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본 소설은 체벌 요소, 폭력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W. 편백



















"너 병신이야?"



개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공중을 떠돌았다. 일순간 음소거라도 한듯 공간이 백색 소음으로 가득 찼다. 22기도, 10번도 벙찐 얼굴로 개별을 바라보았다.


"...네?"


제가... 뭘 잘못 들은 거죠? 혼자서 백 번 회상해도 부정하고 싶은 욕설이 자꾸만 귓가에 웅웅 맴돌았다.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 폼이 영 바보같다. 개별은 하라는 대답은 않고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22기의 모습에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귀도 먹었냐? 

"......"





"푸흡..."


10번은 뭐가 그리 재미진 건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한 손으로 하관을 가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그 꼴을 목격한 22기는 더 상처 받은 얼굴을 했다. 툭 건드려도 울듯한 얼굴로 도움을 요청한 놈한테 '병신이냐?'는 결정타를 날려버린 개별이 웃겨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역시 미친놈. 웬일로 친절하다 했다.


단단한 허벅지살을 꼬집어가며 웃참하는 10번에 개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와중에 메두사라도 맞닥뜨린 놈 마냥 굳어있는 22기를 보니 한숨 밖에 안 나온다.


"그 인간 이거 보고 뭐래?"

"네?"


이 자식 할 줄 아는 말이 '네?' 밖에 없나...?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 저렇게 화초 같고 우유부단한 애가 그 인간이랑 한솥밥을 먹는다 생각하니 제가 다 암담할 지경이다.


"그, ...그 인간이 누구, 아... 작전 팀장님이요?"


'그 인간'이라고 칭한 게 문제였나. 뭐 어쩌라고. 그 인간도 나보고 개새끼 뭔 새끼라 부르는데 인간 취급 정도 해줬으면 됐지. 개별은 더 이상의 질문은 대답도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냥... 다시 해오라고 하셨습니다..."


얼굴이 뭐랄까... 약간 /^\ 같다. 눈꼬리가 입까지 쳐져선 툭 치면 울 것 같았다. 복도 한 가운데서 남정네 우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기에 말을 아꼈다. 개별은 눈썹 끝을 삭삭 긁으며 하찮은 과제물을 다시 살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듯 우는 얼굴에 침 뱉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충분히 고통 받고 있는 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만. 솔직히 칭찬하고픈 부분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빈말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고, 조언해달라 온 놈에게 응원이나 하는 것도 웃기다. 뭔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은데 저 면상을 하고 있으니 어려운 데다 그렇지 않아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건드려야 할 지 모르겠다. 


한 가지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구구절절 설득하느라 바쁘다. 수정한다 한들 꽂힌 생각을 뿌리 채 뽑아 새로 생각하지 않으면 세 번이든 열 번이든 간에 다시 퇴짜 맞을 거다. 이건 수정으로 될 일이 아니라, 싹 다 갈아엎고 방향을 새로 잡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러니 개 팀장이 자꾸 다시 해오라 했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작업물을 보는 눈은 트여있는 사람이니까.


"하."


개별이 한숨을 내쉬니 두 사람이 움찔거린다. 웃음을 겨우 삼켜낸 10번이 큼큼, 목을 다듬으며 개별의 눈치를 살폈다. 이 와중에 뻘 소리 한 번 해보자면 쟨 어쩜 심각한 얼굴도 저렇게 예쁜 걸까. 미간 사이에 진 주름마저 곱다. 나 호모인가?


"솔직히, 이걸 하나하나 다 뜯어보는 건 의미 없어." 


야야... 말 좀... 옆에서 가만히 듣는 내가 다 뼈 아프다. 내뱉는 말마다 족족 직설적이니 저 순두부 같은 녀석이 마상 입고 자괴감에 빠질까봐 걱정될 지경이다. 저 녀석이 대뜸 조언을 요구할 때 선뜻 받아주는 모습에 후배들한테는 대인배로 굴구나, 내심 감탄했다. 동기는 물론이오 선배들한테도 팀장님들한테도 기가 안 죽는 놈이기에 후배들은 개 무시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근데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그 싸가지 어디 가지 않았다. 강강약약인줄 알았더니 그냥 강강약강이었다.


개별이 과제물을 22기에게 건넸다. 좌절, 실망, 자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한 얼굴로 받아든다. 어쩐지 한 마디도 얹지 않은 제 마음이 불편해졌다. 개별은 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그를 바라볼 뿐이다. 분명 덩치도 저 놈이 더 큰데 왜 개별이 내려다 보는 느낌인 건지 모르겠다. 가라는 소리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자리를 뜨지도 않는다. 망부석으로 서서 관찰한다.


만약 저 놈의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면, 난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 안 봐도 뻔하다. 나 역시 기 죽고 저렇게 서 있었을 것만 같다. 저와 개별은 진급 심사 때마다 딜레이 없이 1트 만에 성공해왔기 때문에 1급 교육생들은 죄다 선배 기수거나 동기였다. 애초에 개별은 동기들 중에서도 제일 어리다. 계급 별로 교육을 진행하고 밤 훈련엔 나랑만 붙어다니니 후배를 만날 일도 없었다. 개별도 저도 남한텐 관심이 없다보니 궁금하지도 않았고, 후배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다. 때문에 개별이 아래 사람을 대하는 것은 처음 보았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포스였다. 그렇다고 선배들이나 저한테 깍듯하던 놈도 아니었는데 새삼스럽게 달라보였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벽이 느껴졌다. 마치 나만 좋아하던 가수가 하루 아침에 대스타가 된 기분이다.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지금부터 머릿속에 있는 것들 다 지우고 백지 상태로 들어."


내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22기가 번쩍 얼굴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선배님이 비친다. 비장한 표정도, 선심 쓰는 듯한 대인배의 표정도 아니다. 어쩐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마더 테레사처럼 인자한 분위기도 아닌데 날 구원해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해진 답을 맞히는 게 아니야. 뻔한 거 쓰지 마. 주어진 거 이상으로 활용해서 혁신적인 걸 써.

