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월의 종언 6.0까지의 전반적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2년 7월에 작성하다 말았네요. 그냥 공개합니다


-

게임에 대한 감상

팔로워 공개로 걸어뒀던 후세터 글에 그런 말을 했었거든요 첫 출항때 이미 질문과 답이 나왔다고. <너는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절망일지 희망일지)나아가야 한다> 이 질답 말이에요. 왜 사는가? 에 대한 질문과 답은 모든 학자와 예술가들, 창작하는 사람들이 천착하던 주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주제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고 기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질문과 답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서요. 

지만지 드라마가 번역한 평론가(

저는 지금부터 세상을 향해 메스꺼운 것을 확장시키는 예술가 군대에 지원한 방구석 예술 학위자처럼 굴겠습니다(진짜 예술가분들! 죄송!). 사실 제 투덜거림보다 이 지만지드라마가 2019년에 번역해서 내놓은 희곡 <비평가>를 읽는 게 훨씬 유익하고(작가는 후안 마요르가입니다) 환상에 대한 제 태도를 이해하기에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얼마전엔 연극도 올라갔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부터 판타지가 판타지라서 화를 낼 겁니다. 

미친 인간인가? 

네.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라는 용어가 있더군요. 게임학이 ludology(라틴어로 교육, 게임을 뜻하는 ludus와 -ology의 합성어라고 하네요 출처 : 검색엔진 자동완성 위키백과)니까 루도내러티브는 게임적 서사? 게임학적 서사? 뭐 아무튼 누군가 공신력을 더해주기 전까지는 제 마음대로 부르겠습니다. 바로 게임의 메시지와 게임의 플레이라는 행위 자체가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희망과 연속, 절망의 수용과 성장, 평화와 합일인데 플레이어는 던전에 가서 야수를 물리치고 레이드 보스를 잡아야 합니다. 물론 파이널판타지14는 중간중간 선택지를 가장한 대사들을 몇 가지 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이 준비해놓은 이야기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는, 정말로 사소한 선택지일 뿐이죠. 보통은 게임의 이러한 구조에 대해 우리는 암묵적 합의를 거칩니다. 그래, 게임이 어떻게 무한한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겠어. 시공간의 원자들조차 확률적이고 우리는 관측하는 순간 결정되어버리는 값만을 알 뿐인데...

하지만 이렇게까지 선택지를 주는 '척'하는 것은 효월의 종언까지 와서는 저를 방구석 비평가로 만들게 합니다. 대체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왜 주는 겁니까? 빛의 전사를 무대에 올릴 거라면 그냥 말하게 하면 됩니다. 굳이 쓸모없는 꿍얼거림을 덧붙이는 선택지(혹은 위대한 선택지)를 만들어서 마치 선택에 따르는 결과가 있는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NPC 반응 한두가지가 달라질 뿐이며 연극에 올라간 저는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제 입장을 골라야만 합니다. 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한다와 껄끄럽지만 한다. 에서요. 저는 거의 연극을 보는 듯이 많은 대사량을 들으며 누워있는데 갑자기 와서 클릭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이 안 되니까 클릭을 하러 갔는데 선택지가 있으나마나한 헛짓거리라 게으른 저는 누워있는 시간을 방해하는 선택지를 욕하기로 했습니다. 그냥 제 캐릭터의 신념이나 결정, 주인공이 해야할만한 말을 하게 만들면 되지 왜 그걸... 이건 근데 x를 눌러 조의를 표하기 등으로 이미 많이 얘기한 거니까 넘어가겠습니다 뭐 클릭이 재미있을 수도 있고 새로운 텍스트와 반응이 나오면 도파민이 무한생성되는 플레이어도 있겠죠. 저도 그중 하나인데...

