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Dill). 강한 매력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허브. 이 허브에서 유래된 항구도시의 이름이 지금 내가 다시 돌아온 곳의 이름이었다. 토미는 지금쯤 자고 있으려나? 기껏 소파를 비워두라고 했으면서 바닥 위의 내 짐들을 소파 한쪽에 다시 올려두곤 옆에 앉아 졸던 모습이 생각이 나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이 채워진다. 그러니까 빨리 그 꽃에 대해 알아봐야지! 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게 될 줄은 몰랐다. 꽃을 찾으려면 꽃집을 먼저 가봐야겠다 싶어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입을 모아 밤의 요정의 꽃집으로 가라고 했다. 꽃집이 거기 하나뿐인 것도 아닌데.


"거기 하나만은 아니지만 행운이 따르는 여행이 됐으면 좋겠다고 건네줬다며. 여기서 보통 그렇게 염원이 담긴 꽃을 선물하는 곳은 거기, 밤의 요정의 꽃집이야."

"꽃을 선물한 사람이 꽃말을 잘 알고 있었다면 보통 밤의 요정의 꽃집에서 꽃을 산 경우죠."

"거기가 되게 유명한 곳이거든. 꽃을 사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밤의 요정의 꽃집에는 꽃이 되게 다양해. 여기서는 구하기 힘든 꽃들이 거기엔 항상 있어."

"근데 거기는 저녁부터 새벽까지만 열어. 참 잘 어울리지 않나? 밤의 요정과."


Evening Primrose. 달맞이꽃. 여기가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한 꽃집인데... 아직 안 열었네. 저녁부터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워서 유리창 너머로 두리번거리다가 딱 발견했다. 선물 받았던 자줏빛 꽃. 다른 꽃들에 가려져 이름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잃어버린 꽃과 똑같은 꽃인 건 확실했다. 아, 어차피 나도 선물을 받은 거라 이름은 원래 모르는구나. 다시 저녁에 와보기로 하고 숙소를 찾아 나서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왜 지금! 우산도 없는 길 한복판에서 비에 쫄딱 젖은 채 뛰어가던 나는 결국 잠시 비를 피해 있기로 결정했다. 근데... 여기가 어디지. 길에 사람 한명 없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층집의 문을 두드렸다. 마지막의 노크로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낮은 목소리를 마주쳤다.


"...토미?"

"네?"

"토미라니?"


조금 열렸던 문이 활짝 열리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문 속에는 문 앞의 한 남자, 계단 옆의 한 남자가 있었다. 계단 옆에 서 있었던 남자의 머리가 곱슬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의 한 번의 눈 깜빡임 사이에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빠르지?


"뭐야, 아니잖아. 형은 뭐 그런 착각을 해."

"분명 향이..."

"비에 날아갔어. 형이 맡은 건 묻은 향이었나 본데 어쨌든 얘는 아니야."

"...비 때문에 두드린 거지? 따라와."


곱슬머리의 남자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계단을 올라갔다. 아까는 내 착각이었나? 올라가는 거 보면 일반 성인 남성의 속도인데.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걸 보고 있던 나를 문을 열어준 남자가 불렀다. 그 남자를 따라간 곳은 벽난로 앞이었다. 가방을 내리는 걸 도와준 남자는 수건과 담요를 내밀었다. 손이 닿는 걸 극도로 꺼리는지 내가 수건과 담요를 받자마자 손을 떼어냈다.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은 남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커다랗고 안락한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가 그치면 떠나. 배가 고프면 저기 있는 것들을 먹어도 좋아. 그 외의 필요한 것들은 여기 일 층에서 알아서 찾고. 단, 커튼과 이층의 방들은 절대 건드리지 마. 되도록 최대한 빨리 떠났으면 해. 그 말을 끝으로 낮은 목소리의 남자도 곱슬머리의 남자처럼 위로 올라갔다. 소파에 앉아 몸을 말리고 녹이며 주변을 구경했다. 책과 와인이 굉장히 많네. 가만히 벽난로 앞에 앉아있기에는 조금 심심해서 책을 하나 꺼내왔다. 아. 일기장인가 보네...? 타인의 일기장을 열어보는 건 조금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지만 막상 첫 페이지를 눈에 담으니 호기심이 더 커져 결국 딱 이 한권만 읽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우산 하나를 들고 곧장 우체국으로 뛰어갔다.


