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탁, 맥크리는 초조하게 발을 굴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기엔, 오늘 단 하루동안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감사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런 긴장 속에 갇혀있는 건 싫었다. 뭐든, 빨리 들이닥쳤으면 좋겠다


그 순간, 마치 맥크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 마냥 문이 열렸다. 문의 그늘아래 어두칙칙한 사람의 그림자의 양 손에 하얀 머그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양 손에 하나씩 뭔가를 드는 걸 좋아하나, 아까도 양 손에 샷건을 하나씩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사람을 잡아대더니. 누군가 문을 열어준 것인지 문 너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로 문이 닫혔다. 맥크리를 힐끔 쳐다본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맥크리의 앞에 머그컵 하나를 놓았다. 맥크리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끌어내 앉은 남자는 다리를 꼬고, 머그를 들지 않은 손은 배 위에 감았다.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댄 모습이, 이곳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맥크리는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후룩, 머그컵을 기울여 한 모금 넘긴 남자가 맥크리를 힐끔 보고 컵을 내려놓았다. 맥크리는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눈썹 하나를 치켜올렸다. 맥크리의 앞에 놓인 컵과 맥크리를 번갈아 보더니, 작게 웃었다.


"얼마나 어리면 커피도 못마셔?"


남자는 다시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남자의 말이 맥크리의 신경을 까득, 긁었다. 맥크리는 눈 앞에 놓인 머그컵의 손잡이를 잡아채듯 쥐었다. 얼굴 앞까지 잔을 들었다. 진한 고동빛 수면 위에 가늘게 상아색 거품이 피어올랐다. 후룩, 남자가 그랬던 것 처럼 한 모금 마셨다. 맥크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컵을 입에 댄 채로 맥크리를 보고있었다. 아래로 눈을 깔고 있었지만, 눈꼬리 주변에 잡힌 주름이 그가 웃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맥크리는 컵을 쿵, 내려놓았다. 독오른 시선으로 노려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쪽이 만든거야? 입맛 참 이상하네"

"왜, 써서 못마시겠냐?"

"완전 펄펄 끓인 모래같아"

"펄펄 끓인 모래가 무슨 맛이 나는지 어떻게 알아"

"대낮에 저 밖에 나가면 맨날 마실 수 있거든"

"또, 평생 구치소에서 마실 수 있고"


맥크리는 입을 다물었다. 올 게 왔구나. 남자는 여전히 아래로 눈꺼풀을 내리고 있었다. 맥크리가 말없이 노려보자 남자는 눈만 들어 맥크리를 보았다. 마주친 갈색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남자는 컵을 내려놓고 꼬아놓은 다리를 풀었다.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기댔다.


"마시지 않고 살 수도 있고"


남자는 양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움찔, 맥크리의 어깨가 떨렸다.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맥크리를 관찰했다. 모래밭에 숨겨놓은 쪽지를 찾듯이 샅샅이 맥크리를 훑었다. 분명, 감옥에 가지 않는 것을 대가로 거래를 제안할 것이다. 그게 과연 좋은 선택이 될지, 알 수 없었다. 뭐가 됐든, 이 나이에 감옥에 앉아 죽음만을 기다리는 삶은 싫었다.


"뭔데, 말해봐"



질리게도 익숙한 냄새가 맥크리의 의식을 깨웠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는 무거운데,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알림창이 감긴 눈을 비집고 들어와 눈 앞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흐릿한 시야에 질리게도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레예스는 흰 머그컵 두 개를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고 아직도 침대에서 사경을 헤매는 맥크리의 옆에 풀썩, 앉았다.


"일어날 시간이다"

"으으음"

"그 무거운 궁둥짝 당장 떼지못해?"

"아아아 진짜, 펄펄 끓인 모래 안마시게 해준다더니, 다 뻥이었어"

"뭐, 감옥 보내달라고?"

"매일 아침 이렇게 펄펄 끓인 모래맛 커피를 마셔야 한다니"

"그럼 나보다 일찍 일어나라니까?"

"아아,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힘겹게 몸을 일으킨 맥크리가 기지개를 키며 하품했다.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니 진한 커피향이 훅, 다가왔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니 레예스가 자신의 커피를 마시면서 나머지 컵 하나를 맥크리에게 내밀고 있었다.


"안 마시면..."

"..."

"설탕이라도 넣어주면..."

"..."

"아 그냥 사부가 두 잔 마시면 안되냐고오"

"내가 뭐라고 했었지?"

"기억 안나는...죄송합니다, 코막고 들이붓는 것 만은 제발,"


끄으으,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맥크리는 컵을 받아들었다. 상아색 연기가 코를 타고 들어와 뇌를 두드려 깨웠다. 후룩,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강하게 쓴맛이 돌았다. 맥크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맥크리의 구겨진 인상을 보는 레예스는 즐거워보였다.


"으, 최악이야"

"정신차리라고 일부러 진하게 내리는거야"

"이런거 마시니까 성격이 그 모양, 아, 농담이야"

"이자식이, 깨우러 오지 않으면 일어나지도 않아서 기껏 와줘도 한다는 소리가"


아직 반 남은 커피 때문에 맥크리는 레예스가 귀를 잡아당기는 동안 컵을 든 채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가 신경을 써준다는 건 알고있지만, 그래도 졸린데 깨우면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레예스가 귀를 놓자 맥크리는 잡혔던 귀를 문지르며 실제보다 더 아픈 척을 했다. 레예스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은 차린 것 같으니 준비하고 나와라"


레예스는 빈 머그컵 두 개를 들고 맥크리의 방을 나섰다.



