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강이다. 북적이던 도서관이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자리가 남아있을까 초조해 할 필요도, 옆 사람과 부딪힐까 괜스레 어깨를 웅크릴 필요도 없다. 일후는 여유롭게 평소 좋아하는 4층 칸막이 실에 자리를 잡았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휴대폰이 울어댄다. 진동이 몇 번 울리다 끊어지는 걸 보니 전화는 아닌 것 같다. 급하면 알아서 전화하겠지 싶어 일후는 개의치 않고 마저 자리를 정리했다. 책상에 떨어져 있는 지우개 가루도 털어내고 먹고 남은 사탕 껍질도 치웠다. 어차피 곧 나갈 거라 휴대폰은 밖에서 확인해도 된다.


시험기간이면 열람실보다 더 북적이던 휴게실도 이제는 텅텅 비었다. 일후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 겨울 계절학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한기가 강해진다. 1층에 도착하기 전에 일후는 습관처럼 목 끝까지 지퍼를 채웠다. 추운 건 정말 싫지만 한 겨울에 접어든 캠퍼스는 나름의 운치가 있다. 한산해진 열람실만큼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일후가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새 손가락이 얼어서 움직임이 둔했다. 안에서 볼 걸,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느릿한 손길로 휴대폰을 확인하던 일후가 그대로 멈춰 섰다.


- 늦게 끝날 것 같아요.

- 미안. 15분 뒤에 봐.


애매한데. 차라리 1시간이면 모를까, 15분은 카페에 가 있기도 애매하다. 다시 도서관으로 가자니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어나야 할 것만 같다. 먼저 식당으로 가 있을까. 뭐 먹을지 안 정했는데. 일후는 고민했다. 고민도 고민인데 당장 손이 너무 시려서 일단은 휴대폰부터 집어넣고 마저 고민하기로 했다.


자, 그래서 이제 어떡할까. 일후가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하려던 그때였다.


“저기요.”


발 시리겠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컨버스가 얼마나 발이 시린데 이 겨울에 춥지도 않은지 남자는 검정 컨버스를 신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이넥 제품이라 컨버스가 발목까지 길게 올라와 있었다. 그래봤자 컨버스가 얼마나 따뜻하겠냐마는 어쨌든, 남자의 첫인상은 이랬다.


“이숙형 강의실이 어디예요?”


화려하네. 남자에 대한 두 번째 인상은 더욱 강렬했다. 마주친 두 눈은 사납기 그지없는데 묘하게 시선이 아래에 있는 남자는 꽤나 눈에 띄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쪽 옆구리에 끼워진 오토바이 헬멧이 그랬고, 귓바퀴를 가득 메운 요란한 피어싱이 그랬다. 심지어 이 날씨에 가죽 자켓을 입고 있다. 춥긴 추운지 자켓 속에 폴라티와 털 달린 후드 집업을 받쳐 입긴 했지만 일후에게는 충분히 충격적인 차림새였다.


일후는 오늘만 해도 다섯 겹을 껴입었다. 반팔 티, 긴팔 티, 기모 후드. 그 위에 얇은 패딩 조끼를 입고 마무리로 패딩까지 입었다. 덕분에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인데 눈앞의 이는 옷차림 한번 간결하다. 밴드 하는 사람인가. 인기 많겠네. 남자의 충격적인 옷차림을 뒤로한 채 일후가 되물었다.


“이숙영 강의실이요?”

“아니요. 영 말고 형, 이숙형이요.”

“음, 어느 건물에 있는 건데요?”


그런데 보통 강의실을 물어보나? 길을 물어보는 것쯤이야 이상할 것도 없지만 강의실을 물어보는 경우는 또 처음이다. 캠퍼스에 강의실이 몇 개인데 그걸 일일이 어떻게 안다고. 남자를 쳐다보는 일후의 눈길에 경계심이 묻어났다. 생각해보니 같은 남자가 길을 물어보는 것도 퍽 생소하게 느껴졌다. 보통 일후에게 길을 묻는 건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몰라요.”


대부분인데… 성별을 떠나서 모른다는 대답을 저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신종 도를 아십니까 인가 싶어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가 지지 않고 시선을 부딪쳐왔다.


아, 그래. 일후는 이런 식으로 사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을 알고 있다. 기분 탓인가. 한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일후가 아는 누군가와 묘하게 닮은 것 같다. 물론 생김새는 전혀 다르지만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힘든 저 화려한 분위기가 닮았다.


