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악어새가





“아. 숏패딩 사야하나.”



패션 리더 박찬열의 최근 고민은 숏패딩이었다. 사람들이 하도 롱패딩만 사니까 패션 업계에서 전략적으로 마케팅하는 거라고 회유해 봐도 끄덕없었다. 시류는 시류라고 난리였다. 무신사에 살다시피 했다. 나도 패션에 문외한은 아니지만, 지금은 패션보다 중요한 게 많았다.



일단 수능.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 아닌데도 신경이 쓰였다. 이젠 정말로 내 일이네. 불수능 이니 물수능이니 하는데 긴장이 됐다. 불아니면 물, 두 개 밖에 없나? 수험생 모두가 만족하는 수능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심각하게 고뇌했다. 인터넷에 풀린 수능 문제지를 훑어보다 관뒀다. 아, 싫다. 열아홉.



그리고 도경수.



도경수는 바빴다. 박찬열만큼 들이대는 녀석이 여럿 있었다. 다들 무리에 합류시키려 난리였다. 이유를 물어보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왠지 챙겨주고 싶댄다. 망할. 도경수 앞에서 간지러워지는 건 나뿐이 아니었다. 울컥했다. 야, 그래봤자 걘 나만 졸졸 따라다녀. 으스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민망해져서 연락도 없는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아, 맞는데 왜 자꾸 아니래? 비밀번호 틀린 건 나면서 애꿎은 구글에 화풀이했다.



그리고 걔 나한테 꽃다발도 줬어.



변백현 좀! 속으로 버럭버럭했다. 친구가 꽃을 줬는데 무슨 의미냐고 지식인에 올리려다 지식인은 망한지 오래인 것 같아 보류해뒀다. 박찬열은 애초에 제외였다. 박찬열이 내게 생긴 흥미로운 가십을 그냥 지나칠리 없었다. 문제는 이거다. 내가 이걸 본능적으로 흥미롭다고 느낀다는 것.



숱한 게임을 하며 친우의 도움을 받은 역사가 깊었다. 피씨방에서 포효하다 알바 형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시끄럽다고 언질 주길래 키보드를 열심히 두들겼다. 키읔으로 화면이 꽉 찼다.



내가 일생에 겪은 희노애락은 대강 그랬다. 지면 분하고 이기면 좋았다. 말하자면 승패의 기준이 있었다는 거다. 도경수랑은 아무것도 없었다. 뭘 받기는 받았으니 승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마냥 이긴 기분은 또 아니었다. 받은 걸 맘껏 누리기도 전에 더 큰 걸 주고 싶어졌다. 꽃다발로 만든 꽃다발 같은 거 말이다. 이왕이면 오색찬란한.



“야, 이거랑 이거 중에 골라봐.”

“…꽃다발 받은 적 있어?”

“웬 꽃다발.”

“토 달지 말고.”

“누가 꽃다발 준대?”

“아니, 대답만 해. 좀. 받은 적 있냐니까.”

“뭐, 없진 않지.”



저번에 하영이도 줬었고….



하영이는 박찬열과 132일째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였다. 날짜까지 외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박찬열이 매일 아침 인스타 스토리를 올리는 탓에 강제로 암기하게 됐다. 니가 줘야 맞는 거 아냐? 은근히 흘겼더니 박찬열이 눈을 구겼다. 피해야 했다. 저건 박찬열의 주특기인, <하영이와의 알콩달콩한 연애 썰 늘어놓기>가 나오기 전의 준비 태세였다. 박찬열도 알았다. 자기가 유난히 주접을 떤다는 걸. 사실 그러면 좀 자제해야 맞는데, 박찬열은 배째라는 식으로 나왔다. 떠드는 게 싫으면 떠나라는 거였다. (지금까지 견딘 내가 용했다.)



난 들어주는 척이 늘었다. 아무렇지 않게 딴 생각으로 빠졌다. 박찬열은 하영이한테 받은 꽃다발을 난 도경수한테…. 하영이 자리에 도경수를 두기가 망설여졌다. 내 멋대로 이래도 되는건가? 도경수는 전혀 하영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진저리치면 어떡하냐고.



