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 클리셰 12


12. 소원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먼저, 내가 왜 놀랐는지부터. 블라인드 어플 속 익명으로 올라온 글을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 머릿속에서 그려낸 막장드라마 속 전정국 팀장은 저 글보다 더하면 더 했지, 온전한 캐릭터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게시글 때문에 심장이 뛰는 건 아니다. 그럼 왜? 나 지금 왜 이렇게 손발이 떨리는 거지. 이 사람이 누굴 죽였든, 외계인이든 상관없다는 마음도 여전히 확고한데, 근데 왜….

 

[어딥니까, 출근했는데 안 보이니까 허전하네.] 09:01
[나 또 느끼했나.] 09:01

 

연달아 울리는 메시지에 화들짝 놀라 확인하니 전정국 팀장에게서 온 평소와 같은 문자다. 아직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을 모르는 듯한 문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래, 그가 알면 안 돼. 어차피 어플따위 하지 않을 성격이니 그만 모르면 된다. 대놓고 전정국 팀장에게 블라인드 어플에 대해 말할 또라이도 없을 테고 그만 모르면….

 

엄마가 챙겨준 반찬을 대충 정리하고 탕비실을 나와 중회의실로 뛰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거야. 평소랑 똑같이.

 

“팀장님!”

 

문을 들어서자마자 전정국 팀장을 불렀다. 평소보다 큰 내 목소리에 모든 직원의 눈이 나를 향한다.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막상 부르곤 할 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 생각해. 어, 그러니까….

 

“그, 그! R&D실이요! 레시피 때문에…. 급히 말씀드릴게….”

 

정 대리님이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본다. ‘말하게?’ 입 모양으로 묻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죠.”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전정국 팀장이 나를 앞질러 나간다. 익숙해진 그의 향기에 왈칵 눈물이 고인다. 괜찮아. 나는 괜찮다. R&D실로 향하는 내내 속으로 되새겼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괜찮다. 다만, 그가 놀라진 않을지, 자신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내가 도망가면 어쩌나 걱정했던 그가 자꾸 눈에 밟혀서, 그래서 그렇다.

 

R&D실에 들어간 그가 테이블에 앉는다. 당연히 레시피를 논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 론칭을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우리 손을 떠난 일이었다. 나름 장난스럽게 웃으며 마주하고 앉았다. 부디 내 미소가 어색하지 않길 바랐다.

 

“팀장님 보고 싶어서 불렀어요.”
“근무 태만입니까?”
“네. 팀장님 오전에 바빠요?”
“아뇨, 오후에 매장 가기 전엔 별로. 오늘은 좀 한가하네요.”
“그럼 나랑 여기서 좀 놀아요. 나 일하기 싫어서요.”

 

완전히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 눈앞에 없는 게 불안하다. 혹시라도 핸드폰으로 무슨 연락을 받지 않을까, 그래서 그 글을 보게 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한다. 어리석게도 잘만 하면 그가 이 일을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일? 무슨 일이요? 전혀요? 없는데요?”
“….”
“진짜 없는데. 진짜예요. 진짜.”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나는 썩 의지가 되는 상사가 아닌가 봅니다.”

 

전에 이경식 차장의 무리한 접대에 헛구역질이 나와 꽤 고생했을 때, 그때도 전정국 팀장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내가 아닌 그가 내게 의지하면 좋겠다. 이 비밀투성이의 사람이 나에게서만큼은 막장 드라마의 클리셰로부터 자유롭기를. 부디 겁먹지 말기를. 나는 전정국 팀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를 좋아하니까. 내가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팀장님, 우리 오늘 끝나고 뭐 할까요? 칼퇴 가능해요? 팀원들이랑 양평 본점 가야 하죠? 빨리 끝내고 바로 퇴근하면 안 되나? 나 우리 주말이 너무 기대된다. 그쵸? 뭐 해요? 네?”

“하고 싶은 거 있습니까?”

“영화 볼까요? 야식도 시키고 토요일엔 쇼핑가요. 나 코트 사야겠어. 일요일엔 아쿠아리움 갈래요? 물고기 좋아해요? 어때요?”

 

그가 잠시라도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게 아주 바쁘게 보낼 작정이다. 온통 나에게 정신이 팔릴 수 있게. 계속해서 조잘대며 그와 어떤 주말을 보낼지 얘기했다. 전정국 팀장은 나를 빤히 보다 슬며시 웃고는 내 손을 주무른다. 론칭을 하고 쓸모가 없어져 버린 제품연구실은 CCTV도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업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로 오전 내내 시간을 보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정국 팀장의 핸드폰이 울리기만 해도 몸이 들썩일 정도로 놀랐지만, 다행히 업무적인 연락이 전부다. 그는 오늘따라 그렇게 일이 하기 싫냐며 타박하면서도 이런 모습이 싫진 않은지 허공에 떠도는 나의 수다를 모두 받아준다.

 

“팀장님, 오후엔 정 대리님이랑 아라씨랑 같이 본점에만 가면 되는 거죠? 가는 길에 회사 근처 매장들도 돌아볼까요?”
“퇴근하고 데이트가 있어서 그건 곤란합니다. 일찍 끝낼 거예요.”
“오. 업무 태만.”
“우리 둘 다 업무 태만으로 시말서 쓰죠. 퇴근하고, 우리 집에서.”
“진짜 미친 듯한 느끼함이다. 20대 맞아요? 웩.”

