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 Trivia 承: Love





집중호우

국지성 집중호우







"앉게."




어쩐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는 윤기보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주가 더 긴장한 모양새였다. 넌 왜 안 앉아. 아무래도 괜히 윤기에게 말을 전해서 이런 불편한 자리를 만든 것 같다고 자책하던 여주는 제 아버지의 말에 마지못해 윤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갈 수록 이 자리가 불편하고 불안해 죽겠는 건 여주 본인뿐인 것 같았다. 윤기에게 저번에 먹어보니 이게 맛있던데, 가리는 음식은 없나? 하고 묻는 제 아빠나 다 잘 먹습니다. 그럼 저는 그걸로 하겠습니다. 대답하는 민윤기나 어쩐지 자연스러웠다. 혹여라도 제 아빠가 조금만 안 좋은 소리를 하거나 분위기가 불편해지면 당장 민윤기 손을 붙잡고 음식점을 뛰쳐나갈 마음으로 왔던 여주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한 채 바쁘게 윤기와 제 아버지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여주 너는 뭐 할래."

"나, 나도 같은 거."




무슨 메뉴인지도 보지 않고 그저 고갤 끄덕이는 여주의 말에 윤기가 의아한 얼굴로 여주를 바라봤다. 그리고 긴장이 여실한 얼굴을 한 여주를 발견한 윤기가 피식 웃었다. 생선 별로 안 좋아하잖아. 스테이크 먹을래? 제 아빠가 추천해 준 요리가 하필이면 생선구이였던 모양이다. 윤기가 자연스럽게 여주의 메뉴까지 주문하고 테이블 밑으로 조심스레 손을 잡아왔다. 자기도 모르는 새 또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여주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윤기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긴장하지 말라는 듯 여주의 손바닥을 살살 쓸어오는 윤기의 엄지손가락에 그제야 여주가 힘을 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성원이 별말 없이 직원을 불러 와인을 주문했다.




"그래.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예. 시골이 편하시다고 고향 내려가서 지내십니다."

"다행이구먼."




자신을 소외시킨 채 대화를 나누는 제 아버지와 윤기를 바라보는 여주만 어리둥절했다.








"나 윤기 다시 만나."




몇 주 전, 식탁에 앉아 말을 꺼내던 제 딸을 바라본 성원은 대꾸 없이 묵묵히 식사를 했다. 어쩐지 내내 어딘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주가 이 말을 하려고 그랬구나 하고 헛웃음을 삼키며. 혹시 그러진 않을까 싶긴 했지만 정말로 다시 만난다는 여주의 말을 듣고 성원은 참 질긴 인연이구나 싶었다. 늘 품 안의 자식이기만 했던 딸이 이제는 정말 어른이 다 되어있었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성원이 밥도 못 먹고 제 눈치를 보고 있는 딸과 불안한 얼굴로 저를 힐끔거리는 아내를 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자리 한번 마련해라."




자신의 말에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여주를 뒤로하고 성원은 서재로 들어갔다. 이 전날 자신의 선택을 성원은 오랫동안 후회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제 딸에겐 늘 최고만 쥐여주고 싶었고, 그 아이가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이라면 최대한 피해가길 바랐다. 그런 자신의 이기심이 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늘 어리고 약하기만 할 것 같던 제 딸은 언제 그렇게나 커서 저를 붙들고 우는 엄마도, 엄하게 꾸짖는 아빠도 뒤로하고 독하게 자신의 길을 갔다. 삼 년간 자신에게 손 한번 벌리지 않고, 한국에 한번 들리지도 않고 버티던 여주가 한국에 들어온 게 몇 달 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겨우 제 어미의 부탁으로 이주에 한번 마지못해 집에 와 식사만 하고 돌아가는 딸이 괘씸하면서도, 성원은 마음 한구석으로 여주를 자랑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길을 가기 위해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딸 아이의 핼쑥한 뺨은 안쓰러웠지만 또 정말 행복하다는 듯 생기가 도는 얼굴을 한 자식을 어느 부모가 이길 수 있을까. 이젠 정말 홀로서기를 하는 딸을 뒤에서 응원하는 것 말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 딸을 보며 한 번씩 성원은 윤기를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도 형형하던 그 눈빛과 제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그 당당함. 딸아이가 왜 그리도 그 애에게 속절없이 끌렸을지 성원은 알 것도 같았다. 윤기와 헤어지고 여주가 본가에 찾아와 제 방에 있는 짐들을 다 싸들고 나간 후, 성원은 자신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윤기 어머니의 모든 병원비를 본인이 정산하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어쨌든 자신의 말대로 여주와 헤어져 줬으니 나도 도와주겠다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윤기 어머니의 수술 전날, 윤기가 성원을 찾아왔다. 두툼한 봉투 가득 돈을 넣어온 그 어린 청년은 매서운 눈으로 저를 쏘아보며 돈을 내밀었다.