 여기서는 효율성보다는 가능성을 봐야 돼. 무조건 최단 거리나 최소 인원이 좋은 게 아냐.

그리고 상대는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야. 심리도 써 먹어. 타깃 신원 정보는 주어진 자원이라 생각하고 타깃 입장에서 몰입해. 그러면 대충 행동 유추 돼.

문화 무시하지 마. 타깃이 외국인이면 그 지역 문화도 대충 알아야 해. 아는 게 적으면 이것 저것 뒤지면서 내공 쌓아. 가지고 있는 데이터만 쓰지 말고, 수집해. 알면 알 수록 여러 가지 경우가 튀어나와. 조언도 구하고 다니고, 경험담이나 조서, 기록들도 다 뒤져보고.

그리고... 읽는 사람이 이해하게 써. 구구절절 말고, 적확하게. 쓰면서 생각하지 말고 다 생각하고 써 봐.

분량 채우려고 하지 말고 적게 쓰더라도 공 들여. 중요한 것만 쓰라는 게, 가장 좋은 것만 남겨 놓으라는 소린 아니야. 불필요한 건 지우고, 미완성은 끝까지 생각해서 완성해."


내내 시체 같던 22기의 눈에 빛이 스며들었다. 기관총처럼 우두두두 떨어진 말인데 하나같이 귀에 콕콕 박혔다. 이런 조언은 예상치 못했다. 선배님이 제게 던진 말들은 팀장님께서 내주신 문제의 정답이나 정답에 관한 힌트가 아니었다. 모든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사고 방식을 던진 것이다.


"......"


왜 내가 그동안 팀장님의 과제를 세 번 씩이나 다시 하게 됐는지 알 것 같다. 해당 과제만 해결하고자 했던 저의 어리석은 행동을 제대로 지적한다.


"적당히 사려."


마지막 말을 던진 그는 더 볼 일 없다는 듯 괴팍한 선배와 함께 자리를 떴다. 감사한다는 말 조차 하지 못했는데. 미련없이 떠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감사 인사를 듣자고 한 조언이 아닌 거다. 


왜... 뒷모습이 빛나는 것 같지. 누구보다 냉소적인 태도였는데도 알 수 없는 정이 느껴진다.






-






"필래?"

"아니."


옥상에 올라선 10번이 담뱃갑을 탁탁 털며 물었다. 매번 거부하는데 매번 묻는다. 하는 수 없이 홀로 라이터 휠을 돌렸다. 저의 옆에 선 개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바람이 개별 쪽으로 불었기 때문이다. 


"걍 피지 그래? 옆에서 냄새 맡는 게 더 역하잖아."

"안 피고 싶어."


하여튼 별난 새끼. 이 정도면 고통을 즐기는 수준이다. 혀를 내두르던 10번이 담뱃대를 길게 빨아들이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원래는 버릇처럼 해왔던 흡연이 오늘따라 감성적인 이유가 뭘까. 생각이 갑자기 많아졌다. 자꾸만 개별이 갈색 머리를 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원래도 비범한 놈인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늘 현장 수업에서 라이벌 구도에 서 있었고 그래서 이 놈과 나는 비등비등한 수준이라 은연 중에 생각했었다. 10번이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벽가에 기대어 눈을 고이 감고 있는 개별이 시야에 들어왔다.


라이벌은 무슨...


대체 무슨 유전자를 타고 났기에 이렇게나 잘났단 말인가.


"야."


오랜 시간 지켜보고 있어도 눈을 뜨지 않는 개별을 발로 툭 차며 깨웠다. 자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가보다. 어쩐지 녀석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너 작전팀 다시 들어갈 생각 없냐?"

"미쳤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은 다른 팀에 들어가기엔 아깝다. 현장팀도, 정보팀도, 보안팀도, 의료팀도. 웬만해서는 저도 놈의 아픈 구석을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만 사람마다 걸 맞는 자리가 있는 것이고 개별은 자격이 충분했다. 작전팀의 '작'자만 꺼내도 눈깔을 훼까닥 뒤집는 녀석에게 기어코 다시 들어갈 생각 없냐는 물음을 던졌다. 트리거라는 걸 충분히 알지만, 어쩌라고. 무례하다 여겨도 묻고 싶었다. 물어야만 했다.


"왜 나왔는데."

"묻지 마."

"너도 아쉽잖아."

"......"


아쉬워하는 걸 알고 한 말은 아니었다. 떠볼 생각으로 던진 건데 부정하지 않는다. 녀석이 부정하지 않는 건 조금이나마 마음이 있다는 소리다.


"너도 알잖아. 너 존나 아까운 거."

"이미 다른 애가 들어갔는데, 내가 들어가서 뭐 하는데."

"네가 걍 바르겠던데 뭐. 현장팀, 정보팀, 의료팀 다 출세하기 힘들어. 솔직히 네가 교육생들 사이에서나 짱 먹는 거지 짬 있는 선배들 다 제칠 수 있을 것 같냐?"


본인이 마음껏 휘저을 수 있는 물이 버젓이 있는데도 굳이 맞지 않는 곳에서 헤엄치겠다는 이유가 뭘까. 까놓고 말하면 얘가 떠난 작전팀이 아쉽다. 듣자 하니 작전팀은 팀장님 혼자 캐리하고 있는 상황에다 애초에 거긴 인원이 여럿인 것보다는 잘 다져진 놈 하나가 들어 앉아 있는 것이 더 낫다. 대용품으로 들어온 놈은 우유부단한 것이 결단력도 없고 사고력도 개별에게 한참 못 미치는데 그 놈에게 미래의 제 목숨을 맡기기엔 믿음이 가질 않는다. 인재가 여기 있는데 굳이 모자란 놈을 세우는 건 명백한 인력 낭비가 아닌가.


