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폐하!”

“폐하! 아니 되옵니다, 폐하!”


정 내관과 상궁들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어. 태형은 그것을 전부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갔음. 그리고 불타는 궁 안으로 들어갔어. 밖에서 다들 기겁하면서 빨리 폐하를 모시라고 외쳐댔어. 폐하를 부르짖고 또 폐하를 지키라고 난리야.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안효궁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진 나무 기둥을 바라봤음.

 

내부까지 완전히 무너져버렸어. 처절하고 비참하게 쓰러진 궁이 타올라. 그러니 지민을 덮친 천장이 뭔지, 지민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태형은 무작정 쓰러진 나무들을 파헤쳤어.

 

불이 손에 닿았어. 손이 뜨거워도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정신이 돌았어. 정신없이 파헤치니까, 뒤따라 들어온 궁인들이 태형을 말렸어. 태형이 그들을 뿌리치며 노려봤어. 찾아. 한 마디 명령만 했어. 그 명령이 너무 서늘해서, 다들 더 말리지도 못하고 지민을 찾기 시작했음. 태형은 발갛게 부어오르는 손으로 쓰러진 잿더미를 들어 올렸어.

 

순간 무언가 보였어. 정신없이 들어 올리니까, 더 선명하게 보였어. 새카맣게 타버린 것 말이야. 일부 남아있는 옷만 봐도 궁인의 옷은 아니야. 그러니 저 다 타버린 비단은 지민의 옷이었음. 태형의 숨이 잠시 멎었어. 움직임도 함께 멎었어. 순간, 귀도 먹어 버렸지.

 

멍해진 눈조차 멀어버리는 것 같아. 하지만 지민이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 아니어야만 하잖아. 태형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어.

 

“폐하…!”


태형은 이제 그 앞으로 몸을 기울였어. 그렇게 하니까 더 선명하게 보여. 떨리는 손이 가만히 누워있는, 사람인지도 뭔지도 모를 새카만 덩어리를 매만졌어. 코끝을 메우는 지독한 탄내가 나. 계속해서. 황제의 입술이 덜덜 떨려왔음. 지민의 옷. 장신구. 같은 체구. 그리고…….

 

태형은 반쯤 타버린 노리개를 잡아 들었어. 어떻게 생겼는지 문양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나는 노리개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지. 어떻게 잊겠어? 선황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받은 노리개인 것을. 황제만이 지닐 수 있기에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직접 받았지. 그리고 그걸 직접 지민에게 줬어. 어차피 제 황후가 될 테니 준 것도 있지만, 그냥 주고 싶어서 준 거야. 지민이 그만큼 소중하니까. 평생 제 옆에서 노리개를 지니고 있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아니야. 괜히 줬어. 괜히 이 짐을 줘버렸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었어야 했는데. 노리개가 얹힌 태형의 손바닥이 덜덜 떨렸어.

 

세상에. 그것을 본 정 내관이 탄식하며 주저앉았어. 지민의 노리개야. 궁 안에서 이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음. 황제의 노리개를 지민이 받았으니 당연히 다들 알았거든. 과한 처사라고 말도 많았으니까. 태형이 노리개를 멍하니 바라봤어. 동시에 노리개를 본 궁인들이 전부 놀라며 오열하기 시작했어. 태형은 손에 들린 그것을 보다가, 새카맣게 탄 시신을 매만졌음.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어. 그냥 저를 원망하는 목소리. 그것만 울렸음. 태형은 시신을 안아 들었어. 불에 닿아 고통을 호소하는 손이 비명을 질러댔어. 그래도 그대로 안고 밖으로 나왔어. 밖으로 나오니까, 태후와 한의가 그 앞에 있었어. 태형이 시신을 안고 나오자마자 태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어.

 

“폐하…”

“입 닥쳐.”

 

가까이 오지 마. 태형이 말하니까, 다가오던 한의가 뒤로 물러섰어.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것 같은 태형의 눈 때문에 말을 더 걸 수도 없었음. 태형이 정 내관에게 눈짓하자, 정 내관이 급하게 가져온 태형의 외투를 펼쳤어. 태형이 그 위로 탄 시신을 내려놨어. 그리고 가만히 그 시신을 바라봤어.

 

‘폐하의 손이 닿았던 살갗을 도려내고 싶어요.’

‘폐하가 제 몸을 건드리시면, 저는 그냥 혀를 깨물어 죽겠습니다. 제 형제들을 죽이셔도 저는 죽을 겁니다.’

 

나 때문이야.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폐하가 제 가족을 그리 만들었는데…’

‘폐하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나 때문이다.

 

태형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어. 그리고 손에 잡힌 노리개를 바라봤어.

 

‘지민아, 이것이 마음에 들어?’

‘응. 마음에 듭니다. 색도 곱고, 반짝반짝해요!’

‘이것을 가지고 싶으냐.’

‘그치만… 어마마마가 이건 폐하의 소유라고 했어요. 딱 하나 뿐이라구요. 폐하가 아니면 누구도 가질 수 없다고 했는데… 제가 이걸 가지면 안 되잖아요…’

‘되지 않을 리가 없지.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너에게 주면 되는 것을.’

 

너에게 주마, 지민아. 그 말에 기뻐했던 얼굴이 떠올랐어. 평생 달고 다닐 거라고, 절대 떼어놓지 않겠다고도 했어. 심지어 잘 때도 가지고 잘 정도였지. 제 노리개를 고사리 같은 손에 꼭 쥐고 자던 지민이 떠올랐어. 혼인 후에는 머리맡에 매달아 놨던 것도 생각이 나. 아이가 태어나면 주겠다고도 했었지. 품에 꼭 안겨서 그런 말을 했어.