도경수 배려하다 마음이 닳았다. 동동 구르다 보면 하루가 갔다. 하영이와 도경수를 교환하는 일은 굼뜨게 진행됐고 박찬열과 나를 바꾸는 일은 속전속결이었다. 나도 도경수로 장시간 떠들 수 있었다. 공론장만 있었음 도경수 필리버스터도 했을 것이다. 도경수의 어떤 점이 제일인지 꼽는 게 안건이라면, 지구가 멸망해도 토론은 끝나지 않겠지.



녀석은 자비 없이 속을 쑤셨다.



“날씨가 한겨울이야.”

“어? 어.”

“조심해, 감기 걸리면 골치 아파.”

“그래.”

“너 가만 보면 춥게 입고 다니더라. 겨울 무서운 줄 모르고.”



진작에 월권이었다. 교실에서 감시하는 건 물론이고 평소 생활 습관까지 낱낱이 검열했다. 변백현이 변백현 쪼대로 살지 못하고 도경수 쪼를 따라갔다. 입술 트지 말라며 립밤을 하나 쥐어 주길래 꼬박꼬박 발랐다. 매끈한 입술이 낯설었다. 녀석도 이걸 발라서 그렇게 촉촉- 까지 생각했다. 박찬열 눈 졸라 크네, 와 같은 평범한 감상의 일종이라며 스스로 변명했다.



녀석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면 동상 걸린 것 마냥 발가락을 꼬았다. 급식 뭐 나온대? 와 같은 평범한 질문에도 버벅댔다. 녀석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리면 나도 따라 돌렸다. 만화적인 연출이었다. 도경수가 도라에몽의 이슬이라면 난 진구였다. 비실이도 퉁퉁이도 싫었지만 진구 꼴이 날 줄은 몰랐다. 매일 새롭게 바보가 됐다.



“이따 같이 갈까.”

“…어딜?”

“우리 가게 앞에 붕어빵 트럭 생겼는데 맛있대.”

“아, 붕어빵.”

“별로야?”

“나 붕어빵 처돌이야. 슈크림도 좋고 팥도 좋고. 저번에 티비에서 보니까 요즘 붕어빵 트럭은 계좌이체도 되더라? 경수 너 현금있어? 없으면 내가 낼게. 오뎅도 먹을까? 겨울엔 또 오뎅이지. 아…너 오뎅이라고 안 하고 어묵이라고 하지. 미안.”

“무슨 미안까지 해. 그래서, 먹는다고?”

“무조건 콜.”

“알겠어.”

“…”

“그리고 나도 현금 있어.”

“무조건 내가 산다.”

“왜?”

“…”

“나도 사줄 수 있어.”



실랑이했다. 꽃다발도 못 갚았는데 이것마저 받을 순 없었다. 내가 내는 거 아니면 안 가겠다고 떼쓰고 나서야 일단락됐다. 오후 수업 동안 곱씹으며 머리를 싸맸다. 변백현 간지 다 죽었다. 값싼 음식 하나 사주면서 유세 떠는 것 같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챙기지 않아도 따라오던 내 멋짐이 도경수 앞에선 영 발휘가 안 됐다. 붕어빵 트럭을 사준다고 그럴걸. 돈도 없으면서 허세만 부렸다.



녀석은 팥이 좋다고 했다. 난 슈크림 쪽이었고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녀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팥을 선택할지, 아니면 녀석이 맘껏 팥을 독식할 수 있게 슈크림이라고 밝힐지.



매사 조심스러웠다. 마땅한 이치였다. 악어새가 악어 비위를 맞추는 건.



“핫팩 줄까.”

“추워?”

“아니, 너 추워 보여서.”

“…”

“손 빨갛다.”



