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달뜬 공기가 일순간 바뀐 것은 재혁이 벨트의 버클을 풀었을 때였다. 




“!!!”




달칵, 소리가 나자마자 하선이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뻣뻣이 굳어진 것이었다. 하선이 놀라지 않도록, 하선이 원하는 만큼만... 이성을 쥐어짜가며 하선에게 맞추려 애쓰던 재혁이 그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하선, 괜찮아?”

“......”

“여기서... 멈출까?”




말이 없다.

재혁은 더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온몸이 아리도록 뜨거웠지만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매무새를 추스르고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망설였던 일. 재혁은 숨을 조절하며 하선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누구야, 하선?”

“...문.”




하선의 뺨도 뜨거웠다. 손끝으로 가슴을 더듬으며 파고드는 연인을 끌어안으며 재혁은 한 번 더, 가장 깊은 숨을 끌어올려 훅 내뱉었다.

내 마음만 앞세워 움직였다면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잘 참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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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대로 드립커피와 와플 주문을 넣은 진은 자리를 뜨지 않고 맞은편에서 턱까지 괸 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흥미를 감출 맘도 없이 저렇게 대놓고 훑다니... 매우 불쾌할 상황인데도 이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당당함 때문인지 노아는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안 먹어요? 우리집 와플 죽이는데. 벨지안 스타일이라.”

“...경황이 없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 아침 먹고 나왔습니다.”

“그럼 런치메뉴 가격으로 계산하고 그때까지 천천히 먹어요.”

“무슨 런치예요. 이제 10시 반인데.”

“그럼 브런-치. 헐, ‘브런치브레이크’ 메뉴를 따로 파볼까?!”




청산유수로 받아치다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에 주먹 한 번 쿵 치고는 홱 자리를 떠 버린다. 노아는 어이가 없다못해 그만 소리내 웃고 말았다. 

저래봬도 이 가게의 사장이랬지. 자신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다. 죽었다 깨나도 잘 맞을 리 없지만 잠시 웃고 넘기기엔 좋은 유쾌한 부류. 그래, 저런 사람들이 있지...

노아는 가슴을 울려 쿡쿡 웃고는 와플 한 점을 찍어 입에 넣었다. 괜찮은 맛이다.




[We are open 24/7](24시간 영업)이라는 문구가 걸린 출입문과 메뉴판을 번갈아 보았다. 쉬는 날 한 번쯤은 더 와 볼까 생각하면서. 아니, 오늘 별다른 일이 없으니 아예 여기서 시간을 좀 죽이다가 하선을 데리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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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노출콘크리트 천장은 그대로 살리고, 벽면은 작업에만 집중하기 좋도록 온통 검은 페인트로 칠한 작업실의 한복판. 역시 검은 쉬폰커튼과 새까만 침구로만 꾸며진 재혁의 침대맡에 하선은 홀로 무릎을 끌어안고 하얗게 앉아 있었다.

재혁은 베이킹소다와 과탄산수소를 넣은 물에 하선의 흰 셔츠를 담갔다. 그리곤 몇 번 뺐다 담그기를 반복하다가 손을 털며 물러났다. 얼룩이 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커다란 미식축구 유니폼을 빌려입고 침대에 앉아 라디오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하선은 더 가녀려 보였다. 늘 희거나 검은 셔츠만 입어 이렇게 무늬가 선명한 캐주얼 차림은 처음 본다. 새롭게 사랑스럽다. 커다란 청회색 유니폼과 잘 어울리는 검은 머리카락, 곧고 가는 다리, 무릎 위에 뺨을 대고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소리에만 집중하는 작고 뾰로통한 얼굴... 

내 공간에 들어와 내 옷을 걸친 연인. 이렇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지만 보고 있다는 걸 모른다면... 이건 훔쳐보는 걸까. ‘난 지금 네게서 눈을 떼지 못하겠다’고 알려줘야 하는 걸까.