 

토하는 시늉을 하며 냉장고에 있는 탄산수를 꺼내 벌컥 마셨다. 모든 걸 단절시키고 둘만 있으니 걱정도 줄어든다.

 

각종 재료로 가득 차 있던 냉장고는 탄산수와 물 몇 병이 전부다. 다음 달 CN 푸드빌의 자회사로 출범한 커피연구소가 한 층 사무실을 전부 쓰게 되는 바람에 중회의실이며 R&D실에 있는 모든 짐을 옮기는 데 한창이다. 텅 빈 냉장고가 아쉬웠다. 여기서 우린 첫키스를 했고 간지러웠던 기억이 많은데.

 

“…뭐에요.”

 

별안간 뒤에서 안아오는 전정국 팀장이 목덜미며 귓불에 짧게 입을 맞춘다. 급히 냉장고 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려고 해도 꽉 안아오는 팔에 갇혔다.

 

“박지민씨.”
“네.”

진지하게 불리는 내 이름에 또 놀란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심장이 저 밑으로 떨어지는 건지….

“고마워요.”
“뭐가요, 갑자기.”
“나랑 사귀어 줘서.”
“….”
“내가 뭐라고, 그쵸.”

 

‘내가 뭐라고.’ 그래. 당신이 뭐라고, 당신 도대체 뭔데. 어디서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데. 겸손인지 뭔지 모를 말에 지금이 기회인가 싶으면서도 나는 그의 걱정이 앞선다. 진지하게 받아칠까, 장난스레 넘길까 고민한다.

 

“그러니까. 박지민이랑 사귀는 걸 영광으로 아시라구요.”
“네.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행복. 지난번 물었던 네 글자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전정국 팀장의 입에서 행복하다는 소리가 쉽게 나온다. 나는 그거면 됐다.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

 

 

 

“아따, 우리 성공하긴 했어.”

 

커피 연구소 양평 본점에 방문하자마자 우릴 반긴 건 끝없이 늘어선 손님들이었다. 주차장이 꽉 차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장으로 왔더니 비어있는 빵 진열대가 새로 나온 빵으로 채워지고 입맛대로 커피를 제조할 수 있는 조리대는 각종 시럽과 우유를 섞는 사람들과 지저분해질 틈 없이 청소하는 직원들로 분주하다.

 

정희수 대표의 업체에서 관리하는 홈페이지와 SNS로 익히 봐 인기를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성공을 피부로 실감한다.

 

사원증을 매고 우르르 들어온 우리를 발견한 본점 헤드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피곤해 보이는 기색에도 웃는 낯이라 안심이 됐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매장 상황은 어떻습니까?”
“매일 매출 갱신입니다.”
“이슈될 만한 사항은 없습니까?”
“네. 고객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습니다.”
“고객 말고, 직원이요.”
“아, 직원도 인력을 충분히 배치해 주셔서 충분합니다.”
“휴게시간 보장하시고 식사도 제대로 제공되죠? 직원의 컨디션이 매장의 컨디션입니다.”

 

전정국 팀장의 전략 중 가장 반대에 많이 부딪혔던 사항이었다.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직원 복지. 식사 메뉴는 물론 휴게시간과 쉴 수 있는 공간을 호텔 수준으로 설계하여 비용 절감할 수 있는 부분에 안일한 것 같다는 임원진들의 공격이 있었다. 전정국 팀장은 수준급의 근무환경이 보장되어야 그들도 애사심에 비롯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업계 최고 수준의 복지를 지향했다.

 

그의 전략은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SNS엔 맛과 더불어 아무리 북적여도 청결한 매장과 친절한 직원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도 끊이질 않았다. 그는 언제나 ‘인적 자원’에 대한 중요성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내셨어요?”

양평점의 유일한 여자 매니저 주은씨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아무래도 본점과 본사이다 보니 소통할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늘 친근했던 사람이다. 또래라 대하기도 쉬웠고. 그리고 무엇보다 낯가림이 없었다. 본사 직원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앉고는 앞에 놓인 빵을 손으로 떼어 먹는다. 털털하고 밝은 사람이다.

 

“지민씨, 오랜만이에요.”
“주은 매니저님. 잘 지냈어요?”

 

옆에 앉아 말을 건네는 주은씨에게 안부를 물으니 내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 마신다.

 

“출퇴근 힘들어서 양평으로 이사해요.”
“아 결국 하는구나. 양평 어디요? 카페 근처에요?”
“네. 이제 서울 생활도 얼마 안 남았지 뭐예요.”
“그러게요. 그래도 출퇴근 편해져서 다행이겠어요.”
“그쵸 뭐. 저 이제 서울살이도 끝인데 양평 오기 전에 밥 한 끼 해요.”


자연스레 이어지는 식사 제안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웃기고. 근데 우리가 밥을 먹을 정도의 사이었나?


“뭐 이렇게 반응이 떨떠름해요?”
“네? 아 좋아요. 언제 본사 오시면 연락주세요.”
“본사에서 말고요. 밖에서요.”
“아? 네? 네. 그래요.”

 

어색한 반응에 호탕하게 웃은 주은씨가 할 얘기가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뭐야, 나한테 밥 먹자고 말하러 온 거야? 이렇게 공개적으로?

