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돗가에서 도현이 바닷물을 먹은 하얀 긴소매 티셔츠를 벗어 수돗물에 휘적거리는 동안 상우는 자기 몸에 물바가지를 끼얹고 있었다. 상우가 도현이 하는 양을 잠시 보다가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받아주었다. 도현은 자신이 처음 상우의 집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여기다 빨아. 그래야 제대로 씻겨나가지."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조몰락대느라 물기는 잔뜩 머금고도 비틀어 물기를 짜낸 걸레처럼 쪼그라들어있던 도현의 티셔츠가 대야에 담겼다. 중앙에 잔꽃 그림 스티커가 붙은 아이보리색 대야에 담긴 담수 속에 하얀 도현의 옷이 건물 사이에 부는 소용돌이에 빠진 비닐봉지처럼 떴다. 도현이 그걸 어설프게 풍덩댔다. 물기를 짜내고 나일론 줄에 널자 물이 줄줄 흘렀다. 

도현이 몸을 마저 헹궜다. 물이 차가웠지만 날이 더워 괜찮았다. 상우가 대야 옆에 쪼그려 앉아서 커다란 고무대야에 담아놓은 물을 머리부터 끼얹었다. 시멘트로 마감한 수돗가에서 물이 철썩이며 튀어 호스에서 나온 물로 모래를 씻어내던 도현의 발치까지 닿았다. 도현이 머리카락을 씻어내다 문득 상우의 등에 시선이 닿았다. 고의는 아니었다. 상우가 쪼그려 앉아 옷이 슬쩍 당겨 내려간 게 보였다. 

상우는 소금기 절은 머리카락을 담수로 헹구느라 다른 곳엔 신경을 전혀 나누지 않고 있었다. 도현의 머릿속에도 소용돌이가 생겼다. 도현은 이걸 말해야 할지, 하지만 이게 말할만한 일인지, 그리고 말했을 때 오히려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지 고민했다. 고민하는 사이 시선이 자꾸만 고민의 대상을 흘끔댔다. 햇빛에 조금 그을린 피부 위로 부드럽게 드러나 보이는 근육들 사이로 오목하게 들어간 척추 선을 따라 흐르는 물길에 내쫓기듯 도현은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수도에서 소금기와 모래를 씻어낸 뒤에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앞에 꺼내둔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도현은 방문을 닫고 깨끗하고 잘 마른 옷을 입은 채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상우는 도현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기에 아직 분주했다. 도현의 시야에 상우가 옷을 갈아입는 게 들어왔다. 방금까진 도현이 몸을 돌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상우의 몸은 물기로 촉촉했고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건 도현의 심장과 정신에 좋지 않았다. 도현은 시선을 돌려야겠노라 생각하다 문득 어차피 상우가 옷을 벗은 모습 정도는 지금까지도 많이 봤다는 걸 떠올리며 진정했다. 

상우가 특별히 노출을 즐기는 성향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름의 해안가이니 반바지에 반소매 혹은 민소매가 기본이었고 물에 들어갈 때는 웃옷은 그냥 시원하게 벗어버렸다. 웃통을 깐 남자라는 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장소도 아니었다. 게다가 상우는 편하다며 수영복을 자주 입었다. 그냥 반바지나 마찬가지니 도현도 그에 대해 별로 신경을 기울이진 않았다. 그러니까 도현이 그동안 유난히 상우의 몸을 열심히 본 건 아니고 모든 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하겠다. 물론 지금 힐끔거리는 것은 좀 별개였다.

상우의 팔과 목덜미는 햇살에 많이 그을렸고 팔꿈치 위쪽으로는 경계선을 만들며 좀 더 옅은 색이다가 위팔을 타고 오르면서 슬그머니 옅어져서 경계가 불분명하게 몸으로 이어졌다. 등과 허리, 가슴과 배는 팔이나 얼굴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상우의 등엔 왼쪽 팔과 몸통이 이어지는 지점쯤에 점이 있었다. 도현은 유럽 어딘가에선 옛날에 귀족의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다고 믿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상우의 피부 위에 있는 점들은 어쩌면 그런 것들일지도 몰랐다. 상우의 등에 새겨진 표식들을 살피던 도현의 눈길이 아래로 흘러 떨어졌다. 