"출세할 생각 없어."

"작전 팀장님 제자로 들어가면 대놓고 밀어 주겠다는 거잖아. 그 좋은 기회를,"

"씨발!!! 필요 없다고."


나한테 소리 지른 거?


"넌 그 머저리가 짠 작전에 목숨 맡길 수 있냐?"

"꼬우면 네가 작전팀 해. 그건 쪼달려?"

"이 개새끼가..."


10번의 손가락에 끼여있던 연초가 꾸깃 허리를 접었다. 피부 끝에서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꽁초를 탁 소리 나게 바닥에다 집어 던진 그가 개별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작전팀 가. 팀장님한테 빌어서라도 쳐 가."

"견제하냐?"


쿵, 개별의 어깨가 벽으로 세게 들이박았다.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작게 신음하던 개별이 눈을 부릅뜨고 10번을 바라봤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는데, 왜... 난 왜 방어 태세를 취하지 않은 것인가.


"넌 씨발 목숨 맡기는 게 견제냐?"


알고 있었던 거다. 내 말이 저 놈한테 큰 데미지를 줄 거라는 것도, 입 밖으로 내뱉기엔 몹시 감정적인 것도. 그러니 자기 처벌의 방식으로 10번이 내게 입힐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네 앞가림이나 잘 해."


이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 헛숨을 내뱉은 그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멱살 부근에서 압력이 서서히 빠지는 것이 느껴진다. 머리칼을 서너 번 거칠게 쓸어 올린 10번은 이윽고 내게 시선을 떼고 등을 돌린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간다.








*








찰락, 찰락,



꿀꺽. S의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선 교육생이 고운 두 손을 꿈지럭 댔다. 드디어 세 장 째다... 마의 구간!



찰락.



...여, 여기가 꿈 속인가? 단 한 번도 넘어간 적 없었던 페이지가 차례 차례 넘겨진다. 매 장마다 팀장님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고 있다. 교육생의 눈이 반짝였다. 작전 팀장님께서... 내 과제물을 읽고 계신다.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은 이 상황에 대한 괴리감 때문일까, 설렘 때문일까?



찰락,



그게 뭐든 너무 짜릿해...!!!



그치만 팀장님은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다. 지금 혼자 들떠 있어봤자, 좋을 건 없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팀장님이 과제물을 내려 놓는 순간 욕을 퍼부을지, 칭찬의 말을 할지, 아니면 여느 때처럼 다시 해오라고 할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팀장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적어도 지금은 예전의 상황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그날 위대하신 개별 선배님을 뵙고 난 이후로 난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분께서 생각의 영역을 확장 해준 이후로 내 눈에 비친 것들 하나 하나가 달라 보였다. 분명 같은 문장인데도, 네 번이나 다시 푸는 과제인데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팀장님이 원하는 대답을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오롯한 나만의 생각에 집중했다. 비록 시간은 꽤 오래 걸렸지만 그동안 지루하거나 막막하지 않았다. 사실, 재밌었던 것 같다.


그 분은 매일 매일을 그렇게 사셨겠지?


"앉아서 기다려."

"아. 넵...!"


기다리라는 지시에 호다닥 몸을 움직여 교육실 책상 앞에 착석했다. 의자에 앉는 폼 마저 어설프다. 그 동선을 눈으로 쫓은 S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행동이 느린 것도 아닌데 마음에 안 든다.


수트의 웰트 포켓에서 만년필을 꺼낸 S는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한 글씨체가 담긴 종이에 필기를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그 전과는 전혀 다른 결의 답을 꺼내온 걸까. 한 가지 방식을 내게 설득, 아니 주입하기 위해 온갖 문장들을 가져왔던 구성 방식이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다. 문장만 다르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도 줄었다.


어쩐지 개별이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설마 개별이라도 만난 것인가. 그치만 써온 답안은 개별과는 다른 온전한 녀석의 생각 같다. 작전에 대한 대단한 지식이 없어야만 가능한 초짜의 생각들. 그리고 놈의 색깔이 드러나 있다. 이 과제물에 담긴 무수한 문제들 중에는 개별이 거쳐간 것도 있다. 주어진 정보는 같지만 활용 방식이 다른 것만 봐도 혼자 고민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뭐, 드디어 할 말이 생겼으니... 상관은 없으려나.


그동안은 건드릴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암담했다. 짜증나고 답답했다. 차라리 개별이 새끼처럼 노력 부족, 피드백 무시 같은 명백한 책임이 있다면 매라도 휘둘렀을텐데 얘는 결이 다르다.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랄까. 속된 말로 수준이 낮았다. 생각의 폭이 좁고 어딘가 꽉 막혀 있는 느낌.


그 길을 누가 틔여 준 것인지 내심 궁금했다. 스스로 자신의 수준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누구야."


대뜸 누구냐고 묻는 목소리에 22기가 교육실 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왔나...? 문 너머는 조용했고 불투명한 문에는 실루엣조차 없다.


"...예?"

"누가 알려줬냐고. 혼자 한 거 아니잖아."


아. 그게 누구냐고... 


'아아...' 어리벙벙한 감탄사에 S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척하면 척 알아들을 것이지, 그것도 모르겠으면 뭐가 누구냐고 물으면 될 것을 자꾸만 되묻고 뜸 들이는 것이 슬슬 거슬렸다. 존나 밥통 같다.


"그, 혼자 한 거..."

"난 아무 말도 안 해줬는데 혼자서 네 수준 자각하고 싹 다 고쳤다?"

"아..."

"짐승 소리 내지 말고 대답을 해."


S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섰다. 갑자기 훅 들이닥친 공포감에 쭈뼛, 경직되어 버린 22기가 눈을 굴렸다. 어떡하지... 화나신 건가? 내가, 답답하게 굴어서...?


"죄, 죄송..."

"죄송하다는 말 말고 대답을 하라고."