 

“와따, 주은씨 화끈하고 만두 인기 있네.”


정 대리님이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러게요. 지금 데이트 신청한 거잖아요.”

 

아라씨도 덩달아 신나선 정 대리님의 말을 거든다. 데이트? 데이트 신청인가…?

 

“하하, 데이트는요, 저랑 동갑이어서 그래요. 또래니까요.”
“나랑은 한 살 차인데 또래 아니냐, 아라씨랑도 또랜데.”
“맞아요, 딱 봐도 관심있는 거다. 론칭 날에도 지민씨한테만 명함 준 거 같은데. 뭐야 뭐야, 대박.”
“팀장님 이거 데이트 신청 맞죠?”

 

눈치 없는 정 대리님이 전정국 팀장에게 묻는다.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다. 그도 질투란 걸 하나?

 

“네 뭐. 맞는 것 같습니다.”

 

잔뜩 굳은 얼굴로 대답하는 그가 웃겨 픽-하고 웃었다. 이따 삐진 거 풀어주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은데, 나쁘지 않다. 이런 기분. 나도 정희수 대표에게 질투했던 적이 있으니 그를 조금 골려주고 싶기도 하다.

 

“박만두 들었지? 오, 데이트 신청받았어. 오-”

 

정 대리님과 아라씨가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민망하게 웃어보이는 게 다였다. 그 뒤로도 주은 매니저님은 몇 번이고 우리 테이블에 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자연스레 내 팔을 치며 웃기도 하고 어깨를 부딪쳐 오기도 했다.

 

“그만 가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건 전정국 팀장이었다. 입꼬리는 애써 올려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 이상한 얼굴로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난다. 재잘거리며 얘기를 이어가던 아라씨와 정 대리님이 시계와 전정국 팀장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다른 매장도 가보시게요, 오늘?”
“본사에서 확인할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쵸 박지민씨?”
“예? 아, 그런 것 같습니다.”
“가죠. 정 대리님하고 아라씨는 더 있다 오셔도 됩니다. 여기서 바로 퇴근하시죠.”

 

전정국 팀장의 말에 정호석 대리는 나에게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우리 데이트하러 가는 건데. 내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나자 놓치지 않고 주은 매니저도 일어난다.

 

“팀장님 안녕히 가세요. 지민씨, 밥. 알죠?”

 

공영주차장까지 따라올 기세일 그녀에게 전정국 팀장이 매장에 매니저가 없어도 되냐고 눈치를 줘서 겨우 들여보냈다. 오 이 기분 진짜 나쁘지 않아. 좀 우월감에 도취 된다.

 

“아니, 무슨 따로 밥을 먹자고. 참,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주은 매니저님처럼 적극적인 사람은 또 처음이네요. 이놈의 인기.”

 

차에 타자마자 벨트도 채우기 전에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키득거리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분명 나보다 한술 더 뜨는 그이니 또 나를 놀리려나 싶은데 어라, 진짜 표정이 좋지 않다. 뭐야 삐진 거야?

 

“팀원들 다 있는데 밥 먹자고 제안하는 건 뭔지.”

 

혼잣말인 듯 입을 삐죽이며 말하는 그를 놀리고 싶다.

 

“와, 용기 있어. 신여성.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멋져요.”
“전에 만난 여자친구도 용기 있고 진취적인 스타일이었습니까?”
“에? 슬지 누나요? 헙.”

 

이런, 나도 모르게 이름을 말해버렸다. 슬지 누나. 입 밖으로 정말 오랜만에 꺼내 보는 이름. 잘 지내나. 결혼하는 거 같던데.

 

“네. 영화관 커플석에도 같이 앉아 본 슬지 누나는 진취적인 스타일?”
“저 팀장님이 첫 연애인데 무슨 말씀이시죠?”

 

뻔한 거짓말을 하며 히죽 웃어 보였다. 주차장을 미끄러지는 차가 속도를 높여 도심으로 향한다.

 

“나는 박지민씨 친구인 김태형한테도 질투하고 이주은 매니저한테도 질투합니다. 참고하세요.”
“남녀를 막론하네요. 이놈의 인기.”
“이주은 매니저가 조금 더 걱정되는 바고요.”

 

태형이는 자주 볼 수라도 있다지만 이주은 매니저는 왜? 앞으론 더더욱 만날 일 없는 사람인데.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창밖을 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귀여워. 질투하는 전정국 팀장은 귀엽다.

 

“이주은 매니저가 박지민씨 진짜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래 보여요? 저도 느꼈어요.”
“네. 박지민씨가 저 좋아하는 것 만큼요.”
“그럼 큰일이다. 엄청 사랑하는 거잖아요. 주의시키겠습니다!”

 

크게 대답하곤 ‘주은 매니저 안 되겠네. 내가 팀장님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라면 나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거야? 대박이네.’ 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팔불출처럼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해가며 조잘대니 그가 끅끅 웃는다.

 

“박지민씨 왜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합니까.”
“아휴 팀장님 나한테 헤어나오질 못하네. 미쳐버려.”

