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뿌리쳤을 때.


 "따라오지 마."


 차갑게 말한 일갈에 발걸음이 멎었던 건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건지도 몰라요. 한계까지 힘을 내서 달리는 건 한계가 있어요.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순간 눈 앞이 하얗게 번지면서 어지럽지 않아요? 그때 저는 어지러웠나봐요.


 발이 무겁게 걸려서 그렇게 서 있는 게 한계였어요.

 잃는 거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


 "멍청이."


 "너무해..."


 시라부가 냉정하게 말하자 카와니시는 부러 풀죽은 모양새를 했다. 고개는 툭 떨구고 허리는 구부정해졌지만 원체 체격이 있는 탓인지 의도만큼 작아지지는 않았다.


 "넌 자식 낳지 마. 너 닮은 자식이면 머리 나빠서 안 돼."


 "뭐라고...!"


 카와니시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노려보는 시선을 시라부는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게 문제집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문제를 빠르게 읽고 중요한 단서에 표시하는 것은 시라부의 습관이었다.


 "야, 방금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았냐. 아무리 우리가 짱친이래도 말도 안 되게 심한 말이었다고."


 울컥한 카와니시의 말은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카와니시는 깊은 시름에 잠긴 것 같았고 시라부의 집에 오면서부터 그 상태였다. 시라부는 내심 짜증이 난 걸 억누르는 데만 해도 신경을 소모하고 있었다. 화를 낼 거면 화를 내고 힘들어 할 거면 힘들어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 앞에 참고서에 집중하는 것조차 못하고 있잖아.


 "너 서럽지 말라고 말해주면 머리 나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병 주고 약 줘...?"


 "근데 쓸수록 머리 좋아진다더라."


 시라부의 펜 끝이 카와니시의 참고서를 툭툭 건드렸다. 시라부가 간결하게 적었다. '공부해.' 카와니시는 그 글씨가 대단한 거라도 되는 양 들여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멍청해서 난 차였나봐."


 "그 이야기 안 하겠다며."


 한동안 등교도 안 하는 것에 걱정이 되어 전화했을 때 시라부가 들은 말이었다.


 "30분 줄 테니까 말하든지, 나가."


 시라부는 단호했다. 경험상 카와니시도 그가 유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1년이 넘도록 알고 지내며 시라부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현명한 건지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카와니시는 제 참고서를 덮고 가방에 넣은 다음 주섬주섬 외투를 챙겼다.


 "그래. 굳이 나한테 시간 써달라고 안 해. 머리 쓰는 일 열심히 하시고."


 원망이 묻어나오는 말투였다. 카와니시는 두 번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나왔다. 노트에 식을 적어내리던 시라부의 손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집중도 못 하게 만들고..."


 의식적으로 떨쳐내려 노력했다. 때때로 찾아오는 잡생각을 물리치는 건 익숙하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을 터였다.


 바깥으로 나온 카와니시는 매섭게 부는 바람과 맞닥뜨렸다. 다시 들어가 따뜻한 방바닥에서 참고서나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없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넌 네가 나한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


 '네?'


 되묻고서 바보같아 보였을 거란 짐작은 했다. 다른 할 말을 생각하기 이전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와서 어쩔 수 없었다. 카와니시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었다. 저 물음은 분명히 속뜻이 있는 물음이었다. 무언가를 짐작해야했다. 예상을 해야했고 사과가 필요할 것이었다.


 뭘 잘못했는지 짧은 시간 고민했다. 매일같이 집에 데려다주고 그보다 늦은 시간에 귀가해 어머니에게 한 소리 듣던 것, 가지고 싶어하던 걸 가지고 싶다던 날짜에 선물해준 것, 진로 고민을 밤이 깊도록 들어준 것, 잘못을 찾아야 하는데 열심히 뒤적여도 나오는 게 없었다.


 세미는 언짢은 얼굴로 카와니시를 보고 있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분위기였다. 뭔진 몰라도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자. 카와니시에게는 그게 사랑이었다. 누구보다 밝고 활력을 전해주던 첫사랑에게 카와니시는 맹목적이었다.


 '난 불만족이야. 불만이야.'


 '어느 부분이요? 말해주세요. 고칠 테니까.'


 '그걸 네가 모르는 게 잘못이야.'


 네? 라고 다시 물을 뻔 했지만 삼켰다.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그럴 때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찔렀으니까.


 '따라오지 마.'