"아, ...그,"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내가 뭐 못 물을 걸 물었나? 아님 어려운 걸 물었나? 개별이 새끼는 뱉으면 쳐 맞을 말도 막 뱉어 댔는데 이 새끼는 내가 주먹도 안 들었는데 한 문장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 개별이처럼 패야 하나 싶다가도 이 상황 마저도 놈과는 별개였다. 그 새낀 작정하고 안 하는 거고, 이 새낀 못 한다. 겁주면 더 얼어 붙을 것이 뻔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21기에 개별, 아니 2번 선배님께... 조언을... 받기는 했습니다."

"네가 걔를 어떻게 알고 찾아 가."

"그건...,"


겨우 겨우 대답을 얻어 놓고 또 질문을 했다. 질문은 2초 남짓인데 대답은 더럽게도 오래 걸린다.


"작전팀이라고..."

"걔가 그래? 자기가 작전팀이라고?"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대화를 끝내고 싶어도 말을 똑바로 안 하는 걸 어찌 하랴. 주어 목적어, 중요한 정보는 다 빼놓고 한 마디에 한 정보만 겨우 겨우 겨우 뱉어내는데. 복장 터져 죽을 것 같다.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니면 뭐. 묻는 말에만 대답하지 말고 두 번 묻지 않게 대답을 좀,"


S의 거센 언행이 중간에 뚝 끊겼다. 눈을 마주친 순간 22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저렇게 얼어 붙는단 말인가. 개별이었으면 벌써 뺨을 서너 대를 때리고도 남았는데 주먹 한 번, 욕 한 번을 섞지 않고 다정하게 말하려 노력한 내게 저 표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야. 내가 너 잡아 먹어?"

"예?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콰앙-!


책상이 바닥을 나 뒹군다. 커다란 굉음에 어깨를 잔뜩 움츠린 교육생이 파르르 떨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엔 그렁 그렁 눈물마저 맺혀 있다. 이런 놈이 어째서 ND에 있단 말인가.


"네 구색 맞춰가며 대화 해야 돼?"

"아니, 아닙니다... 흐으..."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서려있는 것이 울기 일보 직전이다. 아무리 삼키려 노력해봤자 그 나약함은 결코 감출 수 없었다.


["넌 그 머저리가 짠 작전에 목숨 맡길 수 있냐?"]


옥상에서 엿 들었던 묵직한 그 한마디가 S의 귓가를 떠돌았다. 그땐 몰랐다. 그 머저리가, 개별과 10번을 만났을 줄은.


"물러 터진 새끼가 무슨 작전을 주도 하겠다고."


뾰족한 말로 가슴을 후벼 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육실을 나갔다. 훌쩍이는 소리가 저 너머로 들려온다. S가 주먹에 힘을 실었다. 당장이라도 쳐 들어가서 짓밟아버리고 싶었다. 내 눈빛 하나에 얼어 붙는 놈에게 내가 대체 무엇을 기대해야 한단 말인가.


내 뒤를 이을 만한 인재를 고르는 일을 가볍게 여겼다. 대충 아무나 주워 버린 내 잘못이다. 주도권은 우유부단한 놈이 잡으면 쉽게 방향성을 잃는다.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 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놈은 절대 목숨 걸고 일하는 곳에 오면 안 된다. 분명히 휘둘릴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고쳐 놓거나, 빠른 시일 내로 다른 놈을 구해야 한다.


도대체 누굴 구해야 한단 말인가.


["다들 능력 있으니까 팀장 자리에 있는 거잖아. 그리고 그 팀장들이 인정할 만큼 얘가 괜찮다면, 더더욱 작전팀이 옳아. 현장팀에만 있으면 얘 머리 쓸 데가 없고, 정보팀에만 있으면 얘 현장 요원으로 거의 못 뛰어. 의료팀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작전팀엘 와야 한다고. 그거 다 잘하는 애는 작전팀에 와야 그 재능들을 다 써 먹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개별인데. 그 놈이 제격인데.


["너도 알잖아. 너 존나 아까운 거. 현장팀, 정보팀, 의료팀 다 출세하기 힘들어. 솔직히 네가 교육생들 사이에서나 짱 먹는 거지 짬 있는 선배들 다 제칠 수 있을 것 같냐?"]


분명 그 놈도 알고 있다. 그 놈도 아쉬워 하고 있단 말이다. 


["작전 팀장님 제자로 들어가면 대놓고 밀어 주겠다는 거잖아. 그 좋은 기회를,"]


하물며 10번마저 제 목숨을 운운하며 작전팀을 강요하지 않았나. 


["씨발!!! 필요 없다고."]


"...하."


그러지 말고 진득하게 내 옆에 좀 붙어 있어주면, 그렇게 덧나나.






*





분명 어디서 맡아 본 냄새였는데...


10번은 며칠 전 옥상에서 언쟁한 이후 옥상 문 앞에서 맡은 향수 냄새를 회상했다. 그 날의 대화를 누군가 엿 들은 게 분명했다. 향이 흩어지지 않았다는 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었다. 


개별을 피해 다닌 지도 어느덧 일주일 째다. 현장 교육 땐 운 좋게도 같은 팀이 되지 않았고, 개인 훈련 시간에는 마주치지 않았다. 매일 함께 다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따로 행동하니 사람들도 이상하게 봤다.


"네 여친 어디 갔냐?"


개별과 저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걸 제일 먼저 눈치챈 사람은 현장 팀장님이었다. 동성애는 돼도, 사내 연애는 절대 안 된다며 어딘가 모순적인 강연을 펼치던 그는 막상 내가 개별과 따로 다니니 화해 하라며 매일 독촉한다. 둘이 붙어 있을 때의 시너지가 가장 좋다나, 뭐라나.


"여기 여자가 어딨습니까."