애인이 마음고생 좀 하겠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경계심이 사라진 일후가 다시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숙형이랬죠?”

“네.”

“이숙형….”


으, 추워. 손가락이 얼어붙는 것 같다. 감각이 둔해진 손가락으로 학교 홈페이지를 뒤적이는데 바로 앞에서 일후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추워요?”


순한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가 온순한 어투로 당연한 걸 물어 왔다. 힐끗, 남자를 쳐다본 일후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뭐.”

“자요.”


그러자 불쑥 남자가 일후에게 핫팩을 건네왔다. 일찌감치 달궈놓았는지 바깥 공기를 만난 핫팩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어쩐지 춥게 입었다 했더니 남자는 핫팩을 들고 있던 모양이다. 역시 나만 추운 게 아니었어. 남자를 향한 인간적인 친근감이 밀려왔다.


“필요 없어요? 춥다면서요.”

“…춥긴 한데….”


친근감은 친근감일 뿐,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핫팩을 받을 이유는 없다. 일후는 김이 올라오는 남자의 호의를 망설였다.


“그럼 써요.”


망설였으나 곧 추위에 굴복했다. 맞닿은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열기가 지나치게 소중해서 일후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후가 단숨에 핫팩을 움켜쥐었다.


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꽁꽁 언 손을 녹이는 핫팩의 열기를 만끽하며 일후는 짧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


겨우 그것뿐인데 일후를 쳐다보는 시선이 한층 선명해졌다. 알고는 있었으나 남자는 어지간히 사람 눈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일후는 마저 홈페이지를 뒤적거렸다.


“전공은 경영인데 내년부터는 법 공부 한다고 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한 건 일후만이 아닌 듯 남자가 갑자기 tmi를 시전 했다. 주어는 불분명했지만 본인의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남자가 말했다.


“오늘도 그거 들으러 왔다고 했어요. 무슨 세미나랬는데. 이숙형 강의실에서 하는 건데 어딘지 못 찾겠어요.”


그럴 만도 하다. 건물이 아닌 강의실 이름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모교생인 일후에게도 이 정도이니 외부인에게는 더 어려웠을 테다. 일후는 남자의 tmi에서 단서를 찾아냈다.


“혹시 로스쿨 관련 세미나예요?”

“아, 맞다. 로스쿨! 우리 유, 아니, 어, 애인이 내년에 로스쿨 들어가는데 벌써부터 엄청 열심히 하거든요. 공부도 진짜 잘해요. 오늘은 이 학교에서 한다고 했는데 어느 건물인지는 못 들었어요.”


애인 얘기였구나.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걸 보면 애인 몰래 마중을 온 것 같은데 보기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다. 게다가 말을 할수록 겉모습과 달리 묘하게 어린 티가 나서 어쩐지 경계가 풀어진다. 일후는 학교 홈페이지에서 법학전문대학원을 찾아 행사 소식을 모아 놓은 게시판에 들어갔다. 그러자 보였다.


“아, 찾았다.”

“헐!”


…깜짝이야. 일후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일후가 남자에게 게시물을 보여주며 물었다.


“외부 세미나가 두 개인데 오늘 아침 10시에 시작한 거 맞죠?”

“네! 네! 맞아요! 아침 10시!”

“그럼 로스쿨 건물로 가면 돼요. 정문 쪽으로 쭉 내려가다가 글로벌… 아니, 저 갈색 건물을 오른쪽에 끼고 좀 가다 보면 바로 있어요.”

“네!”

“신전처럼 기둥이 세워진 건물인데… 알겠어요?”

“괜찮아요! 저 눈 완전 좋아요! 걱정 마세요.”


걱정까진 안 했지만 눈이 좋다니 다행이다. 그럼에도 영 마음이 쓰여 내친 김에 학교 약도까지 보여주자 남자가 알겠다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 떨어지겠네. 일후가 하는 말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귀가 보이는 것 같다.


누구랑 닮았다는 거 다 취소다. 일후가 아는 누구누구와 달리 눈앞의 남자는 말 잘 듣는 강아지를 닮았다. 실제로 일후가 아는 사람은 강아지와는 무척 거리가 멀었다. 멀다 뿐일까. 거진 정 반대에 가깝다.


“형.”


양반은 못 되네. 왔다, 그 놈. 강아지랑은 거리가 먼, 정 반대의 사람이.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채헌이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지 할 말부터 한다.


“아는 사람이에요?”

