





톡톡


시험 공부를 하느라 집중하고 있던 진우는 누군가가 자신의 맞은편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2단 독서대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어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같은과 친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웃고 있었다.


진우가 영문을 모른채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 남자는 풉하고 작게 웃더니 초코렛을 건넸다. 

그 위에 포스트 잇으로 붙여진 쪽지.



[한 시간동안 보고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한번도 안쳐다 보셔서요.

저랑 커피 한잔 하실래요?]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은 금세 연인사이가 되었다.


로스쿨에 다니고 있던 송민호.
사범대 학생이었던 김진우.


훗날 처음본 사람과 왜 커피를 마셔줬냐는 민호의 물음에 진우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예뻐서.
앞에서 환하게 웃는 네 웃음이 예뻐서.








- 우리 그때는 싸워도 금세 화해했었는데.


“ 화해? 그런걸 제대로 한 적있었어? 그냥.. 은근슬쩍 넘어갔지. 넌 그랬어. 나에게 항상.”


- 그랬었나..? 난 네가 화가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눈으로 나에게 쏘아붙이면 또 그게 너무 이뻤어.



“ 무슨 소리야.”


- 그래서 그냥 화내지 않았으면 해서. 네 말대로 상황을 넘기는데만 급급했나봐. 그때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안괜찮았어.
하나도 안괜찮았어.


나는 화가나서 죽겠는데.
내가 화가는 이유따위 처음부터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처럼 그저 나만 보면서 기계처럼 미안하다고 하는 너가 정말 미웠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내 입술에 겹쳐오는 네 입술이 싫었어.
싫다면서도 너의 혀놀림, 내 입술을 정성껏 빨아당기는 너의 키스가 좋아서 또 결론 짓지 않고 넘어가버린 내가 제일 싫어.



- 얼굴만 봐도 좋았어. 너랑 같이 있는 그 순간 순간이 너무나 좋았어. 너랑 만나고 데려다주러 너희 집앞에 가면 난 늘 네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었어. 헤어지기 싫어서 말이야.




나도, 그랬어.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면 너는 늘 한쪽 손으로는 턱을 괴고 약간 내려보는 시선으로 그윽하게 나를 바라봤었잖아. 

난 네가 그렇게 나를 보는 그 눈빛이 좋았어.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 별거 아닌 내 말에도 웃어주는 네 모습이 너무너무 좋았어.

그런 내마음이 들킬까봐, 너를 너무나 좋아하는 내 마음이 들킬까봐 네가 그렇게 나를 보면 나는 괜히 테이블 아래로 네 정강이를 슬쩍 차곤 했어. 꽤 아플텐데도 그저 하하하하 웃는 네 목소리가 좋았어.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나도 그랬어.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처음 너와 내가 하나가 되었던 그 날.
달빛이 새어들어오던 네 방 창문.
창가에 있던 네 침대.
침대가 삐걱거리던 소리.
내 위에 올라와 있던 너의 벌거벗은 어깨.


그 달빛이 너의 어깨로 내려앉아 너의 잔 근육들을 비춰줄때, 여태까지 내가 봤던 세상 모든 포르노보다 더 야했어.



내 몸 속에 들어온 또다른 너를 처음 느꼈을때의 쾌락과 고통. 

내가 힘들어 할때마다 조심스럽게 네 행동을 멈추고 너는 나를 보듬어 안아줬었지. 

나는 그럴 수록 손톱을 세워 너를 붙잡았어. 더 뜨겁게 나를 안아달라고.



가끔은 네가 나만큼 뜨겁지 않은것 같아서 속상했어.
난 최고속력으로 달리고 싶은데 너는 그걸 단속하는 과속카메라마냥 나를 달래주고, 조절하게 도와주었어.
네가 왜 그랬는지 아는데. 그래도 속상했어.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하게 된것 같아서. 그걸 들키면 네가 나에게 흥미를 잃을까봐.


우리의 그 관계가 끝난 다음날. 집에 가기 싫다고 드러누워버린 나를 토닥 토닥 달래주며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잖아.
헤어지는게 아쉬워서 지나가는 말처럼 같이 살면 안헤어지고 좋을 것 같다고 내뱉은 나의 말에 너는 또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그랬잖아.

나중에 라고.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나를 데려다줄때마다 나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다고?
정말로 그랬다면 너는, 그걸 나에게 더 빨리 알려줬어야 했어.



뜨거운 내 마음에 나 혼자 불타 사라지기 전에 말이야.



이제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이 새벽에.





" 거짓말."


- 응?


" 그건 거짓말이야. 아니면, 네 기억이 왜곡 된거야. 내 기억 속에 우리는 아프고 힘들었던 적이 많았어."