"제 집 보증금, 작업실 보증금, 회사와 계약금 다 모은 돈입니다. 제 어머니 병원비는 제가 냅니다."

"내 말대로 여주와 헤어졌으니 내 보답하는 셈 치고 그냥 받지 그러나."

"죄송하지만 여주가 헤어지길 바라서 그렇게 해줬을 뿐이지 저는 여주 놓은 적 없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때론 자존심을 접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네."

"자존심이 아니라 혹시라도 나중에 여주가 제게 돌아온다고 하면, 그 앞에 발목 잡힐 어떤 것도 없어야 하니까요. 여주가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

"그러니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곤 돌아서는 그 남자애의 눈에서 성원은 독기를 봤다. 성원은 그때 조금 아깝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집중호우








집에 가는 길 내내 여주는 운전하는 윤기를 힐끗거렸다. 그런 여주가 되려 신경 쓰인 윤기가 빨간불에 정차하자마자 고개를 돌려 여주를 쳐다보며 웃었다. 




"왜 자꾸 힐끔거려."

"너 속 괜찮아? 체한 거 아니야? 나 혹시 몰라서 소화제도 잔뜩 챙겨왔는데. 뭐 먹긴 먹었어? 제대로 못 먹었지. 뭐 먹을 거 사갈래?"




대답할 틈도 주지 않는 여주를 보며 윤기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건 오히려 여주였다. 식사 자리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통에 오히려 더 민망했던 윤기였다. 


여주는 제 나름대로 큰 각오와 결심을 하고 나간 자리였으나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식사자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고상하게 칼질을 하며 밥을 먹는 윤기와 성원을 보며 여주는 얼떨떨함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아니 왜 나만 불안하고 자기들은 저렇게 태평해? 




"괜찮다니까."




벌써 몇 번째 대답인지 몰랐지만 여전히 여주는 불퉁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식사 자리를 반대하던 여주였고, 굳이 나가겠다고 밀어붙인 건 윤기였다. 




"윤기야, 나 진짜 그냥 한 말 아니야.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너 굳이 마음 안 편한데 내 부모님이라고 억지로 나가고 만날 필요 없어."

"한여주."




저를 달래듯 이름을 부르는 윤기의 부름을 외면한 여주가 창밖을 바라봤다. 진심이었다. 더는 윤기에게 그런 부담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윤기가 저로 인해, 제 부모로 인해 상처받는 꼴을 보고싶지 않았다. 더는 그렇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여주가 괜히 아득바득 개고생해가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한 게 아니었다. 이젠 본인의 의지 없이 질질 끌려다니는 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민윤기를 아프게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너 나한테 저번에 그랬지. 아빠가 다시 반대하면 인정해 줄 때까지 더 노력할 거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빈다고. 난 그런 거 싫어. 네가 왜 그래야 해? 난 다시는 너 그렇게"

"여주야. 나 어린 애 아니야."

"......"




그런 여주의 마음을 아는지 윤기가 여주의 손에 깍지를 끼고 손등에 입 맞췄다. 저를 지키겠다고 불안해하며 날 세우는 여주가 사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윤기는 여주가 그러지 않길 바랐다. 




