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20분 쯤 늦은 기상. 학교에 지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한은 오늘은 잠에서 깨어나면 자신의 꿈에 대한 것을 적으리라 마음을 먹었었는데 오늘은 아무런 꿈도 꾸지 못했다. 머리맡에 준비한 펜과 노트가 처량하게 놓여 있다. 분명 최근 꿨던 꿈들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단서라고 이한은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집착한다. 요즘은 눈이 떠 있는 동안의 대부분을 사색에 빠져 보낸다. 건전하지 못하다. 아니, 건전하고 불건전하고를 떠난 해가 되는 행동이다. 집착. 그것만큼 인간을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별로 없다. 이한이 계속 사색에 빠져 머리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방문을 연 그의 이모가 “아직도 자고 있었어?”라고 당황하면서 말한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멍한 표정의 이한은 자신의 이모를 바라본다.

며칠 전의 일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걸까. 그날에 관한 것, 형운에 관한 것 중 어느 것도 그의 이모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이한의 이마에 손을 댄다. 이런 신체접촉은 이한과 그의 이모 사이에선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이마에 닿은 차가운 손길에 그제야 이한은 시간을 체감하고 헐레벌떡 침대에서 벗어나 욕실로 향한다.

정말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마치 손이 여러 개라도 되는 듯 빠르게 학교 갈 준비를 마친 이한이었다. 숨이 벅차올랐고, 이모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과거를 찾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와 함께 울렸다. 물론, 그 정도에 몸이 아파질 정도로 이한은 약하지 않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수척하고 피곤해 보인다. 겨우겨우 면한 지각. 일어나서 등교까지 고작 2시간도 안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벅차다. 머리가 아프고 몸에 열이 오른다. 이런 열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열. 누군가 이한을 부른다. 고개를 돌린 이한의 눈에 형운이 담긴다. 그의 옆에서 같이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형운. 그렇다. 형운은 매일같이 이한과 같이 등교를 한다. 이한은 오늘 등굣길에 형운이 옆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명이 이한 속에서 시끄럽게 울려퍼진다. 소란스럽다. 형운이 이한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또 다시 말을 건다. 덕분에 이한은 머릿속 생각을 잠시나마 멈출 수 있었다.

점심시간. 형운을 이한을 조금 걱정한다. 아침에 보였던 모습은 마치 예전에 봤던 힘들어하고 아파했던 이한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이한을 마주하는 것은 형운에게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이한에게는 다르다. 이한이 그때의 자신을 마주한다면 분명 또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행복하지 않을 길을 선택할 것이다. 이한은 또 멍하니 앞을 바라만 보고 있다. 손을 뻗어 머리칼을 넘기거나, 한참을 바라보거나, 한참을 바라보지 않아도 이한은 별 말이 없다. 그저 음료수를 홀짝이면서 저 멀리 지평선만을 바라본다.


“무슨 고민 있어?”


“...”


“이한아?”


“...”


“... 김이한!”


“응?”


“무슨 고민 있냐고...”


“아, 아니... 그냥...”


“왜 그러는데...?”


“뭔가... 그게 있잖아, 형운아. 넌 지금의 날 어떻게 생각해?”


“좋아하지?”


“...”


“왜?”


“아니, 나에 대한 감정 말고. 나를 어떻게 생각 하냐고.”


“음... 딱히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데? 근데 왜?”


“갑자기... 며칠 전에 이모랑 이야기 하다 스치듯 들었던 생각인데... 지금의 난 예전의 나랑 많이 달랐던 거 같아서.”


“...”


“이게 기억이 난 건지, 그냥 내가 추측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예전의 난 좀...”


“...”


“...”


“좀 뭐...”


“생각이... 안 나긴 하는데 어쨌든 지금이랑은 많이 달랐던 것 같아서.”


“... 그래서”


“어?”


“난... 지금의 너도, 예전의 너도 싫어하지 않아.”


“아니 좋고 싫고의 그런 게 아니라...”


“알아, 무슨 말로 물은 건지는 아는데... 그때도, 지금도 나한테 너는...”


“나는?”


