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vs 27



 

"스가와라상도 열일곱 살 때 그러셨어요?"


쥐고 있던 술잔을 입에 홀짝 털어 넣으며 히나타가 스가와라에게 물었다. 이미 3차에 걸친 술자리에 히나타의 혀는 꼬일 대로 꼬여, 스가와라는 “뭐라고, 히나타?” 하며 몇 번을 다시 물어보아야했다.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처박을 듯이 휘청대던 히나타가 이내 그 가느다란 목을 휙 들어 올리곤 스가와라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오렌지색 머리가 공중으로 폴폴 날리다가 가라앉는 게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보는 기분이었다.

취해도 예쁘네, 히나타는. 하도 휘어 눈동자가 아예 사라진 히나타의 웃는 얼굴을 마주보며 스가와라는 생긋 미소 지었다.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는 건 데킬라와 함께 나온 레몬조각의 시큼한 향내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통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대변한다고, 스가와라가 소속된 법무팀 사람들은 주변으로부터 공사구분이 확실하고, 일의 맺고 끊음이 명확하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러나 그건 꽤나 허울 좋은 말이지. 이걸 홱 뒤집어 까놓고 말하자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의 집합체란 소리였다. 탕비실 정수기 물통에 물이 떨어지면 밖에 나가 생수를 사먹을지언정 자신이 새 물통을 끼워 넣는 수고 따윈 결코 하지 않는 부류의.

그런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법무팀에 새로 온 신입사원 히나타는 결코 이 팀에 어울릴만한 애는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팀장이 히나타 몰래 인사팀에 전화를 넣어 쟤 진짜 법학을 전공한 거 맞냐, 졸업증명서 위조한 거 아니냐고 물었을까.

팀에 함께 들어온 히나타의 동기 츠키시마가 첫 출근 날부터 자리에 앉아있는 게 원래 이 팀에 오랫동안 근무해오던 사람처럼 위화감 하나 없는 것과 달리, 뭐가 그리 신기한지 그 큰 눈알을 데굴데굴 돌리며 사무실을 둘러보던 히나타는 수많은 오리알 속에 끼어있는 계란 마냥 튀어도 참 튀었다.

쟤 한 달은 버티겠냐. 싸가지 없는 놈은 참아도 일 못하는 놈은 참을 수 없다며 신입사원을 벌써 몇이나 쫓아 보낸 전적이 있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팀장과 순진한 얼굴로 어리바리를 까대는 히나타를 번갈아보며, 올해 3년차인 대리 쿠로오가 혀를 쯧 찼더랬다.

그런데 이게 웬일. 퍽퍽하기가 닭 가슴살보다 더 한 법무팀으로부터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허허- 하는 웃음소리가. 그것도 사무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높은 타피션 뒤 팀장 자리에서부터.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자네 대학은 졸업한 거 맞나? 어떻게 이런 걸 몰라?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 팀장은 삐악거리는 햇병아리 신입사원 히나타를 매일같이 갈궈댔더랬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 하며 속으론 숫자 18을 찾으며 쌍욕을 해댔을 상황이 하루에도 몇 번씩 히나타에게 반복되었다.

그런데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둔한 건지. 히나타는 텅 빈 땅콩 껍질 마냥 속이 없는 사람처럼 그저 그 큰 눈을 곱게 접고 수줍게 웃는 것이었다. 아뇨~ 팀장님! 저 대학 졸업했어요! 마지막에 졸업 논문을 늦게 내서 졸업 못 할 뻔 하긴 했는데, 어휴, 그때 생각만 하면…….

미간에 잔뜩 주름을 만들며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만 팀장 탓에 잠시 정적이 감돌던 사무실. 풉- 끝내 참지 못한 쿠로오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고 이어 다른 파티션 안쪽 곳곳에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대는 히나타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팀장이 허 참-하며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얼굴에 슬며시 미소를 올렸다. 세상에. 스가와라의 팔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입사 3년차, 스가와라는 그날 처음으로 팀장의 미소를 보았더랬다.

