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에 소장본으로 발간했던 다정병을 새해를 맞이하여 재게시합니다.

- 총 90페이지 분량을 상중하편으로 나눠서 천천히 업로드 할 예정이예요.

- 부족한 글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9.

강만음이 알리고 싶지 않아 했던 ‘그 날 밤’의 전모를 남경의의 입으로 듣게 된 금릉은 제 외숙의 염려와는 조금 다른 방면으로 엇나갔다. 첫 만남부터 모현우를 두고 역겹다느니 경멸을 감추지 않은 금릉이었지만 그 역시 평범한 수준의 동정심과 연민을 가진 소년이었다. 


어찌 보면 제 손윗사람이라 할 수 있는 모현우가 어느 순간부터 함광군 손에 딱 붙잡혀 다니는데 밤중에 매 발톱에 꿰인 병아리 마냥 질질 끌려가기까지 했단 말을 들으니 난릉 금씨의 적자로서 당연히 걱정스러웠다. 실은 남망기가 위무선에게 휘둘리는 중이었지만 그런 내밀한 사연이야 관전자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법 아니겠는가.


정신은 온전치 못한 애가 또 얼굴은 아주 반반한 것도 금릉의 걱정을 부추겼다. 얼굴 잘났지, 조금 마르긴 했어도 몸 선도 얄쌍하니 곱지, 거기다 웃음은 헤프고 사람에 대한 경계도 없어서 제게 좀만 잘 해준다 싶으면 대번에 생글생글 풀린 낯으로 찰싹 달라붙으니, 설마설마 그럴 리 없다 부정하면서도 ‘함광군이 혹시…?’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진작 말하지 않았던가. 위무선의 허튼짓에 속절없이 까이고 희생당하는 함광군의 빛나는 평판이 안쓰러워 눈물이 흐를 지경이라고.


한 날, 아주 큰 결심을 한 금릉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꽃으로 꽃반지 따위나 만들고 있는 위무선의 어깨 툭 치곤 너 오늘 우리랑 같은 방 쓸 테냐 물어보자 위무선보다 남경의가 먼저 펄쩍 뛰며 반대했다.



“금 아씨, 미쳤어?!”

“미친 건 얘지 왜 내가 미쳐!”

“경의! 금 공자를 그렇게 부르면 안 돼. 그리고 두 사람 다, 미쳤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 아닙니다.”



먼저 말 걸어 놓곤 대답도 안 듣고 자기들끼리 팔짝 폴짝 널뛰는 꼴을 어리둥절하게 구경하던 위무선은 이 애가 갑작스레 왜 친한 척인가 고민하다 소년들의 어깨너머로 제가 찬 바닥에 주저앉은 꼴이 못마땅한지 미간을 살풋 구기고 다가오는 남망기의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번개처럼 ‘아, 오늘은 이거다.’ 싶었더랬다.


모현우의 몸에 헌사 당한 지 어언 몇 달째. 이제 천연스레 무방비한 웃음 짓는 것엔 아주 이골이 난 위무선은 셋 중 가장 만만한 남사추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럼 오늘 나랑 같이 놀아줄 거야?’ 물으며 활짝 웃었다. 모현우는 위무선도 이따금 면경이나 잔잔한 물에 제 얼굴 비친 걸 보면 그렇게 학대받았으면서 이 얼굴로 용케도 정절은 지켰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출중한 미소년이라, 마음 약한 남사추는 금세 일말의 동정과 넘치는 다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어 위무선과 눈높이를 맞춰 앉아주었다.



“그래요, 모 공자. 오늘은 저희랑 같이 자요.”



뭐라 더 투덜거리는가 싶던 남경의마저 결국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일단 수상한 기색 넉넉한 위무선은 겉으로 보면 저희들과 같은 또래였으니 같은 방에서 함께 잔대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금릉은 위무선이 함광군에게 이런저런 해코지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남경의는 반대로 함광군이 위무선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아닌가 하는, 셋 중에선 가장 정답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기들이 위무선을 떠맡으면 존경해마지않는 함광군의 평판을 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잇속도 들어가 있었다.