형운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행동에 이한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곧 종이 울리고 형운은 미소를 가득 품은 채 교실로 걸어간다.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도 않고 가버리는 그의 모습에 이한은 씁쓸함을 느낀다. 형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쫓아간다. 그를 찌르거나 간지럽혀도 형운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웃음을 가득 품은 채 이한의 손길을 다 받기만 한다.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막이 생긴 것 같다. 어떤 짓을 해도 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한은 한숨을 내쉬고 잠시 머리를 비운다. 처음부터 형운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것을 들을 수는 없으리란 것을 이한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시도라도 해보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니까.

형운의 앞이 아니라면 이한은 계속해서 과거를 기억해내기 위해 생각한다. 하지만 좀처럼 단서는 없다. 알 수 없는 짙은 슬픔만이 스멀스멀 마음 한구석에서 흐른다. 스스로에게서도,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과거를 대체 어떻게 알아야 하는 걸까. 이한은 수업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막막함. 그리고 계속 느껴지는 자신과 자신 사이의 이질감. 머리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 마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 머리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 열기, 이 뜨거움. 기분이 나쁘다.

이 날 저녁 정말 오랜만에 식탁에 나란히 앉아 두 사람은 평화롭게 밥을 먹는다. 이한은 마음을 먹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자신의 이모에게 직접적으로 지금의 자신과 예전의 자신이 다르게 느껴진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모는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행히도 이한은 그녀의 마음속 떨림을 느끼지 못했다. 형운도 그의 이모도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기에 이한은 그들이 답을 피하려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정말 자신이 틀린 추측을 하고 있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다.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밥을 먹자 그의 이모는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누르며 보기 좋게 미소 짓는다. 이제는 거의 다 큰 조카의 이런 모습은 어렸을 때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솔직하고 서투른 표현. 내내 이한이 속에 담고 살았을 감정. 그녀는 이한에게 솔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지금의 이한도, 그때의 이한도 똑같이 사랑하는 조카일 뿐이다.

잠들기 전 이한은 생각한다. 고민한다. 평소랑은 다르게 생각은 번지지 못한다. 물음표가 하나 떠오른 후, 더 이어지지 않는다. 질문도 답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삼키지 못하는 것들을 입에 가득 문 느낌이다. 억지로 삼키려 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나 스스로가 사고 전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 하는 걸까. 이한은 이불 속에서 여러 번 몸을 뒤척이다 겨우겨우 새벽 중 잠에 든다.



*



본격적으로 매미가 울어댄다. 길가에는 뜨거운 햇빛과 매미의 울음소리, 조금만 걸어도 열리는 땀구멍. 그리고 그것들 사이로 한껏 초췌해진 모습의 이한이 걸어온다. 버스 정류장에서 이한을 기다리고 있던 형운은 새삼스럽게 놀라며 당황해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며칠째 이한의 상태는 저랬다. 형운은 가장 가까이서 이한을 지켜봤지만 그가 이렇게 된 것을 이제야 마주했다. 두 사람을 항상 아침에 봤었던 사람들에게는 안절부절못하는 형운의 모습이 더 이상해 보인다. 아플 때는 보지도 않다 죽을 때가 다 돼서야 걱정하는 꼴과 같으니 말이다. 겨우 이 정도로 이한이 죽을 일은 없지만.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갈 때도, 학교 수업 사이사이의 쉬는 시간에도 형운은 온종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한을 바라본다. 반면 이한은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하며 갈등한다.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보며 기억을 떠올리는 수 많은 방법들을 찾아봤다. 그렇게 중요한 걸까. 인간에게 기억이란 그렇게까지 중요한 걸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많은 일을, 수 많은 시간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인데. 이한은 퀭한 눈으로 교실의 바닥을 내려다 본다.

점심시간에 결국 형운이 놀라 소리칠 정도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이한이 코피를 흘리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형운만 소리칠 정도의 일이다. 코피 따위 누구나 흘리지 않는가. 형운의 호들갑에 이한은 생각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얼굴을 조금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 정도의 덩치가 있는 이가 놀라고 흥분한 채로 자신을 끌고 갈 때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있을까.