그날 이후. 조직 활성화 목적으로 인사팀에서 매달 쏟아 부은 회식비로도 통 개선이 안 되던 법무팀의 분위기는 봄이라도 온 듯 한결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탕비실 정수기의 물통이 비어있는 일도 없었으며, 하루에 꼭 한 번씩 팀원들이 올린 서류를 박박 찢어 눈처럼 공중에서 흩날리던 팀장의 행위 예술같은 지랄도 사라졌다.

팀 분위기 변화의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한 히나타는 바로 옆자리에 앉은 선배 스가와라를 유독 잘 따랐다. 아니, 뭐 히나타 자신은 몰랐지만 사실 그렇게 만든 건 스가와라였다. 출근하면 늘 한쪽이 서있는 히나타의 와이셔츠 옷깃을 고이 접어준 것도, 점심시간이 지나 꼭 오후 2시만 되면 고개를 꾸벅대는 히나타 책상 위에 샷 두 잔을 넣은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올려주는 것도, 로펌에 보낼 자료 만드는 걸 도와준다면서 함께 밤을 새준 것도 모두 히나타와 친해지기 위한 스가와라의 빅 픽쳐였다.

다른 팀원들이 히나타의 일에 무관심했냐면 그건 아니었다. 히나타, 내가 도와줄…. 호의가 가득 담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가와라는 생긋 웃으며 그들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됐어. 너 바쁘잖아.

눈치가 백단인 인간들이 모인 게 법무팀이랬다. 겉은 새하얀 법복 같은 게 어울릴 것 같은 인자하고 부드러운 외모이면서, 속은 시커멓기 그지없는 스가와라의 흑심을 꿰뚫어본 팀원들은 이내 혀를 차며 그저 히나타의 안위를 빌 뿐이었다.

야. 퇴근하면 술 처먹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라. 언젠가 스가와라가 히나타에게 퇴근 후 저녁이나 먹자는 얘기를 건넨 날, 동기이면서도 멍청병이 옮는다며 평소엔 눈도 안 마주치는 츠키시마까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질 정도였으니 오죽 하랴.

팀원 모두가 히나타를 걱정하는 이유가 스가와라가 어디 심각한 하자가 있는 인간이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스가와라는 그 잘생긴 얼굴에, 위트와 여유, 배려심까지 넘치는 성격 덕에 어딜 가도 상위 1프로에 소속될 인간이었다. 소고기로 치자면 선명한 때깔부터 사르르 녹는 맛까지 엄지를 척하고 올릴만한 A++ 등급이랄까.

다만, 목표의식이 뚜렷한 스가와라에 비해, 자신이 지금 동쪽으로 쓸려가는 지 서쪽으로 쓸려가는 지 전혀 모른 채 아방하니 웃고 있는 히나타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왜 눈 뜨고 코 베인다고, 후에 히나타가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국에 밥 말아먹듯 후루룩 스가와라에게 잡아먹힌 상태임을 깨닫는 최악의 사태는 막는 게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겠냐는 그런 최소한의 양심에서 비롯된 걱정이었다.

그러나 팀원들이 자신을 볼 때 세모로 눈을 뜨든 네모로 눈을 뜨든. 스가와라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상큼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다들 무슨 오지랖이람. 그 누구보다 히나타를 아껴주고 예뻐해 줄 자신이 있는데. 언제 이 귀여운 후배에게 스가와라 코우시 애인 딱지를 붙여줄까- 스가와라의 머릿속엔 즐거운 계획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달이 차서 둥그런 보름달이 되듯,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스가와라상, 오늘 저녁에 바쁘세요? 상담할 게 있어요. 히나타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후, 스가와라는 자신이 그토록 기대했던 그날이 오늘임을 직감했다.

그런데.


"토오루, 우리 토오루가요. 걔가 진짜 천사 같은 앤데."