 

어처구니없는 내 말에 삐진 게 풀린 듯 크게 웃는 그의 손을 괜히 꼬집었다. 그가 웃어서 좋다. 오늘 아침의 글 따위는 잊은 듯 나도 안심했다. 불쑥 차오르는 걱정의 감정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옆에서 눈을 접어가며 웃는 스물일곱의 이 사람을 많이 웃게 해줘야지.

 

 

*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그가 잠시 한눈을 팔 때면 블라인드 어플에 들어가 그 글을 굳이 확인했다. 지금도, 그가 샤워하러 들어간 걸 확인 하자마자 앱을 실행시켰다. 조회 수는 얼마나 되는지, 댓글은 어떤 것들이 달렸는지 하는 것들. 벌써 이천 명이 넘는 사람이 그 글을 클릭했다. 달리는 댓글에는 전정국 팀장의 실명은 없었지만 다들 누구인진 충분히 아는 눈치였다. 조롱과 비꼼이 가득한 댓글 창을 넋 놓고 봤다. 그가 아직 이 글을 못 본 게 다행인 게 맞겠지? 시간이 지나면 관심도 사그라들 테니 그전까지 꼭 모르게 하고 싶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봅니까?”
“깜짝아!”

 

핸드폰 화면을 숨기고 어색하게 웃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터는 그가 볼사탕을 만들며 나를 쳐다본다.

 

“왜 숨기지?”
“제가요? 뭘요?”
“….”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보는 눈초리에 침을 꼴깍 삼켰다.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둘러대지….

 

“박지민씨 핸드폰 혹시….”
“…….”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혹시…? 혹시 뭐…?

 

“이주은 매니저 연락 온 겁니까?”
“그건 비밀이에요. 앞으로 긴장 좀 하세요.”


휴,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머리를 말리곤 내 옆에 벌러덩 누웠다. 협탁에 놓인 그의 핸드폰이 여러 번 울린다.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번에도 다행히 업무적인 연락이었다. 주말 내내 가슴을 졸일 순 없는 노릇이니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가 전화를 끊길 기다리다 그대로 핸드폰을 낚아챘다.

 

“팀장님, 주말에 중요한 연락 올 데 있어요?”
“글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우리 핸드폰 디톡스해요. 그거 뭔지 알죠. 요즘 세대들은 하도 핸드폰만 가지고 놀아서 가끔씩 이렇게 스마트폰과는 단절된 생활을 해야 한다고요. 나도, 팀장님도 핸드폰 꺼두기. 오케이?”
“나는 핸드폰 잘 안 해요. 박지민씨가 맨날 영상 보면서 킬킬대던데.”
“내가 언제 또 킬킬댔다고! 무튼 이번 주말은 온전히 우리 둘에게 집중하기로. 콜?”


막무가내로 그와 나의 핸드폰 전원을 끄곤 협탁 서랍에 넣었다. 내 행동을 유심히 보던 그가 다시 닫힌 서랍을 연다.


“벌써부터 못 참고 꺼내면 어떡해요. 의지박약이에요?”
“핸드폰 말고, 온전히 박지민씨한테 집중하려고요.”

 

그가 핸드폰 대신 꺼내 내 눈앞에 흔들어 보인 건 콘돔과 러브젤이다. 짓궂게 웃는 그가 ‘온전히 집중. 콜?’ 하며 내 위로 몸을 겹친다. 그래, 이번 주말은 이렇게 넘어갈 수 있겠다.

 

 

*

 

 

나의 바람대로 무난하게 시간이 흘렀다. 우린 끝내주는 섹스를 했고, 엄마가 챙겨준 반찬에 밥도 배불리 먹었으며 설거지를 하다 다시 섹스하고 영화를 보다 소파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토요일엔 느지막이 일어나자마자 백화점엘 가서 전에 사지 못한 코트를 샀고, 뚝섬에 가 차가운 칼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탔다. 손이 벌게질 정도로 매서운 추위에 콧물을 훌쩍이며 라면을 사 먹고 집에 와선 따듯한 물을 받은 욕조에 몸을 녹이며 우린 또 몸을 섞었다.

그보다 내가 더 몸이 달은 사람처럼 굴었다. 한시도 떨어지면 안 되는 사람처럼.

 

전정국 팀장은 나의 행동을 빤히 보다가도 내 행동에 모든 걸 맞췄다. 입술을 내밀면 키스를 해오고 손을 뻗으면 나를 안아 들었다.

 

불안했다. 탁 터놓고 보면 별일이 아닌 걸까 싶다가도 그 빌어먹을 글 밑에 달린 수많은 댓글과 탕비실에서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나도 이런데, 당사자인 본인은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는 아버지를 둔, 낙하산 인사.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거머쥔 그는 고작 스물일곱인데. 이제야 조금씩 삶에 대한 행복을 알아가는 중인데.

 

그가 감내해야 할 아픔에 왜 내가 나서서 오지랖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그냥 어느 순간 전정국은 내게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좀 쉴까요. 박지민씨 감기 걸린 거 같은데.”
“아뇨, 저 괜찮아요. 우리 오늘은 아쿠아리움 갈래요?”
“…진짜 가고 싶어요?”
“네. 갔다가 VR 게임하러 가요. 콜?”