“......”




무표정한 하선에게는 활짝 웃으며 조잘조잘 떠들 때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었다. 표정과 분위기를 읽기 어려워 어색함에 자꾸 떠들고야 만다는 고백을 들은 이후, 재혁은 하선이 말없이 고른 숨을 내쉬며 그저 ‘거기 있는’ 모습이 되려 편안해 보여 좋았다. 애쓰고 있지 않다는 증거니까. 




그리고 싶다.




언젠가 느꼈던, 주체 못 할 강렬한 욕구가 다시 가슴을 때렸다. 재혁은 급히 F20호 캔버스와 이젤을 들고 와 펼쳐 놓았다. 의뢰작이 아닌 ‘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에 화구를 펼쳐드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수선한 소리에 고개를 들 만한데도 하선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세우고 미미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U2 노래 나온다.”




하선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처음 여기 찾아왔을 때... 문이 듣고 있던 노래잖아.

 나 이거 기억나.”




하선을 스케치하던 재혁의 귀에도 그가 사랑하는 노래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하선의 허밍이 덧입혀진 새로운 버전이다.




“See the stone set in your eyes 

 See the thorn twist in your side 

 I wait for you...”

(그대의 눈에 박힌 돌이

 그대 곁을 감아올린 가시가 보여

 나는 그대를 기다려)




가사가 확실하지 않은지 고개를 설핏 젓기도 하고, 살풋 웃기도 한다. 아름답다.




 “With or without you, I wait for you”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아도 나는 그대를 기다려)




꿈결 같은 노랫소리에 벅찬 행복을 느끼며 밑그림의 형태를 잡아나가던 재혁은 하선의 정강이에 아직도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긴 흉터를 보고 잠시 손을 멈추었다.

묻고 싶은 것 투성이인,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은 연인. 어디까지 개입하는 게 안전한 것인지, 어디까지 취하는 게 위하는 것인지... 아직은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한 나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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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해가 아무리 길다 한들 어둠은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친 하선은 여기저기를 서성이다 결국 재혁의 무릎에 앉아 목에 두른 팔을 풀 줄 몰랐다. 다시 조잘거림이 시작되었다. 불안해졌다는 신호이리라. ‘이제 가야 해’, 되뇌며 안절부절못하던 하선의 칭얼거림은 ‘꼭 가야 해?’에서 ‘안 갈래’로 바뀌었다.

8시, 현관문이 똑똑 울렸다.




“가요, 헤일리.”

“노아......”

“약속했잖아요. 안 계시는 동안에는 내가 책임지고 매일 오게 해 주겠다고. 내 시야 안에서, 다치지 않게, 안전하게.”

“......”

"난 고용인이니까... 헤일리의 보호자여야만 하는 거 알잖아요. 외박만은 안 된다는 것도요."

“......”

“헤일리, 어서.”




다정히 속삭이면서도 노아의 시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침대 옆에 놓인 캔버스 속 스케치와 하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얼마나 편안한 시간을 보냈는지 그림 속 하선의 나른한 자태가 말해주고 있었다.

재혁은 반듯한 수트 차림으로 들어서서 가볍게 목례를 하곤 하선의 등을 자상하게 쓸어주는, 게다가 ‘보호자’ 역할까지 자처하는 이 노아라는 남자에게 묘한 질투를 느꼈다. 하선의 집에는 나이 든 가정부가 한 명, 히스패닉계 요리사와 운전기사가 각각 둘이라 했으니... 저 젊은 남자가 바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사 역할을 한다던 이민2세겠지.




“담배 태우십니까?”




채비를 거의 마친 하선을 앞에 두고 재혁이 충동적으로 물었다. 노아는 하선에게만 향했던 몸을 돌려 똑바로 쳐다보다가 금세 얼굴에서 의아한 빛을 지우고는 깍듯이 답했다.




