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을 하지 않는 토요일, 오전, 태현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검색하는 듯 마우스 휠 소리만 계속해서 방 안을 채우고 있었고, 몇 번의 클릭소리가 나긴 했지만, 곧 다시 마우스 휠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역시 고졸은 잘 안 뽑네. 뽑아도 돈을 적게 주거나…'


 충분히 예상되었던, 뜻밖의 고백을 명인으로부터 받고,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굴기에는 이제 막 20살이 된 태현에게는 조금 버거운 일이었다. 봄이가 슬금슬금 태현과 명인의 눈치를 보더니 싸웠냐고 물어오기까지 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마땅한 곳은 나오지 않았다. 벌써 20페이지가 넘는 채용공고를 보았고, 알바자리까지 들여다봤지만, 단 1개월치의 월급만 받았음에도 그 연봉을 기회비용으로 포기하기는 힘들었다.


 '뭐, 괴롭힌다고는 안 했으니까… 실제로 평소랑 똑같았고.'


 결국 태현은 자기합리화를 해버렸다. 하지만 그 자기합리화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며칠째 틈만 나면 채용공고를 들여다봤다. 


 물론 자기합리화라고 하기엔 명인은 평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날의 일이 꿈인 듯 싶을 정도로 명인은 특별히 태현을 차갑게 대하지도, 끈적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태현은 명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럴 때 주변을 둘러보면 명인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명인은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해맑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이마의 키스에 대한 본심을 드러냈기때문인지, 도리어 신체적 접촉은 피하려는 듯 명인은 일정 사정거리 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태현은 채용공고를 보면서 오히려 현재 직장의 좋은 점만 깨달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태현의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뭐해?"


 "우왓!"


 태현은 정말로 놀란듯 어깨를 크게 들썩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귀여운 얼굴로 티없이 순진하게 웃으며 태현을 내려다보고있는 진성이 서있었다.


 "뭐야… 찬별이 왔냐…"


 태리나 체리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태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해? 채용공고는 왜 보고있어?"


 진성이 상체를 기울이며 의도적으로 태현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태현은 그 의도를 알고 의도적으로 몸을 훽 돌려버렸다.


 "그냥."


 "너 지금 일하는 회사 그만 두려고?"


 진성은 포기하지 않고, 태현을 뒤에서 팔로 감싸 안으며 얼굴을 태현의 어깨위에 올려두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현도 피하지 않았다.


 "역시 그 변호사가 짜증나는 거구나?"


 생글생글 기대감을 가득 실어 진성이 물음을 던졌다.


 '짜증난다기 보다는…'


 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성은 태현의 침묵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했다.


 "그럴 줄 알았어. 수상하게 채용조건이 좋더라니."


 "……"


 반박하지도 않았지만 자기 말이 맞다는 듯 우쭐하는 진성을 보고 있자니 불뚝하는 심사가 일었다. 태현은 채용공고 페이지를 닫으며 뾰루퉁해져서 말했다.


 "그만두지 않을 거야."


 "엥?"


 "안 그만 둔다고."


 "왜애~? 그럼 채용공고는 왜 봤는데?"


 "그냥 본거야. 보통은 어떤가 싶어서."


 "보통을 왜 찾아보는데? 역시 뭔가 꺼림칙한 게 있어서 그런 거잖아."


 "……"


 평소에는 무신경하고 둔한 진성이지만, 태현의 일에 관해서만큼은 순식간에 빈틈을 찾아내고 그것을 공략해온다.


 "일하는 데는 좋아. 변호사 님도 잘 해주시고."


 일부러 이 변호사를 언급하지 않은 건 석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석주가 고맙다고까지 말해줬는데, 특별히 스트레스조차 되지 않는 명인의 시시한 집적거림따위로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무슨 이유로 그만두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건데? ‘남자 상사가 꼬셔서 그만두었습니다.’ 라고 말 할 수 있겠어?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런 근성없는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태현 군은.


 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그만두면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태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진성은 그제야 걱정된다는 듯 태현에게 물었다.


 "일이 많이 힘들어?"


 "학생 때 보다는 피곤하지."


 "거기 직원들은 어때? 여자도 있지?"


 "있지."


 "예뻐?"


 "음… 예쁜 거 같은데?"


 "너 노리고 있는 건 아니지?"


 "미쳤냐. 나같은 건 남자로 봐주지도 않아."


 새삼 봄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재차 상처받는 태현이었다. 물론 봄이가 말하는 게 석주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누님이고 뭐고 아저씨한테 먹히게 생겼단 말이지.


 ……


 생각해보니 그랬다. 이 변호사가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이 변호사의 제안에 대해 일말의 고민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변호사에 수입도 장난 아니고. 태리랑 체리를 대학까지 보내고 취업까지 뒷바라지 하려면 결혼까지도…


-어른들의 세계는 다 그래. 특히 소득이 높을 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일 수록, 기득권일수록 더 그렇지.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결혼도 한다고?