보건실에 도착했을 때 보건교사는 자리에 없었다. 이한은 정말 별일 아니라고 말했지만 형운은 그런 이한을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휴지로만 닦아내 덜 닦인 피가 이한의 얼굴 주변에 살짝 말라 있고, 교복 와이셔츠에는 떨어진 코피가 스며있다. 코피는 이미 멎었지만 형운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만 가득했다. 부담스럽게도 가까이서 이한을 바라보는 형운. 이한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짝 밀어내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오히려 더 가까워지면 가까워졌지 멀어지진 않았다.


“호들갑이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응.”


“그치만 넌 코피도 났는데...”


“코피가 뭘 별 대수라고...”


“...”


“왜? 누가 보면 살면서 코피 한 번도 안 나본 사람 같네.”


“그렇게 말하지 마. 넌 예전부터 너무...”


“?”


“...”


“내가 예전부터 뭐?”


“아무것도 아니야.”


“...”


“...”


그렇게 밀어내려고 노력해도 멀어지지 않던 형운의 얼굴이 조금 멀어진다. 갑자기 차분해진 듯한 형운의 모습. 왜 일까 무슨 생각이 나서 저렇게 변한 걸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눈빛이 느껴진다. 이한은 조금 멍한 얼굴로 천천히 형운을 살핀다. 바뀐 것은 없다. 읽을 수 있는 것도 없다. 말없이 뻗은 이한의 손을 형운도 손이 맞잡는다. 무표정인데도 어쩐지 슬프게만 느껴지는 형운의 얼굴. 이한이 다른 것만큼이나 싫어지는 게 형운이 슬퍼하는 모습이다. 이한이 형운을 끌어당긴다.


“어지러워.”


“정말...?”


“응, 머리가 가득 차버린 거 같아... 좀 잘래.”


“응...”


“옆에 있어 줘.”


“알겠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속에 것을 다 내놓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지금보다는 편해질 테지만 이한은 형운이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곤란해 하는 모습도 싫다. 이한은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형운의 온기. 맞잡은 손을 타고 가슴으로 모이는 것 같다. 과거의 기억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말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불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한은 또 고민에 빠진다. 요즘 이한은 항상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계속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만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에도 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돼버린 것 일수도 있다. 코피를 흘리거나 어지러워하거나 같은 증세. 인어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 일이니까.

이한의 머리가 멈춘다. 평소와 같은 손길이다.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볼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 조금 간지럽기도 하고, 괜히 미소를 짓고 싶고, 몸을 뒤로 빼게 만드는 그런 손길. 이한의 머리 속에 다시금 생각이 하나 퍼져 나간다.' 지금은 자신을 위한 시간도,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기 위한 시간도 아니다.'라는 생각. 여태껏 머리를 어지럽히던 무수한 생각들 과는 다른 크고 흔들리지 않는 그런 생각이다. 그렇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자신만의 시간이 아니다. 그 사람과 자신이 함께하는 시간이다. 사사로운 것으로 그런 시간들을 자신만의 시간이라고 착각한다면 그런 이들은 외톨이가 되어도 할 말이 없다. 오늘 내내, 아니 요 며칠간 이한은 그것을 잊고 있었다. 여전히 다정한 형운이 이한에게 그것을 일깨워 줬다. 이한은 무겁고 뜨거운 숨을 깊게 내쉰다. 독이라도 뱉어낸 듯 정신이 조금 맑아진 기분이다.


“안 불편해?”


“불편해.”


“손 놓을까?”


“아니.”


“왜?”


“이래야... 형운이 네가 계속 옆에 있는 것 같으니까.”


“...”


“계속 신경 쓰이면 옆에 눕던가...”


“... 아픈 사람 괴롭힐 순 없지.”



*



“있잖아, 이모.”


“왜?”


“사고 나기 전에 말이야...”


“또 그 이야기야?”


“아니, 그게 있잖아... 내가 혹시 형운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했었어?”


“형운이?”


“응.”


“음... 별로 말을 꺼내진 않았는데... 여름 방학 이후로는 맨날 이렇게 뚱하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지.”


“그래?”


“뭐... 넌 형운이랑 일이라도 직접적으로 말 안 했지만... 네가 데려온 애가 형운이 말고는 없으니까 이모가 대충 추측한 거지만 말이야.”


“음...”


“...”


“...”


“아, 잊고 싶지 않다고 했었던 거 같다.”