 

찬 공기를 맞으며 자전거를 탄 여파로 감기 기운이 있었지만, 집에 있는 것보단 정신없이 바쁜 게 나았다. 또다시 나를 빤한 눈으로 쳐다본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옷을 꺼내입는다. 나는 데이트에 들뜬 사람 행세를 하며 집을 나섰다. 계속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유리 안에서 놀고 있는 펭귄을 구경하다 결국 얼굴에 열이 올라 다시 집으로 왔다. 옷을 덥게 입어서 그렇다고 둘러대도 내 이마를 짚어본 전정국 팀장이 팔을 잡아끌었다.

 

“나 진짜 괜찮은데, 팀장님 VR 게임 안 하고 싶어요?”
“….”
“그럼 집에 가서 마블 시리즈 볼래요? 아, 우리 먹을 거 있나? 장 보고 들어갈까요? 아님 뭐라도 사서….”
“박지민씨.”
“네?”
“주말 내내 이 정도 바빴으면 된 거 아닙니까.”
“네? 뭐가요?”
“충분히 정신없이 보낸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가 안 좋다. 내가 왜 이러는지 말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지만 방법은 없다. 근데 왜 화났지? 내가 아파서?

 

말없이 차를 몰던 그가 이따금 한숨을 쉰다.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핸드폰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쁘게 다녔다. 생각하거나 진지한 대화가 나올 공백 없이 분초를 다투며 그와 연애했다. 나로서는 최선이었다.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왜 기분이 상했는질 모르니 사과를 건넬 수도 없었다.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둔 그가 나를 안다시피 들어 욕실로 데려갔다. 샤워를 마치고 식탁 위에 있는 약을 먹으니 졸음이 몰려온다. 침대에 누워 그가 씻는 걸 기다리다 눈을 감았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둠에 시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돌리니 전정국 팀장이 곤히 잠들어있다. 아쿠아리움에 다녀온 뒤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감기에 걸린 나를 걱정하기에 앞서 화가 나 보이던 그가 이상하다.

 

눈만 끔뻑거리다 조심히 협탁 서랍을 열어 핸드폰을 켰다. 밝기를 최대한 줄이고 빠르게 어플에 들어가 게시글을 확인했다. 혹시 지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무색하게 몇천 회의 조회 수와 백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악플에 가까운 글들은 읽다 핸드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뜨니 전정국 팀장이 그대로 나를 안아온다. 어, 화 풀렸나. 괜히 어리광을 부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오래 자서 몸이 개운한데 ‘졸려요.’ 하는 의미 없는 말도 덧붙였다.

 

“열 내렸다.”
“팀장님 덕분에요.”
“아프지 마요.”
“어젠 나 아파서 화 난 거예요?”
“뭐, 겸사겸사.”

 

내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일어나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 나도 몸을 일으켰다. 협탁 서랍을 열어 핸드폰을 챙긴 그가 ‘디톡스 끝?’ 이라며 내게 묻는다. 그의 핸드폰 전원이 켜지는 게 무섭다. 굳이 ‘전원은 내가 켤래요.’라고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며 그의 핸드폰을 봤다.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울리는 알림창은 다행히 별거 없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에게 건네자 또 나를 빤히 바라본 그가 작게 웃으며 가방 안에 핸드폰을 쏙 넣었다.

 

오늘로 2020년이 딱 4일 남았다. 이번 주엔 종무식 외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1월 중순에 인사이동이 있기 전까진 그간의 자료를 정리하거나 론칭한 매장을 방문해 상태를 점검하는 것 외엔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마트에 시판 믹스 커피가 깔리고 바빠진 이경식 차장과 이종필 대리를 제외하곤 여유로운 연말이었다.

 

모든 팀원의 관심사는 결국 전정국 팀장의 거취였다. 본인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내게도 말을 아끼는 모습에 굳이 묻지 않았다. 어련히 알게 될 테니까.

 

이럴수록 마음이 급해지는 건 이경식 차장이었다. 어느 줄에 붙어야 본인이 위태롭지 않을지만 계산하는 그는 티 나게 전정국 팀장에게 아첨 떨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디선가 커피 연구소의 대표이사 자리는 그가 유력하다는 걸 들은 모양이다.

 

나는 블라인드에 글을 작성한 사람이 이 차장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늘 사무실에서 떠들어대던 내용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으니까. 앞과 뒤가 다른 이경식 차장을 믿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억울하게도 애태우는 건 나뿐이었다. 아직 블라인드 글의 존재를 모르는 전정국 팀장은 본인에 대한 무슨 소문이 도는지도 모르는 채 회사를 활보하고, 사람들의 뒤바뀐 시선은 나만 알았다.

 

우리 팀 사람들이야 몇 개월 동안 전정국 팀장의 수고를 직접 봤으니 다를 게 없었지만, 그 글을 믿는 수많은 타 부서의 직원들은 화장실, 흡연 구역, 탕비실 할 것 없이 그를 씹어대기 바빴다. 무료한 회사 생활에 쓸만한 안줏거리가 생긴 셈이다.

 

[금일 종무식 후 TF팀 마지막 회식이 있습니다. 장소 : 이도 일식]

 

최 전무의 비서에게서 온 한 통의 메시지에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또 당일 통보야? 그것도 12월 31일에? 너무한 거 아냐?”