 잡았다가 내쳐진 카와니시의 손은 제법 처량맞았다. 멀어지는 등은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았다. 카와니시는 아직도 왜 세미와 헤어지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시라부에게 털어놓는 게 빠른 정답으로 향하는 길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루게 되는 건 알 수 없는 본능 때문이었다. 상처입고 싶지 않은 마음.


 "코트에서 잘 굴리는 머리, 평소에도 써보지 그래 라고 할 것 같기도 하고."


카와니시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도 나한테 너라는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지. 너만큼 마음을 터놓은 사람이 있어서. 어줍잖은 친구들 사이에서 멀쩡한 척 하지 않아도 돼서. 혼자 끝없는 물음을 던지지 않고 너를 보고 있으면 돼서.


 괜히 성낸 것 같아서 카와니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음 번에 갈 땐 먹을거리라도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


 처음 봤을 때는 잘 몰랐다. 나른해보이는 눈매도 똑같이 잠겨있으면서도 묘하게 날이 서있는 말투에서도. 시라부에게 카와니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급속도로 편해지고 만만해지는 건 그가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다. 휘적휘적 허술하게 걸어다니다 선배한테 등짝이나 맞고.


 여러 명이서 대화하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집중도 흐트러지는 편이었다. 배구공이 손끝에 걸리는 동안은 빠르게 사고하고 움직일 줄 알면서, 코트에서 다 소진하기라도 하는지 일상에선 빈틈이 많았다. 한 번은 물었다. 왜 그렇게 정신이 팔려서 다니냐고.


 그때 카와니시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랑에 빠져서 정신이 팔려있었구나, 그렇담 조금은 이해해줄 수도 있었다. 끝이 훤하게 보이는 연애를 시작해 어린애처럼 기뻐하고 칠렐레 팔렐레 웃고 다니는 건 거슬려도.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 못채는 게 애석했어도.


 그렇게 카와니시가 헤어졌을 때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졌다. 조금만 사랑을 쟀으면 넌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텐데. 왜 다 내어주기만 했을까. 내 눈에는 보였는데. 세미 선배에게 너는 그다지 커다란 의미가 아니었던 것.


 시라부는 연애경험이 적지 않게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만나보면 보는 눈도 생기고 나쁠 건 없었다. 삶에 있어서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대인관계라고 했다. 잘난 사람도 멋진 사람도 다 만나봤으니 눈이 높아졌어야 정상이었다. 자꾸 눈길이 가있는 게 실연당한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라부는 잠깐 잠들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탁자가 있는 거실로 향했다. 부모님의 귀가는 늦는 게 일상이라 시라부는 트여있는 거실을 자주 이용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만에 부활동에서 본 카와니시는 시라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필요한 말만 주고 받았다. 역시 기분 상했나.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제 앞머리를 쥐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에 놓인 신발을 밟고 문을 열었더니 '네가 내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카와니시가 서있었다. 검고 커다란 봉투가 안겨들었다.


 "선물이야. 오늘도 살벌하게 춥다. 비켜! 들어가게."


 얼결에 밀려난 시라부는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이름도 다양하고 포장도 화려한 과자가 가득 들어있었다.


 "오늘은 나 공부 할 거야. 나 공부하는 모습 보고 반하지나 마라."


 실없는 소리였다. 시라부는 탁자 옆에 과자봉투를 내려놓고 앉았다. 그리고는 추위에 얼어붙은 뺨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카와니시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쩡하고 얼어붙어있다가 그의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이건 무슨 장난이야...?"


 "세미 선배랑 헤어졌으니까 나랑 만나자."


 "뭐, 뭐...?"


 "내가 더 잘해줄게."


 "..."


 카와니시는 온기가 스쳐간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 퍼뜩 생각난 것처럼 새된 비명을 질렀다.


 "너 진지해?!"


 "하..."


 시라부는 마치 방금의 일이 없었던 것처럼 과자봉투를 뒤적였다.


 "포키 딸기맛 사왔겠지? 나 그거 좋아하잖아."


 "내 말에 대답부터 해줘."


 시라부의 잠잠한 시선이 다시 카와니시를 향했다. 시라부도 아주 당당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말이 우물거리듯 나왔다.


 "진지해. 허튼 소리 아니야."


 바보같고 미련한 네가 나를 바라봤으면 좋겠어.  너를 잃으면 나는 연인도 잃고 친구도 잃게 돼. 그런 건 알고 있어. 나는 모든 위험을 감안하고서라도 너를. 세미와 만날 때도 카와니시가 왼쪽이었다더니 주도권은 순전히 시라부가 쥔 것 같았다.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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