 

그런데 그게 탔어. 지민과 함께 타버려서 재가 됐어. 태형은 그냥 멍하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시신과 노리개만 쳐다봤음.

 

“폐하…”

“아인궁으로 옮겨.”

“예?”

“아인궁으로 지민이를 옮겨야겠다.”

“하지만… 그곳에는 황후마마께서,”

“다 치우고 옮기라고. 거긴 지민이 궁이야.”


황명이다. 태형이 그 말을 하며 노리개를 쥐었어. 정신이 자꾸만 아득해졌음.

 

 

***

 

 

“유모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치.”

“그럼. 다 해줘야지.”

 

유모가 발을 주물러주며 말했어. 가는 길에 있는 주막에서 방을 빌렸지.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없어서 몸이 더 편했어.

 

“나도 유모 다리 주물러줄래.”

“그럴 필요 없어. 앞으로는 다리가 더 부을 테니, 그것을 걱정해야지.”

 

유모가 한숨을 짧게 뱉었어. 아직도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얼굴인데 부모가 된다니. 아이를 품는 일은 정말 어렵고도 험난한 일인데, 도망까지 쳐야 하니 더 걱정됐어. 국경까지 가려면 몇 개월이나 걸리니까 도중에 주막이나 묵을 곳이라도 없으면 꼼짝없이 밖에서 자야만 하거든. 귀하게만 자란 몸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근심이 컸어.

 

“다리가 많이 부어?”

“많이 붓지. 그래도 그것만 하면 다행이게.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안 아픈 곳이 없지.”

“…….”

“힘들 거야. 그래도 힘내야지.”

“응. 원래 부모가 되는 건 어려우니까…”

 

나 그렇게 쉽게 안 지칠 거야. 지민이 웃었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너무나도 달라. 몇십 명씩 달라붙어 봐주었던 궁인들도 사라졌지. 그래도 지민은 웃었어. 원실이 지민을 보며 같이 웃었음.

 

“그래도 속으신 것 같아 다행이지?”

“폐하께서 다른 일은 안 하셨으니, 그럴 거야.”

“…유모들, 잘못됐으면 어떻게 하지?”

“각오하고 남은 거야. 우리끼리도 충분히 이야기했고.”

 

죽어도 상관없다. 결론을 내렸었지. 목숨 하나는 아깝지 않았거든. 키운 아이도 제 아이였으니까. 다들 가족이 있지만, 그래도 지민과 보낸 시간이 더 많았기에 제 목숨 하나쯤은 바칠 수 있었어.

 

“그리고 별다른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응.”

 

지민이 몸을 눕혔어. 그러고는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또 커진 기분이었음. 몸이 점점 무거워졌고 입덧은 대충 끝났지만 아직 음식 먹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어.

 

“폐하께서는 날 잊으시겠지?”

“…….”

“못된 말도 잔뜩 했어. 폐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잖아. 폐하를 천하에 둘도 없는 파렴치한으로 말했어.”

“지민아.”

“떼만 쓰고, 나쁜 말만 한 사람이니까 금방 잊으시겠지?”

 

기억 곳곳, 태형이 없는 곳이 없었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태형은 늘 있었음. 그러니 자신은 태형을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렇게 좋아하고 따랐는데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지. 제 생에 유일한 낭군이었고 또 진심으로 연모했으니 아마 평생 가슴에 담고 살 거야.

 

하지만 태형은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누가 사술을 부려서라도 자신과의 기억을 지웠으면 했지. 태형이 저를 완전히 잊어야 행복할 것 같았거든. 자신처럼 그 기억을 붙잡고 살면 황제로서의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슬퍼할 테니까. 지민은 태형이 저에게 아무런 정도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비록 이용하기는 했어도 지내면서 보아온 시간이 있잖아. 지민의 죽음을 믿는다면, 아마 틀림없이 슬퍼하겠지.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야. 태형이 스스로를 탓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제넘고 분수도 모르는 생각이었어도 태형이 제발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어.

 

“더 화를 내시게 할 걸 그랬다. 벌도 받고.”

 

기억을 꽁꽁 싸서 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서랍처럼 빼낼 수 있으면. 그럼 태형의 기억을 모조리 빼서 자신의 기억에 담을 텐데. 천천히 배를 쓰다듬는 손이 떨렸어.

 

“아예 버림받아서, 냉궁에서 도망치는 게 나았을 것 같아.”

“그런 생각 하지 마.”

“버림받는 게 무서워서 끝까지 저항도 못 했어.”

 

만약 귀비의 첩지를 받을 때 난리라도 부렸으면 냉궁에 보냈을까. 자신을 버렸을까. 아이의 존재를 몰랐을 때는, 조금이라도 더 태형을 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그걸 거부하지 못했어. 비참한 마음에 자신을 버려달라고 했고 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인비를 때리기도 했지만, 딱 그뿐이었지. 다른 건 못 했어. 진짜 버릴까 봐 무서워서. 다시는 못 볼까 봐 두려워서. 그 얼굴을 생각하는 지민의 눈에 눈물이 맺혔어.

 

“너무 슬픈 얘기만 한다. 그만 얘기할래.”

 

지민이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어. 아직 갈 길이 멀어. 한참 남았으니 벌써 기운 뺄 수는 없었음. 지민은 유모의 품에 안겨서 눈을 감았어.