녀석이 준 핫팩이 후끈후끈하게 몸을 달궜다. 성능이 훌륭했다. 교과서에 나옴 직한 표현들만 떠올랐다. 내 심장은 붕어빵. 익어서 흐물흐물해졌지. 멈추질 못하고 살짝 오바했다. 도경수는 빵빵. 내 심장에 총을 쏘지. 고등래퍼 나가면 비웃음 당하고 통편집당할 라임이었다.



“뜨겁다. 기다렸다 식으면 먹어.”

“응.”

“…왜 웃어?”



역시. 악어의 비호를 받는 건 악어새뿐이다. 살뜰하게 보살피는 녀석을 성가시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을 다시금 반성했다.



녀석은 관심있는 것에만 반응했다. 친구되자고 몰려온 녀석들로 제 앞이 붐벼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몸에 배인 의연한 태도라기엔 표정이 무심했다. 사소한 일로 내게 트집을 잡던 녀석이 상당히 활기차 보였던 것과 비교됐다.



난 가능성을 셈했다. 녀석을 하영이 자리에 놓을 수 있는 확률을 계산했다. 다행히 매일 상승세였다. 큰 그림을 그렸다. 80퍼센트. 80퍼센트가 되면….



*



75퍼센트를 찍은 날이었다. 함께 하교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 같이 앉아 같이 덜컹거렸다. 나와 녀석이 사는 집은 일곱 정거장이나 차이 났다. 나이스. 내가 앞 순서였다. 녀석이 내리는 데까지 버텼다. 너 어디가? 묻길래 직구로 받아쳤다. 너랑 같이 내리려고. 바로 이유를 캐물을 줄 알았는데 답이 없었다. 설마 부끄러워 그러나. 퍼센티지가 솟았다. 아마도 76퍼센트였다. 수학에는 취미가 없어도 레벨업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내가 구태여 먼 길을 돌아가고 있다는 걸, 녀석도 모르지 않았다. 데려다 준다는 말은 식상했다. 함께 걷고 싶다는 말은 우리 나이대엔 어색했다. 어휘력이 부족해 입안이 썼다. 녀석은 평소보다 느리게 걸었다. 멀쩡한 신발끈을 고쳐 묶었다. 깔끔한 배색의 운동화는 녀석을 닮았다.



녀석의 단점마저 너그럽게 장점으로 봐준 지 꽤 됐다.



콩깍지 씌면 답도 없다는데 난 원래…답을 잘 못 찾는 체질이니까 괜찮았다.



“안 가?”



504동의 입구. 끝끝내 여기까지 따라왔다. 한 걸음이 아쉬웠다. 왜 움직이지 않냐는 녀석의 말에 쉽게 서운해졌다. 내 감정이 녀석에게 달려 있었다.



“안 심심하고 좋네.”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할 말은 했다. 교실에선 둘만 있기가 까다로웠다. 진짜 반장과 가짜 반장이라 세트로 묶였지만 수업 시간이나 청소 시간에 한정된 패키지였다. 쉬는 시간에 함께 놀고 점심 시간에 한 테이블에서 밥 먹어야 찐으로 친한건데 그러질 못했다. 친구들이 귀찮았다. 우정이 나날로 얄팍해졌다. 하지만 난 누누이 강조해온 사람이었다. 우정보단 사랑이라고. 친구보단 애인이라고.



“내일도 이렇게 해야지.”

“너네 집 여기서 멀잖아.”

“뛰어가면 금방이야.”

“뛰지 마. 추울 때 달리면 뼈 삭아.”

“괜찮아. 네가 핫팩 주잖아.”

“…내일도 가져올게.”

“핫팩 없으면 뭐….”

“…”

“네 손 뜨끈하더라. 좀 쓸게. 잡고 안 놔줘야지.”



숭덩숭덩 수제비 자르듯 막 마음을 던졌다. 네모반듯하진 않아도 씹는 맛은 일품일 테다. 노골적인 멘트에도 싫은 기색이 없었다. 머릿속 레버를 당겼다. 축! 76%!