그럼 이제 발등에 불 떨어진 건 저 너머에서도 그 대화 못 들을 리 없는 함광군 남망기가 되시겠다.


남망기는 자기가 끼어들 새도 없이 서론 본론 결론 다 내어버린 대화가 끝나자 심장이 작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최근에는 위무선이 조금 얌전해진 편이었지만, 처음 대범산에서 데려올 땐 하루에도 네댓 번은 넘게 도망치려고 아주 발광을 떨었던지라. 그때마다 재빠르게 눈치채고 도로 잡아 와 고소 남씨 특유의 힘으로 억지로 제 곁에 붙들어 놓았었는데 만일 오늘 밤에 위무선이 또 탈출을 감행한다면 과연 저 애들 셋이서 막을 수 있을까 하여.


일단 흙바닥 위에 풀썩 앉은 모양새부터 어찌하고 뒷일을 생각하자 싶어 멈춘 발을 마저 떼면 이럴 때만 귀신같이 눈치가 빨라지는 위무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가 안기며 홀랑 선수를 쳤다.



“함광군! 우리 오늘은 각방입니다!”



그러면서 노란 꽃 엮어 허술하게 만든 꽃반지를 희고 얇은 손가락에 끼워주며 ‘그러니 오늘 밤엔 외로우셔도 저를 찾으시면 아니됩니다?’ 낭랑하게 헛소리 하다 이건 제가 애첩인지 남망기가 애첩인지 모를 상황극이라 혼자 웃음보가 터져서 깔깔 웃었다. 매미처럼 답싹 매달린 사람 등이며 엉덩이를 받쳐 안아주던 남망기가 뻣뻣하게 굳는 건 또 까맣게 모르고.


남망기는 하룻밤이라 해도 위무선과 떨어지는 게 아주 불안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바꿔보고 싶었으나 위무선은 그 귓가에 조그맣게 달래듯 ‘위영’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도 들은 척 만 척이었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일방적인 애정행각에 소년 셋이 붉어진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리면 남망기가 다시금 위영, 나홀로 애타는 음성으로 불러보는데, 그러자 위무선은 새침한 표정으로 언제 안겼냐는 듯 남망기의 가슴팍을 홱 밀쳐내 떨어지곤,



“또 그리 부르시지요! 자꾸 절 두고 남의 이름 부르시니 서러워 못 살겠습니다. 오늘은 정말 각방입니다! 감히 제 몸에 손댈 생각도 마세요!”



아니 네 이름 위영인 것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마당에 이제 와 그러기냐…. 남망기가 허탈하고 초조한 심정에 위무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마음을 돌리려 애쓰는 와중에 금릉은 ‘제 몸에 손댈 생각도 마세요’ 소리만 찌푸린 낯으로 곱씹고 있었다. 우리 함광군이 그럴 리가 없다는 남경의와 싸움이 붙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필연이었으리라.


금릉의 의혹을 알게 된 남경의는 바락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야! 함광군은 그런 분이 아니야!!”

“나도 내 숙부라는 사람이 단수인 것도 모자라 갑자기 미쳐서 금린대에서 쫓겨날 줄은 몰랐거든? 너네 함광군은 안 그런단 보장이 있냐!?”

“함광군께서 미치실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렇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비록 아직 마을 어귀로 접어들지도 않은 참이라 인적이 드물다곤 하나 길을 가로막고 둘이서 그렇게 싸워대자 남사추는 제발 목소리라도 낮추라며 창백한 얼굴로 소년들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남망기를 뒤에 달고 근처 풀숲을 한 바퀴 빙 돌고 온 위무선이 그 틈바구니에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우리 부군 미친 거 맞는데? 날 향한 사랑에 미치셨지!’ 한마디를 거들어주면 남경의는 그만 혈압이 올라 뒷목 붙들고 어질어질한 정신 다스리기 바쁘고 금릉은 엉겁결에 말싸움에서 이기긴 했는데 못내 찝찝한 마음에 오늘 밤 진짜 쟤랑 같이 자야 하나,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제 숙부처럼 세모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더는 못 견디고 위무선을 홀랑 안아 들고 가는 남망기의 작태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아냐, 오늘은 기필코 저 둘을 떼어놔야겠어. 미친놈에 단수일지라도 내 혈육인데 정절은 지켜줘야지.