 

“부모님은 살아계시겠지?”

“그때 이후로 소식이 없기는 하지만… 별다른 일이 아니라면 살아계실 거야.”

“얼굴이 궁금해.”

 

그리고 유모처럼 따뜻하신 분들이었으면 좋겠어. 지민이 말했어. 유모가 등을 토닥여주겠지. 아마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얼굴 한 번은 봐야지. 지민은 애써 태형의 얼굴을 밀어내며 부모님의 얼굴을 상상하려고 애썼어. 그렇게 계속 있으니 잠이 오겠지. 늘 이런 식으로 자는 버릇이 생겼거든.

 

우리 아기 마마. 좋은 꿈을 꾸셔요. 유모가 작게 말했어. 말을 놓으라니까 그런다. 말하려던 정신이 점점 흐려지겠지. 그래도 부모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어. 그냥 그 보고 싶은 하나의 얼굴만 떠올라. 지민은 잠에 빠져들며 눈물을 흘려냈어.

 

보고 싶어요, 폐하. 그 말은 오늘도 꿈에 나올 사람에게 해주기로 했어.

 

 

***

 

 

“어마마마… 폐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겠지요?”

“…….”

“……저는 폐하를 걱정하여…”

“알겠으니 몸을 돌보아라. 내가 말을 해볼 테니까.”

 

태후가 두려움에 떠는 황후를 바라봤어. 탓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음. 황손을 가졌는데 괜히 잘못될까 봐. 더구나 불이 난 게 황후 잘못은 아니니까 탓해봤자 소용도 없었지. 태후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만 내뱉었어.

 

“하지만 제가 언제까지 언니의 궁에 있어야 하는지……”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면 다른 궁에 가 있거라. 빈 궁은 많지 않으냐.”

“그것이 아니라,”

“지금 황상을 건드리면 안 돼. 혹여라도 찾아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태후가 단호하게 말했어. 지민이 죽은 날부터, 아인궁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밖으로 죄다 쫓겨났음. 짐조차 둘 수 없었지. 그래서 일단은 언니와 함께 있으라고 인비의 궁에서 지내라고 했는데 황후가 궁을 뺏긴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어.

 

“조심하겠습니다.”

“명심해라, 황후. 절대 그 앞에 찾아가지 마. 아인궁 얘기는 하지도 말고.”

 

난 내 아들을 알아.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아니까 하는 말이야. 태후가 말했어. 아쉬워도 참으라는 이야기였음. 어차피 아인궁에서는 황후밖에 못 사는걸.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게 될 거라고도 말했어. 그러자 한의가 아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음.

 

“문안도 여쭈면 안 되겠지요?”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을 못 들은 게냐.”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어릴 적에 그런 적이 있다. 아직 태자도 되지 않았을 때야. 아홉이나 되었을까, 아끼던 말이 하나 있었어. 끔찍하게 아꼈거든. 원래는 야생마였는데 황상이 유일하게 길들인 말이었지.”

“그런 말도 있었습니까.”

“1년도 못 가서 죽었어. 넌 모를 것이다. 나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만 알아야만 했고.”

“어찌…”

“관리하던 것들이 일부러 그런 게야. 당시에는 태자 자리가 비어 있어서 황자끼리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 누군가 명령을 내렸겠지.”

“누가요?”

“나도 모른단다. 알 수도 없어. 그저…”

 

태후가 잠시 말을 멈추었어. 그때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파졌음. 그 일을 처리하려고 얼마나 골이 아팠는지, 지금도 아파. 태후가 잠시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어. 한의는 조용히 그 말을 기다렸음. 뭔지는 몰라도 보통의 말은 아닐 것 같았지.

 

“자정이 넘어서 상궁이 깨우더구나. 내 아들이 없다고. 그래서 찾았지. 순치원에 있었어.”

“동물을 기르는 곳이 아닙니까.”

“그곳에 그 말이 살았으니까. 그런데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그날 순치원에 있던 사람은 다 죽었단다.”

“…….”

“선황께서 붙여주신 무사가 다 죽였지.”

 

왜 죽였을 것 같으냐. 태후가 물었어. 한의가 마른 침을 삼켜냈어. 황제가 그런 성격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사람을 죽였다는 말도 친정을 시작한 이후로는 잘 듣지 못했고. 더구나 그동안 보아온 모습까지 있었으니 설마 그럴 것이라고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어.

 

“하지만… 당시 형님들이 폐하를 괴롭힌 것이 아닙니까. 태자 자리 때문에…”

“그랬지. 괴롭혔지. 태형이가 순해서 유독 더 괴롭혔다. 정실의 아들이니 대놓고는 못 해도, 매번 생채기가 나서 오곤 했어.”

“그런 형님들 명을 받고 아끼던 말을 죽였으니 당연히 복수한 것이 아닙니까.”

“그전까지는 표시도 내지 않았어. 지금 성격은 정무를 보며 많이 딱딱해진 것이지. 원래는 훨씬 더 부드럽고 귀여웠어.”

 

그런데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전부 죽인 거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참았던 것이 나왔다는 게지. 나는 그 일을 덮어야 해서 아주 힘들었다. 죽은 이가 한둘도 아니고 수십인데 폐하께서 아시면 내 아이를 그대로 두셨을까. 태후가 조용히 말했어. 기껏해야 한둘일 줄 알았는데 수십. 한의가 헛기침했어.

 

“그게 더 무서운 거야.”