순조로웠다. 4퍼센트야 뭐, 하루만에 달성할 수도 있었다. 잠이 달았다. 수능이 제 몫이 된 또래들이 하루하루를 아쉬워할 때 나는 시간을 달리고 싶어 안달을 냈다. 청사진이 선명해졌다. 고백을 하고. 고백을 하면. 그 다음엔. 또 그 다음엔.



녀석과 캠퍼스를 누비는 상상은 즐거웠다. 수능에 집중한답시고 헤어지는 애들을 얕봤다. 이 짜식들아. 모름지기 열아홉부터 두 마리 토끼 다 잡고 그래야 나중엔 세 마리 토끼도 잡고 그러는 거다.



*



난 남녀상열지사에 익숙한 편이었다. 박찬열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은근한 기류에 적당히 몸을 싣곤 했다. 사랑이란 모름지기 타이밍이라며 나대고 다녔다. 애들은 재수없다고 까면서도 다 경청했다.



과오였다. 세상을 너무 얕봤음을 깨달았다. 타이밍은 배부른 소리였다. 그것도 다 어느 정도 상대방이 파악이 되어야 꺼낼 수 있는 카드였다. 녀석은 날 심히 헤매게 했다. 왔던 길도 까먹기 일쑤였다. 남녀상열지사가 아니라 남남상열지사라 경우가 다르다고 하기엔 도경수는 도경수였다. 유별나게 특이했다.



77퍼센트를 앞둔 아침.



내가 한국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꼽자면 액땜이었다. 어떤 불행에도 차분히 대처할 수 있는 무적의 단어. 지각해도 액땜, 숙제 깜빡해도 액땜, 급식이 맛없어도 액땜…. 맥락과 맞지 않게 액땜을 오용한 벌을 이제야 받게 됐다.



“오늘부턴 혼자 갈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비극이 아무런 깜빡이 없이 내 삶에 들이닥칠 리 없었다.



“갑자기?”

“그래야 할 것 같아.”

“…왜?”



싸늘했다.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도박판 버금가는 긴장이 내 몸을 휘감았다. 난 녀석이 내게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이 있다는 데 내 모든 걸 건 참이었다. 달성률 76%. 고지를 눈앞에 둔 그래프가 돌연 꺾였다. 목을 꽉 죈 넥타이가 답답했다.



“수업 시작하겠다.”

“…”

“자리 앉아. 담임한테 찍히지 말고.”



지금 담임이 중요해?



남고생들이란 으레 비슷하게 모자란 외모로 치고받고 싸우는 데다가 얼굴이 묘하게 다를 뿐 저 친구가 이 친구 같고 이 친구가 저 친구 같은 나름의 캐릭터성을 공유하기 마련이었는데 도경수는 아무와도 겹치지 않았다. 녀석은 쌀쌀맞고 온순했다. 차가우면서 따뜻했다. 4점짜리 국어문제 같았다.



공부 못하는 애들도 국어는 건드려본다. 풀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조금만 집중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늘 답은 가장 먼저 제쳐둔 보기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정답은 야속하기만 하고.



-왜 그러는 건데.



나는 사투중이었다.



지문 읽으라고 준 시간에 필담만 갈겼다. 악어의 변덕이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악어를 따스하게 그린 동화는 잘 없었다. 악어새의 이름을 빌려 겨우 세상에 등장하긴 했어도 악어는 악어였다. 늪의 포식자. 강인한 힘을 가진 이빨과 턱.



“경수야. 잠깐…”



담임이 녀석을 호명했다. 부동의 원픽을 부르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설마 담임이 이간질했나? 하자 많은 반장인 내가 감히 자기 원픽과 친해져서….



우스운 망상이었다.



종이 울려도 녀석은 들어오지 않았다. 급식실 가는 일을 미뤘다. 오늘 후라이드 닭꼬치에 짜장 덮밥인데…. 먹거리에 죽고 사는 친구들을 먼저 보냈다. 꼬르륵 소리에도 의리를 지켰다. 나만 못 먹은 게 아니라 녀석도 못 먹은 거니까. 오 분 주기로 담임을 흉봤다. 지 일만 중요하지 아주. 도경수 아끼면 도경수 밥 시간도 지켜줘야지.