 

정 대리님의 입꼬리가 한껏 내려갔다. 무슨 수작인진 몰라도 일방적이고 무례한 통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경식 차장은 어디론가 전화하며 회의실을 나선다. ‘예, 전무님. 덕분에 연말이 의미있어졌습니다.’하며 문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이경식 차장의 목소리에 정 대리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작스러운 회식에 어떤 꿍꿍이를 감지한 건지 누구보다 빠른 이경식 차장의 태세 전환이었다.

 

일찌감치 퇴근을 마치고 다들 무거운 얼굴로 가방을 챙겨들었다. 오늘은 또 몇시에 마치려나. 설마 새해 카운트다운을 회사 사람들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연말의 들뜸도 없는 모습이다.

 

“박지민씨는 내 차로 이동합시다. 본점 마케팅 관련, 할 얘기가 있어요.”

 

또 없는 일을 만들어 낸 그가 눈을 찡긋해 보인다.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회의실을 나선다. 다들 죽상인 회식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그 혼자다. 이럴 때 보면 여간 눈치 없는 게 아니다.

 

 

*

 

 

“팀장님, 사람들 다 가기 싫어하는데 왜 혼자 좋아해요.”

 

회식 장소로 이동하는 차의 속도가 느렸다. 일부러 막히는 길만 선택해서 운전하는 그가 내 손을 꽉 잡는다.

 

“그냥. 박지민씨랑 카운트다운 할 수 있어서.”

 

매년 가족들과 연기대상을 보며 1월 1일을 맞이하는 게 익숙했던 나는 오늘도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전정국 팀장이 집에서 혼자 보낼 거라는 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팀장님 내년엔 목표 뭐예요.”
“불어 배우기?”
“와 노잼.”
“박지민씨는요, 새해 소원, 목표 그런 거 빌어요?”
“당연하죠. 보신각 종소리 들으면서 매년 빌었는데.”
“오늘은 어떤 소원입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그가 믿지도 않을 것 같고 스스로도 오글거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왠지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유치한 생각도 들었고. 사랑이 이런 건가 보다. 되게 말도 안 되면서 감성적이고 어린 애들 장난 같은 거.

 

“아직 못 정했어요. 정해지면 말해줄게요.”

 

2021년엔 전정국 팀장이 오롯이 행복해지는 것. 누가 봐도 유치하고 촌스러운 이 소원을 그에게 말하기엔 쑥스럽다.

 

 

*

 

 

뜬금없는 연말 회식에 이경식 차장은 무슨 낌새를 챈 건지 최 전무의 옆에 꼭 붙어 룸으로 들어왔다. 그래, 저 정도 열정이면 인정이다. 이젠 그의 정치질에도 이골이 났다.

 

내일이 휴일이니 마음 놓고 마시자는 최 전무의 말에 팀원들이 억지로 웃으며 잔을 높이 들었다. 직속 상사도 아니면서 최 전무, 박 전무 돌아가며 우리 팀에 기웃거리는 걸 보니 둘 다 대표이사 자리를 두고 각축을 벌이는 건 맞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새파랗게 어린 전정국 팀장이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그들의 심기가 불편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정국 팀장에게 수고했다며 술을 권하는 최 전무의 손이 빨랐다. 술을 잘 못 하는 그가 걱정돼 몇 번이고 눈치를 살폈지만 막내인 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전 팀장이, 수고가 많았지, 그래. 그래서 뭐 어디 해외 유학도 다녀왔나?”

 

자연스럽게 그의 과거를 묻는 말투엔 의도가 다분했다. 굳이 오늘 그를 불러 되도않는 명목으로 회식을 주재하며 술을 먹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얼마 뒤 있을 인사이동을 대비해 뭐라도 알고 싶은 거겠지.

 

“아뇨, 교환학생 말고는 해외에서 공부하진 않았습니다.”
“전 팀장 정도면 부모님이 팍팍 밀어주실 만한데, 왜 해외로 안 가고?”
“한국에서도 충분했습니다.”
“부모님이 기뻐하시겠어. 아들이 이렇게 잘 크고.”

 

계속되는 부모님에 관한 질문에 사람들이 일제히 말을 줄였다. 다들 알고있는 최근의 이슈에 아무것도 모르는 건 전정국 팀장 하나뿐이다.

 

“저도 큰 아들놈이 전 팀장님처럼만 자라준다면 원이 없겠습니다! 하하!”

 

이경식 차장이 최 전무의 말을 거들었다. 계속해서 전정국 팀장의 잔을 비울 새 없이 채워지는 술에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우리 회사 전엔 O제과에 있었지? 그 전엔 C유업이었나? 이번엔 왜 CN 푸드빌이었나? 계약 조건이 괜찮았나?”
“자신 있어서 왔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도 성공시켰으니 스카웃이 더 많이 오겠구만. 그래서 뭐 회사를 옮길 생각인가? 아니면 더 키워볼 생각인가?”

 

본격적으로 전정국 팀장의 의중을 묻는 질문에 그는 말을 아꼈다. 혹여나 술 기운에 실수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묵묵히 잔을 비울 뿐이다. 끊임없이 개인적인 질문을 공개적으로 해댄 최 전무는 딱히 소득 없는 대답만 돌아오자 점점 표정이 일그러진다. 옆에서 말을 거들던 이경식 차장도 ‘대답이 곤란한가 봅니다.’ 하며 사람 좋은 척 웃으며 혀를 간사하게 놀린다.

 

“전정국 팀장. 최근에 그 얘기는 아나?”