“어, 그래. 나도 안녕. 이 날씨에 사람을 15분이나 기다리게 한 유채헌아.”

“정확히는 10분이죠. 그래서 아는 사람이냐고요.”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다그치는 목소리가 급하기 짝이 없는데 정작 시선은 일후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다. 채헌은 일후와 함께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일후의 휴대폰만 보고 있어서 어딘가 이상한 그림이 연출되었다.


“이상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왜 형 휴대폰을 보고 있지?”


볼만 하니까 보고 있겠지. 일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채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신개념 커밍아웃도 아니고 설마 캠퍼스 한가운데서 번호를 주고받을까. 대꾸할 가치가 없다. 일후는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일찍 왔네.”


여상하다면 여상한 목소리에 채헌이 뒤늦게 일후를 돌아보았다. 채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아래를 향해 있던 일후의 고개가 위를 향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 보통은 일후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도 언제부턴가 일후가 올려다보는 눈높이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시선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눈을 접어가며 애살스럽게도 웃는데, 작정하고 눈웃음을 쳐오는 통에 배알도 없이 가슴이 설렌다. 정확히는 시각적인 자극에 의한 일차원적인 설렘으로 이조차 오래가지는 않았다.


“와, 5분 일찍 왔다고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수업이고 뭐고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네요.”


아니, 정확히는 오래갈 틈을 주지 않았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채헌의 반응에 일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여러모로 참 한결 같은 새끼였다.


“별로 좋아한 적 없는데.”

“아, 그랬어요? 난 또. 둘이 딱 붙어서 휴대폰 붙잡고 실실 거리길래 당연히 내 문자는 일찌감치 본 줄 알았지. 이제 보니까 내 건 아직 읽지도 않았네요?”


아, 문자. 중간에 채헌에게서 문자가 오긴 했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남이 보면 안 되는 내용도 상당수라서 일후는 채헌의 문자를 받자마자 급하게 알람 창을 날려버렸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한 법이다.


평소 행실이 좋지 못한 누군가가 일후에게 물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해 같은 질문만 벌써 두 번째였다.


“그래서 누구냐고. 아는 사람이에요?”

“아닌데요.”


드디어 대답을 하긴 했는데 일후가 한 건 아니었다. 질문은 채헌이 했는데 대답은 남자가 했다.


“아는 사람 아니라고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방금 전까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는 어디 가고, 못마땅한 얼굴로 삐딱하게 채헌을 쳐다보는 남자가 있다. 못마땅하다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지만 빈말로도 순하다고 할 수 없는 이목구비에 헬멧과 피어싱, 가죽 자켓이 더해지자 긍정적인 느낌을 찾기가 더 힘들었다.


일후가 눈치챈 걸 채헌이 모를 리가 없다. 무엇보다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성격도 한몫했다.


“흠….”


남자의 공격적인 반응이 불쾌할 법도 한데 놀랍게도 채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런 주제에 두 눈은 예쁘게 웃고 있어서 일후의 불길함만 더해졌다. 하지 마, 미친놈아. 일후가 진심을 담아 팔꿈치로 채헌을 툭 건드렸다.


“응? 왜애.”


척하면 척,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은 놈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일후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당황한 건 일후였다. 빼도 박도 못하게 일후의 팔꿈치를 붙잡은 채헌이 별안간 부드럽게 일후를 달랬다.


“밖이잖아요. 나중에.”


저 미친 새끼가…. 어이가 없으니 말문이 다 막힌다. 내가 도대체 뭘 했다고. 불시에 장소 구별도 할 줄 모르는 몰상식한 사람이 된 일후가 붙잡힌 팔을 빼내려 하자 채헌이 도리어 힘을 주며 잡아 왔다.


“가만히 있어요. 잡아줄게요.”

“뭐라는 거야. 평지에서 잡아주긴 뭘 잡아.”

“하하, 없기는. 당장이라도 굴러갈 것 같은데. 얼어 죽을까봐 껴입었어요? 핫팩도 가져왔네? 어디 펭귄이라도 만나러 가요?”


그래. 이런 새끼였지. 일후는 남자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잠깐이지만 이딴 놈이랑 닮았다는 실언을 하다니. 일후는 채헌처럼 일관성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은 새끼다. 좋은 의미로도 그렇고, 나쁜 의미로도 그렇다. 일후가 새삼 감탄하는 사이 사건이 벌어졌다.


“형.”

“…저요?”


