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물 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무언가에 기대어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차가운 천과, 천 너머의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무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익숙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가까이에서 빠르게 무언가가 뛰고 있었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덮이고, 그녀의 의식이 다시 꺼졌다.






그녀는 부드러운 침대 시트에 싸여 눈을 떴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젤라틴이 녹았다가 다시 굳는 과정을 직접 경험한 듯 몸이 이상하게 흐물흐물하다. 그나마 뜨뜻하고 축축한 것이 이마에 얹어져 있어 좀 더 나았는데, 아마 수건일 것이다.


“정신이 들어요?”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건.”

“좀 상처네요……. 방금 물수건 갈아준 사람한테.”

“윽, 너한테 말한 건 아닌데. 일단 미안…….”

“농담이에요!”


크로노가 키득거렸다. 농담이라고? 다이나는 그리 쏘아붙이다가 자신이 들어도 상당히 잠긴 목소리에 여러 번 헛기침했다.


“무사히 눈을 떠서 다행이에요.”


크로노의 다정한 말에 절로 눈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짐짓 모른 체하며, 다이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낯설지만 익숙한 곳에 누워 있었다. 별장에서 다이나가 머무는 방이었다. 침대 시트는 그 전의 시원한 안감이 아닌 훨씬 푹신하고 비교적 따뜻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파자마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머리맡에 더운 김이 나는 대야와 몇 가지 약병이 놓여 있었다. 어쩐지 혀에서 쓴맛이 나는 것도 같다.

다이나는 몸을 일으켜보려고 애썼지만, 이명과 함께 머리가 멍해져서 그만두었다. 아직 몸이 무거울 거예요, 크로노가 베개를 두어 개 더 가져와 다이나의 등 뒤를 받쳐주었다.


“맞다, 의사 선생님께서 다이나가 깨어나면 이 약을 한 숟가락 먹으랬어요.”

“나 지금도 입 안이 쓴데.”

“약이 단 게 어디 있어요? 애도 아니고 좀 참아요.”


크로노가 약병과 숟가락을 내밀었다. 못 먹는다는 얘긴 아니었거든, 다이나는 약과 함께 불평도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약은 꼭 기절할 때만 먹여주면 좋겠다.”

“헤헤, 물 여기 있어요.”

“고맙습니다…….”


물 한 컵을 더 들이켠 다음에야 다이나는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얘기 좀 해줘.”


크로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다이나는 기억이 안 나나요?”

“물에 빠진 건 알겠어. 음…… 다른 건 모르겠다.”


그때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아무리 실수였다 해도 곱씹을수록 부끄러운 일이었다. 다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골이 흔들리는 느낌이라 금방 그만두었지만.

크로노가 설명했다.


“하츠랑 나루터에서 배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매드해터 선생님께서 굉장히 급하게 손짓하시더라고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서 일단 배를 말뚝에 매드렸죠. 배를 다 매기도 전에 선생님께서 다이나를 안아 들고 배에서 내리셨지만……. 선생님 재킷에 가려서 잘 몰랐는데, 다이나는 엄청 흠뻑 젖어있었어요. 물에 빠졌으니 당연한 거지만. 어휴, 하츠가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몰라요!”

“음…… 짐작이 가네.”

“마침 캐피타 교수님이 담요를 들고나오셔서, 다이나한테 덮어주고 방으로 옮겼어요. 이 별장 직속 의사가 진찰을 해주셨고요. 꽤 고열이었어요. 젖은 채로 오래 있기도 했고, 다이나 체력이 좋지 않으니까 더 그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공부든 독서든 밤새우면서 하면 안 좋다고 내가 평소에 말했잖아요. 운동도 좀 하고!”

“으응…….”


잔소리가 많네, 다이나는 크로노의 시선을 피했다.


“으이구, 그다음엔 우리는 남아서 다이나 상태를 보려 했는데 매드해터 선생님께서 하츠는 파티 주최자니까 자리를 지키러 가야 한다고 하시고, 나한테는 저녁이라도 챙기라고 보냈어요. 음, 그리고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 같이 한 시간쯤 이 방에 있다가 선생님을 빼고 다들 자러 갔어요.”


크로노의 말을 다 듣고 난 다이나의 얼굴은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제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젠장, 제대로 실수했어. 선생님께 너무 폐를 끼쳤네.”

“다이나…….”

“게다가 엄청난 가십거리도 만들어 냈군.”

“무슨 소리예요!”


크로노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마음은 알지만, 지금 다이나는 환자잖아요.”