상우는 긴바지를 잘 입지 않아서 다리도 적당히 타 있었는데 아무래도 옷에 좀 더 가리는 무릎 위쪽부터는 색이 밝아졌다. 무릎을 움직이며 오금에 인대가 움직이는 게 드러났다. 상우의 동작은 가끔 힘이 너무 들어가곤 했지만 대부분 유연하고 가벼웠다. 도현의 시선이 다시 상우의 피부색 위에 머물렀다. 거의 항상 햇빛에 가려 있는 곳이라면 좀 더 흰빛을 띨 거였다. 그러니 지금 가려있는 부위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리기 보다는 분명 훨씬 흰빛일 터였다. 

도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의도한 신체 반응은 아니었다. 당황한 도현이 황급히 시선을 돌리려 마음먹은 순간에 티셔츠를 입던 상우와 눈이 마주쳤다. 상우는 입꼬리를 올려 웃는 낯으로 도현을 마주 보더니 팔과 목만 꿰어 말려있던 티셔츠를 마저 입었다. 근육을 보이기 위해 지방을 극단적으로 깎아낸 것과는 달랐으나 단단한 몸 위로 막이 내리듯 면과 레이온을 혼방한 옷자락이 덮였다. 상우가 몸을 숙여 손을 내밀었다. 도현의 시선이 손등과 경계 지게 밝은 상우의 손바닥으로 향하자 상우가 말했다.

"게으름뱅이는 배고픈 법이지. 자, 내 손을 잡고 일어나라!"

"무슨……? 70년대 반공 포스터 같은 말투 좀 쓰지 마세요. 상우 형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이거 어째 시대가 점점 과거로 가는 것 같은데?"

도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상우가 도현의 손을 붙잡았다. 상우의 손은 많이 거칠진 않았지만 딱딱하고 단단했다.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잡힌 손을 움직이다 보니 우연찮게 깍지를 꼈다. 진짜로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도현이 깍지를 끼자 상우가 자연스럽게 맞잡아서 그리되었다. 깍지 낀 손 너머에서 상우가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상우가 도현을 보고 미소 지을 때면 다소간의 기적이 발휘되는 것만 같았다.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거나 해풍이 몸을 휘감거나 귓가에 파도가 속삭이는 일과 비슷했다. 그것들은 도현을 벅차오르게 했다. 그리고 가끔은 도현이 무얼 해도 괜찮을 것 같이 느껴지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햇볕에 그을린 상우의 피부 위 흐린 경계를 매만지고 싶다거나 개구쟁이처럼 새카맣게 탄 부분들에 입술을 대보고 싶다거나 햇빛을 거의 본 일 없는 곳을 어두운 밤 달빛 아래 치는 파도처럼 펼쳐 본다든가 하는 일들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혹은 그 이상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흐린 확신을 도현의 마음속에 심곤 했다. 그건 정교한 환각으로 이루어진 착각일 수도 있었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상우가 행한 것은 해안에 떠밀려 온 해초처럼 늘어져 있던 도현을 잡아다 뿌리채소를 밭에서 한 방에 뽑아내듯 힘으로 일으키는 일이었다. 상우는 도현의 등을 톡톡이나 콩콩이라기 보다는 철썩이나 퍽에 가깝게 치더니 뒤에서 어깨를 붙잡고 문으로 밀고 나갔다. 도현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빠져드는 동안 상우는 솜씨 좋은 목양견처럼 단호하게 움직였다. 도현은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문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배고프고 힘없는 사람을 이렇게 막 다루다니……. 너무해요."

"아무래도 도현이 너 나랑 같이 운동하러 다녀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미 구민회관에 정기권을 끊어두었지만 여기 주민이어야 가능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수단은 걱정하지 마라. 모래밭을 달리는 건 체력을 향상시키는 데 아주 좋은 방도니까."

"형 혹시 제 말 안 들려요?"

"물론 잘 들리지. 오늘 영양보충 하고 나랑 같이 내일부터 전력질주로 특훈하자."

"저 진짜 말만 들어도 죽을 것 같아요."

"일단은 밥부터 먹어야지. 자, 착하지? 신발 신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도현아."