남자가 일후를 불렀다. 그것도 형, 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놀라지 않은 건 남자뿐이었다. 당황한 일후가 남자에게 되묻자 남자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형이요.”

“아…. 어, 네.”

“저 사람이랑 친해요?”

“…둘이 아는 사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일후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남자가 턱짓으로 채헌을 가리키는 걸 보니 채헌과 친하냐는 소리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처음 본 너보다는 친하지 않겠니.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황당한 마음과는 달리 도리어 마음만 약해졌다. 남자는 예의 그 강아지 같은 눈으로 가만히 일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생김새와 달리 얌전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꼴이 정말로 말 잘 듣는 강아지 같다. 남자는 기특하게도 채헌에게만 으르렁 이빨을 드러낼 뿐, 일후에게는 순하디순한 강아지에 불과했다.


그랬다. 남자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차별했다.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일후는 남자가 보기에 ‘좋은 사람’에 속하는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채헌은 아니었다. 초면이지만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친구였다. 호의로 점칠된 남자의 첫인상을 수정하며 일후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냥, 뭐. 적당히?”

“아.”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일후의 대답에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한 명은 수긍했고, 한 명은 빡이 쳤다. 일후가 궁금한 건 당연히 전자였다.


안 친하다고 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걸까. 궁금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일후에게는 당장이라도 처리해야 할 채헌이 있다.


“적당히? 지금 말 다 했어요?”

“왜. 안 친한 건 아니잖아.”

“하, 존나 박애주의자 납시었네. 형 너는 친한 것 같은 새끼랑 떡을, 아!”

“미친놈아!”


미친놈한테는 매가 약이다. 들려서는 안 되는 낯뜨거운 단어에 일후가 있는 힘껏 채헌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오, 나이스 킥.’ 이를 지켜보던 남자가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일후의 순발력에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었다. ‘아, 진짜!’ 옆에서는 채헌이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 뜀뛰기를 하고 있었다.


“형 좀 하네요?”


이건 또 무슨 칭찬일까. 엄지손가락을 거둬들인 남자가 주머니에서 또 다른 핫팩을 꺼내 일후에게 건네주었다. 도대체 핫팩을 몇 개나 갖고 있는 건지, 일후에게 핫팩을 건네주고도 남자는 여전히 추운 기색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하나면 충분해요.”

“아닌데. 안 충분한데.”


일후의 거절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펭귄 만나러 가려면 두 개는 있어야 돼요.”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누군가에게는 비아냥의 대상이었던 펭귄이 이 순간 진심으로 귀여워졌다, 강아지 같기는. 일후가 피식 웃어 보이자 남자도 일후를 따라 씩 웃어 보였다. 제 앞에서 펼쳐진 사이좋은 투 샷에 채헌이 진심으로 어이없어 했으나 그마저 곧 묵살 되었다.


“형 너 지금 대놓고 바람 피, 아!”

“미친놈아. 넌 좀 가만히 있어.”

“오. 형 축구 좀 하겠는데.”


저게 진짜…! 악의 없는 조롱에 채헌이 바짝 약 오른 얼굴을 했지만 당장은 정강이의 사정이 더 급해 보였다. 물론 남자가 알 바는 아니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후와 채헌에게 꽤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남자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로스쿨 건물 쪽으로 총총 사라졌다.


“형, 고마워요. 메리 크리스마스!”


아, 그렇지. 깜박 잊고 있었다. 오늘이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다. 워낙 이런 기념일에 감흥이 없는 편이라 날짜를 알면서도 크리스마스와 연결 짓지 못했다. 내면만큼은 강아지를 닮은 화려한 남자가 사라지고, 신경질적으로 바지에 묻은 신발 자국을 털어낸 채헌이 질세라 대꾸해왔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지랄.”

“지랄은 너고, 미친놈아.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딴 소리가 하고 싶냐.”

“먼저 그따위로 군 게 누군데요. 둘이 뭐 하고 있었어요? 이제는 하다 하다 남자 새끼까지 지랄이지, 아주.”


글쎄. 지랄은 네가 더 지랄인 것 같은데. 일후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뒤늦게 채헌의 안부를 물었다. 있는 힘껏 차 놓고 나니 좀 미안한 것 같기도 했다.


“정강이 괜찮냐.”

“괜찮겠어요? 존나 세게도 찼네. 나는 형 못 건드리는 거 알고 이러지, 지금?”