맥크리는 흥겨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머그컵 두 개를 놓고, 커피포트를 들어 미리 내려놓은 커피를 따랐다. 쪼로록, 쪼로록, 두 잔을 모두 채운 후 설탕을 담아놓은 통의 뚜껑을 열었다. 딸그락, 유리병에 티스푼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두어번 설탕을 넣고, 옆에 놓은 컵으로 시선을 옮겼다. 맥크리는 씨익, 자신이 생각해도 사악하게 보일 미소를 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설탕을 듬뿍 퍼서 넣은 후, 머그컵의 가장자리를 땅땅, 두드린 후, 잠깐 고민했다가 두 번 더 설탕을 퍼넣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휘휘 젓다가, 냉장고로 발을 옮겼다.


문을 열고, 아, 여깄다, 이런 날을 위해 몰래 사다 숨겨놓은 휘핑크림을 꺼냈다. 공기와 크림이 섞이는 소리를 반주삼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잘 섞은 후, 뚜껑을 열고, 다시 씨익 웃었다. 누가 보면 좀 악당같아 보이겠는데. 그래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반응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쉬이익, 빙글빙글 산을 쌓으며 높이높이 쌓아올렸다. 마지막 꼭다리까지 예쁘게 뽑아내고 잠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최고야. 양 손에 컵을 하나씩 들고, 자, 이제 복수의 시간이다.


비스듬이 들어오는 태양빛 아래 펼쳐진 광경을 보고 맥크리는 잠시 멈춰섰다. 새하얀 시트와 베개에 뒤덮인 레예스의 진한 피부색이 도드라졌다. 자신의 머그컵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레예스에게 눈을 돌렸다. 꼭 머그컵에 담긴 커피같았다. 발을 옮겨 침대 옆에 서자마자, 레예스는 부스스 눈을 떴다.


"일어나세요, 공주님"

"...죽여버린다"


허공에 대고 연극톤으로 장난스레 부르는 맥크리에게 짜증을 담아 대꾸한 레예스는 몸을 일으켜 어깨를 이리저리 쭉쭉 끌어당기며 몸을 풀었다. 몸의 움직임에 맞춰 약동하는 등과 옆구리의 근육이 커피향처럼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몸을 풀고 맥크리의 양 손을 본 레예스는 살짝 인상을 썼다. 레예스는 크림이 올라가지 않은 쪽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맥크리가 몸을 돌려 뒤로 슥, 잡아빼고 한 모금 후룩, 마셨다. 그리고 크림이 산더미처럼 올라간 쪽을 레예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내가, 대장은 이거"


레예스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맥크리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들썩이기 시작했다. 레예스는 큭, 큭, 웃기 시작한 맥크리를 무섭게 노려보고 컵을 건네받았다. 크림과 눈싸움이라도 할 듯한 모습을 보고 맥크리는 점점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가장자리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신 레예스의 더 이상 구겨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인상이 더욱 더 구겨지자, 맥크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 설탕물이잖아, 너나 마셔라"

"내가 먼저 일어나면 타주는 대로 마신다고 했잖아"


레예스는 입을 다물었다. 레예스의 성격은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다.


"설탕을 얼마나 들이부은거야? 게다가, 대체 이 멍청한 크림은 뭐야"

"대장에게 당분이 좀 필요해보여서"


레예스가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다시 얼굴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그 와중에 수염 군데군데에 걸린 크림이 안어울리게 앙증맞아서 웃음이 났다. 맥크리는 손을 뻗으려다가, 몸을 숙여 입술 사이로 크림을 훔쳐내고, 레예스의 입술 위로 한 번 더 입술을 훔쳤다. 멍하게 열려있는 입술 사이로 들어가자,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커피향이 났다. 가볍게 입 안을 돌아다니고 쪽,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레예스의 얼굴은 조금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정말 달긴 하네"

"앞으로 이따위로 타오면 죽을 줄 알아"

"그럼 일찍 일어나면 되잖아"

"최소한 크림이라도 빼"

"오늘 처음 딴 건데"

"너나 많이 먹어라"

"그럼 내가 먹을테니까 여기다 뿌려보면 안되나?"

"...변태새끼"

"그렇게 생긴 대장이 잘못이지"


무슨 헛소리야, 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레예스를 보며 맥크리는 옅게 웃으며 미간에 입술을 맞췄다.



"죄송합니다, 모닝 세트에 음료는 커피만 가능하십니다"


곤란한 미소를 지은 점원을 보며 맥크리는 한숨을 쉬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판을 든 점원이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생활소음에 조근조근 섞인 작은 말소리들을 듣고 있으니 점원이 트레이에 머그잔을 들고 돌아왔다.


"음료 먼저 드리겠습니다"


맥크리의 앞에 잔을 내려놓은 점원이 다시 멀어졌다. 상아색 거품이 감도는 표면을 바라보던 맥크리는 잔을 들었다. 달그락, 맑은 소리가 작게 울렸다. 후룩, 한 모금, 입으로 커피가 흘러들어왔다. 중후하게 혀를 감도는 쓴맛에 새큼함이 잘 섞여있었다. 커피의 맛이라곤 잘 모르는 맥크리의 입으로도, 그게 잘 내린 커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 양반 그냥 커피를 내릴 줄 몰랐던 게 분명해. 뒤늦게 씁쓸한 먼지의 맛이 입에 감돌았다. 역시, 커피는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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