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완전히 시간 낭비야."

데미안은 녹이 슨 쓰레기통 뒤로 몸을 숨기며 투덜거렸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블랙마스크의 본거지로 직접 쳐들어가는 것이 나았을 걸. 그는 발 옆을 지나는 커다란 시궁쥐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얼핏 보면 고양이로 착각할 정도로 큰 쥐는 사람의 존재는 아랑곳 않고 벽에 기대어 세워진 쓰레기 봉투를 갉기 시작했다.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어째서 이런 싸구려 클럽의 스트리퍼가 그런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거야?"

"그냥 스트리퍼가 아니라 애인이라고. 클럽 사장이 알면 안돼서 둘 다 관계를 숨기고 있었지만..."

골목 안으로 돌아오던 제이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믿음을 좀 가져봐."

믿음이 가야 말이지. 데미안은 작게 투덜거렸다. 기본적으로 그는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쉽게 믿지 않았다. 친아버지인 브루스를 믿기까지 거의 일년 가까이 걸렸고, 고든 서장과 GCPD에 대해 약간의 신뢰를 가지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그런 그에게 처음 만난, 크라임 앨리에서 노숙하는 꼬마의 말을 믿으라는 것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눈을 감고 옥상에서 떨어지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애인이 있었다면 내가 알았을 텐데."

"밀수품이 들어오는 날짜가 바뀐 것도 몰랐잖아."

제이슨은 데미안 옆의 쓰레기통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걸 열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데미안은 인상을 쓰며 제이슨을 보았다. 소년은 데미안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검은 플라스틱 뚜껑을 열었다. 밀봉 되어있던 통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눅눅한 악취에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걸 지금 열어야겠어?"

"배고픈 걸 어떡해?"

"세상에." 데미안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해서 음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걸로 배를 채운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암살자 훈련을 받으면서 어느 상황에서도 굶어죽지 않을 식성을 길러야 했다. 라자루스 섬의 정글에서 뱀이나 개구리 같은 파충류를 잡아 먹은 적도 있었고, 상황에 따라서는 상한 음식이나 벌레를 먹을 때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들로 배를 채운 경험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찾는 걸 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는 없었다.

데미안은 제이슨이 안으로 몸을 기울이기 전에 재빨리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세웠다. 그는 악취가 나는 쓰레기통의 뚜껑을 닫고 유틸리티 벨트를 열었다. 알프레드는 항상 벨트에 사탕이나 작은 초콜렛을 넣어 두었다. 비상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했던가. 지금이 그 비상시겠지.

"일단 이거 먹고 있어."

제이슨은 별 다른 말 없이 사탕을 받았다. 제법 크기가 큰 탓에 볼 한쪽이 불룩 튀어올랐다. 그는 데미안의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입안의 사탕이 적당히 녹기를 기다렸다. 사탕은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뱃속을 긁는 것 같던 허기를 가라앉히는데는 효과적이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안돼."

"슈퍼보이랑 친해?"

말을 전혀 안 듣는군. 데미안은 카울 아래 눈을 굴렸다.

"안 친해." 데미안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좁은 건물 틈에 몸을 구기고 있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다. 그는 몸을 기울여 골목의 입구로 바로 보이는 클럽 뒷문을 확인했다. 앞으로 빠른 시간 내에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느려터진 바운서 대신 그가 직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때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뒷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짧은 반바지와 두꺼운 점퍼를 입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키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는 분홍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이슨?"

"엠!"

"아, 거기 있구나. 지금 많이 바빠서 오래는 못 있어. 무슨 일이야?" 여자는 제이슨의 키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그녀는 제이슨의 마른 뺨을 손바닥으로 쓸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또 거리에서 지내고 있는 거야? 마마는..."

"마랑은 상관 없어." 제이슨은 고개를 돌리며 재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데일이랑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어."

"네가 데일은 왜?"

"내가 아니라..." 제이슨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를 따라 어둡고 좁은 골목 안으로 시선을 돌린 엠의 몸이 흠칫 떨렸다.

고담에서 밤에 마주치기 싫은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박쥐 복장의 자경단은 그 중에서도 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인간인지 괴물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외형 때문에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배트맨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거나 곧 생길 거라는 신호였다. 그것도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꼬마가 당신이 날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배트맨이 그녀에게서 대체 어떤 도움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고 그녀가 그 말처럼 그를 도울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이슨은 대체 왜 그런 말을 한걸까? 엠마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제이슨과 자경단을 번갈아 보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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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데일이..." 엠마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에게서 뭘 원하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도움이 될만한 게..."