밥심으로 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용납이 안 됐다. 시간은 잘도 흘렀다. 박찬열이 후식으로 나온 포도쥬스 빨대를 씹으며 등장했다. 너 뭐냐? 묻길래 매점에서 때웠다고 구라깠다. 이빨 닦으러 가잔 말엔 주저했다. 이빨 닦는 줄을 기다리다 녀석을 놓칠까봐 그런 것이었는데 박찬열이 더럽다며 욕했다.



박찬열 치약은 매웠다. 혀가 얼얼했다.



통한의 5교시. 조는 애들을 가르고 녀석이 등장했다. 판서에 힘쓰던 물리 선생이 녀석을 흘끔거렸다. 딱히 혼내진 않았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젊었을 적 교련을 담당했다던 물리는 타이틀 부자였다. 첫째, 재물포. 쟤 때문에 물리 포기한다. 이건 뭐, 학교마다 한 명씩은 있으니까. 둘째, 철수. 맨 뒷자리에서 봐도 거칠어 보이는 수염(정말로 철수세미를 연상시킨다.) 때문에. 셋째, 야매.



야매는 야매의사의 줄임말이었다. 치과 예약을 잡아 두어서 야자에 빠져야 할 것 같다는 학생에게 실은 자신도 소싯적 의사가 되고 싶었다며 직접 치료해줄테니 앉아서 공부하라는 명언을 남긴 후 획득한 별명이었다. 물리도 못 가르치면서 무슨 의술. 신천지에서도 안 할 소리를 학교에서 했다. 이사장 빽이라 쫓겨나지도 않았다.



물리는 존재 자체가 야매였다. 교육을 일삼아 애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수업 시간에 지켜야 할 십계명을 인쇄해 나눠주었다. (거짓 교리였다.) 수업 시간에 움직이지 말 것, 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물리 시간엔 화장실도 못갔다. 뒤에 앉은 친구의 근황이 궁금해 물어보려다 걸리면 끝장이었다.



그런 물리가 녀석을 눈감아줬다. 뭐 하다 이제 들어오냐고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교권의 덕을 톡톡히 보는 녀석이었지만 물리까지 녀석을 싸고 돌진 않았었는데.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찝찝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종례 직전, 녀석이 내게 미션을 줬다. 봉봉 좀 사다줘. 약간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길래 됐다고 손사래쳤다. 자발적 봉봉셔틀을 자처했다. 생태계의 법칙을 충실히 따랐다. 한입거리 악어새가 먹이사슬 최상위 서열의 악어를 어떻게 거스르냔 말이다.



그나저나 봉봉이라니, 귀여웠다.



“…먼저 갔다고?”

“아까 경수 막 뛰어가던데?”

“나한테는 이거 좀 사다 달라 그랬어.”



다른 음료수에 비해 키가 작고 뚱뚱한 봉봉을 내 몫까지 두 개 사서 교실로 돌아왔을 때, 녀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쏜살같이 뛰어나갔다는 녀석의 목격담을 믿기 힘들었다. 에이 설마.



설마가 변백현 잡았다. 얄미운 알림음이 나를 반겼다.



-먼저 가봐야 해서. 봉봉은 너 먹어.



(봉봉) 멕이는 거지 지금….



녀석은 날 번번이 멕였다. 틈을 안줬다.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녔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만큼이나 악착같이 도망가는 데에도 능했다. 한동안 내게 치대던 녀석의 모습이 잠깐의 꿈 같았다. 나도 몰랐던 내 은밀한 꿈 말이다. 녀석을 본받아 이번엔 내 쪽에서 들이대려고 용써도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깜빡했다. 녀석은 학교의 기대주였다. 녀석이 짬을 내지 않으면 나로서는 녀석을 방해할 수 없었다. 침만 삼켰다. 녀석은 왜 이렇게 잘나서! 칭찬 섞인 분노가 들끓었다.