토오루, 우리 토오루. 벌써 몇 번째 듣는 이름인지. 히나타는 술이 조금 오른 이후부터 주구장창 옆집에 사는 열일곱 먹었다는 고딩 남자애 얘기만 하고 있었다. 하도 “우리 토오루, 우리 토오루”하기에 성이 ‘우리’냐고 물었더니 푸후 웃음을 터뜨리며 “아니요, 오이카와요” 한다. 그것도 스가와라가 이 세상 인간을 평가하는 표준이라도 되는 양, 우리 토오루가 스가와라상만큼 잘생겼다느니, 스가와라상만큼 똑똑하다느니 하면서.

상담할 게 있대서 회사일이나 커리어에 관한 일인 줄 알았다. 스가와라가 면밀히 관찰한 바에 따르면 히나타는 분명 사귀는 누군가나 썸이라 할 만한 것을 타는 상대가 없었다. 그렇기에 연애에 관한 얘기는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설마 육아 상담일 줄이야.


"제가 걔 백일 좀 넘었을 때 처음 봤는데 얼마나 예뻤다고요. 주먹이 요만 했어요."


갓난아기는 원래 주먹이 다 그만 해, 히나타.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이나 새끼는 다 예쁜 법이야. 스가와라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키며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엄마라는 말보다 먼저 말한 게 제 이름이었어요. 쑈-쑈- 하는데 정말 천사가 따로 없었어요."

"하하. 신기하네."


낳고 길러준 부모보다 옆집 사는 형 이름을 먼저 불렀다라. 보통 그런 걸 배은망덕이라고 표현하지.


"토오루가 동네에서 별명이 쇼요 껌딱지였어요. 눈 뜨면 우리 집 벨 누르고, 저 학교 갔다 올 때까지 목 빠져라 기다리고. 제가 매일 업고 다녔다니까요."


응. 그랬구나. 네 키가 그래서 안 큰 거야. 히나타. 한참 성장판 열릴 때 꼬마가 꼬마를 업고 다녔으니 네 성장판이 일찌감치 짜부가 됐겠지.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데킬라 잔을 입에 털어 넣는 스가와라의 속이 편치 않았다. 아니, 편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히 불편했다.

잔정이 많다 못해 넘쳐흐르는 이가 바로 히나타였다. 저 멀리 복도에서 A4 박스를 들고 나르는 누군가가 있으면 쪼르르 달려가 함께 들어주거나, 경조사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한다는 팀원을 대신해 잔업을 도맡아 하는 것은 예사였다. 뭐, 사실 그게 또 스가와라가 히나타에게 반한 매력 포인트 중 하나이니, 얼굴도 모르는 사춘기 남자애 얘기 따위를 한다는 게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왜 하필 히나타와 자신이 서로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야 할 이 타이밍이냐-가 스가와라의 속이 꼬이는 이유인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걔가 이상해졌다는 거야?”


그렇지만 스가와라는 이런 걸로 공든 탑을 제 발로 걷어찰 만큼 인내심이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손톱만큼도 궁금하지 않은 일을 묻는 스가와라의 표정이 사뭇 어두웠다. 마치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는 듯.

히나타는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술이 올라 붉어진 통통한 입술 사이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네…….”

"뭐가 이상한데?"

"그러니까… 처음 좀 이상하다고 느낀 건 한 달 전 쯤인데요."


머뭇거리며 말하는 히나타의 귓가가 조금 달아올라있었다.

 

 

*

 

 

오렌지색 지붕, 그 옆의 민트색 지붕. 옆으로 나란히 선 2층 단독 주택은 각각 히나타와 토오루의 집이었다. 히나타가 8살 되던 해, 태어난 지 100일이 겨우 넘은 토오루가 민트색 지붕의 집으로 새로 이사 왔다. 하얀 피부에 아기치고 긴 속눈썹,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유모차에 누워 곤히 잠이든 토오루를 보고 히나타는 날개 잃은 천사란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히나타는 꿈에도 몰랐다. 강산이 변하는 걸 넘어 천지개벽이 된다 해도 달달한 아기 향이 폴폴 나는 토오루는 영원히 품안의 천사일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쇼짱, 쇼짱’하며 예쁜 얼굴로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겨, 아침부터 밤까지 제 품을 독차지하던 입안의 사탕 같이 달콤하던 그 천사가 점차 흉흉한 악의 기운을 풍기기 시작한 것은.