어쭈, 편해졌다 이거지. 이젠 나한테 귀찮은 말투까지 내보이고? 질문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우문서답하는 10번에 J가 헛웃음을 쳤다. 냅다 헤드락을 걸고 딱밤을 서너 대 갈기니 '악악' 신음하며 탭을 친다. 귀여운 놈. 


"뭐 때문에 싸웠는데. 걔가 바람 폈어?"


J에게 10번은 사촌 동생 같은 놈이었다. 상사와 부하 직원 혹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보다 더 친숙하다. 워낙 죽이 잘 맞기도 하고 10번이 J를 무척 따른다. 밤마다 찾아와서 이것 좀 알려 달라, 저것 좀 알려 달라 제 사무실 문을 두드렸었다.


"아, 그런 거 아닙니다."

"화해해.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개별과 친해진 이후로는 둘이 같이 찾아와서 저를 귀찮게 굴더니 얼마 전부터 혼자서만 내 방문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교육 때도 서로 모르는 척 하더니 밥도 따로 먹고 말이야.


"친구 아니고, 걔보다 제가 더 형 입니다."

"그래 그래~ 동생이랑 사이좋게 지내야지."


J는 어쩐지 씁쓸했다. 남한테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으나 둘은 자꾸만 눈길이 가서 말이다. 자주 투닥거리긴 해도 이렇게 까지 오래 질질 끈 적은 처음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J는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10번의 뺨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아."

"귀여운 쉐끼."

"...근데 왜 오신 겁니까?"


익숙치 않은 칭찬에 뒷목을 쓸던 10번이 J에게 물었다. 무려 팀장님께서 단순히 2번과 화해하라는 말이나 하려 이 야밤에 훈련장에 올 리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뭘 알려 달라 청탁하지도 않았다.


"아, 맞다." 





-





["정보 팀장님께서, ...저를요?"]


아니 그 양반은 왜 중요한 말을 늦게 하는 거야. 안 물었으면 어쩔 뻔 했냔 말이다. '정보 팀장님이 너 찾고 계셔.' 라는 천연한 말투에 잠시 벙쪄있던 10번은 부리나케 움직였다. 야밤에도 매 층마다 멈추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계단을 서너 칸 씩이나 껑충 껑충 뛰면서 말이다.


뛰면서도 이상했다. 뭔가 불길했다. 나는 현장 팀 소속인데 정보 팀장님이 나를 부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3급 이후로는 정보 팀장 얼굴을 마주친 것도 간간이 있던 일이지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일은 처음이었다.


...어?


끼익, 급 브레이크를 밟고 선 10번이 황급히 고개를 올렸다. 이 냄새는,


"어... 안녕하십니까...!"


작전 팀장님...?


비상 계단에서 맞닥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S였다. 틀림없이 옥상에서 맡았던 향과 같은 향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던 팀장님은 가만히 멈춰 서서 나를 내려다 보았다. 고요한 그 시선에 10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된다.


뚜벅, 뚜벅.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온다. 고개를 팍 숙인 10번의 귓가에 제 심장 소리가 가득 울렸다. 둘이서 대면하는 건 처음이다. 멀찍이서 구경했던 때보다 포스가 더 상당하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설마, 옥상에서의 그 대화를 들으셨으면 어쩌지? 내게 물으면, 난 뭐라고 하지? 내가 그때 무슨 말들을 했었지...?


터벅,


흡, 눈을 질끈 감았다.


터벅, 터벅, 터벅...


그리고 발소리는 다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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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기 10번 입니다!!"



우렁찬 음성에 개별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보니 10번이 단숨을 헥헥 내뱉으며 서 있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여기서 마주칠 거라는 건 예상치 못한 듯이 둘 다 놀란 표정이었다. 쟤가 왜 여기에...?



"어, 왔니?"



C의 목소리에 둘 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듀얼 모니터가 넉 대나 달린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서 눈알을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는 '잠시만.' 이라며 대기를 명령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개별도 그런 눈치였다. 10번은 얼 타는 것을 접어두고 개별의 옆에 섰다.



화면 빛에 팀장님의 안면이 밝아졌다 어두워질 동안 10번은 개별을 흘끔 바라보았다. 팔꿈치로 팔뚝을 툭 치니 저를 본다. '뭔 일이야?' 입을 오므렸다 폈더니 개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동안의 정 때문인지, 이 돌발 상황 때문인지 화해도 하지 않은 둘에게 어색한 기류는 흐르지 않았다.



"얘들아."

"예.", "예?"



탁, 소리와 함께 데스크 위에 있는 프린트기가 반응한다. C는 프린트기가 뽑아낸 종이를 정갈하게 정리하고 스테이플러로 집어 둘에게 건넸다. 미어캣 마냥 C의 동태를 쫓던 둘은 눈 앞에 내밀어진 종이를 받아 들었다. 얼떨떨한 10번과는 달리 개별은 초연했다. 



'O#2022009'



작전명 2022009. 개팀장한테서 매 맞아가며 외운 음어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쉬운 음어다. 개별은 손에 든 종이가 전략서라는 것을 단박에 파악했다. 일반인은 해독하기도 어려운 음어를 남발하고 있는데도 능숙하게 읽어 내린다. 작전 팀을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지만 술술 읽혔다. 이것이 주입식 교육의 효과인 것인가. 


반면에 10번은 까막눈이 논어를 읽는 것처럼 눈만 끔뻑였다. 흰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씬데... 이게 뭐야?



"너희 둘은 3주 뒤에 ND 현장 작전에 투입될 거야."



작전 투입? 종이에 코를 쳐 박을 기세였던 둘은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어 C를 바라보았다. 개별 역시 꽤나 놀란 눈치다. 우린 아직 교육생 신분이 아닌가.



"다른 작전이랑 이 작전이랑 기일이 겹쳐. 이런 경우가 자주 있긴 한데 이번엔 세 건이나 겹치거든."