 뭐가 파렴치한 짓이라는 건지. 어차피 이 변호사가 여자였으면 이런 고민따위는 애초에 하지도 않고 결혼까지 노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분식집에서 말했던 것 처럼 태현은 평범한 연애라든가 평범한 결혼이라든가 포기한지는 오래였다. 그렇기때문에 태리와 체리의 뒷바라지를 해야하니까 라는 건 굉장히 허울 좋은 핑계였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든가 소중한 사람이라든가 어차피 그 사람도 불행해질 것이 뻔한데. 아니,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이 불행해질 것이 뻔하다.

 결말이 100% 예측되는 일에 무모하게 도전하고, 시도는 했다며 정신승리하는 것은 태현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 


 자기혐오의 바다에 빠져 골똘히 자신만의 세계에 매몰되어 있던 태현은 문득 진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생각 하는데?"


 쭉 태현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드디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자, 진성은 태현이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눈웃음을 흘리며 질문을 던졌고, 그런 식으로 대놓고 끼부리는 진성과 무방비하게 눈이 마주치자 태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아무런 대화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몇 초, 아니 몇 분, 몇 십 분이 흐르는 것 처럼 시간의 팽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진성아! 태현아!! 가자!!!"


 진성이의 모친의 부름이 두 사람만이 존재하지 않던 세계에서 공간의 공백을 깨뜨렸다. 태현과 진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옥탑방에서 나왔다. 진성이의 모친이 옥상의 철문을 잡고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성은 당연하다는 듯이 옥상을 빠져나가 계단을 내려갔고, 태현도 당연하다는 듯이 진성이네 아주머니가 잡고 있는 문을 대신 잡아주고는 먼저 내려가시라며 손짓을 했다. 그런 태현을 보며 진성의 모친은 한탄하듯이 말하며 계단을 향했다.


 “정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태현이랑 다르다니까.”


 “아, 또 뭐가-”


 “태현이 봐라. 엄마가 문 잡고 있으니까 대신 문 잡아주잖아. 근데 너는 그걸 홀랑 내려가버리니? 정말 너~ 남자가 여자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으으- 시끄러! 자기가 늦은 주제에 민망하니까 나한테 잔소리하네.”


 “어머~ 오랜만에 태현이랑 데이트인데 이쁘게 하고 가야지~”

 

 “아빠랑 나도 있고, 태리랑 체리까지 있는데 데이트는 무슨. 애초에 아줌마가 이뻐 봤자지.”


 “태현아, 진성이 너무 못되지 않았니?”


 “그러게요. 아주머니는 항상 예쁘신데.”


 태현의 말에 진성이네 아주머니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내 태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역시!!! 태현이 밖에 없어!!!”


 “빈말인게 뻔하잖아!!!”


 진성이 태현을 끌어안고있는 모친을 보고서 곧장 태현에게서 떼어놓으며 외쳤다. 자신의 모친이라도 아무튼 여자고, 태현에게는 타인이니까.


 1층으로 내려가자 7인승 SUV앞에 진성이네 부친만이 서서 세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리와 체리는 이미 차에 탑승한 것 같았다. 진성이의 모친은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어 주책맞은 소리를 했다.


 “근데~ 태현아, 우리까지 끼는 건 좀 비싸지 않니? 그냥 태리랑 체리랑 셋이서만 먹지.”


 “괜찮아요. 하나도 안 비싸요. 월급 많이 받거든요.”


 “그래도, 첫 월급 선물은 내복정도가 좋아. 전통적이고…”


 “아, 저는 첫 월급으로 가족이랑 외식하고 싶었거든요.”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유희거리도 되지 못 하는 이 관습적인 대화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태현이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무거운 분위기를 참기 힘들었던 진성의 모친은 다시 한 번 진성을 희생양으로 삼아버렸다.


 “하아… 진성이가 태현이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닮았으면…”

 

***


 진성의 가족이 외식을 할 때 자주 가던 고깃집으로 갔다.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무턱대고 모르는 곳으로 가봤자 6인분의 한 끼 예산을 추정하기도 힘들 뿐더러, 항상 얻어먹던 곳에서 대접하는 입장이 되고싶다는 보상심리도 어느 정도 있었다. 


 늘 그렇듯이 진성의 가족과 외식을 할 때도 태현은 편하게 있지 못 했다. 항상 얻어먹는 입장이었던 만큼 반사적으로 눈치빠르게 움직였다. 태현이 다른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 바지런히 움직이는 건 두 동생들때문이라기 보다는 진성의 부모님과 진성의 탓이 더 컸다. 