아픈 사람에 대해 뒷말을 꺼낼 만큼 예의 없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일 터다. 상류층으로서 상식과 예절을 배워온 사람들이라면 그만한 예의를 갖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어떨까? 다이나는 잔잔하게, 그리고 차갑게 웃었다.


“그래봐야 사람들은 제멋대로 떠들지.”


본인 귀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될 일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소위 ‘가십’이 무서운 것이다. 매드해터에게 후원을 받는 거로도 많은 말이 돌았다. 다이나 자신이 아직 매드해터와 대면하기도 전부터, 지식인들이 모이는 대학, 그 지성의 보고에서부터 말이다.

개중에는 대단히 지저분한 추측도 있었다. 그간 인간 사회의 사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충분히 그리 추측할 수 있다. 사회는 좋든 나쁘든 편견을 만들어 내고,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사회에 빌붙어 편견을 주입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능성이라는, 뇌 내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입 밖에 내는 순간에는 충분히 문제가 된다.

다이나는 그 문제들을 모두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건 떠드는 사람들 잘못이에요. 다이나는 잘못 없어요, 알았어요?”


크로노가 조금 화난 투로 위로했지만, 어쨌거나 눈에 띄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다이나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그간 파티에서 다이나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크든 작든 악영향을 줄 것이다.

감수하는 건 오로지 본인의 몫.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은?”

“아, 매드해터 선생님은 잠깐 눈 좀 붙이시겠다고 하셨어요. 지금 소파에서 주무시는데, 밤새 다이나 옆에 계셨거든요…….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얼굴이셨지만 지금 잠드신 걸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봐요.”


크로노가 뒤편의 티 테이블에 딸린 소파를 가리켰다. 긴 소파는 침대와 등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있는지 쉽게 볼 수 없었다. 다만 해터의 모자가 소파 옆 협탁에 놓여있었다.

속이 쓰렸다.


“바로 옆이 선생님 방인데 왜 가서 주무시지 않고.”


다이나가 볼륨이 확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로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츠가 힘차게 방문을 열었다.


“여, 다이나! 일어났어?”

“쉿, 선생님 주무시잖아.”

“하츠… 노크 좀 하고 들어와요……!”


동시에 다이나와 크로노가 주의를 주었다. 그들의 말에 소파에서 잠든 해터를 발견한 하츠는, “이크!” 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매드해터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하츠의 걸음걸이도 굉장히 조심스러워져서, 마치 도둑처럼 살금살금 걸어 들어왔다.


“약은 먹었어?”


의자 하나를 빼고 앉는 데 육십 초 정도 소비한 하츠가 모기만한 소리로 물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그 행동에 피식 웃고만 다이나가 말했다. 하츠의 등장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좀 전에 크로노가 챙겨줘서 먹었어.”

“다행이네! 꼬박 하루 동안 안 깨서 걱정했어.”

“하루?”


지금 몇 시인데? 다이나는 그렇게 물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하하, 좀 오래 자긴 했죠?”

“갑자기 머리가 좀 아프네…….”


별일 아니라는 듯 해맑게 미소 짓는 크로노와 이마를 짚는 다이나의 얼굴이 너무 대조되어서, 하츠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있다가 저녁 가져올게. 오늘 저녁 수프는 다이나가 먹기에도 무리는 없을 거야!”

“속에 무리가 있는 건 아니니까 수프 말고 평소 먹는 저녁으로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 그냥 여기서 다 같이 먹을까요?”

“어, 그럴까? 어차피 오늘은 식당에서 뷔페식으로 먹는 거라 내가 빠져도 상관없을 것 같고. 그럼 선생님 몫도 여기로 가져와야겠네! 일어나시면 바로 드실 수 있게.”

“참…… 고마운 얘기인데 말이야…….”


너네가 여기서 저녁 먹으면 어제 일만큼이나 더 눈에 띄거든, 다이나는 그 말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려는 것도 꾹 참아냈다. 그래, 호의가 고마우니까. 그녀는 시트에 몸을 푹 묻었다.


“나 잠깐만 잘게. 있다가 깨워줘.”

“졸리구나? 알았어!”


다이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트럼프나 할까? 좋아요, 마치아도 잠깐 부를까요? 그러면 체셔도 따라올 것 같은데… 곧 주변 소리가 하나씩 묻히기 시작했다. 하츠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고, 그에 자신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다. 방 밖으로 나가는 크로노의 옆모습, 카드를 찾는 하츠의 뒷모습, 그리고 협탁 위의 모자에 시선이 닿았다.


나중에 뭐라 말씀드려야 하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다이나는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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