어린애를 어르는 듯한 말투에 도현이 신발을 신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형 미워요……."

"그건 좀 상처인데."

상우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썹이 찌글찌글해졌다. 난처하게 미소 짓는 상우를 보고 도현은 기분이 좀 풀리고 말았다. 미움받기 싫다며 저런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리다니 정말 중증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겠는가.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도현은 주인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상우를 힐끔대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진짜 맛있는 거 사주세요."

"다행이네. 거기 주방장 솜씨가 좋거든."

상우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도현은 상우의 미식 기준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품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상우의 생활공간이 붙어있는 상가건물에 있는 식당이었다. 거의 바로 벽을 맞대고 있는 위치로, 100m 밖에서 봐도 글자가 읽힐 정도로 커다란 간판은 물론이고 메뉴도 실내 인테리어도 여느 곳에서나 익숙하게 있을 법한 관광지 한쪽에 즐비한 그런 식당이었다. 간판에 붉은 글씨로 명물이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상우가 익숙하게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며 사람을 불렀다.

"이모 저 왔어요."

크다기보다는 우렁찬 상우의 인사에 바로 답변이 쫓아 나왔다.

"이게 누구야. 왜 이리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그는 정말로 상우를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안 도현은 상우가 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상우는 재잘재잘 웃으며 자리에 가 앉을 뿐이었다. 그 사람도 도현을 별개로 대할 뿐 굳이 궁금증을 드러내진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친한 사이는 아닐 수도 있었다. 하긴 식당 이모가 정말로 혈육이나 일가친척도 아니고 밥 먹는 식당에서 오가며 얼굴이 익은 것뿐인, 어디까지나 업무상 보는 사이에 그럴 필요는 없기는 했다. 어찌 보면 상우가 도현과 사이를 멀리 밀어내는 말을 듣는 것보단 낫기도 했다. 그들은 남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에게도 무어라 설명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손님이 몰리는 피크가 조금 지났다 싶은 때에 바로 그 '식당 이모'가 친숙한 분위기로 상우의 옆자리에 앉았을 때엔 도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래도 요즘엔 좀 널널하지?"

"최근엔 조용하긴 하네요."

"이대로 쭉 조용하게 50년만 지나갔으면 싶은데 말이야. 주민 회의니 뭐니 모이고 하는 것도 다 일이니까. 토론이라고 해도 자기 말하기만 바쁘지 어디 건설적인 이야기가 제대로 되던가."

상우는 살짝 데친 멍게 두 점을 초장에 찍어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리다 삼킨 후에 바로 대답을 이었다.

"그래도 필요하면 해야죠."

"맞는 말이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더니 가지고 온 민어 튀김을 테이블 중간 쪽으로 밀었다. 

"집에서 보내왔는데 먹을만하더라. 뇌물이야. 필요한 일 앞으로도 잘해달라고."

상우가 웃었다. 도현은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고 그래서 묵묵히 밥만 먹었다. 그저 그런 맛을 각오했는데 생각보다 꼼꼼한 음식솜씨가 있는 곳이었다. 도현이 동그란 자기 컵에 따른 물을 마시는 동안 상우가 도현의 밥 위에 민어살을 올렸다. 겉면은 노르스름한 갈색으로 익었는데 속살은 흰쌀밥처럼 보얗다. 접시에서 꼬리와 주둥이가 튀어나와 있는 통째로 튀긴 생선의 등 쪽에 상우가 젓가락으로 가른 부분이 새하얗게 김을 피워올렸다. 제 몫도 챙긴 상우가 민어 튀김에 파절임을 올려 꼭꼭 씹어먹었다.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역시 아저씨 솜씨네요. 잘 먹겠습니다."

"그래서, 이쪽은?"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린 이후 갑자기 공이 날아왔다. 도현이 눈알을 데구르 굴려 상우를 보았다. 상우는 아주 약간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어깨가 살짝 경직되며 허리를 폈다. 하지만 잘못 본 거라고 설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런 이상 점을 드러내지 않고 곧바로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이곳 명물식당의 대표이자 총책임자인 김해린 사장님. 예전부터 여러모로 도움받고 있는 사이셔. 그리고 이쪽은 도현이라고, 우리 집에 묵고 있는 친한 동생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야 들어오면서도 했는데요, 뭘. 아무튼 반가워요."