토미. 여기 네가 찾아야 할, 너를 찾는 이들이 있어.



에릭을 배웅하고, 곧바로 아지트를 향했다. 분명 꽃이라고 했어. 말 한마디, 아주 작은 단서 하나라도 내겐 무척 소중했다. 내가 태어난 이유이자 내게 주어진 사명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크리쳐들에게 쫓기다가 떨어뜨렸다고 했으니 꽃을 잃어버린 곳은 내가 에릭을 찾아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일 것이다. 새벽에 에릭을 데리고 먼저 빠져나오느라 현장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깝다. 내가 가고 나서 현장을 수습한 헌터 중, 꽃을 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지 않을까? 어서 묻고 싶은 마음만 앞선다.


"벌써 다녀왔니? 그 청년은?"

"잘 돌아갔어요. 아, 여기 열쇠요."


아지트 근처에 바이크를 대충 세워두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중앙 테이블에 앉아 총을 손질하는 아저씨가 보였다. 문이 열리며 딸랑이는 종소리에 나를 본 아저씨가 에릭을 벌써 데려다주고 온 거냐며 반겨주셨다. 정성스럽게 총을 닦고 계시는 아저씨의 시선이 닿는 테이블 위에 엘리베이터 열쇠를 꺼냈다. 엘리베이터 열쇠가 없어서 에릭이 고생했었다며 소피아에게 체리 케이크 홀 케이크 하나를 사주기로 약속하고 빌려낸 열쇠였다. 잠시 총을 내려두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은 아저씨가 내일모레 쯤 내 몫의 열쇠를 복사해서 새로 주시겠다고 하셨다. 몇 달 전 임무를 나간 사이 내 방을 털어간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내가 체리 케이크를 사줄 일은 없었을 텐데. 감히 헌터의 방을 털어가? 거기엔 내 사명의 단서인 손수건도 있었다. 그 손수건의 향이 유인한 단서였는데. 내게 그 향이 각인되어 잊을 일이 없어 망정이지. 아직도 그 범인을 잡지 못한 것까지 모든 게 다 짜증이 난다.


"아저씨. 새벽에 거기서요, 꽃 못 봤어요?"

"꽃...? 왜."

"아니, 뭐..."

"뭐야, 저 바이크? 토미 왔어요?"

"그냥요."

"내가 바이크 1구역에 갖다 놓으라고 했지!! 말 진짜 안 들어."


아저씨한테 꽃에 관해 물어보는 사이, 2층의 식당 문이 열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며 창문 밖의 바이크를 본 건지 바로 나를 찾았다. 그래. 엘리베이터 열쇠는 아저씨, 바이크는 1구역. 분명 너 써야 한다고 1구역에 갖다 놓으라고 아침에 두 번이나 말했었지. 알지. 아는데, 내가 좀 급해서.


"소피아. 어차피 나랑 1구역으로 갈 거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토미가 쓰게 해."

"일 끝나고 거기서 오는 게 문제니까 그렇지."


1구역의 빅토리아가 소피아에게 팔짱을 끼며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다. 은빛 머리카락의 빅토리아는 1구역의 헌터로 꽤 유명했다. 1구역은 말발굽, 2구역은 하프, 3구역은 까마귀. 각 구역별 상징은 순서대로 승리, 전통, 지혜를 뜻했는데 빅토리아는 이름부터가 승리를 의미하고 있어서 1구역의 마스코트였다. 시야가 넓은 편이고 판단력도 빠른 편이어서 보통 '눈'이 되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어제 크리쳐를 소탕할 때도 높은 곳에서 상황을 보며 지원해줬는데 마무리된 이후 시간이 좀 늦어서 어차피 소피아가 보고 건으로 1구역에 들려야 하니까 여기서 자고 간다고 했었다.