-잘 가. 오늘은 집 가서 푹 자고. 목요일이 제일 피곤하다며.



스팸 메시지 버금가는 안부 인사는 (그래도) 꾸준했다. 한낱 디지털 메시지에 감복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거라도 보면서 버텼다. 뭘 버티는지 모르겠다는 게 웃겼다.



난 녀석에게 중요한 일이 생겼을 거라 어렴풋이 짐작했다. 녀석의 학생부를 빵빵하게 채우기 위한 부자재들. 무슨무슨 경시대회 혹은 무슨무슨 토론대회. 녀석과 단상은 잘 어울렸다. 녀석의 미래는 빛나야 마땅했고 난 기꺼이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긍정이 탈이었다.



“도경수 전학간다던데?”



씨발. 박수칠 줄 알았더니 악수하게 생겼네….



확률이 곤두박질쳤다. 마음이 거덜났다.



*



클리셰는 사양이었다. 난 녀석과 학창 시절의 애틋한 무언가로 전락하기 싫었다. 나중에서야 추억하며 먹먹해지는 러브 스토리는 질색이었다. 전학? 그게 뭐라고. 삐삐도 없던 시절에야 생이별이겠지만 지금은 옆반 민철이보다 먼나라 제임스랑 더 친해지기 쉬운 세상이었다. 다만 섭섭한 점을 꼽자면, 내가 왜 이 소식을 녀석이 아니라 박찬열한테서 듣고 있냐는 거다.



어제도 녀석은 내 긴 밤의 안녕을 빌어줬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게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목도리를 하고 다니란 잔소리는 덤이었다. 옷장 끄트머리에서 겨우 체크무늬 목도리를 찾아낸 정성이 무색해졌다.



“…누가 그래?”

“강준석이 들었대. 담임이랑 도경수 대화하는 거.”

“잘못 들었겠지. 아니면 경수가 아니던가.”

“도경수를 헷갈릴 수 있어?”



그럴 리가 없긴 하지….



할 일이 쌓여 있으니 먼저 가란 말에 순순히 물러난 오후였다. 툭툭. 이슬비보다도 약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하늘은 날씨마저 감췄다. 도경수는 나를 보냈고 나는 박찬열을 보냈다. 신중하게 유턴했다. 하고 싶은 말을 열심히 다듬었다. 화내고도 싶었지만 어설프게 화냈다간 그 밑의 진심마저 망칠 수 있었다. 공부도 인생도 요령은 비슷했다. 핵심을 쫓아야지 건더기를 쫓으면 안 된다.



내려오는 녀석을 만났다. 



“도경…”



녀석의 무기는 우산이었다. 준비성 하나는 끝내줬다. 가릴 비도 아닌데 냅다 우산 아래로 숨었다.



“왜 다시 와.”

“…너 전학 간다며.”



박찬열의 말을 다 믿진 않았다. 강준석이 잘못 봤을 수도 있었다. 연예인을 억울하게 닮은 일반인처럼, 도경수를 애매하게 닮은 친구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했다.



“…”

“부정 안 하네.”



안타깝게도 적중이었다.



“언제 가는데?”

“…”

“왜 말을 안 해.”



녀석은 안 보이고 녀석의 우산만 보였다. 이슬비라 불러도 좋을 비가 뺨을 적셨다.



“오지 마.”



성큼 다가섰고 녀석은 거부했다. 순간 열이 확 뻗쳤다.



“나 너한테 뭐 크게 잘못했어?”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왜 오지 말래. 전학은 뭐, 그렇다 쳐. 가게 되면 어쩔 수 없지. 근데 그게 나한테 이럴 이유가 돼? 꼴보기 싫으면 차라리 쌩까자고 해.”

“…”

“밤마다 문자 안 보내도 돼. 싫은데 뭐하러 그래.”