"작전이 겹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개팀장이 셋이 아닌 이상 세 건이나 작전이 겹칠 일은 없다. 하루에 두 개가 겹치는 건 가끔 가다 있다고 들었지만. 개별은 꽤나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드디어 그 인간이 미친 건가.


"응. 하필 그 날이 최적의 기일이고, 이제 S랑 보스가 작전 나눠서 맡거든."


C는 입에 침 한 번 안 바르고 구라를 깠다. S가 보스와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구라가 아니지만, 기일이 세 개나 겹치는 건 구라였다. 그렇다고  '보스께서 개별이 너를 S와 화해시키기 위해 네 목숨을 담보로 걸었단다.' 라는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교육생에게 '이유 불문하고 그런 줄 알아라.' 통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둘러대는 거다. 작전에 교육생을 투입하는 데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원이 모자라. 다른 직원들은 메인에 배치해야 하는데, 투입 인원이 많다보니 새끼 임무를 처리해야 할 조직원이 없어. 그쪽에 넣을 바엔 메인에 넣는 게 더 효율적이고."



현장 경험이 없는 이 초짜들이 C가 거짓말 한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원래 이곳이 째라면 째는 법이고, 어차피 C는 이들에게 있어 신뢰가 높은 사람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 보아라. 개별도 10번도 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침을 꿀꺽 삼켜가며 경청하지 않는가.


Exi와 주종 관계에 있는 '은하' 라는 소기업 하나가 옆 섬나라의 조직과 교류한다는 첩보를 얻었다. 기업이 아닌 조직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Exi의 산하에서 벗어나 은하를 독립 기업으로 운영할 계획인 것이다. 스파이에 보고에 따라 밀회 날짜에 맞춰 소탕 작전을 세웠고,



개별과 10번이 히든 전력으로 쓰일 것이다.



"보스께선 1급 교육생 중에서 소규모 인원을 선발하는 걸로 결정하셨어. 나한테 심사 자격을 위임하셨고, 그래서 뽑은 애들이 너네야."



바다 건너 섬에서 이루어지는 작전이기에 결코 호락호락 할 리가 없다. 밀항 단계부터 난관이다. 밀항은 주로 새벽에 이루어지고, 운이 나빠 적 조직에게 들통나면 바다 위에서 싸워야 한다. 섬나라 조직은 특히나 적을 처단하는 방식이 매우 가학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가 없기에 더더욱 위험하다.



"내일부터 임무 수행 교육할 거야."



기일이 3주라면 훈련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보스 역시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단순히 밀회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개별이 S의 아래로 다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다만, 그 방식이 어떤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는 C도 확신할 수 없었다. S의 주도하는 작전에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개별이 작전 팀에 다시 들어갈 명분이 될 수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보스가 직접 지시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는 분이다.









*







왜 우리일까?


윗 기수 선배도 아닌, 우리가, 왜 투입 되는 거지? 아직도 그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물론 기수가 높은데 교육생 신분이면 그만큼 능력치에 있어서 딸리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우린 이제 겨우 1급이 된 교육생들이 아닌가.


우리의 임무는 은하 기업의 밀회가 이루어지는 섬에 먼저 도착해서 도청 장치를 심어 놓는 것이다. 밀회가 끝날 때까지 내용을 녹음하고 나면 후발대인 우리 조직원이 섬에 도착한다. 소탕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우리 조직원이 상대 조직과 전면으로 붙을 동안 저와 10번은 은하 기업의 주요 문서를 빼돌린 뒤 은신한다.


새끼 임무라더니 완전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이다.


10번과 따로 훈련을 받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 말은 즉슨 기일이 2주 남은 것이다. 그 사이 개별과 10번은 섬의 구조와 작전 내용을 외우고, 도청기와 비밀 문서에 대한 교육과, 몇 번 배를 어떻게 타고 어느 타이밍에 잠입할 지를 시뮬레이션 했다. 바닷배를 타고 울렁이는 파도 위에서 토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옥상에서의 사건은 잊은 듯이 훈련에만 집중했다. 그렇다고 관계가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도 둘은 대화 없이 서로를 공적인 파트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대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고강도 훈련을 마치고 숨을 고르던 개별이 손에 쥔 물병을 만지작거렸다. 어딘가 답답한 얼굴을 하던 그가 멀찍이서 벌컥벌컥 냉수를 들이키는 10번을 흘끗 바라보았다.


불편하다.


10번이 일방적으로 제게 애정을 쏟아 부었다고는 하지만, 저도 10번이 싫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한때 서로만 보면 기싸움을 벌였던 과거도 있고, 10번이 제게 몹쓸 짓을 한 전적은 있었어도 친해진 이후로는 항상 곁에서 챙겨줬다. 까칠하게 굴어도 진득하게 붙어왔으며, 제 일에 두 팔 걷고 나서기도 했다. 장담컨대 흑심 없는 순수한 애정이었다.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실패를 겪었지만, 왜 매번 이렇게 힘든 것인가. 맷집이 생긴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태연한 척 해봐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동안 사회화라도 된 것인가.


불편한 것은 10번도 마찬가지였다. 제 아무리 개별에게 실망을 했다 한들, 먼저 트리거를 건드린 건 나니까.


["견제하냐?"]


씨발,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내가 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동안은 싸우면 맨날 내가 먼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하며 화해를 시도 했지만 이번엔 절대 안 그럴 거다. 그래서 기를 쓰고 모르는 척을 하는데 저 놈도 모르는 척 한다. 나만 쟤를 피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쟤도 나를 피하고, 나만 쟤를 거리 두고 대하는 것이 아니라, 쟤도 나한테 거리를 둔다. 아니 여태껏 내가 먼저 다가갔으면, 쟤도 나한테 한 번은 다가와야 하는 거 아니냐? 


"......"


짜증스레 개별을 노려봤다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개별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냉수를 들이킨다.


뭐야 저 새끼...?