 

늘 괜찮다고 했었어. 눈치도 빠른 아이라 남들 기분도 잘 살폈고, 어머니가 하라는 건 뭐든지 했고, 서자인 형님들이 정실의 자식이라고 몰래 괴롭혀도 그냥 넘어졌다고 하고 말았었지. 그날만 빼고는 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 이야기였음.

 

“그래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만.”

“…그럼 괜찮지요.”

“그런데 지금은 말이 아니라 지민이야. 아끼던 동물이 아니라, 반려였던 지민이라고. 사람이란 말이다. 같은 베개를 베고 누웠던.”

“…….”

“나는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무섭구나.”

 

그때야 어렸지, 지금은 제 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어. 뭐하러 무사를 시키겠느냐? 태후가 말했어. 한의는 그 뜻이 무엇인지 조용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어. 단 한 번이라도 그랬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어마마마.”

“그래. 그러니 가서 태중 황손을 돌보거라.”

 

내가 황상을 보러 갈 테니. 태후가 말하자 한의가 물러났어. 태후는 잠시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황제궁에 가려고 몸을 일으켰음. 그런데 상궁이 뛰어 들어와. 정신없이.

 

“마마, 큰일 났습니다.”

“무엇이?”

“폐하께서 대무녀를 아인궁으로 부르셨답니다.”

“뭐라고?”

“데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끌고 오라고…”

“당장 가마를 가져와.”

“예, 마마.”

 

태후가 급하게 움직였어. 가마를 재촉해서 거의 달리듯 갔지. 그런데 아인궁 안까지 갈 필요도 없었어. 아인궁 밖에 태형이 나와 있었거든. 지민의 관이 만들어지는 며칠 동안은 아인궁에만 있었는데, 안도 아니고 대문 밖에 대무녀를 꿇린 거야. 가마에서 내린 태후가 급하게 그쪽으로 다가갔어.

 

“이게 무슨 짓이오, 도대체 왜…”

“물을 것이 있어 불렀습니다.”

“무엇을?”

 

태후가 물었지만, 태형은 대답하지 않았어. 그냥 대무녀를 쳐다봤음.

 

“묻겠다. 대답해라.”

“예, 폐하.”

“지민이가 좋아하는 꽃이 무엇인지 아느냐?”

“…예?”

“좋아하는 꽃. 좋아하는 색. 좋아하는 옷. 다 말해.”

“…….”

“너는 신을 모시지 않느냐. 그럼 네 신에게 물으면 되잖아.”

“폐, 폐하. 그것을 제가… 신께서는 그런 사소한 것까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그래?”

“예, 폐하. 신께서는 나라의 중요한 일만 대답하십니다.”

 

대무녀가 말했어. 그렇구나…. 태형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어. 아주 안타까운 얼굴이었음. 태후는 순간, 등줄기를 스쳐 지나간 소름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어.

 

“그럼 내가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부탁… 이시라면…”

“조정에서 골치가 아픈 일이 하나 있다. 큰일은 아니나 신의 뜻이 필요해서.”

“어떤 일이신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신께 여쭤보겠습니다.”

“아니. 신에게는 묻지 말고. 그냥 신의 뜻이라고 말하면 귀족들이 알아듣지 않을까? 수세(收稅)에 관한 이야기라.”

 

세를 조금 더 걷으려는데, 네가 도와주면 좋을 것 같다. 도와만 준다면 섭섭지 않게 해주마. 태형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대무녀가 눈을 크게 떴음.

 

“무슨 뜻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금 열 상자면 될까. 난 황제니 뭐든 해줄 수 있지. 네 가족을 99칸 집에 넣어줄 수도 있고.”

“…….”

“그저 세를 아주 조금만 거두려는 것이다. 도울 수 있겠느냐.”

 

안 돼. 태후가 입을 벙긋거렸어. 하지만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음. 그날, 그 어린 날. 이곳이 꼭 제 아이를 찾아 미친 듯이 달려갔던 순치원 같아서.

 

“폐하… 신의 뜻을 움직이는 일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

“아니면 네가 신을 설득해보아라. 응? 내 조상님이시니까.”

 

내 말을 들어주시겠지. 황제가 다시 말해. 대무녀의 눈이 흔들려. 금 열 상자면. 99칸의 집이라면. 여느 귀족 못지않게 살 수 있을 거야. 제 어머니처럼 신의 뜻은 대가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었지. 아니, 오히려 그런 척을 해도 잘 살 수 있을 거였음. 꼭 안씨 집안이 저에게 해줬던 것 말이야.

 

게다가 지금 상대는 황제였지. 귀족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씨 가문이 비록 대가를 약속했기는 했으나 그건 태중 아이가 태자가 된 다음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직 약속한 것을 반의반만 받은 상태였거든. 하지만 황제라면 한 번에 줄 거야. 어쩌면 제 다른 형제들에게 관직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어쨌든 황제는 이 제국의 주인인걸.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음.

 

“아니야…”

“마마?”

“태형아.”

 

태후가 겨우 아들의 이름을 불렀어. 하지만 너무 소리가 작았음. 대무녀는 그사이에 고개를 들었어. 그러고는 황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어.

 

“신께… 설득의 말은 올려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

“예, 폐하. 제가 기도를 올려서… 신의 허락을 받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것이면 됐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여. 신녀를 이용하는 황제는 많았어.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대가를 주는 건 처음 봤어. 어머니가 워낙 청렴해서 그런가. 물론 친어머니는 아니고 신어머니였지만, 어쨌든 선대 대무녀가 국가의 신녀임에도 가난하게 살아서 저까지 가난하게 살았지. 대무녀는 잠시 호화롭게 사는 꿈을 꿨어. 어쩌면 제국에서 갑부로 살 수도 있을 거야. 당장 안씨 가문의 생사도 저에게 달린걸. 예언 또한 저의 일이었으니까.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태자만 된다면 현 황제와 다음 황제까지 전부 제 손에 둘 수도 있는 거였음.