- 아니야, 진우야. 그 뒤에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더 많았어. 생각나지 않아? 너와 처음 학교 캠퍼스를 걸었던 날. 내가 은근 슬쩍 손을 잡으려고 뻗었는데 너는 잔뜩 긴장해서는 내 손끝이 닿자마자 화들짝 놀라서 얼굴이 빨개졌었잖아. 난 그때도 그런 네가 이뻤어.





" 야, 송민호."



- 또 뭐더라. 방학때 봉사활동 같이 갔었잖아. 마음이 아픈 아이들 돌봐주러 갔었을 때. 아이 한 명이 청소시간에 소란피웠을때. 네가 그 아이 꼭 끌어안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달래주고는, 돌아서서 나한테 안겨 네가 엉엉 울었던거. 난 네 마음이 다 이뻤어.




그런걸 왜 다 기억해.


나 조차 기억이 잘 안나는 세세한 에피소드를, 너는 왜 다 기억하고 있어?


너는 하나도 모르는 줄 알았어.
너와 내가 함께하는 시간에 너는 무신경한줄 알았어.

내가 뭐라고 말을 하면, 너는 응?하고 되물었잖아.
내 말을 안듣고 있는 사람 처럼.





진우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그와의 관계가 끝난 이유는 자신의 뜨거움을 둘 다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오히려 뜨거웠던 쪽은 자신이 아닌 것만 같다.

헷갈리기 시작한다.



진우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잠시 기다리면 민호는 긴 한숨을 휴하고 내뱉었다.




- 미안. 내가 괜한 말을 했나봐. 너와 전화로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 그래.”


- 그래도 용기 내길 잘 한것 같아. 너에게 전화 걸까 말까 많이 망설였는데.



용기..?
진우는 헛 웃음이 나왔다.


- 부담은 갖지마. 그냥.. 우리 그랬었다, 너는 참 예뻤었다 추억하고 싶었나봐. 끝났지.. 우리사이는. 어떻게되돌리고 싶어서 그런건.. 아냐.



“ 우리 사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맞아. 우리 이미 끝났어. 근데.. 왜.. 왜 전화했어? 왜 전화해서 옛날 이야기하며 내 맘을 뒤집어놔?”



민호의 입에서 나온 끝난 사이라는 말에 잠시동안 그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원위치되었다.




그래.
너는 그렇게 무신경하니까.

우리가 헤어진지 얼마나 지났는데 이제와서 겨우 옛 생각하자고 전화한거였어?


진짜... 화난다.



“ 우리가 예뻤다고? 좋았던 기억도 있다고? 그래 그랬겠지. 근데 나는 너무너무 슬프고 힘들었어. 그걸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데. 너는.. 뭐? 용기내길 잘 했다고? 송민호. 너 그거 알아? 너와 나는 그래서.. 헤어진거야.”



- 진우야



“ 너와 내 마음은... 이렇게도.. 이렇게도 계속 엇박자니까. 내가 네 앞에 있을때는 내게 귀 기울여주지 않아놓고, 지금 나는 너를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 한켠이 아픈데. 너는 내가 좋았다 이뻤다 떠올리게 만들고 있잖아!”





흑, 흐흑
또 울음이 터져나온다




새벽이 걸려오는 옛 연인의 전화따위를 처음부터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왜 이전화를 받았을까
뭘 기대하고?



난 네가 뭐라고 말하기를 기대했을까.


너와 함께 기울였던 술잔을 혼자 기울이면서 그렇게도 맛있던 술을 더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지고.

네가 없는 주말이 너무나 무료하고 심심해서 몸서리쳐질때 때마침 네 전화가 걸려와서 나는 반가웠을까.


병신같다.




-하아. 우리는 어디서 부터 잘못 됐던걸까. 

 진우야, 응?




아마.
그 무렵이었겠지.


겨울에 쳤던 임용고시를 나는 겨우 붙어서 너의 축하를 받으며 교직생활을 시작했었고, 너는 그 다음에 치뤄진 변호사 시험에 떨어졌을때 말이야.




나는 불안했어.


나때문에 네가 떨어진건 아닐까.

내가 먼저 시험에 붙어서 사회생활 한답시고 바쁘다고 너의 공부흐름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그런건 아니었을까.

애들 가르치는 일을 처음 해봐서 너무너무 힘들어서 너에게 내가 너무 징징거렸나. 


그래서 네가 공부를 제대로 못한거 같아서.
미안하고 불안했어.









“ 미노야. 오늘은 공부 많이 했어?”