"장소를 찾고 있다. 그의 이름이나 가명과는 전혀 관계 없지만, 여러번 찾아가거나 얘기했을 거야. 그가 마음 놓고 물건을 숨길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게 그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는 곳."

데미안은 차분하게 자신이 찾는 장소에 대한 조건을 말했지만 여전히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애인이 죽었다는데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사람이라. 감정이 극도로 무뎌진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제이슨이 말하던 것과 같은 사이가 아닐 것이다. 데미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빈 플라스틱 병을 굴리고 있는 제이슨을 살짝 노려보았다.

"...알고 있기로는," 짧은 침묵 끝에 엠마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뉴 햄프셔에 있는 먼 친척에게 목장이 하나 있어요."

"친척?"

"그냥 엄마 쪽의 먼 친척이라고 했는데, 성이 에클...뭐였던 것 같아요."

엠마는 흐릿한 기억을 최대한 더듬어보려 노력했다. 그녀가 그 목장에 갔던 것은 딱 한번이었다. 짐승이라곤 늙은 말 한마리와 돼지 두어마리가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였고, 페인트가 다 벗겨진 낡아빠진 집 안은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데일은 그 친척의 취미가 수집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호더였다. 돼지우리보다도 지독한 냄새에 5분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기억이 났다.

"그 쓰레기장 아래에 보물이 있다고 농담처럼 얘기하긴 했는데, 딱히 뭘 본 적은 없어요." 엠마는 뺨을 살짝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네요."

"...확인해 볼만한 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괜찮은 정보였다. 데미안은 밀수업자와 관련된 모든 가명과 가까운 가족의 이름들을 다 확인했지만 목장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먼 친척이라는 것이 거짓말이든, 데미안이 미처 찾지 못하고 넘겼던 것이든 그 곳에 가서 확인해 볼 정도의 가치는 있었다.

"다행이네요." 엠마는 그의 말에 한시름 놓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점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오래 밖에 있었네요. 빨리 들어가 봐야겠어요."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도 이 곳에 더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클럽 뒷문으로 돌아가던 엠마가 제이슨을 손짓해서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둘이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아 보였는데. 그는 엠마가 제이슨의 어깨를 잡고 말하는 것을 조용히 관찰했다.

"그녀가 네가 자경단이랑 경찰을 돕는 걸 알면 좋아하지 않을 거야."

"마는 모를 거야. 그리고 다시 거기로 돌아갈 생각도 없고."

"조심해, 제이슨."

"엠마도."

제이슨은 짧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데미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데미안은 제이슨의 얼굴에 떠오른 우쭐한 표정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았지?"

"뭐, 확인해 볼 가치는 있겠군."

데미안은 소형 컴퓨터에 필요한 단어들을 넣으며 대꾸했다. 컴퓨터가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아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 마마란 사람은 누구지?"

"음...NOB야."

"그런 조직이 고담에 있었나?"

"None of your business. 그리고 난 조직 활동 같은 거 안해. 개인 사업자라고."

"퍽이나." 데미안은 코웃음을 치고 배트모빌을 세워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색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뉴 햄프셔로 향하고 싶었지만 중간에 들려야할 곳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이제 뭐 할거야?" 데미안의 보폭을 쫓느라 숨이 가득 찬 목소리로 제이슨이 물었다.

"...일단 너는 경찰서에 데려다 놓고, 나는 계속 단서를 쫓아야지." 데미안은 배트모빌의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엑," 조수석에 잽싸게 올라탄 제이슨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난 우리가 끝까지 같이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왜 너를 데리고 다녀?"

"그거야...우리는 파트너니까?"

"......"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트모빌에 시동을 걸었다. 더 이상 헛소리에 하나하나 반응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잠시 후, 짧은 전화를 받고 GCPD 건물 밖으로 나온 고든의 앞에 검은색 배트모빌이 멈춰섰고, 케이블로 꽁꽁 묶인 제이슨이 조수석 문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시끄러워서 재갈을 물려놨으니까 적당한 때 풀어주세요."

데미안은 고든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바로 엑셀을 밟고 출발했다. 백미러로 보이는 모습에서 제이슨이 온몸으로 그에게 욕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애는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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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수정할 수도 있지만 일단은 3편입니다...





@tigerin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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