 본래 태현은 주위의 생각만큼 동생들을 많이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태현이 움직이지 않아도 체리가 움직여주었기 때문이었다-당연하지만 태리에겐 이럴 때 움직이는 눈치랄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진성의 가족과 밥을 먹을 때면 진성의 부모님이 딸처럼 생각하는 태리와 체리를 챙겨주느라 체리도 그 막내 딸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어리광을 부려야했고-당연하지만 태리는 처음부터 역할이랄 것도 없이 평소와 똑같이 천진난만했다-, 덕분에 태현은 이씨 집안의 가상의 장남으로서 이 촌극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진성의 부모님 태리와 체리의 앞에 고기를 수북하게 쌓아두었고, 태현은 그 고기들을 다시 진성의 부모님 앞에 두었다. 


 "태현이 먹고 있어?"


 평소에는 태현에게 어리광을 부려대는 진성이지만, 이럴 때는 이상하게 태현을 신경써주었다.


 "어어-"


 대충 대답을 하며 고기를 뒤집고 있자 진성이 직접 쌈을 싸서 태현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태현아, 아~"


 "아, 아냐, 됐어! 찬별이 너 먹어."


 당황한 태현이 진성의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거절했고, 그 모습을 본 진성의 모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성아, 엄마를 좀 그렇게 챙겨봐-"


 "엄마는 태현이가 챙겨주잖아. 그러니까 태현이는 내가 내조해야지."


 "어이구, 그러셨어요? 아주 현모양처 나셨어."


 "그치?"


 진성의 모친의 비아냥에도 진성은 헤헤 웃으며 눈치없이 대답했다. 


 "'그치?'는 무슨 '그치?'니? 니가 아직도 여자애인 줄 알아?"


 "아, 뭐 어때? 애초에 딸로 키운 건 엄마잖아."


 "내가 일부러 그랬니? 됐다… 태현아, 아줌마 많이 먹었어. 태현이 먹어~"


 진성과 입씨름을 하던 진성의 모친이 약간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태현에게 말했다. 


 "아뇨, 아줌마… 어라?"


 진성과 진성의 모친의 대화를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고기를 굽다보니 어느새 진성의 모친 앞에 고기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진성이가 해야할 효도를 태현이가 대신해주는군."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진성의 부친이 농담처럼 한 마디 거들었고, 태현은 굳어져가는 얼굴 근육을 애써 이완시키며 억지로 웃음을 흘렸다.

 

 "하하…"


 ***


 식사를 마치고 진성의 가족과 태리, 체리를 내보내고 태현은 영수증을 들고 카운터 앞에 섰다.


 "해당 테이블은 결제 되었습니다."


 "네?"


 캐셔의 대답에 태현이 갸우뚱 하고 있자, 뒤에서 누군가 태현의 어깨를 감싸며 밖으로 이끌었다. 진성의 부친이었다.


 "태현아, 가자."


 "어? 저기…"


 진성과는 다르게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진성의 부친이 힘으로 이끌어내니 태현은 속절없이 끌려가버렸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진성의 부친이 태현을 감싼 팔을 풀어주고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도 아들이 첫 월급 타면 축하 외식 하고 싶었거든."


 "……"


 목구멍 어귀까지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태현의 목을 죄어왔다. 가짜라고 할 지라도 혈연을 초월해버린 하해와도 같은 가족애는 태현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수심이 깊었다. 그렇기에 그 심해 속으로 빨려들어 갈수록 기압은 비례하여 태현의 폐부를 압박해왔다.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붙잡으며 태현은 고개를 숙였지만, 태현의 이성보다는 감정이 더 빨랐다. 그런 태현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진성의 부친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태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이제 봄이니까, 아저씨는… 내복은 됐고, 속옷이나 사줘."


 "…네…"


 진성의 부모님을 진심으로 부모님처럼 생각한다. 아니, 양친이 없기에 이미 부모와 마찬가지다. 정말로 고마운 분들이고, 평생을 다 갚아도 모자를 은혜를 입었다.


 가까스로 눈물을 그친 태현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말끔해진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성의 부친과 함께 건물을 나왔다. 맑은 날 건물안에 있다 밖으로 나오니 2월 답지 않은 청량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건물 앞 주차장 한쪽에 진성 가족의 SUV가 주차된 차 안에서 진성의 모친은 보조석에 앉아 뒷좌석에 앉아있는 태리, 체리와 즐거운 대화를 하는 듯 꺄르르 웃고있었고, 진성만이 차 밖에 서서 태현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태현아, 빨리 와아-"


 정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 한 행복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억지로 멱살잡혀 끌려들어온, 눈 앞에 마주한 꿈처럼 가짜 같은 이 현실이,


 태현은 그 무엇보다 혐오스러웠다.



 


 생각해보니 태현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 세상에는 내 불행을 먹고사는 악마가 있다 라는 말을 <월하의 연인>의 조영재같은 애들이 말했으면 명인 아조시는 영재한테 관심은커녕 극혐하면서 분식집을 뛰쳐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물론 그뉵그뉵이 취향인 분들은 그게 스토리 진행상 전혀 문제가 없으시겠지만요!


 아무튼, 얼굴이, 전부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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