“ 오랜만에 봤는데 할말이 그거 밖에 없어?”

“ 그냥.. 너도 빨리 붙어야 더 신나게 연애하지.”

“ 그래. 그래도 네 생각은 많이 했어.”



민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방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진우에게 키스를 건넸다.


그때 둘 사이는 그랬다.

다시 일종의 고시생이 되어버린 민호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진우.
진우는 민호 공부에 방해될까봐 제대로 데이트 다운 데이트를 피하고 있었다.


민호가 공부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일찍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고 늘 마지막은 민호의 집이었다.


일주일에 한 두번.
바쁘면 그보다 더 띄엄 띄엄 만났던 두 사람.


늘 같았다. 진우는 민호의 공부를 걱정했고 민호는 다소 그런 그의 잔소리가 귀찮다는 듯 넘기며 진우를 만지고 싶어했다.


어떤날은 거의 대화도 없이 만나자마자 집으로 가서는 땀에 흠뻑 젖을때까지 두사람은 몸을 포개고 관계를 가졌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자 못견뎌했던건 진우였다.




어느 주말이었다.
진우는 밤새워 울었는지 퉁퉁 부은 얼굴로 민호에게 왔다.


“ 얼굴이 왜 그래. 울었어?”


 
걱정섞인 눈빛을 보내는 민호를 야속하게 바라보는 진우.


“ 요즘 우리 뭐야?”

“ 왜.”

“ 우리 사이가 이상한거 같아. 넌 그렇게 생각안해? 그냥 원나잇 즐기는 섹스파트너가 된 기분이야.”

“ 야, 김진우. 너 말이 심해.”



평소의 민호와 다르게 화를 냈다.
늘 진우가 날카롭게 말해도 웃으며 미안하다고 하고 말았는데 그날은 민호도 뾰족해져있었다.


“ 그리고 너 뭐야. 공부 안해?”

“ 또 그소리야? 알아서 하고 있어. 잔소리좀 그만해.”

“ 어제 너 놀래켜 주려고 도서관 갔었어. 근데 너 없더라. 늘 네가 앉는 자리에 너 없었어. 너랑 같이 공부하는 선배한테 물어보니 너 도서관 안온지 좀 됐다고 하더라. 왜 나한테 거짓말해.”



진우의 눈에선 독기 어린 눈물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닦아주었을 텐데. 

민호는 그저 그런 진우를 보고만 있었다.



“ 나는.. 나 때문에 니가 떨어진거 같아서.. 진짜 신경쓰이는데. 너 공부 집중하게 해주려고 하고 싶은 말 있어도 참고, 투정 부리고 싶어도 참는데. 너는.. 지금 뭐하는 거야?”


“누가 참으라고 했어?”


“ 너 집중하라고 그러는 거잖아. 너 그러다가 시험에 또 떨어지면! 그럼 어쩌려고 그래. 내가 네 발목 잡는거 싫어. 네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것도 싫고, 자꾸 내가 잔소리 하는 것도 싫고. 대화도 없이 욕구 해소하는 것처럼 섹스하는 것도 싫어!”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너무 화가나서 심하게 말한것 같았다.



늘 자기만 바라보던 눈빛은 땅으로 떨구어져있었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자극을 주고 싶었던것 뿐인데 상처를 줘버렸다.



“ 우리. 그냥 이제 그만하자.”




한참의 정적 후 민호에게서 나온 말은 이별이었다.






- 나는 네가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났던날. 그날도 네가 이뻤어. 분명히 나때문에 울었겠지 싶어서 미안한데도 눈물 가득한 눈동자에 키스해주고 싶었어.


진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네가 그 사과처럼 빨간 입술로, 독한 말 잘 하지도 못하면서 나 자극하려고 그런 말들을 내뱉을때 네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어. 나에게 칼날을 꽂아대지 못하도록.



진우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저건 거짓말이야.

그럼 미안하다고 했었어야지.

왜 헤어지자고 했어?



넌 너무나 담담하게 나에게 화도 내지 않았어

그냥 그저 오늘 뭐했냐고 묻는 것처럼 헤어지자고 했잖아.

이미 답을 정해 놓은 사람 처럼.



- 근데. 그렇게 말할수가 없었어. 그무렵의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어. 아니 불행하게 만들었어.

나도 사실 불안했어. 너에겐 내가 모르는 또다른 삶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너는 또 내가 아는 나와 달라서. 내가 너를 잃게 될까봐. 그래서 그랬었어. 

너만 보면 자꾸 너를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너를 안고 싶었던거. 내 옆에 있는건 다른 사람 아니고 너라고. 너를 잃어버릴것 같은 불안함에 너는 내꺼라고 마킹이라고 하듯이. 