“…”

“…나한테도 내 입장이란 게 있어. 떼쓰는 거 아니니까 설명해줘. 이유까지 못 말하겠으면 결론이라도.”



변백현, 화내지 않는 거야. 슬퍼도 울지 않는 거야…. 아무리 읊어도 소용없었다. 눈물은 이성보다 빨랐다.



“내가 어떻게 그래.”

“말 해, 그냥. 변백현 미안한데 너 존나 싫어졌어. 완전 질려. 이렇게.”



“…떨어져 있는 연습 한 거야. 보고싶을 것 같아서.”



녀석이 천천히 우산을 들어 올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까맣고 반질반질한 동공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녀석의 눈물도 이성보다 한 수 빨랐다. 민첩하게 눈꺼풀을 적셨다. 난 더듬더듬, 방금 들은 녀석의 말을 짚어 나갔다. 음절마다 형광펜을 칠했다. 숨은 의미를 포착하려 온 신경을 다 동원했다. 육감도 가세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건….



빠르게 결정했다. 녀석을 올려둔 저울을 멋대로 움직였다. 76, 77, 78, 79, 80.



“나 너 좋아해.”



80%가 되면 고백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미미한 다짐은 흘려 보냈어도 이렇게 중대한 결심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

“넌 나 좋아하지.”

“…어.”

“근데 난 너 사랑한단 말이야.”



어?



“넌 내 문자 받고 잘 잤지. 근데 난 그거 보내는데도 힘들어서…. 한 번 보면 여러 번 보고싶을 것 같아서 피해다니는 건데 왜 자꾸 따라와.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나 진짜 단련해야 해. 곧 있으면 간단 말이야. 아침에도 못 보고 점심에도 못 보고 저녁에도 못 볼거고…. 주말에야 겨우 만날 수 있을 텐데. 이대로 가다간 못 견딜 것 같단 말이야. 수업시간에 뛰쳐나오면 어떡해….”



책상 엎고 나오면 어떡하냐구.



악어의 고백에 악어새는 뻑갔다. 울다가 웃느라 정신이 혼미해졌다. 비슷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녀석의 사랑 타령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안고 달랬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옆반 민철이 보다 먼나라 제임스랑 부랄친구 되기 쉬운 세상이라고 위로했다. 민철이는 만질 수 있고 제임스는 못 만지잖아. 논리적인 반박에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그러게 갑자기 전학을 왜 가? 속상함을 토로했다. 나도 가기 싫어…. 녀석이 어깨에 손을 감고 매달렸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잡아 먹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



세상에 숱하게 널린 잘못된 상식 중 대표적인 것은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에 관한 이야기다.



악어는 평생 50회 이상에 걸쳐 이빨 3000개를 갈기에 따로 청소부를 고용할 필요가 없다. 악어에게 악어새란 그저 먹잇감일 뿐이다. 얌전히 입을 벌린 악어가 이빨을 쑤시는 악어새를 기꺼워하는 삽화는 순 거짓이고.



악어와 악어새가 종을 넘나드는 세기의 파트너로 포장된 것은 누군가 악어새가 악어의 입속을 드나드는 것을, 그러니까 잡아 먹힐 게 분명한데도 입속을 들락날락 한 것을 봐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처구니 없는 우연보다 신상하나 알지 못하는 관찰자가 더 흥미롭다. 한낱 미물에서도 진리를 얻는 삶이란.



그러나 나에게도 의문은 있다.



악어새의 납작한 부리. 은회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깃털. 중앙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 길고 뾰족한 꽁지. 어느 것도 악어를 연상시키지 못한다. 하다못해 어떤 초록도 가진 바 없다. 우림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묻게 되는 것이다. 왜 이 새의 학명에 악어가 들어가 있는지를.



컴퓨터 속의 악어새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해줄리 없다. 그러나 나는 악어와 악어새의 그럴듯한 연쇄를 발견해 낸 누군가처럼, 한번 가정해본다.



만약에 악어새가


악어를 좋아하고,


악어는 악어새를


사랑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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