"쇼짱. 취향 참 안 변하네."

"헉! 토, 토오루!"


이, 이게 웬 날벼락이야.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주인도 없는 방에 토오루가 들어와 책상에 떡하니 앉아있었더랬다. 손에는 언제 꺼내들었는지 침대 밑에 고이 숨겨두었던 살색 가득한 민망한 잡지를 팔랑팔랑 흔들며.


"너 그거, 어, 어떻게!"

"쇼짱은 여전히 거유에 귀여운 스타일 좋아하는구나."

"토오루! 이 자식 얼른 내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쪽팔림도 이런 개쪽팔림은 없었다. 차라리 엄마한테 들켜서 등짝 몇 대 맞고 마는 게 낫지 하필이면 꼬마 토오루한테 들키다니. 아니, 꼬마라기엔 이젠 너무 컸긴 했다. 매일 같이 입에 우유를 달고 살았으나 겨우 165cm를 찍은 자신과 달리, 토오루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이미 180cm를 훌쩍 넘어 있었다. 신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점프 하나는 자신 있는데. 천장으로 쭉 뻗은 토오루의 손안에 있는 잡지를 낚아채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건만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 코스프레 꼴일 뿐, 끝끝내 손이 닿질 않았다. 당황할수록 더욱 터질 듯 빨개지는 자신의 얼굴을 재밌는 구경이라도 하듯 느긋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토오루의 낯짝이 괘씸해 히나타는 더욱 씩씩 열을 냈다. 이 자식이 진짜.


"야! 내놓으라고 했지!"

"쇼짱, 아저씨 티 좀 내지마. 요즘 누가 이런 걸 돈 주고 사.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게 야동인데. 내가 주소 알려줘?"

"뭐어? 이 자식! 너 벌써 그런 거 보면 안 돼!"

"뭐래. 요즘은 초딩도 보는데. 쇼짱도 어릴 때 봤잖아. 누구더라. 그 친구라는 형이랑 아줌마 몰래 집에서… 읍!"


히나타는 급히 토오루의 입을 두 손으로 눌러 틀어막았다. 머리가 좋아 전교에서 손에 꼽힐 만큼 공부를 잘 한다는 건 진즉 알고 있긴 했지만. 아니, 그걸 아직도 기억해?

인생에서 파내고픈 수치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맞닿아있는 토오루의 단단한 가슴이 조금 꿈틀대더니 이어서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보였다. 목젖까지 잘생겼네, 우리 토오루는. 보기 좋은 모양으로 불거진 목젖이 참 남자다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묵직한 무엇인가가 히나타의 허리를 천천히 감싸왔다. 뜨끈하고 굵직한 팔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해오던 배구를 고등학교에 와서 이어서 하고 있는 토오루였다. 세터라고 했던가. 허투루 운동하는 게 아닌지 근육이 잘 잡힌 탄탄한 팔은 히나타의 허리를 빙 두르고도 남을 만큼 길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우리 토오루가. 어릴 적 덥석덥석 잘 안겨올 땐 품 안에 꼭 안기는 꼬꼬마였데, 이젠 반대로 자신이 안겨있는 모양새였다.

훌륭하게 큰 토오루에게 새삼 감탄하고 있던 그때. 토오루의 입을 막은 손바닥에 따끈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닿아왔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야릇하고 생경한 감촉. 

