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민윤기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한순간도 없다.

윤기는 태형의 이웃이었고, 과외 선생이었고, 가족이었고, 형제였고, 가장 친한 친구였고, 연인이었다. 민윤기는 김태형의 전부였다. 어촌에서 바다의 소금 냄새와 비린내를 맡으며 자란 태형과 윤기는 함께 서울에 왔다. 태형은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윤기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정부군 고시에 매달렸다. 정부군 고시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시험으로, 사관학교 출신은 물론 온갖 명문대 졸업생들도 뛰어드는 시험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도 겨우 하고 I live in Seoul을 I life Seoul로 알던 윤기가 선뜻 도전할 만한 분야는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군에게는 경복궁에 도보로 출근할 수 있는 거리에 아파트를 하나씩 준다.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직업이기 때문에 월급도, 연금도 있다. 민윤기는 세 번 낙방했다. 그리고 네 번째, 합격했다. 그때는 태형이 등록금 전액 면제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기숙사에 막 들어갔을 때였다. 두 달간 기초 체력 훈련과 기초 군사 훈련을 이수하면, 정식 정부군이 된다고 했다. 야, 태형아, 기다려. 너 대학에서 잘 안 풀리면 그냥 형 집으로 들어와, 알겠지? 형이 너 먹여 살릴 테니까, 너 할 수 있는 일 충분히 여유 있게 찾아볼 수 있어. 오케이? 삼 년이 지났고, 다행히 태형은 대학에서 잘 풀려 장학금을 받으며 잘 지냈다. 성적과 교우 관계만 잘 풀렸다.

괴로웠다.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태형은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쌀이나 보리가 충분하지 않아 봄에 심어둔 감자를 겨울에 아껴 먹는 삶. 갓 태어난 아기가 얼어 죽고 넘어져 다친 노인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는 삶.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렇게 심어대고 수확해댔던 쌀은 다 어디로 갔지? 어떤 의대에선 한 해에 신입생을 여덟 명 뽑는다고 했다. 의대가 우리나라에 몇 갠데. 우리나라에 병원이 몇 갠데, 의사가 몇 명인데…. 서울에 와서야 알았다. 아, 전부 서울에 있구나. 전부 저 궁 안에 있구나. 모든 건 왕이 꽉 쥐고 있구나, 우리의 목숨 같은 거.

대학생들이 익명의 투서를 쓰기 시작했다. 태형도 몇 장 썼다. 새로운 내용의 투서도 썼고, 모두가 읽기 쉬운 내용의 투서를 베껴 쓰는 일도 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윤기를 만났다.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왕은 왕이었고, 서울은 서울이었고, 경복궁은 경복궁이었고, 민윤기는 그냥 민윤기였다. 태형의 모든 것인 민윤기.

태형아,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 투서 같은 게 유행이야?

엉?

너는 그런 거 안 할 애인 줄 내가 아는데, 왕은 몰라.

……….

너 친구 중에 만약에 그런 거 하는 애 있으면, 하지 말라고 해. 너희 학교 이름 걸고 제일 많이 들어오더라.

……….

왕이 대학 하나씩 다 밀어버리려고 해. 두고 보겠다고는 하는데,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진 모르겠어.

…그래?

응. 그냥, 다들 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냐.

 

뭐라고?

형은 다 잊었어?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윤기와 경복궁 앞에서 헤어진 태형은 그 길로 바로 학교에 갔다. 마침 투서를 쓰고 있던 동기들과 후배들을 만났다.

다들 이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면 군대를 만들자.

왕이 우릴 죽이기 전에, 우리가 왕을 죽이자.

 

태형은 여전히 윤기를 사랑한다. 태형은 결핍 가득한 곳에서 자라 결국 원하던 바를 이루어내고 그대로 사는 윤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한다. 정부군 민윤기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적, 여전히 한순간도 없다. 시위 혹은 혁명이 시작된 지 한 달, 서울은 황폐해졌고 폐쇄됐다. 버티는 싸움이다. 수장인 태형을 비롯한 혁명군인들은 혁명군이 이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방에 있던 정부군들이 숨통을 조여오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했을 때 지방민들이 일어섰다.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혁명시위가 아닌 혁명전쟁이 되었다. 화학을 전공한 대학생들은 폭탄을 만들었고 죽은 정부 군인들에게서 무기를 뺏었다. 그러면서 태형은 언제나 얼굴을 확인했다. 없다. 죽은 자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얼굴에 늘 안도했다.

그러다가 보았다. 팔자 좋게 교대로 들어온 정부군 중 가장 최전방에서, 까만 방패를 앞에 세워놓고 혁명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사람.

민윤기.

김태형의 전부. 김태형의 모든 것.

 

쪽잠 자던 태형이 눈을 뜬다. 오늘도 죽은 군인들의 시체를 뒤지러 간다. 제발 너의 얼굴이 없길 바란다. 그렇지만, 이제껏 없었으니 오늘은 있을 수도 있기에.

나는 오늘도 내 안에 살아있는 너를 죽인다.

죽은 자들에게서 너의 얼굴 너의 몸을 보았을 때 놀라지 않게, 슬퍼하지 않게.







김떡순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