이 모든 선택들이 진짜 '선택'이 되는 순간을 위한 극적 장치였다면 좋아했을 겁니다. 사실 그걸 기대했어요. 게임이 내가 하고싶은 말이든 하기 싫은 말이든 이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 그 자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곡예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마지막에 걸어가면서 모두가 혼자가 아니라며 말을 걸어오는 연출은 제게 거의 알러직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흘러나오는 bgm... 장엄한 희생... 절망보다 많은 희망...(그만. 그만하라고. 제발 그만해) 그런데 꽃이 등장해서, 그리고 고대의 인간들이 등장해서 어디어디가봤냐?(픽시 : 원초충들은 원초세계에있어라 멋대로 숫자붙이지말고)(저기요. 발견되기 이전에도 있었고존재했거든요?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국의 환상? 미친)

제가 원한 건 질문이지 답을 강요하는 선형적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비장하고 감동스러운 연출로 엘피스를 빠개시는 베네스 님께서는 아름다우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비장함을 느끼지 못하고 대신 그렇게 고통받지 않는 이들을 희생시켜서 이어간 인류의 의지를 제 세계에 적용시키다가 심각한 오류로 전두엽이 꺼졌습니다.

하이델린은 자비로운 신이셨죠. 에메트셀크는 이해할 수 있는 인간 같고요. 그리고 저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무력감과 허탈함이 느껴졌죠. 마음의 힘으로 일어난 일들, 종교적 수난으로 비춰지는 베네스의 숭고함 속에는 전쟁과 기아, 불안과 공포, 고통이 깃들어 있었겠지요. 저는 질문했습니다 : 오로지 존재하기 위해서만, 그러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만 세계에 고통을 창조해낼 수 있는가?

저는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세계무역은 불공평함을 일으키고 양적완화 이후에 이어지는 긴축은 공황을 몰고 오고 있는데 전기를 낭비하며 이런 글이나 쓰는 게 세계구적인 불행이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보는 세상은 고통과 전쟁을 만들어내서까지 지속시켜야 하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이테리스가 현실의 은유가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지향점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된다면 이 스토리는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하이델린은 영웅을 찬양하고, 영웅의 마음은 세계를 이으며, 신인 줄 알았던 고대의 인간은 완벽을 버리고 미래를 응원합니다. 현실과 닮은 점이 있다면, 바로 누군가의 마음과 의지는 세계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만 그렇지 않은, 영웅이 아닌 이들의 의지는 아주 미약하고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이겠지요. 그리고 결정적 차이점이 있습니다. 고통이 덮여 있는 오멜라스가, 아주 소수의 이들만이 불행한 엘피스가 있었다는 겁니다.

헤르메스는 '잘못' 태어난 개체들을 보며 날 수 있게 '돕는다면' 된다고, 제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정의 과정 없이 오류로 태어난 존재들을 고통 없이 제거하는 대신에 교정하고 '돕는' 일이 그 세계에서 선량하다고 말해질 수 있을까요? 탄생 자체가 그저 관념인 세계에서 죽기 싫어하는 마음을 공감한다면, 탄생은 끝을 내포하고 영원은 없으니 탄생과 판단 자체가 폭력이 아닐까요? 제가 창조생물 번역기를 해보겠습니다 : 미친. 역지사지하지말고 그냥 죽여라. 내가 너랑 같니? 그건 그냥 자기만족이고 투영이야.  *저는 이런 이유로 동물의 입장에서 안녕하새오. 인간 좋아. 이렇게 말하는 인간 찬가를 매우 싫어합니다. 제가 장애인이고, 도움을 주는 비장애인에게 감사하다는 만화를 비장애인이 그렸다고 생각하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는데 그건 공감이 아니라 그냥 투영입니다. 삶충동이라는 본능을 이길 만한 고통이 존재하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게 세상과 본 생명체에게 나은 삶이 분명히 존재합니다-이건 제 억지라서 설득의 영역이 되지 않습니다 삶이 얼마나 좋고 제 논리가 일반화되면 왜 안 되는지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어느정도 잘못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머리에 문제가 있어요. 사회성에도 문제가 있고 공감 능력에도 문제가 있는데 여러 화학 물질과 사회적 도움으로 살아 있습니다. 도와준 화학 물질과 사람들에겐 고맙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잘못 태어난 저의 존재를 고통 없이 삭제시킬 수 있었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선택지가 있었더라면 주저 없이 삭제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극복하고 노력하고 감사해도, 배제와 소외에서 조금 벗어난다 해도 잘못 태어난 것 자체가 남긴 고통이라는 자국은 너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고통 덩어리로 만들어 저와 같이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만 태어나게끔 하고, 서로 싸우고 소외시키고 분쟁과 기아를 일으키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수용소 문학을 좋아합니다.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생을 이어가는 하찮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수용소에 집어넣지는 않을 겁니다. 애초에 그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할 방법이 있다면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겁니다. 그저 그럴 방법이 없어서, 전쟁 이후에 인류는 인류의 역사를 보는 방법을 진보에서 완전히 바꿔놓기도 했습니다.