“네, 태웁니다.”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빈틈이라곤 없을 듯 칼각이 서 있다. 단순히 한 저택의 피고용인 취급으로 끝나기엔 아까운 기품 있는 모습. 재혁은 왠지 모르게 누그러졌다. 




...믿음직해 보이는 사내 아닌가.





하선이 집에 돌아간다고 할 때마다 묘하게 불안했던 마음을 이 사람이라면 다잡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선에게 물을 한 잔 떠다 주고 부드럽게 양해를 구한 재혁이 현관문을 열고 노아에게 손짓했다.




“한 대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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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가 많아요.”




후- 느리게 연기를 내뱉으며, 노아는 재혁의 첫 질문에 표정 없이 답했다. 외박만은 안 된다고 하는 이유, CCTV.




“집까지 와본 적은 없으시죠? 헤일리가 아마 완강할 테니까... 저 단지에서도 가장 넓은 축에 속하는 큰 저택입니다. 대문 앞 CCTV는 얼마 전 파손됐는데, 그걸 제외해도 집안 여기저기 달린 CCTV가 10대는 넘을 거예요.”

“하선, 아니... 헤일리는 열여덟입니다. CCTV가 무서워서 단순 외출조차 허락받아야 합니까?”

“네, 아마 그럴 겁니다. 헤일리의 아버지가 이유도 없이 불시에 확인하곤 하니까요.”

“감금이잖아요, 그건!”




재혁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질렀다.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지만 다정하게 ‘보호자’를 자처하던 노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답변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담배를 치켜든 긴 손가락과 재혁을 마주보는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랍니까?”

“모르겠습니다.”

“하선은... 집에 한 번 돌아가면 연락이 안 돼요. 부모가 외부의 연락조차 막습니까?”

“네, 막습니다.”

“왜요!!”

“모릅니다.”




노아가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걸 왜 내게 따지느냐’는 식의 철없는 원망의 눈빛은 아니었다. 앳된 얼굴에 깊은 눈. 재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집 안에서 듣고 있을지 모를 하선의 입장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헤일리의 방에도 전화기가 없습니다. 헤일리는 지금까지 핸드폰을 가져본 적도 없어요. 왜냐고요? 모릅니다. 저도 몰라요. 뭔가 부당합니다. 하지만 전 그들에게 아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할만한 입지는 못 됩니다.”




재혁은 그저 들었다.




“네, 데이비스 부부는 확실히 헤일리를 과보호해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7살 때 시력을 잃었는데, 온몸이 분쇄골절되고 안면마비가 올 정도의 큰 사고였다고 했어요. 그 후로 몸이 약해서 늘 홈스쿨만 했습니다. 가정교사도 몇 번이나 바뀌었고요.”

“......”

“헤일리가 눈이 먼 후로 툭하면 넘어지고 깨지니 처음엔 베이비 모니터를 달다가... 어느날부턴가 온 집안에 CCTV가 생기더군요. 고용인들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고 자주 관뒀습니다. 제가 거기서 가장 오래 일한 것 같네요. 아버지 손 잡고 더부살이하듯이 들어와 자연스럽게 일을 물려받았으니까요. 일한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헤일리를 봐 온 건 벌써 10년도 넘었습니다.”

“......”

“어릴 때는 나름 친했습니다. 멋모르고. 저도 워낙 어릴 때라 기억이 드문드문해요. 지금은 고용주의 아들과 피고용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노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고 전의 헤일리가 절 쳐다보고 웃고...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던... 그런 모습들은 지금도 간혹 생각납니다.”




뜸은 길었으나 표정은 평이했고 음성에도 높낮이가 없었다. 감정이 철저히 배제된 말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듯 주의깊게 듣는 재혁의 미간만 깊게 패여 있었다. 손에 들린 채 한 번도 입에 물지 않은 담배 끝에서는 긴 재가 툭 떨어졌다. 




하선은... 후천성 시각장애인이었다.

7살이 될 때까지는 세상을 보았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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