히익! 히나타는 화들짝 놀라며 이내 토오루의 입에서 손바닥을 떼어냈다. 뭉근하게 손바닥을 누르며 느릿느릿 움직이던 것은 분명 토오루의 혀였다. 히나타의 잔뜩 움츠린 어깨 위에 있는 목이 화르륵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자식, 이, 이상한 장난을 치다니! 혼이라도 내줘야겠다고 씩씩대며 고개를 들어 토오루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히나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꼴깍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지그시 자신을 응시하는 토오루의 눈이 낯설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가득 담고 있는 눈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토오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쇼짱.”

“으, 응?”

“키스한다?”

“뭐, 뭐라고?”


토오루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얘가 원래 이런 얼굴이었나. 진지하고 조금 무섭기도 한. 잠깐만, 잠깐. 야, 너 왜 그래! 머릿속에선 이런 저런 말들이 팝콘처럼 튀어나왔으나 당황한 입은 얼어붙어버린 듯 바보같이 우물댈 뿐이었다.

아, 안돼! 이건 아니잖아! 히나타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껏 토오루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이 자식! 너, 너어 진짜!”


너 혼나볼래? 장난이 지나치잖아! 해야 할 말은 분명했으나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바라보는 토오루의 눈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토오루의 눈엔 장난기라고는 하나 없어서, 장난치지마란 말은 이 상황에서 맞지 않았다. 뭐야. 왜 그러는데. 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혀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자신의 정수리에 집요하게 닿아있는 시선이 돌처럼 묵직해 히나타는 입도 발도 그 어떤 것도 뗄 수 없었다. 


"쫄기는."

"뭐, 뭐?"


팽팽해진 분위기를 깬 건 평소와 다름없이 건방진 말투를 한 토오루의 목소리였다. 히나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토오루를 바라보았다. 나른하게 뜬 눈과 여유가 넘치는 토오루 특유의 표정은 늘 보아오던 옆집 꼬마 토오루였다. 하아. 히나타는 안도의 한숨이 내뱉었다. 금방 보았던 토오루의 모습은 무엇인지, 지금 자신이 큰 위기에서 빠져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지 히나타는 생각해보려 하였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부러 못된 말만 툭툭 내뱉는 것이 사춘기가 틀림없는 토오루가 혀를 쯧 차며 히나타에게 비죽대기 시작했기에.  


"쇼짱 키스 안 해봤지?"

"어, 엉?"

"그러니깐 그렇게 당황하지."

"아니거든! 키, 키스해봤거든!"

"하루미였나. 그 누나랑 한 거? 그게 무슨 키스야, 뽀뽀지."

"너 그걸 어떻게 알…!"

"거기다가. 아직 동정이지? 스물다섯에 동정이라니. 참."


히나타의 얼굴에 누가 불이라도 붙인 듯 화르륵 뜨겁게 타올랐다. 아니, 그,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죄야? 누구한테 피해준 것도 아닌데, 우씨! 가뜩이나 동정인 것도 억울한데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한테 놀림까지 받으니 창피함까지 더 해져 히나타의 양 콧구멍에서 씨익씨익 콧바람이 새어나왔다.


"쇼짱. 첫 경험이 그렇게 소중해? 그렇게 아끼다가 똥 된… 아얏!"

"이 자식이 진짜!"

"아프다고!"


철썩! 참다못한 히나타가 기어코 손바닥을 들어 토오루의 등짝에 스매시를 날렸다. 찰진 소리와 함께 토오루가 날개뼈를 등 가운데로 모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매를 벌어요, 아주! 넌 좀 맞아도 싸!"

"아파, 아프다니까!"


히나타의 손바닥이 찰싹찰싹 등에 닿을 때마다 토오루는 아프다며 질색 팔색을 했다.

아프긴. 거짓말. 그 잘생긴 얼굴을 팍 구기고 아프네, 나 죽네, 어쩌고저쩌고 엄살을 펴도, 사실 히나타보다 이미 덩치도 키도 힘도 더 세진 토오루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히나타의 팔 따위 가볍게 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토오루는 왜인지 피하지도 않고 넓대대한 등판을 히나타를 향해 슬쩍 들이미는 것이었다.