 

“노력해보겠습니다.”

 

대무녀는 그 부귀영화를 꿈꾸며 그때처럼 똑같이 대답했어. 안씨 가문의 가주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미소를 띠며 당신과 내 거래는 성사되었다는 뜻을 품고.

 

황제의 눈이 보여. 저 사람은 용이야. 어머니가 늘 그랬지. 황제마다 타고나는 용의 기운이 있다고 말이야. 신딸이기는 해도 어머니보다는 신의 기운이 약해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용의 기운은 느껴졌음. 


하지만 그 용의 눈이 평온했어. 평소엔 오히려 화가 나 있다고 느꼈는데 오늘만큼은 평온했어.

 

“저, 폐하…”

 

그래도 그게 뭔지는 잘 몰랐어. 오히려 언제 물으러 올 것인지 물으려고 했지. 그날이 거래가 끝나는 날이니, 준비를 하겠다고 말하려고도 했어. 살짝 눈을 빗겨서 보고 있던 대무녀가 고개를 조금 더 들었음.

 

그리고 용의 눈을 보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났어. 굉장히 작은 소리였지. 약간은 날카로운….

 

“그것이면 됐다니까.”

 

황제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울렸어. 그 눈을 보고 있던 대무녀는 그제야 깨달았어. 방금 들린 소리가 무엇인지. 대무녀의 손이 제 목을 감싸겠지. 끅끅, 날것의 소리가 났어.

 

평온한 용이 아니야. 대무녀는 바닥에 쏟아지는 제 피를 바라보며 그 기운을 느꼈어. 그제야 느껴지는 기운이 대무녀를 덮쳤어. 날카로운 단검에 그어진 목에서 피가 폭포처럼 흘러나왔음.

 

“치워. 피도 다 지워. 돌도 바꿔 갈아.”

 

분노. 분노야. 대무녀가 털썩 쓰러지며 생각했어. 극렬한 분노가 평온을 만들어 낸 거야. 그거였어. 어머니가 그렇게 기운을 느끼라고 했는데, 그걸 죽어가는 순간에야 알아버렸어. 하지만 이제 끝이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거든. 그저 암흑. 끝. 대무녀는 그렇게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꺼트렸어.

 

“태형아…”

 

궁인들이 급하게 움직였어. 시체를 치우고 피가 흥건한 곳을 닦기 시작하겠지. 다들 공포에 질려서 그저 시킨 일을 했어. 정 내관은 태후의 표정을 보며 바닥에 갈아 끼울 돌을 가져오라고 했음.

 

“어마마마 오셨습니까.”

“지금…”

“신의 뜻을 만들어 내는 신녀가 어찌 대무녀가 됩니까.”

 

신의 뜻을 그대로 받들어야 대무녀가 되겠지요. 전 그저 신의 뜻을 속인 것을 벌했습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어. 불에 닿아 천을 둘둘 감아둔 손에서 단검이 떨어지겠지. 태후의 얼굴이 창백해졌음.

 

‘어마마마. 소자는 그저 형님들의 명을 사칭한 것들을 벌했습니다.’

‘이 무도한 것들이 그러지 않습니까. 형님들이 제 말을 죽이라 했다고요.’

‘윗전의 뜻을 곡해하는 것들이 어찌 궁에서 일합니까. 필시 형님들과 저를 이간질하려는 것이지요.’

 

이제 눈이 질끈 감겼어. 그때는 제 아이를 숨겼어. 그런 게 아니라고 전부 없던 일로 했어. 하지만 지금은 숨길 수가 없어. 다 커버렸으니까.

 

그래. 그때도 이렇게 죽였어. 시험을 했고 이유를 만들어 내서 죽였어. 어차피 증명도 할 수 없는 ‘진짜’ 이유는 드러내면 안 되니까. 어차피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거든. 아끼고 사랑하던 말을 죽인 순치원의 모든 이를 죽이고 싶다고 하면, 누가 그걸 이해해주겠어? 그러니 시험을 던지고 그것에 적절하게 답하면 그것을 이유 삼아 죽인 거야. 물론 시험을 통과하면 살려주겠지만 대무녀도 순치원의 사람들도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음. 어차피 죽이기로 생각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

 

“대가를 받고 신의 뜻을 만들어 내다니… 참으로 괘씸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그냥 하나야. 지민이 죽어서, 그때처럼 더는 참을 수가 없어진 거야. 그래서 지민을 그렇게 만든 모든 이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거였음. 그 일이 다시 벌어질까 봐 두려워하기에는 이미 늦은 거였지. 태후는 두 번째로 보는 눈을 바라보며 멍해졌어.

 

“저는 아인궁에 있겠습니다. 관이 완성되었으니 봐야겠지요.”

 

어마마마. 돌아가시지요. 말을 마친 황제가 아인궁 안으로 들어갔어. 태후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궁인들 입을 막아라.”

 

또한 명령할 수밖에 없었지. 그때처럼 숨길 수는 없겠지만, 피라도 닦아야만 했어. 태후는 급하게 닦이는 피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어. 꽉 닫힌 아인궁의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건했음.

 

 

***

 

 

“괜찮은 거야?”