“잊고 싶지 않다고? 왜?”


“이유야 나도 모르지? 그냥 언젠가 서로 각자 길을 갈 때 형운이랑 네가 서로를 한 때의 추억으로 남기진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었어. 난 뭐... 그냥 사춘기의 감성이니 하고 대충 무시하고 넘어갔었지만.”


“그랬구나...”


“근데 형운이는 갑자기 왜?”


“그냥, 형운이와 관련된 것만 기억을 못하잖아. 그리고 사고 전이랑 지금이랑 내 모습이 좀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형운이랑 관련이 있나 싶어서.”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넘겨짚는 건 안 좋지만... 계속 그렇게 붙잡는 것도 좋지는 않아.”


“...”


“그때도 지금도 너는 김이한 너고, 그때도 지금도 형운이는 좋은 애야.”


“응... 알아. 갑자기 궁금해서 그런 거야, 형운이가... 정말 잘 도와주니까! 하하...”


“뭐, 어차피 네 몫이니까 알아서 하는 거지만... 너 지금 고2다? 다른 거 생각할 시간이 그렇게 많아?”


“이모는 공부가 중요해! 조카가 중요해!”


“...”


“왜 답을 바로 안 해?”


“그냥 뭐가 더 중요한가 생각하고 있었지...?”


“아, 됐어!”


이한은 씩씩 거리며 자신이 다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넣어두곤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이 조금 아이 같아서 귀엽다. 그의 이모는 그 몰래 미소를 짓는다. 그의 이모는 이한이 많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서 잘 성장하기를 마음속으로 빈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그리 좋진 않지만 이상한 것은 아니다. 모든 생물은 기억, 경험 같은 것에 의존해 살아가니까. 그래서 지금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이한이 사고 나기 전의 자신을 기억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고가 나기 전의 일. 사고가 났을 때의 일. 그것은 누구에게서도 답을 들을 수도 없고, 들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 일은 오롯이 이한의 몫이다. 본인이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본 것을 떠올리고 받아들이고 답을 내려야 한다. 설령 그게 얼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한에게 슬프거나 아픈 진실이 있다면 계속 잊은 채로 지내도 되지 않을까 하고 그의 이모는 잠시 생각한다.

이한은 자신의 방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밤하늘에는 오랜만에 별들이 많이 보인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에 넋을 놓고 있다 또 자신도 몰래 비늘이 덮인 손을 뻗는다. 사람의 피부와는 다른 느낌의 그것. 이한은 비늘을 숨긴다. 어떤 모습도 자신이긴 하지만 뭔가가 다른데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봐야 하는 걸까. 달라짐과 바뀜은 인간의 속성이다. 아직 어린 이한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다시 무거워진 이한은 자신의 침대로 뛰어들어 형운에게 카X을 보낸다. 지금은 그런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보인다.



*



이한은 오늘도 깊은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이 정도로 개운함을 느꼈던 것이 언제였었는지 생각해볼 정도의 날이었다. 하지만 이한에겐 그게 별로 희소식은 아니다. 꿈을 꾸고 싶은데도 꿀 수 없다는 건 이렇게 힘든 것이다.

깊은 잠을 잤음에도 시간은 아직 새벽.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휴대폰을 켜보니 읽은 적도 없는 형운의 말들이 읽어져 있다. 자신의 기억과 화면을 대조해보며 시간을 거슬러 본다. 얼마나 손가락을 움직였을까 이내 이한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본다. 한숨과 함께 피어나는 무수한 생각들을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이한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옷장으로 걸어간다. 이한이 일어난 지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여전하게도 이한은 혼자 있을 때면 과거에 대한 생각들을 떠올리기 위해 괴로워 한다. 다만, 전과는 조금 다르다. 어느 정도 집착을 가지다 그 생각을 머릿속 저편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다른 행동을 한다.

이제 여름인데도 새벽에는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분다. 천천히 걸어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 자전거를 타고 왔다. 이 시간의 하늘은 어둡지만 파랗다. 짙은 남색? 표현을 하기엔 까다로운 색이다. 이한은 휴대폰을 꺼내 낭떠러지와 바다, 지평선이 함께 보이게 사진을 찍는다. 그리곤 어떤 믿음을 마음에 품고 자고 있을 형운에게 보낸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사고가 난 절벽. 높다.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이 낭떠러지의 끝에 있으면 금방이라도 멀미가 날 것 같다.