해린은 순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었지만 어딘가 살피는 기색도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에 대한 가벼운 호기심이었던 듯 도현과 인사를 나눈 뒤 금방 시선을 돌려 상우를 보았다. 한식당의 대표이자 총책임자라는 중책을 지고 있는 사장님의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 길게 올라갔다.

"그냥 친한 동생이야?"

해린의 말씨는 조금 묘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는 정말 특이한 느낌이 났다.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억양이었다. 상우는 짭짤하고 새콤달콤한 죽순 장아찌와 밥을 한 숟갈 듬뿍 떠넣은 탓에 조금 길게 우물거린 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옆 테이블과 상차림이 좀 달랐다. 메뉴를 다른 걸 주문해서 그렇거나, 단골 특전인 모양이었다.

"네. 한 다리 건너서 알게 된 동생인데 최근에 많이 친해졌어요."

무난하게 말하기 대회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친구 공통지인마저 생기고 말았다. 거짓말은 단순할 수록 유지하기 좋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상우는 최악의 거짓말쟁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며 한 팀이 안으로 들어섰다. 해린은 손님맞이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엔 두 사람만 남았다.

상우는 도현에게 해린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했다. 해린은 여기에 식당도 하고 있지만 조금 떨어진 시내(市內)에 있는 3층짜리 상가 건물 주인이며 1층과 2층은 상가 세를 주고 3층에서 남편 자식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듣자 하니 초등 저학년 딸이 전학을 하며 가족들이 모두 해린의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더라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들이었다. 

도현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굳이 들어야 하나 싶었으나 간명하지만 그리 간추리지 않고 개요 없이 이것저것 늘어놓는 상우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는 생각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내용이 아니라 목소리에 좀 더 집중하게 됐다. 낮고 조금은 묘한 목소리.

"맛있게 드셨어요?"

음식 맛은 있었지만 지금 도현은 좀 싱숭생숭해서 뭔가 붕 뜬 기분이라 맛있는 것도 그만큼 맛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도현은 그냥 상우가 얹어줬던 민어 튀김을 떠올렸다. 상우는 가장 먹기 좋고 살이 많은 부위를 제일 먼저 큼직하게 발라주었다. 그 뒤로는 그런 친절이 없었지만, 도현은 자기 밥은 떠먹을 수 있는 나이이니 더 욕심부릴 처지는 아니었다.

"네. 맛있었어요."

"그럼 둘이 자주 오면 좋겠네."

도현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해린의 시선이 빠르게 상우에게로 넘어갔다. 계산하는 건 상우였으니까 당연했다. 먹은 음식값을 계산하며 두 사람은 조금 전엔 못 했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세탁소집 누구가 요즘 들어 이 씨인지 정 씨인지랑 술친구라 자주 어울리지 않냐느니 하는 얘기가 대체 도현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기 학생이랑 거기서 단둘이 지낸단 말이지? 벌써 몇 주째?"

도현은 해린이 너무 사적인 부분을 캐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도현을 경악하게 하는 일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해린이 박하사탕을 권하더니 자연스럽게 도현의 손등을 간지럽히며 윙크를 보냈다.

"둘만 있으면 적적하지 않아요? 오후엔 혼자 있는 거잖아."

해린이 손등을 쓱 쓸 때 도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르르 빠져나갔다. 도현이 자기 손등을 당겨와 감싸면서 경악했는데 도현에게 더 큰 충격을 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옆에서 상우가 웃었던 것이다. 배신감에 휩싸인 도현이 충격받은 얼굴로 쳐다보자 상우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 삼켰으나 웃겨 죽으려고 하는 게 뻔히 보였다. 도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현이 불쾌감으로 펑 터져버리기 직전에 상우가 재빨리 진화를 시도했다. 상우가 다독이듯 도현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걸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오해하잖아요. 그냥 시간 되면 한 번씩 놀러 오라고 하면 될걸."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왜요? 새벽이가 심심하대요?"