"꽃... 거기서 꽃... 소피아, 어제 거기서 꽃 봤니?"

"꽃이요? ...어, 글쎄. 빅토리아, 너는?"

"나는 봤는ㄷ-,"

"어딨어? 가져왔어?"

"-ㅔ. 뭘 가져와. 걔네가 가져갔어."

"크리쳐가 꽃을?"

"네. 어제 제 자리가 중심점 근처 옥상이었거든요. 뒤에 있던 애들이 뭘 줍길래 봤더니 자주색 꽃이던데요?"

"가져갔다고...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야! 어디가?!"

"놔둬. 쓸데가 있나 보지. 저래도 능력은 출중하니까."

"곧 있으면 비 쏟아질 거라고 했는데..."


크리쳐가 꽃을 가져갔다고? 왜? 크리쳐가 관심을 갖는 건 크게 두 가지. 살아있는 것과 기계. 그 살아있는 것에 해당하는 것은 대부분 인간이었으며, 식물은 제외 대상이었다. 그러니 에릭이 말한 꽃도 별 관심이 없어야 맞는 건데 이상했다.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에릭을 따라 걷던 그 모습. 사람을 발견하면 보통 크리쳐들은 달려드는데, 답지 않게 에릭을 따라서 걷고 있었다. 사람처럼 살금살금. 살금살금 걸어야 하는 이유가 뭐였을까. 덮치려는 것도 아니고. 순순히 따라 걷는 크리쳐라니.


"...크리쳐가 에릭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면?"


모든 게 의문 투성이었다.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는 가정을 도출해낸 게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모든 게 이상했으니까 모든 방향을 열고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조서를 쓰면서도 생각이 깊어졌었는데. 복잡한 머릿속에서 겨우 헤어 나오며 에릭을 만난 곳으로 출발했다. 해가 가려지는 게 오늘은 어둠이 빨리 오려나. 에릭이 딜에 도착할 때까지는, 적어도 프로모아사의 경계를 넘어갈 때까지는 부디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프로모아사(Frumoasa)는 꽤 큰 섬이었다. 그 중 가장 관광명소로 많이 알려져 방문객이 많고 주민도 많은 이곳 타임(Thyme)은 계획적으로 세워진 도시였다. 용기. 주로 현장에서 직접 몸을 부딪히는 3구역의 헌터들이 주둔해있는 곳으로 참으로 적합한 이름이었다. 계획도시다 보니 정갈하게 블록이 나뉘어있어서 위치 파악이 쉬웠다. 아, 저기다. 벽 한쪽에 세워두고 자줏빛 점들이 떨어진 곳을 향해 걸었다.


"그래도 남긴 했네."


내가 에릭과 마주쳤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줏빛 꽃잎 몇 개가 남아있었다. 멀쩡한 꽃잎들을 주워 손수건 위로 옮겨 담았다. 내가 찾던 향이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꽃 향은 아니고, 꽃에 묻은 향기였다. 이 꽃을 중점으로 경로를 잡고 추적해봐야 하나.


"...저건 뭐야? 에릭이 떨어뜨렸나."


네모난, 약간 크림색? 여튼. 네모난 작은 종이가 근처에 떨어져 있길래 다가가 주웠다. 카드였는데 여기서도 향이 났다. 꽃잎보다는 강한 향인 게, 그 향의 주인이 직접 쓴 듯했다. 앞에는 Evening primrose, 뒤에는 "그대의 시간에 행운과 행복이 나비처럼 날아들기를."이라고 적혀있었다. 에릭이 그랬는데. 다른 여행객이 행운이 따르는 여행되라고 선물로 몇송이 준거라고. 에릭에게 이 꽃을 준 사람이 내가 찾는 향의 주인일까?