쟤 지금 나한테 눈 깐 거 맞지? 그 무시무시한 작전 팀장님 눈도 똑바로 바라보는 애가 내 눈을 피한 거야, 방금? 10번은 괴리감이 드는 개별의 행동 태세에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그가 홀린 듯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건 시그널이다. 쟤도 나한테 찔리는 게 있고, 나랑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는.


성큼 성큼 다가오는 발소리에 개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씨발, 눈을 마주칠 거라곤 나도 예상치 못했다.


"야."

"......"

"너 내 눈 피했지."


저 미친 눈썰미. 곧장 피했는데 그걸 또 읽었다. 개별은 저답지 않게 주저했다.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있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사람이 아쉬운 것도 처음이고, 상대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여지껏처럼 배째라는 듯이 뻔뻔히 굴기도 싫은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도 아쉬워 죽겠는데 저 놈이 정말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답지 않게 조급하다.


"개새끼야, 피했잖아."


성질 급한 새끼. 대답을 피하니 멱살을 잡아 올려 기어코 눈을 맞춘다. 개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눈에 맞대응 하듯 저도 바라봤지만 이윽고 눈을 다시 깔고 말았다. 내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자각한 거다.


"...미안."

"......"


개별의 멱살을 쥐고 있던 10번의 눈이 흔들렸다. 담판을 짓고자 한 건 맞지만 이렇게 바로 사과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표정을 살펴보니 빈 말은 또 아니다. 애초에 빈 말을 할 놈도 아니었다.


"그딴 말 해서 미안. 진심 아니고 잠깐 돌았어."

"왜 돌았는데."

"진심으로 모르겠냐?"


내내 눈을 피하던 새끼가, 지금 순간 만큼은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내가 왜 돌았는지, 정말로 몰라서 물어?'. 그 눈빛은 순수한 의문이 아닌 일종의 경고였다. 너도 네 잘못을 분명히 알고 있지 않냐는, 모른다면 나도 사과할 이유가 없다는 듯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0번이 옷깃을 놓아주자, 개별은 한껏 솟구친 옷 매무새를 고쳤다. 10번은 더 이상의 질책 없이 개별의 옆에 앉았다.


"첫 작전이 이게 맞냐?"


미안하다, 용서한다, 화해한다는 말도 없이 예전처럼 말을 붙인다. 선을 넘은 건 알지만, 그 날의 말에 대해 정정할 생각은 없나 보다.


"...그러게."


개별은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열 받은 건 맞아도 그때 10번이 제게 한 말들은 모조리 사실이었고, 굳이 사과 받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쩐지 불쾌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사이를 회복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왜 우리지."


하라는 대로 따르면서도 의심스럽기는 10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럴 만도 하다. 현장 팀에 스카우트되면서 만난 현장팀 선배들의 생생한 현장 썰을 익히 들어왔다. 아무리 소규모 기업을 소탕하는 작전이라 한들 타국의 조직과도 엮인 일인데다 바다 위를 건너야 한다는 건 결코 작은 스케일이 아니다. 이는 아무리 저들이 교육생이어도 아는 바였다. 물론 우리가 직접 적과 힘 겨루기를 하는 건 아니니 상대적으로 위험은 덜하지만... 아무리 위험이 덜하고, 전략을 조리 있게 구성한다 해도 작전에서 죽어 나가는 일은 부지기수가 아닌가. 동 직급이어도 현장팀의 보수가 가장 높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이 없대도 그렇지. 이렇게 중요하고 핵심적인 임무를 작전 경험도 없는 저들에게 맡기는 게 맞나?



"그래도 기대는 되네."



다들 내게 개별이, 별난 놈, 미친놈이라 하지만 정말 별종 중의 별종은 10번이다. 납득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 기대가 된다는 말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개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 역시도 이 판에 발 담구고 있는 한, 10번과 다를 게 없는 놈이지만 현장 투입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넌 왜 ND에 왔어? 너 정도면 국대 가뿐히 따먹고 세계적인 선수도 될 수 있잖아."


진심으로 궁금했다. 나야 인생이 법을 피하는 인생이고 양심 따윈 개나 줘버린 지 오래지만, 10번은 저와 다르지 않은가. 유단자라면 필시 부모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며, 저 정도 스펙과 실력자면 돈 벌 방법은 충분히 많다. 굳이 선과 악 중 악을 택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게 더 간지나서."


미친 새끼.


"목숨 걸고 하는 일이 간지나냐?"

"어. 난 진짜 싸우고 싶어. 심판 아래서 적당히 때리는 거 말고. 원시인들처럼 싸우는 거. 그게 더 재밌잖아?"

"싸이코야?"

"여기 나 같은 놈 많아. 현장 팀장님도 나랑 똑같거든?"



얘한테 인생은 게임 정도인 건가? 내 편이랑 붙어 먹고 상대를 개 박살 내는 게 재밌나. 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로 하기엔 몹시도 위험하고 무모한 선택이다. 솔직히 싸이코 같다. 아군이니 망정이지 적군이었으면 골머리 아팠을 새끼다.



"이번 작전 성공하면 혜택 주나?"

"정직원 채용 심사 가산점 준다고."

"돈은?"

"몰라."



이딴 대화나 하고 있다. 사람 죽이는 일에 이익이나 계산하고 있는 꼴이 속물 중에 속물 같다. 뭐, 사실이긴 하다만 순간 자기객관화가 돼서 나 자신한테 혐오감이 들었다. 그런다고 해서 이미 어그러진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이렇게 현타가 온다.



"넌?"

"나 뭐."

"넌 왜 ND 들어왔냐고."



10번의 눈빛이 가볍지 않다. 미소를 띄고 있지만 어딘가 진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개별은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에 잠시 침묵했다. 그동안 시덥지 않은 이야기는 많이 주고 받은 것 같은데 이 이야기는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그냥,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Exi? 아니면 ND?"

"처음엔 Exi."