"말했잖아. 난 이제 아무것도 포기 안 한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

"여주야."

"왜."

"우리 집으로 갈까."




고개를 돌리면 짙어진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윤기가 보였다. 여전히 제 손에 깍지낀 민윤기가 은근하게 손등을 쓸어온다. 어린 애는 무슨... 대답도 못 하고 눈을 피하는 여주의 귓가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집중호우









설핏 잠이 들었던 여주가 요란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느리게 눈을 떴다.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는 여주를 보고 있던 윤기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여주에게 다시 이불을 여며준 윤기가 침대에서 내려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어떤 미친 새끼가...




"자고 있어."




허리를 숙여 잠기운으로 가물가물한 여주의 눈가에 입 맞춘 윤기가 방문을 닫고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티셔츠를 껴입으며 문을 열자마자 남준이 들이닥쳤다. 스케줄을 하고 바로 왔는지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남준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형!!! 뭐야. 형 잤어요? 이 시간에?"




새벽 두 시에 연락도 안 하고 쳐들어왔느냐고 욕을 하려던 윤기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평소 같으면 한참 깨 있을 시간이었다. 그걸 아는 남준이었기에 이렇게 찾아왔을 테고. 게다가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무음으로 돌려놓은 사이 받지 못한 전화며 카톡이 수십 통이었다. 의아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남준을 보며 윤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왔는데. 급한 일 아니면 내일,"

"형 여자친구 생겼다면서요! 미친, 내가 아까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나 촬영 중이었는데 뛰어나갈 뻔했다니까. 아니 회사 사람들도 한참 전에 알았다는데 내가 몰랐다는 게 말이 돼? 근데 누구를? 아니 어느 틈에? 아니 이거 뻥이죠?"

"미친놈아 그거 확인하려고 이 시간에 찾아왔냐."

"아 그럼 전화를 받든가! 궁금하잖아요!!"

"하..."

"석진이 형 지금 도시 어부 찍는다고 바다 한가운데 있어서 못 왔지 아니었음 그 형도 같이 쳐들어올 뻔했다니까요. 아니 그래서 누군데. 나 아는 사람이에요? 가수? 아니면 작곡가? 같이 작업한 사람인가?"

"아니 나 연애하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저번부터 난리들이야."

"형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나한테?"




그간 내가 형 뒤치다꺼리 한 게 얼만데!!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징징대는 남준을 보며 윤기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저번에 회사에서 여자친구가 생겼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대답하는 게 아니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어 그렇다 했을 뿐인데 이렇게 피곤해질 줄이야. 그나마도 최근에 해외 콘서트를 도느라 남준은 한참 늦게 소식을 들은 터였다. 




"목소리나 낮춰."




방에서 자고 있을 여주가 신경 쓰여 그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지며 윤기가 말하자 그 시선을 따라간 남준의 표정이 의문에서 점점 경악으로 바뀌어갔다. 서... 설마 지금 집에...! 헙! 하고 제 입을 틀어막은 남준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자다 일어난 행색의 윤기도 이해가 갔다. 여태껏 워낙 신경 쓰지 않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던 터라 생각도 못 했던 남준이었다. 아니 근데 대체 누구길래 이 형이 벌써 집엘 들여? 여주와 헤어지고 연애의 ㅇ도 관심이 없던 민윤기에게 갑자기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벌써 집에까지 불렀다는 걸 남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제라도 윤기가 여자를 만난다니 다행이었지만... 형 죄송해요... 당장에라도 나가려는 남준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내젓는데 뒤에서 방문이 열렸다. 아... 또다시 경악으로 물드는 남준의 얼굴을 보며 윤기가 제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 그러니까 형 여자친구라는 사람이 여주 누나고... 아니 누나 언제 한국에... 분명 그때 뉴욕에서 봤는데... 아니 그럼 그때 그 남자가 정호석이라고?"