"행운과 행복이 나비처럼."


툭툭-.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다 못해 퍼부었다. 젠장. 나와 있을 때 쏟아질 줄은 몰랐는데. 꽃잎을 감싼 손수건과 명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점점 굵어져서 급하게 재킷 안주머니로 넣었다. 우산 가지고 올걸. 나오면서 소피아가 비 쏟아질 거라고 한 거 듣긴 들었는데 그게 내가 1구역에 도착한 다음일 줄 알았지. 행운과 행복의 나비가 쏟아지는 비를 피해 날아가며 나까지 피해 가나보다. 어쩔 수 없이 조사를 마치고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1구역이 위치한 클로버(Clover)까지 40분은 걸리니까 판초를 꺼내 헬멧 위로 뒤집어쓰곤 서둘러 출발했다. 크리쳐와 꽃의 관계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아직 우리는 빅터와 크리쳐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미지의 사실이 존재하는 만큼 우리의 정보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크리쳐의 자료를 다시 살펴볼 생각으로 1구역의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소피아를 찾았다.


"어? 토미.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아, 빅토리아. 소피는 어딨어?"

"저~기. 오고 있는데. 뭐 좀 찾았ㅇ,"

"토미!!"


내 시야에 소피아가 들어오자 그 애도 나와 비슷했는지 바로 내게 뛰듯이 걸어왔다. 결국 비에 젖었냐며 판초에 달랑거리는 빗방울들을 툭툭 치며 떨어뜨려 준다. 바이크 안에 우산 없었어? 머리 다 젖었네. 소피아는 3구역의 헌터 중 유일한 내 또래였다. 신탁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여기로 보내져 아저씨 밑에서 자란 내게 소피아는 누나 같았다. 얘도 나를 동생으로 여기고 있기도 했고. 소피아는 크리쳐에게 가족을 잃고 아저씨에게 거둬진 애였다. 우린, 가족이었다.


"나 여기서 점심 먹고 갈 건데."

"나는 패스. 나 자료실에서 뭐 좀 찾아볼 테니까 차고에서 만나."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하고 소리치는 소피아를 뒤로 한 채 지하 계단 쪽으로 걸었다. 자료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헌터에게 옷에 달린 와펜을 보여주곤 크리쳐의 정보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크리쳐는 무조건 0번. 가장 왼쪽으로 가렴, 토미. 헌터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 알려준 대로 가장 왼쪽으로 갔다. 도서관처럼 쭉 자료들이 보관되어있는 선반의 숫자를 확인하며 걸어도 1번이 끝이었다. 이 선반 옆은 그냥 벽인데.


"0을 찾니?"

"...제 1구역의 프라우스께 인사드립니다."

"0은 저 방 자체가 0이란다. 문을 열고 들어가렴."


0을 찾아 헤매는 내 어깨를 두드린 사람은 제 1구역의 수장 프라우스였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구석에 벽과 같은 색으로 숨어있던 문을 열고 들어간 0의 중앙 벽에는 빅터의 전설이 쓰여있었다. 프로모아사에 사는 헌터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그래, 이게 크리쳐의 시작점이지. 의자에 앉아 벽에 새겨진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멀고도 드넓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 동부. 그 신비로운 곳에 한 연구원이 바닷길에 올랐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영생을 몹시도 갖고 싶어 했다. 시간과 앎은 서로 비례하므로 영생은 그녀에게 탐스럽지만 닿지 못할 열매였으리라. 허나 영생은 신의 영역이었기에 감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고 동부에는 그 신에 가까워질 수 있는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를 사랑한 엔지니어는 그 바닷길에 함께 올라 마침내 그 땅에 발을 딛었다. 그곳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재앙의 시작이었다. 연구원이 저주받은 이들을, 그녀가 바라는 영생을 가진 존재들을 만나고야 말았다. 그 어떠한 존재들에 반한 그녀는 그들의 일원이 되고자 했으나 그들은 가차 없이 거절했다. 하루종일 그들이 떨어뜨린 손수건만 손에 들고서 갈망과 좌절에 미쳐가는 그녀를 위해 엔지니어는 기계인형을 선물했다. 그 인형은 정교한 기계였기에 엔지니어가 있다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었다. 연구원은 생각했다. 이 인형을 실제 사람으로 바꾸면, 그 사람은 영생을 갖겠구나. 그것들을 계속 만들어내 실험을 하다 보면 영생의 답을 얻을 수 있겠구나. 그럼, 그토록 바라던 열매를 손에 쥘 수 있겠구나.