“응. 아직 더 걸을 수 있어.”


밥도 배불리 먹었잖아. 지민이 웃으며 말했어. 그러고는 걸음을 재촉했음. 배가 나날이 나와. 강을 건너고, 국경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지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눈에 띄게 부풀었어. 마차를 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유모가 배를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어. 정말 괜찮아. 그리고 우리 빨리 가야 해. 아까 들었잖아. 주막에서… 지민이 말끝을 흐렸어.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어. 계속 가기는 해야 해. 아까 들린 주막에, 도성으로 올라가는 군사들이 몇 있었거든. 도성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죽은 귀비를 아직도 장례 치르지 않았다는 말도 분명히 들었음.

 

한 달이 더 지났어. 그러니 분명 그날 죽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았는지. 너무나도 불안했어. 혹시 죽지 않은 걸 알게 된 걸까. 그래서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것일까. 아니라면 내가 너무나도 미워서, 증오스러워져서 그냥 시신을 버렸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어.

 

“그래도 산을 지날 때는 나귀를 타야 할 것 같은데…”

“응. 그렇게 하자.”

 

지민이 걸으며 배를 쓰다듬었어. 국경까지 가려면 서너 달은 더 걸려. 지금도 버거운데 더 힘들겠지. 아주 많이. 그래도 우선은 진짜 가족들이 보고 싶었어. 비록 아무것도 모르고 황제의 아이를 가진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유모. 폐하께서 정말 모르시겠지?”

“아셨다면 병사들이 돌아다닐 거야. 전 제국에 퍼질 거고. 괜찮아.”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어.”

“생각을 많이 해서 그래. 조금만 덜 생각해. 응?”

 

그래서 그런 것일까. 지민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한숨을 뱉었어. 유모의 말이 맞기는 했으니, 정말 제 죽음이 가짜라는 사실을 안 건 아닐 거야. 정말 모를 거야. 그런데 자꾸 가슴이 답답해졌어.

 

“잠깐만 쉬자. 나무 그늘이 좋네.”

 

유모가 일부러 지민을 나무 아래 앉혔어. 부모가 불안해하면 아이도 불안해져. 유모가 다독여주겠지. 지민은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국경에 가면 배가 많이 부르겠지?”

“응. 그래도 그전에 조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이따만큼 커져?”

“그거보다 더 커져. 그리고 지금 상태로 보면…”

 

아이가 많이 커. 유모가 걱정하듯 말했어. 그건 지민도 알고 있었어. 회임을 알게 된 후로는 아이가 안심하듯이 무럭무럭 자랐거든. 어쩌면 그동안 숨어있었던 것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겠지. 지민은 반쯤 나온 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어.

 

“차라리 해산하고 가는 건 어떨까?”

“…그건 안 돼. 어차피 오래 있지 않을 거잖아.”

“오래 있지 않을 거라니?”

“날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일도 있었고, 무엇보다… 폐하의 아이잖아.”

 

폐하는 가문의 원수야. 그런 폐하의 아이를 가졌는데 어떻게 부모님 곁에 있겠어. 아이만 낳고 바로 국경을 넘을 거야. 지민이 생각하던 것을 말했어. 유모가 놀란 얼굴을 했음. 그것까지 생각한 줄은 몰랐거든. 그냥 부모와 형제가 보고 싶으니 가는 것으로만 알았지. 유모는 잠시 지민의 얼굴을 보다가, 쓰다듬어주었어. 생각이 깊구나. 그래도 나쁜 생각이야. 타이르기도 했지.

 

“현실이잖아. 내가 부모님이라도 내가 미울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알면 곤란해지니까, 얼굴만 보면 떠나야지. 지민이 단호하게 말했어. 혹시 가족에게 또 피해가 갈까 봐 그러는 거야. 혹시라도 황제가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자신만 죽어야 하니까. 지민은 이미 최악의 경우 또한 생각해둔 상태였음.

 

“그땐 미워하지 않으셨다니까.”

“지금은 20년도 더 지났는걸.”

 

떵떵거리던 가문의 사람으로 살다가 20년이나 노비로 살게 되면 어떨까. 수도 없이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마음을 알지는 못할 거야. 지민이 고생한 건 단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어. 그저 아주 힘들고 끔찍할 것이라는 생각만 들었지.

 

“그래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좋지 않아. 너에게도, 아이에게도.”

“…확실히, 궁을 나오니까 생각도 많아지네.”

 

그냥 원래대로 잘 태어나서, 황제의 반려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그 생각도 했어. 다른 가문에서 태어나서 가문을 박살 내지도 않고 황후가 되었다면 엄청나게 행복했겠지. 황제의 귀인은 자신이고 또 아이도 있으니까. 지민은 나무에 머리를 기대며 그런 꿈같은 상상을 다시 했어.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일에 대한 상상이었지.

 

“지민아. 그럼 소원을 빌까?”

“소원?”

“이런 커다란 나무 근처에는 산신령이 계신대. 그래서 돌을 쌓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

“정말? 그럼 빌어야지.”

 

지민이 말하면서 바닥의 돌을 주워 쌓기 시작했어. 별것도 아니고 그저 풍속이겠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었어. 유모와 제 마음이 편해지도록.