 

일순간 룸에 적막이 왔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자리를 마련한 거겠지.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는 팀원들과 찢어진 눈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이경식 차장, 오늘 끝장을 보려는 기색의 최태준 전무, 그리고 여전히 별다른 기색없이 잔을 비우는 전정국 팀장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내 앞에 있는 물컵에 술을 가득 따랐다.

 

“어, 박지민씨 그거 물컵이야.”

 

난데없는 내 행동에 당황한 이종필 대리가 나를 저지하지만 나는 취한 척 컵을 들어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이 정도 술에 취할 나도 아니고 전정국 팀장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화두가 되길 바랐다. 빌어먹을.

 

“최근에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내 노력이 쓸모없게 전정국 팀장이 저 스스로 덫을 향해 걸어간다. 옳다구나 싶은 최 전무가 자세를 고쳐 앉고 전정국 팀장을 바라보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나도 들은 얘긴데 그 우리 회사에 낙하산이 한 명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렇군요.”

 

여전히 무미건조한 대답이었다. 그 글에 쓰여 있는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 한들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어…그, 자리를 옮길까요?”

 

보다 못한 정호석 대리가 수습하려 나섰지만 최태준 전무의 헛기침에 분위기는 다시 원점이다.

 

“요즘에도 낙하산이 있습니까? 어휴, 큰일나요.”

 

이경식 차장이 최 전무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한다. 어쩔줄 모르는 눈빛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눈짓을 주고받는 건 외엔 이 룸안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근데 그 낙하산이 전 팀….”
“최태준 전무님!”

 

최 전무의 입에서 전정국 팀장의 이름이 불리기 전에 내가 나섰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일개 직원이 임원의 이름을 외치며 말을 끊는 행동을 할 배짱이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박지민이, 취했으면 가만히나 있어. 낄 때 안 낄 때 몰라?”


이경식 차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읊조린다.


“연말 회식 자리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야 너 취해서 뵈는 게 없냐?”
“허허, 그런가. 내가 실례했군.”

 

나를 향해 언성을 높인 이경식 차장과 그를 막으며 금세 말을 거둔 최태준 전무가 술을 벌컥 마신다.

 

“그러면 어떤 얘기를 하면 좋은지 박지민 사원이 해보겠나?”
“….”
“할 말 없으면 한잔 받지.”

 

내게 맥주잔을 건넨 최태준 전무가 소주를 콸콸 들이부었다. 그의 불편한 심기를 모를 사람은 없었다. 이깟 술이야 열 잔도 더 마실 수 있다. 맥주잔을 들고 눈을 꽉 감았다.

 

“박지민씨, 마시지 말죠.”

 

전정국 팀장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에 ‘허.’ 하며 이경신 차장이 콧방귀를뀐다. 겉잡을 수 없이 얼어붙은 분위기였다.

 

“저 괜찮은데요 팀장님.”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꿀떡꿀떡 넘어가는 술에서 쓴 알콜향이 확 끼친다.

 

“TF팀이 몇 개월 같이 고생하더니 의리가 대단해. 이래서 사업이 잘됐나 보군.”

 

비꼬는듯한 최태준 전무의 말에 다들 침묵만 유지했다.

 

“최 전무님. 오늘 자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하시죠.”
“난 전 팀장이랑 얘기를 더 나누고 싶은데 전 팀장은 별로인가 봐?”
“그럼 팀원들은 보내고 둘이 말씀하시죠.”
“왜, 사람들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라도 있나?”
“아뇨, 최 전무님이 곤란하실까 봐 배려해 드린 겁니다.”
“배려? 전 팀장이 나를? 하하하! 애비를 닮아 그런가 파렴치하군.”

 

술이 과하다고 해도 이런 식은 아니다. 처음부터 전정국 팀장을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만든 자리에 그를 놀아나게 할 수 없다. 이제 입사 2년을 지나 3년 차가 되는 밑바닥 사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아직 밑바닥 사원이니 못 할 일도 없다. 특히나 전정국 팀장에 관련된 일이라면 이깟 회사 그만둬도 상관없다.

 

“최태준 전무님.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정 대리님이 내 손을 꽉 잡으며 미쳤냐고 내 귀에 속삭였다. 그래, 내가봐도 나는 미쳤다. 그냥 미친놈 하고 말란다.

 

“박지민씨, 그만하죠.”

전정국 팀장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젓는다. 


“팀장이 저따위니까 팀원도 별수 없구만.”
“전정국 팀장님이 왜요? 이 자리에서 계속 실언한 건 최태준 전무님이신거 모르세요?”
“뭐?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그러니까요. 새파랗게 어린 새끼한테 이러는 거 부끄럽지 않으시냐고요.”

 

술이 올라 브레이크 없이 말이 나간다.

 

“박지민씨 취했네요. 다들 일어나시죠.”
“건방진 새끼. 뒷배가 누군지 재수없는….”
“제 뒷배경 아시면 저한테 한 마디도 못 하실텐데, 최태준 전무님도 적당히 하시고요.”
“저…저….”