그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동부를 떠나 새로운 땅에 자리를 잡았다. 엔지니어는 오직 사랑의 힘으로 연구원을 도와 인형들을 만들었다. 연구원은 그 인형들을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렇게 '어떤 존재'를 따라 만든 태초의 아이가 탄생했다. 그 이름은, 빅터. 연구원과 엔지니어는 빅터를 사랑했다. 빅터 또한 그들과 그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했다. 아이들 모두가 연구원과 엔지니어를, 서로를, 사랑했다. 매일 본인들의 몸을 헤집어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어도 연구원이 기뻐하고 행복해했으니까. 그런 자신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고쳐주는 엔지니어의 눈물과 미안하다는 말이 너무나 따뜻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랑이 쌓이고 쌓여 증오가 될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 모든 건 밤의 요정의 전설과 비뚤어진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날은 눈이 소복히 쌓인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만 바라보며 그녀를 위해 감내할 고통만을 기다리던 아이들을 연구원은 가차 없이 죽이기 시작했다. 생각을 해본 적도, 생각을 해볼 수도 없던 일에 아이들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임을 맞이했다. 학살이었다. 그 학살 앞에 무력히 쓰러져가는 이들을 위해 연구원이 가장 사랑하던 빅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칼날은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이 빅터를 향했다.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던 그들처럼 가차 없는 손길이었다. 그 손길을 막아낸 건 엔지니어였다. 빅터 대신 흐른 엔지니어의 붉은 사랑이 연구원의 손에 닿으면서 그 학살은 멈추어 섰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손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은 빅터는 살아남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며 복수를 다짐했다. 멍하니 엔지니어를 끌어안고 있던 연구원은 곧 자취를 감췄고, 몸을 추스른 빅터는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빅터의 복수극이 시작되었다.」


"밤의 요정의 전설? 이런 게 있었나."

"몰랐을 수도 있지. 이 벽에 새겨진 게 진짜거든."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올려보니 프라우스가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싱긋 웃어 보이며 나를 내려본 프라우스는 내가 왜 0번에 들어왔는지 궁금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문 앞의 헌터에게 나를 물어봤는데 제 3구역의 토미라고 하길래 호기심이 생겼다고. 마카온이 데리고 있는 두 아이 모두 꽤 괜찮은 헌터라고 얘기들 하길래. 하나는 아까 보고 건 때문에 만났고, 하나는 0에 방금 들어갔다니 도와줄까 싶어서 왔단다.


"크리쳐의 어떤 것 때문에 여기에 들어왔니?"

"...크리쳐와 꽃의 상관관계요."

"꽃?"

"어제 전투에서 크리쳐가 꽃을 가져갔다고 했거든요."

"아, 그거. 너도 어제 거기 있었던 모양이구나."

"네."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해선 둘은 상관관계가 없어. 전설에 따르면 크리쳐는 사람 또는 기계를 찾는 게 1차 목표. 그것들로 동족을 성공리에 만들어내는 게 2차 목표. 최종 목표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처럼 연구원을 찾아 복수를 마무리 짓는 거란다.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는 이것들은 뒤로하고, 우리 헌터들은 그저 크리쳐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켜내면 돼. 답이 되었니?"