결국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꽉 닫힌 답은 제게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 이래로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말한 것이 폭력의 총체임을, 우리가 이뤄온 것이 진보가 아님을 어떤 사람들이 말했고, 인구수와 세계의 1인당 GDP는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잘 하고 있나요? 행복한가요? 그저 숨을 쉬고 물건을 사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이는 세계가, 착취와 불평등 아래에 있는 이 세계를 그렇게 칭찬해야 하나요? 그 칭찬의 이유가 심지어 감정(죽고 싶지 않아)의 세기와 정도 때문이라고요?

누군가가 저를 잘 살아왔다고, 힘든 과정 속에서도 잘해왔다고 칭찬하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이게끔 하는 구조에 가둬 놓고, 고통받게 하면서 그 고통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야기에다 대고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아가고, 얘기하고, 화합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언제?) 존재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보고요?

고통의 이야기는 듣기 싫은 이유를 대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합니다. 비극은 희극보다 좋거나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게 제 삶일 때,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고통을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 결론을 내고 있는 걸 보고 있어야만 하는 게, 그게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는 게 싫었습니다. 그게 제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고, 이런 이유 때문에 판타지를 보지 못한다면 다른 것도 보지 못할 텐데 ㅉㅉ... 이렇게 불쌍히 여기셔도 맞는 말입니다.

근데 암흑 물질이 정동이라는 건 너무 제게 커다란 타격이네요. 저는 타인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해결책을 떠올려도 세계는 너무나 두루뭉술하게 생겨나 있어서 무기력함을 느끼는데 환상 세계에서는 정동의 풍부함이 씨발 능력이라니...인간이 약하지만 인간이 감정적이기에 감정이 짱이라고 찬양하는 걸 공감빠개미로 태어나서 사회에서 개 뚜들겨맞고 자란 제가 보기에 영 좋지 않습니다.

정동의 풍부함이 인간다움이고 착한 거냐? 그럼 니네가 만든 세상은 왜 이런데? 다 착한 사람들인데 왜 여전히 식량은 넘쳐나지만 기아로 죽고 자살하고 차로 누군가를 치고 노동시키다 죽이냐고.

제가 판타지 세계가 꼭 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가상의 세계에서도 캐릭터들이 행복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뒤나미스는 저를 너무 화나게 만듭니다. 애초에 뒤나미스인 것도 짜증나는데 그게 나타내는 것도 짜증납니다. 베네스 님은 숭고하시고 짱이시고 아름답지만 저는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켜는 대신 꿍얼대고 껐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토리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데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소외된 기분은 별로 좋지 않고, 고통에 대해 결론을 내리면서 제 결론을 통째로 비난하는 이야기는 슬펐습니다. 항상 혼자가 아니라는데 저는 교정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혼자였고요.

-끝-


안녕하세요?

굿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