함께한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깨달은 사실이 있다. 채헌은 장난으로도 절대로 져주는 법이 없지만 결국 늘 지는 건 채헌이다. 남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법 없는 채헌이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는 한없이 쉬워지는 것도, 온갖 어른스러운 척은 다 하면서 제 앞에서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도 사실은 전부 다 좋아한다.


좋아하는데 얄미워. 무엇보다 그래서 귀엽다고 하면 내가 미친 건가. 일후는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자신이 걷어찬 채헌의 정강이를 문질러주었다.


“어.”


당연하지. 너는 나 못 건드리는 거 당연히 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모를까. 일후가 채헌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어 보이자 즉각 반응이 돌아왔다.


“아…. 씨발, 좀 귀엽네?”

“배고프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손은 또 왜 이렇게 따뜻…. 핫팩 당장 버려요.”


이 따뜻한 걸 버리긴 왜 버려. 혹여나 뺏길 새라 일후가 소중하게 핫팩을 움켜쥐었다.


“저런 양아치 새끼가 주는 걸 왜 받는데!”


라고 양아치가 말했다. 일후는 살면서 채헌보다 더 양아치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채헌은 눈빛부터 글러 먹었다. 일후는 양쪽 주머니에 핫팩을 하나씩 집어넣으며 태연하게 지껄였다.


“안 오냐.”

“버리라고!”

“안 오면 나 먼저 굴러간다.”


당장이라도 굴러갈 듯 일후가 걸음을 빨리했다.


“그건 안 되지. 형 굴러가면 나는 어떡하라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너도 따라와야지.”


아까부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일후를 뒤따라온 채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두 사람은 함께 크리스마스 장식을 입은 캠퍼스를 걸었다. 일후가 눈 여겨 보지 않아서 몰랐을 뿐, 캠퍼스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둘이 뭐 했냐고요.

길 물어봐서 알려줬어.

역시 클리셰는 영원하네. 그리고? 길도 물어보고 번호도 물어봐서 알려 줬어요? 그러다 내가 왔고?

…넌 애가 진짜 왜 그러냐?

내가 뭐.

애인 마중 왔대. 몰래 온 것 같더라.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그래서요?

…뭐 어쩌라고 미친놈아.


평화로워야 할 크리스마스 이브, 불청객의 등장에 제대로 뿔이 나서 그런지 채헌의 지랄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일후가 한 쪽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냈다.


“할래? 따뜻한데.”

“하하, 장난해요?”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핫팩을 마저 꺼내기도 전에 상큼하게 거절당했다. 하여튼 성질은. 일후가 얼마나 큰맘 먹고 핫팩을 꺼냈는지 알면 저렇게는 못 할 테다. 아니면 다 알면서도 저랬거나. 물론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와아, 황송해라. 남자친구라는 새끼가 다른 남자한테 받은 걸 나한테 다 주려고 하네?”

“내가 언제부터 네 새끼였냐.”

“아니지. 내 새끼는 형 안에 있지. 그동안 싸지른 게 얼마인데 내 새끼 하나 없겠어요?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탁해요.”


미친 새끼. 저 새끼는 진짜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어. 일후는 채헌을 무시한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디 가요.”

“누구세요.”

“그쪽 아니에요. 이쪽으로 와요.”

“…우리 어디 가는데.”

“우리 둘 다 한 번도 안 가본 곳.”

“…….”

“배고프다면서요. 이리 와.”


다른 일도 아니고 식당에 한해서는 절대적으로 채헌을 믿어야 한다. 잠시 망설이던 일후가 순순히 채헌에게 돌아왔다. 채헌은 말없이 그런 일후를 훑어보고 있었다.


일후가 군말 없이 돌아온 걸 보니 배가 고프긴 한 모양인데 식당도 가기 전에 어디로든 도로록 굴러가게 생겼다. 얼어 죽을까봐 저러는 건지 하도 꽁꽁 싸매서 눈만 보이는 일후였다.


패딩 안에는 뭘 또 겹쳐 입었는지 몸선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얼굴이든 몸이든 뭐가 보여야 번호도 딸 테니까…. 채헌은 일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뭘 봐.”


자신이 무죄 판정을 받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본능적으로 채헌의 시선을 아니꼽게 여긴 일후가 사납게 대꾸했다.


“내가 내꺼 보겠다는데 왜.”

“…미친놈아.”

“이리 줘요.”

“뭐를.”

“핫팩.”

“안 한다며.”

“할 거야.”


채헌이 일후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일후의 핫팩 하나를 뺏어 왔다.


“따뜻하지?”