 

그렇게 지민은 유모와 같이 돌을 쌓아 올리고 두 손을 모아 빌었어. 눈을 꼭 감고 말이야. 바라는 건 그저 가족의 행복. 그뿐이었지.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가족. 혈육과 제 아이 그리고…. 지민은 생각을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섰어. 이제 다시 출발해야 할 때야. 배를 쓰다듬던 지민이 유모의 손을 잡고 길을 걷기 시작했어. 또 멀리까지 걸어야겠지. 그래도 소원을 비니 마음이 나름 편해졌어. 아가야, 조금만 버티자. 마음속의 목소리가 울렸어.


 

***

 

 

“마마…”

“나보고 어찌하라는 게야? 황상이 저 상태로 계속 있는데…”

“제 얼굴을 한 달이나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도 그렇고요. 그리고 아인궁도…”

“황후!”

“…어마마마.”


지민이가 죽었어. 그런데 고작 한 달을 못 견디는 게야? 그리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니까! 태후가 성을 냈어. 같이 앉아있던 인비가 깜짝 놀라서 뒤로 조금 물러났음. 한의는 잔뜩 마른 태후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어.

 

“폐하께서 또 아무것도 드시질 않습니다. 미음도 다 드시질 않는다고 들었어요.”

“…….”

“마마, 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러다 사달이 납니다. 정무도 겨우 보시질 않습니까. 그마저도 중요한 것이 아니면 보지도 않으세요. 계속 저리 아인궁에 계시게 두실 겁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시신이라도 치워야지요. 계속 관에 있질 않습니까. 망자에 대한 예도 아닙니다. 인비가 거들었어. 태후는 아픈 머리를 짚다가, 한숨을 뱉었어.

 

“네 생각은 알겠다만, 지금은… 지금은 안 돼. 누가 있어도 안 된단 말이다. 내,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어마마마께서는 폐하의 모친이십니다. 폐하께서는 소문난 효자시고요.”

“마마. 정 그러면 저라도…”

“인비. 나설 곳을 가려라.”

“…예, 마마.”

 

인비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어. 서녀인 동생이 황후가 되더니 이젠 취급도 달라. 성이 났지만, 정실이 되지 못한 제 잘못이니 어쩌겠음. 입술을 씹으며 뒤로 더 물러났지.

 

“마마. 저는 진실로 폐하가 걱정되어 그럽니다. 제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안다. 네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느냐?”

“저러다 쓰러지시면…”

“또 내가 가봐야겠지.”

“같이 가시지요.”

“넌 안 된다니까. 아인궁에 가지 말아.”

 

태후가 막아섰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자신은 아니까, 황후를 태형의 눈앞에 보일 수는 없었음. 설마 자신의 아이를 가진 황후를 해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도 제 아들이 어디까지 할지는 모르는 거니까. 최대한 조심하는 게 나았어.

 

그래도 한 달은 지났으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 아무리 화가 났어도, 한 달이면 많이 가라앉았겠지. 헛된 생각도 같이 들었어. 실제로 대무녀 이후로는 죽인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가보겠다고 말을 했어. 똑같이 미음이나 먹고 사는 처지지만, 그래도 아들은 황제였어. 자신은 죽어도 이 제국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아도 황제는 아니니까. 황제는 제국 그 자체니까. 그래서 겨우 가마에 올랐어.

 

“아인궁으로 가자.”


말을 하고는 가만히 있었어. 가마가 움직여. 동시에 어마마마! 목소리가 들렸어. 앳된 목소리. 태후가 귀를 막았어. 이건 지민의 목소리였음.

 

“귀가 아프구나.”

“마마, 어의를 부를까요?”

“아니. 괜찮다.”


어마마마와 저는 가족이잖아요. 그렇죠? 목소리가 다시 들렸어. 태후는 귀를 간신히 틀어막으며 아인궁에 도착했어. 그래도 지민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지. 솔직히 말하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음. 꼭 태형의 일이 아니더라도 그날 이후로 늘.

 

지민이 아기 때부터 칭얼거리면 안아 재웠어. 빼앗아 키운 주제에, 더 커서도 그랬어. 그럴 시기가 지났어도 며칠에 한 번은 안아 재웠지. 태형이 처음이자 마지막 아이니까, 키운 지 15년이나 지난 뒤라 그런지 아기를 새로 보는 일이 즐겁고 좋았어. 행복했고 또 설레기도 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하며, 태후는 천천히 아인궁으로 들어갔어. 아인궁은 지민이 있을 때와 똑같이 푸르렀고, 꽃이 흘러넘칠 정도로 예쁘게 피어있었어. 황제가 관리를 철저하게 명했으니 다들 기를 쓰고 아인궁을 아름답게 만들었거든. 태후는 그 아름다운 마당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어.

 

아인궁의 침궁 안. 그 안은 아주 고요했어. 바깥의 소리조차 나지 않았지. 들어가면 관이 있어. 커다랗고 화려한 지민의 관. 태후는 침궁 한가운데 있는 관을 바라보다가, 그 앞에 앉아있는 태형을 바라봤어.

 

“태형아.”

“…….”


엉망이었어. 그날 이후로 말이야. 태형은 잔뜩 마른 얼굴로 태후를 바라봤어. 그날 이후로, 단 하루도 이 앞을 떠난 적이 없었음. 자기 궁으로 돌아간 적도 없었고 그냥 항상 이 앞에 있었어. 태후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아들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그 옆으로 다가갔어.

 

“상소가 또 잔뜩 올라왔다더구나.”

“그들이 알아서 볼 것입니다.”

“언제까지 종친들에게 맡길 작정이야? 그러다 네 자리를 넘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럼 죽여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지?”

“그게 중요합니까.”

“황제잖니.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어. 더구나 회임한 황후가…”

“그 인간 얘기…”

“…….”