히나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토오루는 분명 예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져있었다. 마치 어릴 적에 눈이 빠져라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했던 틀린그림찾기 속 그림처럼. 톡, 톡, 톡. 타이머의 시간은 0이 되어가고 있는데 도무지 달라진 곳이 어딘지 찾을 수 없어 히나타는 초조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히나타, 정신 좀 차려봐."


스가와라는 자신의 겨드랑이 깊숙이 안겨 잠이든 히나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무도 없는 주택가 골목길, 가로등불에 비쳐 길게 드리워진 스가와라와 히나타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져 있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옆집 꼬맹이 얘기를 타령처럼 늘어놓던 히나타의 넋두리에 장단을 맞춰주던 게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점차 눈이 풀리며 혀가 꼬인 발음으로 날개 잃은 천사가 악마가 되었다며 했던 얘기를 도돌이표 마냥 반복하던 게 수상하다 했더니. 갑자기 벌떡 자리에 일어선 히나타가 지금 당장 토오루를 만나야겠다는 게 아닌가.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겠어요! 주먹을 꾹 말아 쥔 히나타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아니, 무슨 당장 전쟁을 앞둔 국가 간 협상 자리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뭐가 그리 급해. 눈동자의 초점이 나가 오징어 마냥 다리를 꼬는 주제에 어찌나 고집이 세던지. 막차도 끊겼으니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는 스가와라의 달콤한 유혹에도 히나타는 ‘오늘 할일은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를 몸소 실천하는 새 나라의 어린이 마냥 집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더랬다.

그래. 뭐 오늘만 날인가. 어차피 언젠가는 같은 집으로 퇴근할 사인데. 스가와라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히나타와 함께 택시에 올랐었다. 어여쁜 예비 애인이 꽐라가 된 틈을 타 누가 보쌈이라도 해갈까 봐서.

그런데 그렇게 전의를 화르륵 불태우던 히나타는 택시에 탄지 얼마 되지 않아 이내 고개를 꾸벅이기 시작하더니, 스가와라의 어깨로 머리를 스르륵 기대어왔다. 토오루 이 자식 내가 업어 키웠는데…. 잠꼬대를 해가면서.


"여기 이 집 맞지? 오렌지색 지붕."

"으응…."


따뜻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게 마음에 든 것일까. 축 쳐진 작은 몸이 스가와라의 품안으로 더욱 파고 들었다. 폴폴 날리는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스가와라의 턱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알싸한 알코올 향기와 함께 색색대는 고른 숨을 내뱉는 벌어진 입술이 붉었다. 마치 달콤한 향을 풍기는 꽃잎처럼.

이거 참. 심란하게.

히나타의 집 대문 앞에 서서 스가와라는 잠시 생각했다. 고민 상담료에 술값, 집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머릿속 계산기를 여러 번 두드려 보아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러니깐 수고비로 키스 한 번 정도 받아도 될 자격이.

흐음. 잠시 가볍게 숨을 내뱉고선 스가와라는 어깨에 기대어 있는 발그레한 얼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취한 사람한테 그러는 거 범죄 아니야?"


나른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의 입술에 말랑한 히나타의 입술에 닿기 바로 직전이었다. 스가와라는 이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히나타의 옆집, 민트색 지붕의 집 대문 앞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서있는 인영이 하나 보였다.

정말 잘생겼어요, 우리 토오루. 히나타의 말이 거짓이 아닌 듯 길을 가다 마주쳐도 한 번쯤 돌아볼 만큼 반반한 낯짝이었다.

그런데. 강아지처럼 귀엽다더니, 그건 아니었다. 저 키에 저 덩치가 무슨 강아지야. 저건 이미 강아지의 크기를 넘어섰다. 게다가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게 강아지는 무슨. 늑대지.


"네가 토오루구나."

"아저씨가 스가와라 코우시고."