 

최태준 전무의 말을 끊은 전정국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내 팔을 잡고 일어난다. 이거 놔. 왜 이래. 나 할 말 다 못했어. 이경식 차장한테도 할 말 많은데. 내가 버둥거리니 정 대리님과 이 대리님까지 나를 부축해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 케어했어야 하는데….”
“내가 미안합니다. 박지민씨는 제가 바래다 주겠습니다.”
“저희가 자리는 잘 마무리 하겠습니다. 걱정말고 들어가세요 팀장님.”

 

최악의 12월 31일이었다. 나와 카운트다운을 한다며 들떴던 전정국 팀장도, 그가 그딴 소문 따위는 몰랐으면 했던 나의 계획도 실패한 최악의 연말.

 

화나 보이는 그가 내 손목을 잡고 거리로 향한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또 그는 화난 표정인지. 나에게 고마워하거나 미안해야 할 순간에 그는 늘 화를 냈다. 이번에도 ‘미안해요, 고마워요’란 말 대신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다.

 

“또 왜요.”
“….”
“팀장님 왜 또 화났는데. 내가 뭘 또 잘못했는데.”
“아무리 과음을 했어도 선은 넘지 말아야죠. 최태준 전무가 박지민씨에게 어떻게 나올 줄 알고 그런 짓을 합니까.”
“선을 넘은 건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죠.”
“술에 취해 실수했다고 하고 내일 전화해서 사과하세요.”
“…뭐라고요?”
“박지민씨가 실언했습니다. 내일 술 깨면 전화…”
“팀장님.”

 

실언은 내가 아닌 당신이 하고 있다. 실수는 내가 아닌 네가 하고 있으며 당신을 위해 노력해온 내 수고를 보지 못하는 것도 당신이다.

 

“…나한테 할 말이 그거뿐이에요?”
“무슨 말이 더 듣고 싶습니까.”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나 때문이죠.”

 

알면서도, 본인 때문인 걸 당연히 알면서도 왜 내게 화를 낼까.

 

“그걸 아는 사람이….”
“나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욕을 듣고,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하고 괜찮은 척, 즐거운 척. 내가 아는 박지민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어떤 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열정에 불타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이젠 계속 눈치 보고, 둘러대고….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그의 눈시울이 붉다. 울어야 할 건 나인데 당신의 눈이 붉다.

 

“팀장님은 몰라요. 내가 팀장님 위해서 내가…. 내가….”

 

그를 위해 마음 썼던 것들을 나열할 수 없다. 당신의 가족사에 대해 차마 물어볼 수 없어 나 스스로 만들어 둔 무기를 내보일 수 없다.

 

“왜 날 위해서 박지민씨가 곤란해집니까. 왜 매번 나 때문에 박지민씨가 힘듭니까. 그런 모습 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나는 계속 미안하고….”
“됐어요, 그럼.”
“….”
“내가 헛수고했네. 괜한 짓 했어. 팀장님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소문에 휘둘리든 욕을 먹든 말든 상관할 거 아닌데. 주제넘었다, 내가.”
“내가 어떤 사람인데요.”
“….”
“박지민씨가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데요. 박지민씨 머릿속에 있는 내가 그 글 속에 있는 나와 다릅니까?”

 

알고 있었다. 전정국 팀장은 그 글의 존재도, 자신에 대해 도는 소문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내 상상 속에 존재했던 전정국은 딱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보다 더 최악을 생각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좋다는 건데 왜 그건 몰라주고….

 

“나에 대한 믿음이 아예 없군요.”
“…뭐라고요?”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이 아예 없군요.’ 이경식 차장과 접대를 들킨 후에도 이딴 식으로 말했었지.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요. 당신 부모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그냥 물어보지. 혼자서 앓지 말고 물어보지. 나한테 한 번이라도 물어봐 주지 그랬습니까.”
“내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말했어야죠. 지레 겁먹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먼저 말해줄 수 있었잖아요. 나를 못 믿은 건 팀장님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대화가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다. 나는 그를 위해 노력했고, 그는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나를 보며 마음이 아픈 것뿐인데. 우리는 결국 서로를 생각해서 힘든 건데, 흘러가는 대화는 서로를 탓하기에 바쁘다.

 

“박지민씨 머릿속에 있는 전정국보다 내가 훨씬 최악의 사람이면 어떡할 건데.”
“지금이 최악이야.”
“….”
“팀장님이 사기꾼이든 사람을 죽였든 나는 상관없었어. 나한테는…최태준 전무에게 사과하라는 말이나 내뱉으며 서 있는 지금의 전정국이 최악이야.”
“박지민씨.”

 

곧장 뒤를 돌았다. 다급하게 내 손을 잡으려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따라오지 마세요. 팀장님 말처럼 눈치 보며 둘러대고 즐거운 척, 괜찮은 척하는 거 지치니까.”
“….”
“오늘 어떤 소원 빌 거냐고 물었죠.”
“….”
 “내년엔 전정국 팀장님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그게 내 소원이에요.”


거짓말이다. 아니,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이밍 좋게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올라탔다. 라디오에서 새해 카운트다운 시작됐다.

10, 9, 8, 7… 줄어드는 숫자만큼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도 작아진다.

 

“손님, 소원 비세요. 지금 비는 소원은 꼭 이루어지더라고요. 허허.”

 

기사님의 말씀에 눈을 감았다. 고여서 흐르지 못했던 눈물이 지금에야 투둑 떨어진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택시 안에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소원을 빌었다.

 

내 소원은,

 

내 소원은…….


소울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