“별로 안 따뜻해요.”

“그래?”


금세 허전해진 빈 주머니를 더듬으며 일후가 나머지 핫팩을 만지작거렸다. 핫팩이 불러온 기대 이상의 효과에 내심 감탄하던 일후였다.


“핫팩 같은 것보다 형 안이 훨씬 뜨겁….”

“미친 새끼야.”


핫팩으로 달궈진 따뜻한 손으로 일후가 채헌의 입을 틀어막았다. 언제나 그랬듯 평소와 같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귀엽고, 얄밉고, 달콤한 둘만의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


찾았다!


오른쪽에 갈색 건물을 끼고서 조금 걷다 보니 신전처럼 기둥이 세워져 있는 건물이 보였다. 저기에 우리 유진이가 있단 말이지. 잘생긴 형이 말한 대로였다. 유진을 잡으러, 아니, 데리러 가는 연호의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캠퍼스에서 우연히 잘생긴 형을 만나기 전까지 연호는 꽤 오랜 시간을 헤매야 했다. 그놈의 이숙형 강의실은 어디에 있는 건지 연호가 아무리 검색을 해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잘생긴 형을 만나기 전에도 몇 번이나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물어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건물도 아니고 다짜고짜 강의실을 물어보는 연호의 질문이 워낙 모호한데다 길에 서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날이 너무 추웠다.


역시 크리스마스라 이건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신기할 정도로 강추위가 찾아오곤 했다. 아니지. 그건 수능인가?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오는 날이 언제였더라. 잠시 헷갈렸지만 연호는 이내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뭐든 어때. 어느 쪽이든 연호와 관련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연호는 수능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연호가 수능을 볼 일은 없을 테다.


단, 크리스마스는 제외하고. 애인이 생긴 연호에게 크리스마스는 세미나에 참석한 애인을 데리러 가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 조금 험난했다는 사실이다. 늘 바쁜 연상의 애인과 달리 연호에게 시간이 차고 넘치길 천만 다행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학교에 나온 것도 짜증나는데 이 추운 날씨에 길까지 물어본다. 연호에게 불려 세워진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여기에는 연호가 말을 건 사람들이 죄다 남자들이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별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그들이 이성이었다면 연호도 조금 더 빨리 미아 신세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무사히 잘 도착했으니 됐다. 연호는 염원대로 유진이 있을 법학전문대학원 건물에 입성했다. 원래대로라면 밖에서 유진이 나오기를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날이 추우니 건물 안에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인지 삭막해 보이는 건물 안에도 곳곳에 성탄절 장식이 걸려 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뭐 하는 날인 건데? 애인을 사귀어본 적도 없거니와 따로 크리스마스를 챙겨본 역사가 없는 연호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도 명색에 크리스마스인지 선물은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연호는 유진에게 줄 목도리와 장갑을 샀다. 막상 사놓고 보니 좀 부족한 느낌이라 큰맘 먹고 케이크도 한 판 샀다. 고로 이제 필요한 건 유진뿐이다!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준비를 마친 연호의 가슴이 콩콩 뛰었다. 연호는 이제 유진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 서프라이즈를 앞두고 있었다.


아, 이래서 다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하는 건가. 세상 사람들이 왜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열광하는지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사람을 더 좋아할 수 있는 명분이 충분한 날, 연호는 제 마음대로 크리스마스를 정의했다. 건물도 제대로 찾아왔겠다, 유진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진 연호가 습관처럼 휴대폰 게임을 켰다. 방금 전까지 핫팩이 들어있던 주머니는 아직도 뜨끈하게 열을 내뿜고 있었다.


연호는 집에서 두 개의 핫팩을 가지고 나왔지만 현재는 총 0개에 수렴한다. 연호가 챙겨온 두 개의 핫팩은 자신을 도와준 잘생긴 형한테 줬다.


원래 예쁘고 잘생긴 건 눈만 봐도 안다고, 패딩에 가려 눈만 내놓고 있는 남자의 상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유진이 바빠서 의도치 않게 남우와 많은 시간을 보낸 연호였다. 못생긴 사람한테 익숙해져 있었던 만큼 연호는 낯선 이에게 길을 묻던 순간 남자에게 숨겨진 비범함을 알아차렸다.


