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는 아닙니다. 그저 한말 배경에 공포영화를 볼 뿐인 삼톡 세계(...)


리퀘하신 분께서는 그저 '공포영화를 보는 찬윱'이 보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뭐를 원하시는지 알았는데 서사를 넣다보니 이상한 게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알아주세요.


약간의 원윱과 성적인 뉘앙스가 있습니다. 공손찬이 죽고 유비가 원소 진영에 의탁할 때입니다.


풍번문답(風幡問答)

바람과 깃발에 관한 질문과 대답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으스스한 소리가 들린다. 등 뒤 방향으로부터 거친 바람이 미친 듯 분다. 빼곡히 붙은 나무들이, 그 가지들이, 잎들이 서럽게 운다. 이 밤, 하늘은 구름이 짙어 달빛조차도 흐릿하고 불빛은 저 멀리에 떨어져 희미하게 점으로 보인다. 다시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새벽에 비가 내렸다가 그친 뒤, 여전히 날은 습한데 밤기운은 쌀쌀하다. 아무래도 태풍이 부는 시기가 다가오는 모양이다. 무성한 나뭇잎 탓에 더 오싹한 소리를 내며 나뭇가지가 거침없이 흔들린다. 꼭 사방에서 원한을 가진 귀신이 이리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오스스 소름이 돋고 눈빛이 자연스럽게 불안해 진다. 이 음산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마땅히 발길을 서둘러 이 인적 없는 오솔길이 아닌 사람이 많은 대로로 가야 한다. 하지만 발목이 꼭 누군가에게 붙들린 듯 움직이지 않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막무가내로 자라 발목까지 오는 잡초들이 그의 낡은 신발에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있다는 것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난 다음에서야 깨달았다. 풀숲 사이에서 우는 풀벌레와 올빼미 소리가 평상시보다 음험하게 들린다. 뒤집어 쓴 후두의 모자를 괜히 다시 꾹 눌러 쓰며 헛웃음을 짓는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사람이었는데.’


불현듯 대학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요동치는 배에 있듯 몹시 불안했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안락했던 열여섯. 가난한 집안의 독자, 홀어머니의 헌신과 기대, 황실의 후예로서의 자신감. 그 현실이 버거워 분노에 가득차 있던 때, 누군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의 상처를 알아보고 꼴사납다 여기지도, 동정하지도 않고 그저 곁에 있어주었다. 지금와 생각하면, 남들보다 사려 깊던 생각에 지극한 연륜의 차이로 선배는 그런 그도 마냥 귀여웠을 터다. 고슴도치마냥 날을 세우고 사방에 화풀이를 하며 다시 상처받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했을 거고. 왜 자신에게 정을 줬는지 그가 살아있을 적에는 한 번도 묻지 못했다. 그저 짐작할 수밖에.


어느 날 선배 손에 이끌려 영화를 보았다. 귀찮다며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렇게 고급스러운 문화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억울하게 모함당해 죽은 충신이 귀신으로 나타나 복수한다는, 유교 관념에 충실한 공포영화였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보던 그도 귀신이 나타날 때마다 움찔거렸다. 소리 지를 뻔한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니, 아예 무서우니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원흉이 귀신에게서 도망치려다 무리에서 떨어져, 정신없이 숲을 헤매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그는 원흉이 어리석다고 욕을 했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보았을 때…….


‘비야.’


생각이 뚝 멈췄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억 속 생각인가, 실제 들려온 목소리인가 구분이 안 된다. 바람이 다시 거칠게 부는데, 나뭇가지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부모와 스승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던 선배는 오래 전 불속에서 죽어버렸다. 이제 그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비야, 많이 무섭니.’


아무래도 몹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는 모자 속에 손을 넘어 두 귀를 꾸욱 눌렀다. 하지만 그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마치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다. 피곤할 법도 하지. 그렇게나 과격하게 정사를 치루고 왔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 같다.