하아..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숨이 막혀온다.
그때 당시의 민호의 감정을 그때는 듣지 못했다.


헤어지자는 말이 쉽냐며 소리를 질러대는 자신에게 민호는 그저 미안 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돌아서 버렸었는데


왜 이제서야 그런 말을 하는 건지.



- 차라리 나에게 투정이라도 부려주면 좋을텐데. 너는 그걸 나에게 티내지 않으려 꾹꾹 참는게 느껴져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쓸모없는 놈 같았어. 그걸 못견디겠더라. 내가 너를 웃게 만들기는 커녕 울게 만들고 가슴 아프게 만드는 바보 같은 나자신이.



“ 그런 말을... 왜 이제서야 해.”



- 그러게. 나도 이 말을 너에게 하는 날이 오게 될줄 몰랐어. 그러고 나서 한참을 후회했어. 실수했다고 생각했어. 결국 내 실수로 우리 관계가 결국 돌이킬수 없게 되었다고.


“ 나 그렇게 헤어지고, 네 전화 기다렸었어.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해 주려고. 근데 그 전화가 안오더라. 그렇게 기다린 전화가 이제서야, 이렇게.”


진우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할지 자신의 마음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저 다끝난 관계를 회상하는 건데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행동을 새벽이란 시간을 빌려서 하고 있는 건데.

그에게 아직도 기대하는 것이 있을까.
아니, 그는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을까.



-진우야. 나는 너에게 무신경 했던게 아니라 너의 모든 것이 너무 집중했기 때문이었어. 말하는 너의 입술, 너의 눈동자. 말할때의 제스쳐. 그 모든것에 집중하고 싶어서 때로는 네가 하는 말을 내가 못들었나봐.


“ 송민호...”


- 진우야. 나는 뜨겁지 않은게 아니었어. 태양 바로 옆에 있는 금성처럼 네 옆에 있는 내 마음은 너무나 뜨거운데 그걸 다 보여주면 네가 놀랄까봐.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면 너를 내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는 내 못난 소유욕을 너에게 말할 수 없었어. 언젠가 온전히 내가 당당해 질 수 있을때 정식으로 말하고 싶었어.


“ 말하지마.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마.”



- 너를 내 모든것과 바꾸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고. 네가 영원히 내 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진우는 히끅 거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늘 민호에게서 듣고 싶었돈 말들.

하지만 그때 민호는 늘 웃으며 다음에, 나중에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을 왜 지금 하는 걸까.




“ 그말을.. 그말을 왜 지금해. 네가 보고 싶어서 숨도 못 쉴 정도로 힘들었는데. 보고 싶어서 너에게 안기고 싶어서 오지도 않는 전화를 오랫동안 기다렸었는데. 다 끝나서 어쩔수 없는 우리 사이에 왜 그런말을 해.”



- 나 보고 싶어?



히끅 허헉, 흑


진우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보고싶었냐고? 보고 싶었다.

보고 싶냐고?

현재형으로 된 물음.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우리 사이는 끝났는데.

예뻤던 우리 지난 기억은 과거가 되어버렸는데.

우리의 타이밍은 너무나 어긋나서 나도 너에게 한아름의 상처를 주고, 너 또한 나를 힘들게 했는데.



주저 하는 마음과 다르게 진우의 입은 다른 말을  뱉는다.




“ 흐흐흑.. 보.. 보고시퍼어.. 흐흑 보고.. 보고싶어서..”


- 진우야


“ 미노야.. 너 보고 싶어.. 흐흐흑 너 보고 싶어하면 안되는거 아는게 보고 싶어어.... 숨을 못쉬겠어.”




진우의 울음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민호는 말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기다려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손으로 토닥토닥 진우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다.



- 진우야.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해 주려고 했다는 거 아직 유효해? 너무... 늦었지만.



“으...으응... 흑.”


겨우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 진우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마음 멋대로 숨기고 너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너 힘든거 알면서 너를 잃을까봐 불안해서 내 멋대로 행동한 것도 미안해.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내가 못견뎌 헤어지자말한거 정말로 미안해.





진우는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서 오랜만에 걸려왔던 전화.

그걸 받을때만해도 이렇게 자신이 민호를 그리워하고 있는 줄 몰랐다.

슬프고 힘들었던 그 사랑을 저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내가 어떻게 너를 용서할 수 있겠어.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너를 미워한적조차 없었나봐

그저 네가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나봐





- 진우야, 너 보고 싶어. 널 안고 싶고. 너에게 키스하고 싶어.



“ 미노... 미노야.”