해린이 픽 웃었다. 상우가 핵심을 짚은 것이다. 해린이 노래하는 시냇물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그 나이 애들은 영 힘든가 봐. 나로는 감당 안 돼. 저녁엔 내가 또 바쁘니까."

"고등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존재는 원래 어렵게 마련이죠."

"아이가 자라는 걸 보는 건 놀랍긴 해. 부러진 줄기가 다시 서는 걸 보는 기분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탈이지만."

"좋은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상우의 손이 도현의 손을 붙잡고 있는 걸 풀며 손등에 살짝 스쳤다. 상우가 도현의 손안에서 박하사탕을 하나 가져가 입에 쏙 집어넣었다. 상우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행동을 했고 도현은 결단코 딴생각을 하지 않았다. 상우의 녹아내릴 것 같은 체온이나 야릇하게 스친 접촉이나 새하얀 사탕이 사라지는 순간 짧게 드러난 붉은 혀의 움직임 같은 걸 구체적으로 떠올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도현은 그냥 풍선 인형처럼 움직여 상우를 따라 식당 밖으로 나갔다. 땡볕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이 집 딸 있다고 그랬지? 시간 맞으면 내가 자주 놀아줬는데 요즘엔 거의 못 봤거든. 나보고 애하고 좀 놀아달라는 얘기야. 학교에선 친구들이 있지만 이 근처엔 같이 놀 또래 친구도 없으니 엄청 심심해하거든."

"그럼 그냥 그렇게 얘기하지 왜 제… 저를 가지고 그러는 건데요?"

"그것도 나 때문인데, 미안. 나랑 같이 가서 그래. 미안하다."

"……형이 미안할 건 아니고요."

"근데 진짜 나랑 같이 온 것 때문에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저런 장난 같은 거 좋아하시거든."

그러면 그런 '장난'을 상우에게도 한단 말인가? 상우는 가볍게 말하고 치웠으나 도현은 심각해졌다. 도현은 조금 전 식당 안에서 상우의 옆자리에 가까이 앉은 해린의 모습이나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표정이나 몸짓 등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오묘하게 편집해서 떠올리다가 더욱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도현은 짧은 거리나마 상우의 옆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상우는 도현이 그러는 것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도현은 그게 조금 불만스러워졌다.

"집에 가도 할 거 없지? 좀 걸을까?"

상우는 도현이 소심한 불만에 휩싸여 있을 시간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도현은 상우가 자기 생각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든가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 머쓱한 타이밍이 좀 공교로웠다. 하지만 답은 하나뿐이었다.

"좋아요."

상우는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고 도현도 쭐레쭐레 상우를 따라갔다.


상우는 지구는 둥그니까 계속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고 돌아올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도현은 이 행군의 초장에 질려버렸으나 상우가 교묘하게 도현을 계속 끌고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우가 "참새 짹 짹! 병아리 삐약 삐약!" 같은 소리를 하며 도현의 손을 잡고 끌고 갈 때는 목이 뜨끈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도현은 울며 집으로 뛰어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한 사람이 무작정 이끌고 다른 한 사람이 질질 끌려가는 이상한 산책 후에 더위 속을 돌아다니느라 지친 두 사람이 쉴 곳을 찾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소나무 그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날이 덥기는 한데 해풍이 불어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형 저 얘기 좀 해도 돼요?"

"네 이야기라면 이 형은 언제나 환영이다."

도현이 눈을 흘겼다.

"진지하게요."

"난 언제나 진지하다만."

말투부터 하나도 안 진지했다. 도현은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좀 떨어진 곳에서 파도가 철썩이고 있었다. 도현은 상우를 바라보지 않은 채 바다에 던지는 것처럼 말을 꺼내놓았다. 

"어떤 날은 물 밖인데도 바다 깊은 곳에 있는 것 같아요."

"무거운 얘기네."

"그러게요. 무겁네요."

도현의 얼굴 근육이 웃음을 지어냈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언제나 물꼬를 트는 게 일이지 그 뒤로는 그저 흐르게 두기만 하면 됐다. 무게 만큼 중력을 따라 소용돌이치며 쏟아지는 물처럼 도현의 목소리도 빠르게 흘러나왔다.