하. 스가와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히나타한테 키스 미수를 저질렀다고 할 때 싸한 기분이 들긴 했었는데. 보통 놈은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 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토오루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제가 하루미짱이랑 만난 거랑 잡지 숨겨둔 거랑. 그거 뿐 만이 아니에요. 심지어 패, 팬티 색깔도 알고 있다니까요. 아까 전 히나타가 했던 말이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아무리 이웃사촌이라지만 두 집 사이의 담장이 터무니없이 낮았다. 거기다가 조금만 운동신경이 있는 사람이라면 담을 타고 2층으로 뛰어올라 창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식은 죽 먹기, 씹던 껌 뱉기였다.

천사가 아니라 순 도둑놈이네, 히나타. 그 도둑놈이 밤마다 네 방 창문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훔쳐갔겠지. 네 일기장에 쓰인 추억이나 내가 보낸 핸드폰 메시지나. 팬티 색마저 알 정도면 입술 정도는 이미 오래전에 도둑맞았음이 틀림없다.

스가와라의 한쪽 입술이 스윽 말려 올라갔다.

불쾌하네. 좀.


"아저씨. 쇼짱한테 관심 있어?"


팔짱을 낀 채 툭 던지는 질문이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하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이런 골 때리는 놈이 다 있지. 한참을 웃던 스가와라가 토오루를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어쩌지. 쇼짱은 나없인 못 살 건데."

"그래, 그런 거 같더라."


확신에 가득 찬 안타깝기 짝이 없다는 말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원래부터 잔정이 많은 애니까, 히나타는. 만난 지 일 년도 안 된 팀원들에게도 몇 십 년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잘하는데, 하물며 17년이나 보아온 옆집 꼬마한테는.


“그런데.”


한 템포 쉰 스가와라가 상큼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가족 같이 생각하는 꼬마랑 입 맞추고 배 맞추진 않겠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미묘한 긴장감이 공기 중에 흘렀다. 스가와라의 귀에 곧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 쇼짱이랑 나랑 가족 같은 사이이긴 하지. 근데."

"……."

"원래 야동도 근친물이 인기 있는 거 몰라?"


하하, 그거 참 재밌네. 히나타의 어깨를 잡아 쥔 스가와라의 손등 위로 불끈 힘줄이 솟아올랐다. 참을 수 없었다. 태연한 낯짝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열일곱 살 저 꼬마가 참으로 귀여워서.


"귀엽네."

"응, 아저씬 재수 없고."


기대어있던 대문에서 몸을 일으켜 팔짱을 푼 오이카와가 스가와라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스가와라의 품에 안겨 잠이든 히나타를 망설임 없이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드라이 크리닝을 맡긴 옷을 세탁소에서 찾아오는 것처럼, 원래부터 제 것인 양 당당하게.

쇼짱,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 속은 안 아파? 응? 히나타를 부축한답시고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감는 손길이 참 능숙했다. 자기 집 대문 열 듯 자연스럽게 히나타의 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대문 안으로 사라진 후, 곧 2층 창문에 불이 켜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두 개의 그림자가 한데 엉겨있는 것을 응시하는 스가와라의 눈에 핏대가 섰다. 스가와라는 이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깊게 파고들어 멍이 드는 지도 모를 만큼.

인정한다, 자신의 패배를. 상대가 열일곱이라기에 얕보았던 것 또한.

그러나 이제 겨우 한 게임 뛰었을 뿐이었다. 

히나타와 함께 처리해야 할 업무가 얼마나 되더라. 분명 많겠지. 막차가 끊길 때까지 야근을 해야 할 만큼.

어금니를 아득 가는 스가와라의 눈이 날카로웠다.

패배감에 젖어있을 틈 따윈 없었다. 

첫 방어전에 성공한 토오루를 향해, 도전자 스가와라 코우시는 다음의 일격을 노리는 것이었다. 

 


fin.



 


드디어 내가 메이저를 파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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