"...네."

"그래. 돌아가면 마카온에게 안부 전해주렴."


아저씨 이름 오랜만에 듣는데. 아저씨는 군의관 출신 헌터였다. 크리쳐와 자주 부딪히는 3구역에 인력이 부족해 1구역에서 넘어온 케이스라고 했었는데. 그래서 프라우스가 안부를 전해달라는 건가. 묘하게 빨리 0에서 나가길 바라는 말투에 결국 인사를 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별수 없이 차고로 올라가니 소피아가 바이크에 걸터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점심을 패스한다는 내가 신경 쓰여 그냥 샌드위치를 가져왔단다. 편하게 식당에서 든든하게 먹지. 비가 잠시 그쳤을 때 빨리 돌아가자며 사이드카에 앉은 내게 헬멧을 씌우고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근데 소피아."

"왜?"

"혹시 밤의 요정에 대해 알아?"

"밤의 요정? 뱀파이어는 왜."

"...뱀파이어라고?"

"응.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는 지역별로 다양하잖아. 그중 하나가 밤의 요정 이야기인데, 이건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라 그냥 동화로 넘겨버리는 경우가 대다수거든. 그래서 뱀파이어랑 연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하는 경우가 많지. 애들이 읽는 책에는 반드시 빠지는 구절이 있어. 그게 들어가면 잔혹동화가 돼서. 그... 달을 집어삼킴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밤의 요정이 되었다."

"밤의 요정이라..."

"빨리 뜯고 먹어. 끼니 좀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으라니까? 일단, 천천히 출발할게."


차고를 벗어난 하늘은 비만 잠시 그쳤을 뿐 금방이라도 다시 쏟아지려는지 여전히 우중충했다. 오늘은 크리쳐가 평소보다 이르게 활동할 것 같은데. 아마 비상령을 내리고 일찍 거리를 봉쇄할 것이다. 비가 심하게 오는 밤은 모든 섬의 창문을 막고 자취를 감춰 하루를 넘기는 게 보통이였다. 시력이 뛰어난 적은 비가 와도 문제가 없었지만 우리는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시력을 가진 데다 어둡고 비가 많이 내리면 눈앞의 상황을 인지하기가 힘드니 데미지가 크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반쯤 돌아갔을 때 곳곳의 하늘에 붉은 신호탄이 떠올라 터져나갔다. 제 1구역의 클로버, 제 2구역의 스코트, 제 3구역의 타임 순으로 터지고 그 주변으로 점차 번져나가는 신호탄을 보며 사람들을 하루의 끝맺음이 부디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바라며 모든 문을 막으며 대비했다. 붉어져 가는 회색 하늘에 마음이 조급해진 소피아는 좀 더 속력을 냈다. 아지트에 다다랐을 때는 아저씨가 나와계셨다. 걱정이 된 건지 만약을 위해 항상 부분적으로만 여닫던 차고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아저씨의 수신호에 따라 우리가 들어간 차고의 문은 금방 굳게 닫혔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밑에서 다 해결할 테니 너희는 아침이 될 때까지 7층에서 내려오지 말렴."


우리와 함께 올라온 아저씨는 7층의 입구를 쇠창살 문을 끌어와 자물쇠로 잠가 막은 뒤 엘리베이터의 열쇠를 돌려 가동을 중지시켰다. 신호탄이 터지는 밤은 크리쳐가 활발한 날이라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도, 민간인의 피해가 심해 구출을 나가야 할 수도 있어서 아저씨는 항상 우리를 7층에 대피시키고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된 거 쉬면서 천천히 생각을 이어 나가야겠다 싶어 보호구를 벗고 누울 준비를 했다. 따듯한 물에 감겨진 머리카락을 말리기는 귀찮아서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소파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손수건에 싸여있던 꽃잎들과 카드. 도둑맞은 내 손수건과 같은 미약한 향이 나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시 추론을 시작했다.