"여기…… 몸속에 출렁이던 파도가 바다에 이어져 버린 것처럼 마구 일렁거리고 그러다 조류처럼 어딘가로 전부 흘러가고 흘러 들어와요. 저 자신이 조류를 따라 깊은 곳에서 흘러다녀요. 그러면 정말로 참을 수가 없이…… 참을 수 없이 그리워져서, 참지 못하고 이렇게 흘러넘쳐요. 그런데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전부 일렁이기만 해요." 

도현은 지기식으로, 자기 속도와 자기만의 표현으로 모호한 느낌을 설명하고 있었다. 상우는 묵묵히 들었다. 파도가 시간을 조금씩 삼키듯 상우는 도현의 말을 조용히 들었다. 도현의 말이 끝나고 파도가 두어 차례 친 후에 상우가 고요한 곳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평소와 달리 파도에 섞여 겨우 들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편한 목소리였다. 

"바다는 달에 영향을 받아. 달이 크게 뜨면 바다도 같이 끌려 올라가지. 우리 안에도 바다가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보름달이 뜬 밤이면 범죄율이 증가하는 거 알아?" 

달의 위상에 관해 얘기하는 동안 파도가 천천히 모래 위를 쓸었다. 힘을 빼고 말하자 상우의 낮은 목소리가 물결처럼 피부를 긁는 것만 같았다. 상우의 다리 위로 햇빛과 그늘이 얼기설기 얼룩무늬를 새기고 있었다. 도현이 픽 웃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거기에 팔을 올렸다. 좀 더 편하게 웅크린 자세가 된 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씩은 꿈을 꾸는데, 그러니까 거기에……. 바닷속에 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해서 정말로 나오기가 싫거든요. 아예 꿈에서 깨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상우는 묵묵히 들었다. 도현은 한 번도 입 밖에 내어본 일 없는 것들을 파도 속으로 계속 던져 넣었다. 파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든 어절과 어휘를 집어삼켰다. 도현은 책장 사이에 낙엽을 끼우듯 한마디 한마디를 흰 포말에 담았다. 

"더 이상 힘들어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이기적인 일인가요? 그 속에선……." 

한동안 바다라는 책엔 빈 페이지가 생겼다. 투명한 페이지들은 흰 칠을 한 테두리를 두르고 팔락팔락 끝없이 넘어갔다. 낱낱의 것들이 겹겹이 쌓인 투명한 책장(冊張)은 푸른색만을 반사했다. 그 사이를 갈매기가 페이지를 표시하지 않은 가름끈처럼 바람을 타고 낮게 날았다. 침묵을 품은 바다가 검푸르게 반짝였다.

정적 없는 침묵 속에 앉아있던 상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하러 가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시간이 일렀지만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땡볕 더위에 벗어놓은 옷을 집어 들고 모래 위를 기운차게 걸어 나가려던 상우는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춰서더니 도현을 향해 돌아섰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무래도 출출하더라. 가능하다면 야식 좀 부탁해도 될까?"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웃을 때면 부드럽게 눈꼬리가 더 내려가서 훨씬 순한 인상으로 변하는 도현의 쌍꺼풀진 눈이 잠시 상우의 말을 곱씹듯 느리게 깜빡이다 순식간에 비난의 기색을 보냈다.

"그런 귀찮은 일을 당당하게……? 너무해요." 

"좀 부탁할게. 뭐든 좋으니까." 

상우는 한낮처럼 씩 웃고는 모래밭을 휘청이며 걸어갔다. 도현도 곧 일어섰다. 앞서 걸어가던 상우가 문득 확인하듯 도현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모래 알갱이들이 햇빛을 마구 반사하고 있었다. 햇빛을 가릴 곳이 없어 모래밭 위는 오래 머물기엔 너무 더웠다. 도현이 손그늘을 만들며 상우를 보았다. 머릿속으로 무엇을 갈등하는지 위아래 양방향으로 구워지며 서 있던 상우가 결국 힘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시내로 갈 건데 혹시 같이 갈래?"

고작해야 이런 일을 얘기하는데 그렇게 뜸을 들일 일이 있단 말인가. 도현은 의아했지만 그냥 간단하게 답했다.

"좋아요."

열병에 빠진 자의 입에서 다른 대답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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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는 김해린 사장의 딸이며 초등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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