오, 잘생겼다. 연호에게 길을 알려준 잘생긴 형은 안과 밖이 모두 못생긴 남우에게 찌들어 있던 연호의 눈을 개안시켜주었으며, 심지어 착하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신경질적으로 연호를 지나치지도 않았고, 연호를 아니꼽게 훑어보지도 않았다. 추위를 많이 타는 듯 남자는 새빨개진 손끝으로 끝까지 이숙형 강의실을 찾아봐 주었다.


친절해! 착해! 좋은 사람! 연호가 남자에게 핫팩을 내어준 건 순식간이었다. 눈앞의 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연호는 제 핫팩을 나눠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러자 감사 인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라며 저보다 한참 어린 연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연호는 더더욱 감동했다. 그래도 그렇지 처음부터 남자에게 핫팩을 두 개나 줄 생각은 없었다. 없었는데, 연호의 계획이 틀어진 건 웬 불청객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굳이 설명하자면 좀 예쁘게 생긴 불청객이었다. 불청객의 성별도 남자였지만 연호는 개의치 않았다.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남자인 게 뭐! 예쁘면 성별도 가리지 않는 연호다. 이처럼 철저한 외모 감별사 강연호의 역사는 유진을 만나면서 정점에 달했는데, 유진을 처음 만났을 때도 형은 어떻게 이름도 예쁘냐며 개수작을 부리기 바쁜 연호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호가 얼굴만큼이나 (꼴에) 마음을 본다는 점이다. 연호를 도와준 친절하고 잘생긴 형의 친구도 그렇다. 사람이 얼굴만 예쁘면 뭐하나. 마음이 예뻐야지. 연호에게 있어 불청객은 얼굴만 예쁜 빌런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우리 유진이지만. 연호는 자신했다. 세상에 유진보다 예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이렇듯 천유진 때문에 쓸데없이 눈만 높아진 연호가 보기에도 그는 저절로 시선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럼 뭐해. 빌런은 빌런답게 마음이 안 예뻤다. 착한 형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인 거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딘가 묘했다. 그러니까, 음, 어땠냐면….


그래. 이거다. 사람이 좀, 삐뚤어졌다. 잘생긴 형의 친구는 예쁘게 생긴 얼굴로 입만 열면 미운 말을 쏟아냈다. 개인적으로 남우에게 소개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한남우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바를 것 같던데 둘이 친하게 지내면 볼 만 하겠다.


생각만 해도 벌써 재밌는데? 연호는 혼자 실실거리며 신나게 게임을 했다. 예정보다 유진의 등장이 늦어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신기하게도 유진을 기다리는 시간은 하나도 지겹지가 않다. 유진을 만날 수 있다면 이대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끈기도 없는 연호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래도 내가 게임은 좀 하지 않나. 연호가 열심히 아이템을 주워 먹는 사이 저 멀리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줄곧 조용하던 로비가 한층 소란스러워진 걸 보니 뭔가 끝나긴 끝난 모양이다. 연호는 곧바로 게임을 종료했다. 도중에 게임을 저장하겠냐는 팝업창이 떴지만 유진과의 만남을 코앞에 둔 지금 게임은 더 이상 연호의 알 바가 아니다.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연호는 자신이 기다리는 단 한 사람을 찾아 열심히 복도를 기웃거렸다. 강의실 문 앞에서 사람들을 가로 막고 선 것도 아니고. 연호가 한 일이라고는 복도 끝에 서 있을 뿐인데 강의실에서 나오는 사람마다 연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연호가 마주친 얼굴만 예쁜 빌런처럼 연호를 노골적으로 훑어본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도 그럴 게 강의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다. 잘생긴 형도 패딩을 입고 있던데 어째선지 이 건물 사람들은 죄다 코트를 입고 있다. 아씨, 나도 좀 어른스럽게 입고 올걸. 제 딴에는 한껏 멋을 부리고 나온 고등학생 강연호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교복 셔츠라도 입을 걸 그랬나. 내심 후회되기도 했다.


연호가 차갑게 질린 가죽 자켓을 괜스레 잡아 당겨보는 동안에도 유진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혹시 저가 건물을 잘못 찾아 왔나 싶어 몇 번이고 건물 밖을 오갔지만 괜히 찬 바람만 잔뜩 쐬고 돌아왔을 뿐 연호는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았다. 로비에 있는 안내도에도 이숙형 강의실이 나와 있었다.


역시 서프라이즈는 무리인가. 몇 번째인지 모를 방황을 끝내고 연호가 다시 1층 로비로 들어선 순간, 한눈에 알아봤다. 연호의 시선 끝에 익숙한 인영이 걸리었다.