'어떻게 떨어진 걸까?'


또 다시 틈을 비집고 기어 온 생각이 이한을 껴안으려는 찰나 습한 바람이 스치고 피부위로 물방울이 하나 떨어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벽임을 감안해도 짙은 색의 구름들이 곳곳에 깔려있다. 큰일이다. 일기예보도 하늘도 보지 않고 달려온 이한은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여름비는 딱 질색인 이한은 표정을 찌푸린다. 괜한 생각을 해서 이곳까지 왔다며 자신과 자신의 머리를 탓한다. 차라리 집에서 책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게 맞았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그래봤자 변하는 것은 없지만 사람은 안 좋은 상황에 닥쳤을 때 그게 자신이라도 탓할 존재가 필요하니까. 이한도 마찬가지다. 반은 사람이니까.

이한은 주변을 둘러본다. 비를 피할 곳은 없어 보인다. 지금이라도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해보지만 몸이 좀처럼 땅에 아무렇게나 쓰러뜨려 놓은 자전거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실은 자전거로 다가가는 것은 고사하고 웅크려 앉아 바다를 보고 있다.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니까 웬만하면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한은 일어설 생각을 포기한다. 오히려 풀 위로 누워 몸을 대자로 뻗는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젖은 땅과 풀을 냄새를 맡는다. 눈을 감고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하나를 느껴본다. 비 냄새와 섞인 풋내가 몸을 가볍게 느끼게 해준다.

떨어지는 물방울의 간격이 짧아진다. 피부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다시 그 물방울이 풀 위로 떨어진다. 이한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딱히 감기에 걸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어차피 인어라서 감기에 걸릴 일은 별로 없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것도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가면 분명 비 피할 곳은 보일 것이다. 또 지금 입은 옷은 이한이 좋아하는 옷 중 하나다. 비가 스며들고, 젖은 흙이 묻었지만 왠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이한은 비 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여름비는 더욱. 하지만 왠지 움직이고 싶지 않다. 지금이 정말 편하게 느껴지고 있으니까.

스스로를 탓하고 있음에도, 좋아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웃을 수 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이한은 곧 눈을 감은 채 몸을 일으킨다. 그의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속 심어두었던 믿음이 생각보다 빨리 피어났다. 지금 이한이 느끼는 모든 것들은 다 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한은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뭐 해, 감기 걸려.”


“형운이 네가 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지.”


“정말?”


“아니, 잘 거라고 생각했어.”


“누가 이 새벽에 깨 있겠어.”


“곧 아침인데?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은 다 깼을 걸?”


“휴일이잖아...!”


“휴일에도 출근 하는 사람 많은데?”


“그렇네...”


형운이 이한의 옆에 몸을 붙이고 앉는다. 우산 하나에 몸을 의지해 서로에게 기대 바다를 바라본다. 오늘따라 바다가 잠잠하다. 이상하다 이렇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기 직전의 바다가 잠잠할 리는 없는데 말이다. 바닷속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녹색 빛이 보였다. 이한은 그제야 왜 지금 바다가 잠잠한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웃음이 난다. 그렇게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인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렇게 부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날이 점점 밝아온다. 짙은 구름이 깔려 있어 그렇게 밝지는 않지만 고작 1시간 아니, 20~30분 전보다 확실히 밝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 보이지 않던 발밑의 풀이나 멀리의 건물들이 잘 보인다. 풀 위로 떨어진 비가 물방울이 된 모습도 잘 보인다.


“있잖아...”


“응.”


“왜 항상 오는 거야?”


“뭐가?”


“왜 항상 내가 있는 곳에 오는 거야?”


“좋아하니까.”


“...”


“...”


“그거... 참 좋은 말이네.”


“어...?”


“왜?”


“방금 항상이라고 그랬지.”


“응.”


“예전에 너한테 찾아갔었던 것도 기억 났어?”


“어?”


“?”


“잠... 깐만?”