쉽게 정리가 안 되는지 머리를 쥐어뜯던 남준이 넋이 빠진 얼굴로 앞에 앉아있는 여주와 윤기를 번갈아 봤다. 얼마 전 지민이 자기 선배라며 스쳐 지나가듯 소개해준 안무가가 그때 뉴욕에서 누나 옆이 있던 남자였다니. 대체 무슨 인연이면 이렇게 다시 만나지는지. 뉴욕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둘을 보며 인연은 인연인가보다고 말하던 석진의 말에 남준은 이제는 납득 할 수밖에 없었다. 참 지독하다 싶었다. 헛웃음을 친 남준이 제 머리를 연신 쓸어 넘겼다. 둘이 좋아 다시 만난다는데 제가 뭐라 하겠냐만은 그사이에 얼굴이 빤질 하게 좋아진 윤기를 보니 남준은 좀 억울했다. 사 년 내내 옆에서 그렇게 보약 해다 맥이고 밥 챙겨 먹이던 게 전부 부질없었다.


대박이다 진짜... 연신 감탄사만 중얼대던 남준이 정신 빠진 사람처럼 비틀대며 현관으로 향했다. 윤기 옆에서 어색한 얼굴로 웃고 있는 여주를 보며 남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민윤기가 한창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할 땐 잠시 누나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누나, 돌아온 걸 환영해요."




결국 윤기를 웃게 만드는 누나가 남준은 반갑고, 또 고마웠다.










집중호우










여주가 커다란 꽃다발을 무릎 위에 내려놨다. 유명한 뉴욕 발레단이 내한해 공연하는 백조의 호수는 예매가 거의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할 만큼 어려웠다. 그 넓은 공연장에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매진이었다. 단 한 좌석, 여주의 옆자리를 제외하곤. 조금 쌀쌀한 공연장 온도에 윤기가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여주에게 둘러줬다. 여주는 빈 옆자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곧 공연이 시작한다는 안내에 핸드폰을 전원을 껐다. 




"윤기야, 대박이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발레 주인공이 햇살이라니."

"햇살이라고 하지 마."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대답하는 윤기를 힐끔 본 여주가 헛웃음을 쳤다.




"윤기야, 질투해?"

"......"

"그래서 전에 햇살이 얼굴에 주먹질도 한 거야?"

"그건 그 새끼가,"

"윤기야."

"아니 정호석이... 한여주 넌 왜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해? 그리고 그 새... 정호석 입 싼 새끼. 말 안 한다고 하더니."




씩씩거리는 윤기를 보며 여주가 웃음을 참았다. 몇 달 전 BTS의 컴백 후 휴가를 마친 호석이 뉴욕으로 돌아가며 여주에게 귀띔해줬다. 그때 17대 1로 싸웠던 주인공이 윤기였다고. 그리고 내한 공연을 위해 다시 한국을 찾은 지금까지도 윤기는 호석의 이야기만 하면 펄펄 뛰는 중이었다. 그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투덜대던 윤기도, 그런 윤기를 보며 웃던 여주도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는 마지막 안내 방송에 조용히 무대를 바라봤다. 객석의 불이 하나둘 소등되는 순간, 비어있던 옆 좌석에 누군가 앉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호석도 아닌데 여주는 괜히 심장이 철렁였다. 여주가 옆좌석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대에 불이 들어왔다. 저 사람이구나, 우리 햇살이의 지젤이. 여주는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여주야, 네 옆에 여자 공연 내내 우는데. 이게 그렇게 슬픈 내용이야?"




인터미션 때 의아한 얼굴로 제 귀에 속닥이는 윤기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 여주가 옆자리에 앉아있는 여자를 돌아봤다. 여자는 공연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잠깐 극이 쉬어가는 순간에도 연신 눈물을 훔치는 여자의 마음이 어떨지 여주는 알 수 없었다. 호석은 유연을 봤을까? 밝은 무대에서 어두운 관객석이 보일 리 없겠지만 왠지 여주는 호석이 유연을 봤을 것만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한 사람인가. 자리 바꿔줄까?"