무리 지어 강의실 밖으로 나온 사람들 사이로 머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유진은 강의실 바로 앞에서 사람들이 다 나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고 있었다. 우리 유진이는 진짜 천사인가봐…. 연호가 좋아하는 깨끗한 색감의 니트 차림의 유진은 겨울을 맞이해 특유의 분위기가 더욱 돋보였다. 유진은 한쪽 팔에 짙은 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다행히 목도리는 보이지 않았다. 연호가 야심차게 준비한 장갑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입혀주고 싶어. 유진에게 목도리와 장갑을 둘러줄 생각에 연호의 입꼬리가 춤을 추듯 씰룩거렸다. 핫팩이 없어서 매섭게 느껴지던 겨울바람도,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옷차림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무심하게 연호를 스쳐 지나가던 무성의한 사람들도, 무언의 의미를 담아 연호를 훑어보던 냉정한 눈길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괜찮아. 다 괜찮아. 저기에 유진이 있잖아. 당장이라도 유진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연호가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유진이 혼자 있었다면 진작 달려가고도 남았을 텐데, 마지막 남은 이성이 연호를 붙잡고 있었다.


유진을 기다리면 유진을 만날 수 있다. 연호가 몇 시간이고 유진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였다. 유진을 기다린다는 건 곧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일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연호는 유진이 좋았다. 다정해서, 예뻐서, 착해서. 유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간 지 오래다. 연호는 그냥 유진이 좋았다. 유진이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았고, 유진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유진 씨!”


그리고 세상에는 그런 유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진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 같이 있는 사람들은 유진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유진과 잘 아는 사이인지 온통 연호가 모르는 얘기만 해댔다. 유민이가 어쩌고, 아버지가 어쩌고. 유진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긴 한데 연호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호가 아는 건 천유진이 전부다. 연호가 알고 싶은 것도 오직 천유진뿐이다. 걷는 듯 멈춰 있는 그들의 속도에 지켜보던 연호만 애가 탔다. 그런 연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예쁘게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다.


저래서 끝나기는 하는 건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유진보다 윗사람들 같은데, 서프라이즈랍시고 연락도 없이 찾아온 자신의 존재가 뒤늦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그냥 갈까.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유진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연호는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그냥 가는 건 아쉬운데….


그럼 형한테 물어보면 되지! 치열한 고민 끝에 연호는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아니지, 메시지는 못 볼 수도 있으니까 확실하게 전화를 하는 편이 더 낫겠다.


물론 연호의 전화가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하긴 했는데 아주 잠깐 했다. 유진이 안 된다고 하면 1초 만에 끊으면 되니까! 그렇게 연호는 유진을 바라보며 유진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유진이 저기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신호음이 심장박동 소리처럼 느껴진다.


잠시만요. 멀리서 유진이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유진이 사람들 사이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가 봤다. 보고 말았다.


유진이 웃었다. 휴대폰을 보자마자 오래된 미로를 빠져나온 아이처럼 유진이 웃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유진은 원래도 웃고 있는 얼굴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해사한 미소였다.


- 여보세요.


연호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통화는 바로 연결되었다. 그저 연호 혼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 여보세요? 내 말 들려요?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유진의 목소리에 연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유진이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 없는 연호를 부르고 있었다.


“어, 어. 형, 난데.”

- 응. 알아요. 어디예요?

“형, 앞에….”


있잖아요, 형은 대체 나 같은 게 왜 좋아요? 궁금하지만 차마 유진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까. 연호가 유진에게 숨기는 유일한 비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여운에 연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내 앞에요?

“응.”


데리러 왔다고 똑바로 말할 걸 그랬나. 다행히 연호의 걱정은 걱정으로 그쳤다. 제대로 된 문장도 아니건만 연호의 말을 알아 들은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과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인형처럼 웃고 있던 유진의 시선이 비로소 정면을 향하고, 그곳에서 유진을 기다리던 연호에게 닿았다. 닿고 말았다.


아, 또다. 유진이 웃는다. 연호와 비로소 눈이 마주친 순간, 연호를 발견한 순간 유진이 웃는다. 처음으로 하늘을 마주한 아이처럼 그렇게,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유진이 웃는다.


저 사람이 좋아. 너무 좋아. 이제껏 겪어본 적 없는 벅차오름에 숨이 막혔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유진이 모두를 등지고 연호를 향해 걸어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연호의 세상이 바로 앞에 있다.


“연호야.”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

늘 감사합니다.


오후네시육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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