- 진우야. 내가 다시 너에게 들어갈 수 있게 문.. 열어주면 안될까?



영상통화도 아닌데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런 그의 행동을 안다는 듯 전화기 너머의 민호는 풉하고 낮게 웃는다



- 문 열어줘.


“ 응?”


- 너희 집 현관문. 너희집 앞이야.



진우는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내팽겨친채 달려나갔다.


삐리릭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진우 마음의 잠금 장치도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두꺼운 철문 뒤에는 전화기를 아직도 귀에 대고 있는 민호가 웃으면서 서 있었다.


마치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을때 처럼.
너무나 예쁘게 환하게 웃으면서.


진우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 소.. 송민호...”


“ 네 생각이 날때마다 너희 집 앞에 왔었어.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네 방 창문을 하염없이 보다가 불이 꺼지면 나도 집으로 가곤 했었어.”


“ 빨리.. 빨리 말하지 그랬어. 이런말들을 내게.”


민호는 진우를 일으켜세웠다. 진우의 얼굴을 마주보고 선게 믿기지 않는다는듯 한참을 그를 바라보았다.


“ 말하고 싶었어. 그날 뒤돌아 서던 너의 뒷모습을 쫓아가서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말하고 싶었어. 그러면 너는 나를 용서해 줬겠지만 나스스로 달라진게 없어서 그러지 못했어. 너에게 또 상처줄까봐.”


진우는 민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자신의 옆에 나 있던 민호 모양의 공백이 다시 채워지는 기분.

그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살며시 자신의 등으 감싸는 그의 온기가 눈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었다.


“ 아무렴 어때. 뭐든 상관없어.”

“ 오늘도 너희집 앞에 왔다가 엄청 늦은 시간인데도 불이 안꺼지길래.. 용기냈어.”

“ 고마워. 용기 내줘서 고마워.”



민호는 고맙다 말하는 진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전화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이었다.
변호사 시험 합격 화면이 캡쳐되어있는.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노야..”

“ 진우야. 나 이제 너에게 내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고싶어. 너와 내 모든걸 함께하고, 너의 모든걸 내걸로 하고 싶어. 나의 뜨거운 마음을 활짝 열어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나랑.. 그렇게 해줄래?”



진우는 대답대신 키스로 답했다.

결혼 맹세를 하며 I Do라고 답하듯이.






용기 내기를 잘한것 같아


너에게 전화를 걸 용기

너의 전화를 받을 용기





사랑해.











오랜만이야
어디 아픈 데 없이 잘 지냈니
우리 안 본 지도 꽤 오래됐지
네 생각나서 전화했어

실은 말이야
어제 내가 뭘 찾았는지 아니
없어진 줄 알았던 우리 사진
침대 끝에 껴있더라고

그때 우린 웃고 있더라
정말 행복해 보이더라
여태 내 기억 속의 우린
눈물, 그늘뿐이었는데

예뻤더라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땐
싸우던 모습마저 그땐
Oh, 그때 우린
예뻤더라
얼굴만 봐도 좋은 그때
헤어지기 싫어 울던 그때
Oh, 그때 우린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들 뒤에
아름다운 순간들이 더 많은데


오랜만이야
너와 전화로 이렇게 긴 얘길
나누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용기 내길 잘 한 것 같아

부담 갖지 마
그냥 예뻤더라 추억하는 거지
끝나버린 우리 사일 되돌리긴
늦었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때 우린 웃고 있더라
정말 행복해 보이더라
여태 내 기억 속의 우린
눈물, 그늘뿐이었는데

예뻤더라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땐
싸우던 모습마저 그땐
Oh, 그때 우린
예뻤더라
얼굴만 봐도 좋은 그때
헤어지기 싫어 울던 그때
Oh, 그때 우린

예뻤더라
밤새워 흘린 너의 눈물로 퉁퉁 부은 얼굴도
예뻤더라
사과처럼 예쁜 너의 입술로 뱉던 독한 말들도
예뻤더라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실수로 마지막이 됐던 그날도
예뻤더라
넌, 넌

예뻤더라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땐
싸우던 모습마저 그땐
Oh, 그때 우린

예뻤더라
얼굴만 봐도 좋은 그때
헤어지기 싫어 울던 그때
Oh, 그때 우린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들 뒤에
아름다운 순간들이 더 많은데

예뻤더라




- WINNER. [예뻤더라(We were)]










이번 앨범에서 정말 좋아하는 곡이예요.

그래서, 꼭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나봐요.

감정이 숨길수 없어 터져나오는 그런 이야기를.


재밌게 읽어주시고, 응원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놀로그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