"조용히 해 윤기야. 공연 다시 시작한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여주는 호석을 만나지도 않고 윤기의 손을 붙잡은 채 공연장을 나섰다. 오늘은 굳이 자신이 없어도 될 것 같았다. 늘 죄책감을 얹고 춤을 춘다던 호석의 도약이 어쩐지 오늘따라 더 높고 찬란했으니까.




"정호석 준다고 꽃다발 사온 거 아니야? 안 만나고 그냥 가?" 

"그냥 민윤기랑 데이트할래. 호석이 꽃 안주고."








그 말에 바보처럼 웃어 보이는 윤기를 보면서 여주도 웃었다. 오늘 밤은, 부디 호석이도 행복하게 웃길 바라면서. 











집중호우










여주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숟가락 가득 퍼 입에 넣었다. 머리가 띵할 만큼 차가운 아이스크림은 따듯한 입속에서 들쩍지근하게 금세 녹아내렸다. 코를 훌쩍이며 담요를 어깨에 대충 두른 여주가 다시 한 번 아이스크림을 크게 푸며 티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말 가요 시상식이 한참인 티비에서는 아이돌 가수들이 세상 화려한 옷을 입고 무대를 하고 있었다. 민윤기도 저기 어디 앉아있을 텐데. 카메라가 무대가 아닌 가수 석이나 관객석을 비출 때마다 매의 눈으로 찾아봤지만 사람이 하도 많아서 찾는 게 쉽지가 않았다. 대단하신 남자친구를 둔 덕에 새해 첫날을 혼자 맞게 된 여주는 불퉁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한가득 밀어 넣다가 옆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윤기


지루해 죽겠다

집 가서 한여주 보고 싶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티비로 보고 있어

너 언제 나와?

오 방금 화면에 지민씨 나왔어

오늘 BTS도 무대 해?

마지막에 할 걸

우와 지민씨 저번에 집에서 봤을 때랑 다르네...

역시 연예인

지민씨 그만 봐

ㅋㅋㅋㅋㅋㅋㅋ

왜 연예인 신기하단 말이야

김남준이랑 김석진도 연예인이잖아

젊고 푸릇푸릇한 아이돌이랑은 좀 다르지

그쪽들은 약간 칙칙하잖아...

앞으로 박지민 우리집 출입 금지야

야!! 지민씨가 무슨 죄야!!!

한여주

ㅋㅋㅋㅋㅋㅋㅋ

헐!!!!







여주가 윤기와 카톡을 하는 사이 티비에서는 아이돌 팀의 무대가 끝나고 프로듀서 상 시상자들이 무대로 나오고 있었다. 턱시도를 빼입은 석진이 걸어 나오는 걸 보며 여주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입을 틀어막았다. 헐 김석진이 왜 저기 있어? 후보들의 이름과 얼굴이 호명되고 마지막으로 윤기의 얼굴이 티비에 나오는 순간 여주가 턱이 떨어져라 입을 벌리고 티비로 빠져들 기세로 몸을 기울였다. 어느새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은 안중에도 없었다. 윤기 옆에 앉아있는 남준과, 잠깐 비춰준 BTS 멤버들이 윤기를 응원하는 듯한 입 모양을 해 보이자 관객석에서 난리가 나는 걸 보며 여주가 제 두 손을 부여잡았다. 




"올해의 프로듀서상 수상자는, SUGA. 축하합니다."




윤기보다도 더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던 여주는 석진의 입에서 슈가라는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물이 글썽글썽해져서 티비를 보면 윤기가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처음 받는 상은 아니었지만 여주가 직접 영상을 보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먹먹했다. 주책이라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닦아낸 여주가 티비 소리를 조금 키웠다.