“꺼내지 마십시오.”


지금도 죽여버리고 싶은 것을, 어마마마 때문에 참고 있으니까. 태형이 서늘하게 말했어. 태후가 움찔거렸음. 참고 있다면 화가 풀린 것일까. 기대감이 들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아들은 전혀 그런 모양새가 아니었어. 분노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잠재해있었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그런 상태로. 그러니 분노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음. 그냥 자신으로 인해 최소한의 정신만 붙잡고 있을 뿐.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게냐. 네 아이를 가진 사람이야. 황후가 아니면,”

“그것이 아니면!”

 

지민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태형이 말했어. 태후가 한숨을 뱉었음.

 

“어찌 그것이 황후 잘못이겠느냐? 불이 난 것을…”

“압니다. 원인은 저니까요.”

“그건 또 무슨…”

“어마마마와 제가 지민이를 죽였지 않습니까.”

 

알아요. 그래도 용서 못 합니다. 아이만 낳으면… 아니, 아이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필요 없으니까. 태형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어. 그러고는 관에 묻은 조그만 티끌을 털어냈음. 먼지 한 점도 쌓이지 않은 관이 소름 끼치도록 깨끗했어. 아마 태형이 매일 닦는 거겠지. 이 앞에 앉아서, 모든 것이 끝난 저 얼굴로. 아직도 천이 감겨 있는 태형의 손이 눈에 박혔어.

 

태후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어. 대무녀를 죽였어. 아무리 입을 막아도 언젠가는 다들 알 거야. 이러다가는 정말 반란이라도 일어날지 몰라. 황제가 위엄도 없이 매일매일 관 앞에서 이러고 있는데 누가 황제로 모시겠음.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을. 심지어 정말 중요한 것만 빼면 전부 종친들에게 맡기니까, 다들 걱정하면서도 그 자리를 노리는 건 당연했지.

 

“그래. 너와 내가 지민이를 죽인 것이다. 네 말이 맞아.”

“아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대무녀를 죽였잖니. 네 화는 그것으로 풀면 안 되는 게야?”

“고작 대무녀 하나 죽었다고 성화십니다. 재물로 신의 뜻을 팔아버린 여자인데요.”

“고작이라니…”

 

말을 하던 태후가 잠시 멈추었어.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였어. 원래라면 그때처럼 다 죽여야 하거든. 이렇게 궁 안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해야 했지. 그런데 태형은 아인궁 안에서 그냥 가만히만 있는 거야.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동안은 그것이 대무녀를 죽였으니 화가 풀려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의에 대한 살기가 여전히 있는 것을 보면 그건 또 아니라서 무언가 더 이상했어. 게다가 불이 났을 당시에 지민을 구하지 못했던 궁인들도 벌하지 않았는걸. 죽인 것은 오로지 대무녀. 한 사람이었지. 아직까지는. 잠시 생각하던 태후가 태형의 어깨를 잡았음.

 

“태형아.”

“예, 어마마마.”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태형이 모르는 척 되물어. 아들이야. 그걸 왜 모르겠음. 분명 다른 생각이 있었어. 그저 지민의 죽음에 관련한 자들을 다 죽이겠다는 그 생각이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잔인한 생각이 있었지. 그것을 깨달은 태후가 미간을 좁혔어.

 

“지민이는 죽었어.”

“압니다.”

“…….”

“그래서요?”

 

태형이 되물어. 하지만 그 생각의 끝까지는 간파할 수 없었어. 태후는 다 죽어버린 아들의 눈빛을 보다가, 더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어.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으니 할 말도 없었지.

 

“…아인궁에 있지 말라고는 하지 않으마. 대신 수라라도 들어라. 미음이라도 먹어.”

 

이 어미 속이 타서 그런다. 알겠느냐. 태후가 말했어. 대답은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 알아듣고 밖으로 나왔음. 정 내관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

 

“정 내관.”

“예, 태후마마.”

“폐하를 잘 보살펴드리게.”

“…예.”

“혹여…”

“…….”

“혹여 이상한 일을 시키면 나에게 꼭 와서 아뢰어야 할 것이야.”


태후가 강조했어. 예, 마마. 정 내관이 대답했고 태후는 자리를 떠났어. 그런데도 태형은 미동조차 없었음. 그냥 또 그 자리에 앉아있었어. 아무리 정리해도 정리가 안 되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말이야.

 

‘그치만 저는 다른 사람이 아니잖아요.’

‘저는 폐하의 반려인걸요.’

‘폐하!’

‘낭군님…’

‘폐하…’

 

태형이 가슴팍을 손으로 쥐어뜯듯 매만졌어. 미칠 듯이 아파. 끔찍한 고통이었지. 태형은 지민의 침상 기둥에 머리를 박으며 그 고통을 나눴어. 힘없는 몸이 늘어져. 어머니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음. 신경 쓰이는 건 딱 하나. 저 관. 새카맣게 탄 시신을 넣은 관. 태형은 집요하게 그것을 보다가, 정 내관을 불렀어. 그러고는 무언가를 명령했어. 놀란 정 내관의 두 눈이 흔들렸음.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울렸어.

 

‘폐하의 손이 닿았던 살갗을 도려내고 싶어요.’

 

지민아. 태형이 중얼거렸어. 하지만 이름을 불러도 지민은 없어. 했던 말만 남을 뿐. 태형은 지민이 했던 모든 말을 되새기며 관으로 손을 뻗었어. 쿵. 기어코 몸이 쓰러졌어. 폐하! 외치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울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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