나에 대한 이야기는 3번에게조차 늘어 놓지 않았는데. 어쩐지 10번에게는 대답을 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나에 대해서.



"근데 너 Exi 공채로 들어왔다던데."

"거절했다가 3년 뒤엔가 내가 지원했어."

"미친 그럼 고딩 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거라고? 영재원 제의도 아니고 Exi 제의를?"



그게 대단한 건가? Exi는 세계적인 기업이니 고딩도 인재라면 스카우트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너 뭐 됐냐? 영재고에서 전교 1등 뭐 이런 거?"

"고졸인데. 것도 검정고시."

"와 이 새끼 가방끈 나보다도 짧았네."



저의 학력에 배신이라도 당한 것 마냥 눈을 휘둥그레 뜬다.



"그럼 Exi가 널 어떻게 알고?"

"학교 자퇴하고 해커로 돈 벌었는데, 그때 뭐 흔적이라도 밟았나보지."



화이트 해커는 진입 장벽이 높고 그 당시엔 블랙 해커가 입지를 다지기에도 돈을 벌기에도 좋았으니까. 물론 지금이야 워낙 수사 방법이 다양해진 탓에 잘못 걸리면 나락 가겠지만 그 당시엔 그랬다. Exi가 포털 사이트 기업이니 내 초짜 해킹의 경로를 읽었을 것이고, 아마 그때 날 추적하지 않았을까.


["...별아"

"흐윽... 하,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게 네 태명이야."]


그치만 얼마 전 미국에 견습 간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정보 팀장님이 나의 태명을 알려주고, 내가 꼭 Exi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이후로 말이다. Exi가 내게 스카우트 제의를 건넨 것은 아마 나의 부모와 관련이 있을 거다. 그러나 그것까지 10번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부모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서기 전에 내가 추측했던 경로로 설명하는 수 밖에. 



"...너 부모님 없냐?"

"......"



패드립을 저렇게 대놓고 치네. 순간 기분이 팍 식는 느낌이 들었다. 저기 주어진 정보라면 누구나 의심할 수 있는 바다. 고등학교 자퇴,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경제 활동. 그게 블랙 해커 일이라면, 결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아닐 거란 건 아주 쉽게 도달할 수 있다.


고아란 사실이야 첫 니가 빠지기도 전에 받아들였다. 그걸 흠 잡아 저를 욕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소리들은 어금니가 빠진 후부터 내성이 생겨 아무렇지 않았다.



"어. 너도 없잖아."



근데 왜 난 지금, 기분이 상한 것일까.



"씨발, 있거든?"



열등감인 것인가. 나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10번도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당연하게 가지고 누리고 살았다는 것이 꼬운 것인가. 그런 가정에서 큰 주제에 여기에 기어 들어온 것이 한심한 이유가, 대체 뭘까.



"있는데 여기 온 거면 불효자 새끼 아냐?"

"그냥 기분 나쁘다고 말을 해. 왜 시비질이야."

"한심해서."



하?



10번은 난데 없이 스트라이크 훅을 날리는 개별에 인상을 그득 찌푸렸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보고 한심하다고 한 건가. 같은 처지에?



"적당히 해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개별에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법도 하다. 애초에 10번과 개별의 차이는 배운 놈과 못 배운 놈의 차이가 아니었는가. 10번의 테크닉은 타고난 재능과 덧붙여 부모가 뒷받침 해준 덕이 크다. 그런 놈이 부모를 놓고 재미를 보려고 여길 왔다니. 저는 부모 하나 찾겠다고 여길 왔는데.



"내가 너라면 여긴 안 와."

"야."

"복에 겨운 새끼."



낮은 경고에도 꿈쩍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그동안의 불쾌감이 한 번에 해소된 느낌이다. 


["넌 그 머저리가 짠 작전에 목숨 맡길 수 있냐?"

"넌 씨발 목숨 맡기는 게 견제냐?"]


나에게서 재능이 아깝거니 제 목숨이 어쨌거니 훈수질을 하더니, 결국 지 목숨을 건 놈은 본인이 아닌가. 그것을 내 탓으로 넘기며 가스라이팅 하다니. 이 별 볼 일 없는 새끼한테 잠시나마 미안함을 느꼈던 내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다. 쟤가 한 말이 신경 쓰여 작전 팀에 다시 돌아 갈 생각까지 했었다. 수 많은 팀원들에게 죄를 지은 기분에 잠까지 이루지 못 했단 말이다.


내가 그럴 이유가 어디 있나? 재미 보겠다고 들어온 새끼의 목숨을 위해 내가 작전 팀에 들어가는 노고를 왜 기울여야 한단 말인가. 설령 그들이 멍청한 작전에 휘말려 죽는다 한들 그게 왜 내 책임이 된단 말인가? 



개별은 잔뜩 성이 나 있는 10번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미련 없다. 내 앞가림이나 신경 쓸 것이다. 개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한심한 새ㄲ...




"집에 빚이 육십 억이다, 개새끼야!!!"




멈칫,



"......"




좆됐다. 그는 효자였다.


















-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편백 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독자 여러분들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걱정거리만 한아름 안겨드리고 이렇게 한참 뒤에 찾아 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먼저, 저는 그동안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정신도 몸도 회복된 상태입니다. 제게 닥쳤던 상황은 잘 풀려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믿고 기다려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21편은 6월에 써 놓았던 걸 모조리 지우고 새로 썼습니다. 본래는 이전에 쓴 글을 수정하여 게시하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수정이 더 힘들더라구요. 엉망인 문장에 휘둘려 머리가 굳어버려서 아예 백지부터 새로 썼습니다. 잘한 선택인 것 같아요. 물론 내용은 같고 여전히 필력은 모자라지만 이전 글보다는 확실히 나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현생을 포함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참 많았는데 종종 울리는 포스타입 알림이 제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절대 멈추지 않겠습니다.

모든 독자님들! 행복한 하루 되세요.

트위터: @PB202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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