공격성을 보이기 시작한 건 내게 배어있는 화약 냄새가 바람에 쓸려간 후. 예민한 후각이 화약 냄새로 덮어져서 그랬다고 치고... 원래 반응대로 살기를 띠며 뛰기 시작한 건 에릭이 숙이면서 내 모습이 드러나고 나서니까...? 그래. 분명 크리쳐는 에릭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정말 나처럼 꽃 때문에, 꽃에 묻은 향 때문에 크리쳐는 에릭을 쫓았을까. 크리쳐의 최종목표는 연구원을 찾는 것. 그건 빅터의 뜻이기도 하다. 그럼 이 향의 주인은 연구원인 걸까? 나의 사명은 빅터와 같은 목적을 띄고 있는 걸까.


"토미. 내 우편물에 네 전보가 같이 끼어있던데."

"...! 줘. 빨리 줘봐."

"뭐야~? 내용이 뭔지 아나 본데? 뭐길래 이렇게 다급해?"


에릭일거다. 내게 전보를 보낸 사람. 부디 전보에 답이 쓰여있길. 꽃에 대해서, 향의 주인에 대해서 쓰여있다면 이 퍼즐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거야. 소피아의 손에 들려 그녀가 흔드는 대로 팔랑거리는 종이를 빠르게 펼쳐보았다. 놀리려고 했는데 내가 장난에 응하지 않고 금세 낚아채 손에서 빼가니 쩝 소리를 내며 아쉬워했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지금 여유가 없다고.


[Flowers, Shop, Evening primrose, Vampire]


"나도 같이 보게 옆으로 좀 가봐. 꽃, 가게, 달맞이꽃, 뱀파이어. ...뱀파이어?"

"...엔지니어와 연구원이 '어떤 존재'를 따라서 빅터를 만들었다."

"뭔 소리야. 이건 뭔 내용이고. 뱀파이어가 너를 안다니!"


[They, Know, You, Tommy]


"부디 '환영받지 못하는 자'에게 안식을 안겨주기를. 마침내 그 가엾은 영혼의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그거 네 신탁이잖아?"


태어나자마자 내게 주어진 사명. 내가 안식을 안겨줘야 할 존재. 내가 찾는 향의 주인. 그리고, 빅터와 크리쳐도 찾고 있는 존재. 그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다. 에릭이 있는 곳에. '어떤 존재'와 빅터의 전설이 더 이상 전설이 아니라 실제 과거의 사건으로 재분류되는 순간이었다. 카드 앞쪽에 쓰여있던 Evening primrose. 이 이름을 가진 꽃집에 그들이 있는 거겠지. 발송인 에릭, 아쉬테프타(aștepta)의 딜(Dill). 수신인 토미, 프로모아사의 타임.


"나 어디 좀 다녀올게."

"이 상황에서 어딜 간다는 거야! 뱀파이어라잖아. 뱀파이어는 이쪽에선 자취를 감춘 지 한참인데... 상부에 보고해야 해."

"보고는, 조금만 미루자. 내가 할게. 그냥 잠깐 조사하고 나서 보고해도 늦지 않아. 휴가라고 하고 여기만 살펴보고 올게."

"이상하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뱀파이어가 언급된다고? 네가 밤의 요정을 물어봤던 오늘?"

"그래. 그래서. 그 밤의 요정 때문에. 이건 운명인 거야. 오늘부터 내 사명의 실이 조금씩 풀리는 거야."


우리가 찾고 있던 건 연구원이 아니라 어떤 존재였어. 빅터가 찾고 있는 게 왜 뱀파이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그들을 찾아야 하는 건 확실해. 하루빨리 딜로 넘어가서 그 꽃집을, 그들을 만나야겠어. 손수건에만 남아있던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날이 이제 멀지 않은 것 같네요,


선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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