난리 중에 의지하던 의형제들도, 세력도 모두 잃었다. 남에게 의탁해야만 살 수 있는 위태로운 처지니, 은혜를 베푼 상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내주는 게 당연했다. 줄 수도 없는 금은보화가 아닌 이 몸을 바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 그가 먼저 거래를 제의했다. 자신을 보던 상대의 은밀한 욕망을 느끼고.


능숙한 척 웃으며 옷고름을 풀었다. 하지만 결국 그 여유는 상대에게 무참히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찾아간 것은 그였는데, 오히려 상대는 그를 지독한 열락에 적셔버렸다. 그의 온몸을 다 녹여버리는 것으로도 부족한지, 아예 그 자체를 앗아가 버렸다. 눈물을 떨구어내며 애원하던 그 모습을 상대는 어떤 기분으로 보았을까. 자존심이 있었다는 흔적이나마 보이기 위해, 자고 가라는 희롱을 거절했다. 누구의 방에서 이 야심한 시각에 나왔는지 아무도 몰랐으면 했다. 일부러 풀숲이 우거진 외딴 길을 골라 돌아오다 지금의 상황을 만났다.


‘두려움을 느끼는 걸까, 내가.’


바람이 거칠게 불면 나무가 소리내며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 낮에 보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광경에 위축되어 걸음을 못 옮기는 자신이 이상하다. 왜 못 움직일까? 귀신이라도 나올까봐?


‘전 귀신같은 거 안 무서워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사람이 더 무섭죠.’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그때 그는 영화를 보다 시선을 느꼈다. 의자 팔꿈치에 팔을 괸 선배는 그를 보며 피식 웃고 있었다. 영화 내용에 그때부터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보았냐고 묻자 선배는 말했다. ‘영화보다 네 표정이 더 재미있더라. 비야, 많이 무섭니.’ 여태 두려워 덜덜 떨었던 주제, 사람이 더 무섭다고 허세를 부렸다. 선배는 그런 그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중히 받아주는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 ‘나도 사람이 더 무섭더라. 사람은 하지 못할 짓이 없으니까, 그 속을 모르겠더라고.’


그때 등 뒤에서 바람이 무섭게 불었고, 주박에 걸린 듯 서 있던 그가 휘청거리다 끝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간신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 바닥에서부터 보니 세상이 더욱 왜곡되어 무섭게 보인다.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쉽게 일어나기가 어려운 광경. 흙바닥 위에 짚은 손등을 풀잎이 매섭게 때린다.


이상한 일이다. 여태까지 생사를 걸고 수많은 격전지를 지나 왔었다. 맨 눈으로 바로 보기가 힘들 정도로 잔혹한 시신들도 숱하게 목격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을 포함해 지금 이 아무것도 아닌 자연이 너무 무섭다. 어째서? 왜 그는 있지도 않은 귀신을 상상해, 겁에 질려 일어나지도 못하는 걸까.


숲 사이에서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어두워서인지 그곳을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귀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귀신이 있다면 이미 진작 자신 앞에 모습을 나타냈을 터였다. 선배가 자신에게 가졌을 원망을 생각한다면. 함께하며 그가 얼마나 괴로웠든, 적어도 선배는 자신의 가치관 속에서는 그에게 맹목적이었으니……. 이제와 그의 앞에 나타난다면, 오히려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마지막 순간에까지 자신을 저주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비야…….’


그러니까 지금 그가 이렇게 두려운 건, 이 밤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그를 가둘 듯 해서……. 정말 그래서니…….


‘너는 날 죽인 자의 품에 안겼잖니. 정말 내가 늦은 걸까?’





두 스님이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고 ‘바람이 움직인 흔적이다’, ‘깃발이 절로 움직이는 것이다’ 다투었다. 지나가던 혜능 대사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작업곡 Schubert - Piano Trio in E-flat D929 - II. Andante con moto (with score) 


삼톡 유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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