이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인상까지 쓰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여전히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어렴풋하게나마 예전에도 어디에 있든, 어떤 때든 자신을 위해 왔었던 형운의 모습은 머리에 그려진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도 교복을 입고 자신을 찾아온, 상처가 가득한, 웃고 있는, 울고 있는 그리고 자신을 따듯하게 안아줬던 그가 떠오른다.

빗물 속에서 그 와는 다른 물 몇 줄기가 흘러내린다. 그 이질적인 물을 보고 놀란 형운은 이한을 감싸 안는다. 방금까지만 해도 잔뜩 인상을 쓰던 얼굴이 평온함을 간직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다. 형운은 지금 위로를 해야 할지, 달래야 할지 그게 아니면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감정을 끊어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를 안아주고 있는 팔에 힘을 빼지 않는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는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왜 일까. 기뻐서? 너무 오랫동안 참아 와서? 무언가를 느껴서? 알 수 없다. 지금의 감정은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한은 눈을 뜬다. 물기 가득한 시야에 당황해하다 손으로 눈물을 닦아낸 뒤 형운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한다. 서로의 감정이 녹아있는 눈.


“괜찮아?”


“모르겠어.”


“안 괜찮으면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옆에 있어줄게.”


“응...”


“근데 좀 웃긴다.”


“뭐가.”


“꼭 내가 널 찾아오게 되면 넌 항상 울거나 힘들거나 그런 상황이더라.”


“... 고마워.”


“그런 소리를 듣고 싶은 건 아닌데...”


“...”


“그냥... 우리가 아마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소리가 하고 싶...”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선택을 한 형운. 형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한의 표정이 바뀐다. 방금까지 뿜어내던 짙은 감정의 향기는 어디로 가고 차갑게 식은 무표정한 얼굴이 있다. 형운이 이한의 눈을 피한다. 이한이 크게 한숨을 내뱉고 형운이 살짝 몸을 움츠린다. 그는 조금씩 이한에게 감았던 자신의 팔을 풀려고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멈출 수밖에 없다. 이한이 그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한의 표정이 풀린다.


“일부러 그렇게 말 안 돌려도 돼.”


“...”


“그렇게 안 해도 기분은 좋으니까.”


“그래.”


“그리고 그런 말 너무 말하기도, 듣기도 창피하지 않아? 운명이라고?”


“아... 좀... 그냥 넘어가자...”


“되게 낭만적이네? 그런 말도 다 쓰고?”


“알겠어, 알겠어! 다음부터는 절대 안 할게!”


“왜?”


이한과 형운이 계속 서로의 말에 꼬리를 문다.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진 지 얼마나 됐었는 지 두 사람은 모른다. 어깨는 물론이고 온 몸이 비에 젖어 들어간 지가 언제인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남자 고등학생 둘이 쓰기엔 애초에 작은 우산이었다. 비에 잔뜩 젖을 것이 예상된 상황이었다. 두 사람도 그것을 알았을 텐데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둘은 말을 넘어 서로의 젖은 몸을 쿡 찌르며 계속 말을 잇는다. 차갑게 번지는 촉감, 그에 비해 따듯한 체온. 그런 기분 좋지 않은 상황에도 두 사람은 웃으면서 서로의 말에 비아냥거린다. 어쩌면 이한이 잊지 않고 싶었던, 형운이 잊지 말아줬으면 했던 그 여름으로 돌아온 것 같다.

이한이 괜히 형운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에게로 몸을 격하게 기댄다. 어정쩡한 자세에서 무게 중심을 잃고 넘어진 형운. 그는 이한을 잡아당긴다. 이미 우산은 두 사람에게서 벗어나 두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나뒹굴고 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다 서로의 심장이 뱉어내는 가장 뜨거운 숨을 피부로 느끼고 입을 맞춘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두 사람은 분명 감기에 걸릴 것이다. 두 사람도 그것을 알 텐데, 서로를 열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이 뜨거운 심장이 맞닿는 것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열을 낮추어야만 맞닿을 수 있을 정도의 열기이기 때문에. 머리에서 시작되는 뜨거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열. 솔직함도, 비밀도, 슬픔도, 기쁨도 그 모든 감정을 품은 열은 비를 믿고 자신을 더욱 뜨겁게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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