근데 쟤는 상을 받아도 표정이 저래... 옆집 사람이 상을 받아도 저렇게 무덤덤하진 않겠다 싶은 얼굴을 한 민윤기가 마이크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




그 애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그 뒤에 무슨 말이 올지 모두 숨죽였고, 그 기대와 달리 그 애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여주는 눈물을 훔치다 그런 윤기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는 행동이 영락없이 민윤기다웠다. 옆에 서 있는 석진의 황당하다는 얼굴도 봐줄만 해서 깔깔 웃는 여주에게 당황한 엠씨가 무대를 내려가려는 윤기를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슈가씨 그게 답니까? 조금만 더 길게 말씀 해주시죠! 부모님이라던가, 사랑하는 분이라던가 전하고 싶은 말씀 없으십니까? 머쓱한 얼굴로 다시 마이크 앞으로 끌려온 그 애는 잠시 고민하다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도... 여전히 비가 쏟아진다. 금방 갈게."




그리곤 미련없이 무대를 내려가는 윤기를 보며 입술을 깨무는 여주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여 들었다. 창밖의 어두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윤기는 그날 여주가 먼저 잠들고도 한참 지난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식에 끌려가 축하주를 폭탄으로 받아 마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금방 온다며... 아침에 눈을 뜬 여주는 제 옆에서 거의 실신한 채 누워있는 윤기를 째려보며 침대를 빠져나왔다. 새벽에 씻고 누웠음에도 윤기의 온몸에서 술 냄새가 풍길 지경이었다. 그런 윤기가 얄미웠지만 그래도 여주는 윤기를 위해 콩나물국을 끓였다. 잠시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으로 겨울바람이 불어와 하얀 커튼이 휘날렸다. 콩나물국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쯤 여주의 등 뒤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허리에 익숙하게 휘감기는 두 팔과 목에 파묻히는 윤기의 고개에 여주가 윤기의 손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너 술 냄새나!"

"한여주..."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화를 내려다가도 마음이 약해진 여주가 윤기의 머리칼을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속은 괜찮아?"

"응."




여주가 제 목에 쉴 새 없이 입 맞추는 윤기를 겨우 떼어내 테이블에 앉히고 상을 차리자 윤기가 숟가락을 들고 미안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미안. 진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인간들이 놔주지를 않아서. 윤기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던 여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가 등 뒤로 무언갈 숨기며 나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를 보는 윤기에 입술을 삐죽이며 어제 준비해둔 꽃다발과 선물을 내밀었다.




"축하해 민윤기. 어제 사서 꽃이 조금 시들었다."




그런 여주를 보며 웃음이 터진 윤기가 꽃다발과 함께 건네진 길쭉한 상자를 열었다. 윤기의 취향을 고려한 밑에 브랜드 로고만 작게 수놓아져 있는 심플한 넥타이였다. 




"너 나중에 사장님 되면 넥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아직 계약 끝날라면 멀었는데. 이것도 행운의 부적 같은 거야?"

"응. 앞으로 중요한 계약 같은 거 할 때 이거 매고 가."




그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를 마주보며 여주도 웃었다. 




"윤기야, 우리 밥 먹고 오후에 산책가자."

"그래. 그러자."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에 장 봐와서 저녁엔 수제비 만들어 먹자."

"응."




늦잠을 자고 일어난 주말의 늦은 오전, 겨울 치고 따듯한 날씨와 앞에 앉아 기분이 좋은 듯 발 장난을 치며 웃고 있는 한여주. 윤기는 밥을 먹다 말고 그런 여주를 한참을 빤히 쳐다봤다. 




여주야, 너는 알까.

어느 순간부터 내 행복의 기준이 너의 행복이 되어 버렸어. 여주야, 그래서 나는 늘 그렇게 살 거야. 네가 행복할 수 있게 언제나 네가 사랑하는 민윤기의 모습으로 살거야. 그러니까 우리 온 힘을 다해 행복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조금씩 무뎌지고 빛바래도, 언제나 내겐 단 하나 절실할 너일 거야. 이제 피할 새도 없이 내리는 비에 발을 빼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뒤늦게 우산을 써도 이미 온몸이 젖어든 나는 그마저도 그저 좋았다. 우리 쏟아지는 빗속에서 함께 춤을 추자. 서로를 끌어안고 체온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자. 여주야, 너와 함께라면 쏟아붓는 폭우도 무섭지 않을 나는 내일도, 또 내일도 여전히 너를 사랑할 모양인가 봐.







집중호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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