물론 제 외숙이 들었더라면 장하다고 칭찬하긴커녕 ‘내가 그놈들 곁엔 얼씬도 말랬지!!’ 하고 호통만 들었을 착한 생각이었다.





10.

객잔을 찾을 때까지 기어이 위무선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 실패한 남망기는 결국 굳은 얼굴로 처음으로 그와 다른 방을 잡게 되었다.


변한 환경에 해시에 자고 묘시에 깨는 제 일상마저 잊었는지, 남망기는 침상 위에 누워서도 도무지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전전반측 뒤척이는 동안 본래 제 몸 위로 느껴져야 할 무게감이 없는 것만 더 선명히 깨닫게 되니 급기야는 눕기도 싫어 반쯤 일어나 앉았다.


앉는 게 무에냐. 지금이라도 애들 자는 방을 한 번 들여다보고 올까, 아니면 혹시 모르니 객잔 밖에서 지키고 있어볼까 고민하던 남망기는 아무래도 자는 방을 열어서 확인하기는 참으로 면구하니 차라리 순찰을 핑계 삼아 날을 지새울 결심을 했다. 가뜩이나 넷이서 한 방을 잡는 소년들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탓에 금릉은 안 좋은 방향으로 깊은 확신을 가지게 된 참이었다.


남망기의 이러한 행동은 사실 심한 분리불안에 가까웠지만, 허나 홀로 짝사랑하다 못해 짝을 잃은 사랑까지 13년씩이나 한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저 혼자만의 애처로움이 몹시 가여울 따름이었다.


침의를 벗고 옷차림을 말끔히 정제한 후 피진 쥐어 드는 찰나, 때마침 어렴풋이 들리는 복도를 걸어가는 기척에 남망기는 절로 촉각이 곤두섰다. 숨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가벼운 발소리. 익숙한 보폭. 보지 않아도 떠오르는 팔랑거리는 걸음걸이.


이건 분명, 내 사람의 것이라.


앞뒤 가릴 것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나가자 어두운 복도에 눈까지 감고 느긋하게 걸어오던 위무선이 감았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망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몰풍스럽고 딱딱했던 얼굴이 보기 드물게 감정에 솔직하여 흐트러진 것에 어쩐지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지고 붕 뜨는 것 같아, 위무선은 평소의 바보천치 같은 웃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을 비집고 나온 미소를 환히 피워올리며 일견 조급해 보이는 몸짓으로 그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얼핏, 나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이상치 않을 지금의 형편이 자못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누가 감히 내 안식을 방해하느냐 불만스럽고 원망스러웠는데 막상 주어진 대로 엉망으로 살다 보니 강제 헌사 당해 이승으로 불려 나온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라고…….


해도 떨어지고 달도 저무는 마당에 잠 못 들고 저 기다려주는 이도 있고, 이미 반절은 넘게 잊힌 제 이름 기억해 불러주는 이도 있고, 평생 비었던 손 맞잡아 주는 이도 있고, 팔 벌리면 기꺼이 품 내주어 안아주는 이도 있으니.


정말……

이만하면, 제법 괜찮은 삶이다 싶어서.


그래도 그놈의 모현우 가면 벗어던질 마음은 아직 들지 않아 ‘야밤에 어딜 가려 하셨어요, 둘째 오라버니? 설마! 저 몰래 숨겨둔 정인이라도 만나시려고! 아이고, 부군~ 어째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어요~’ 하고 지가 밀어내놓고 남 탓 앞세워 우쭐거리면 그 소란을 묵묵히 감내한 남망기는 다른 사람들을 깨우기 전 고대로 뒷걸음쳐 방으로 들어갔다.


원하던 이가 제 발로 돌아왔으니 벗어둔 침의로 다시 갈아입어야 할 텐데, 그럼 지금 안고 있는 사람을 놓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검만 협탁 위에 내려놓고 간밤처럼 제 몸 위에 위무선을 겹쳐 올려 이불을 덮어주었다. 뭔가 더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차마 꺼낼 수 없어 또 ‘그만 자라.’ 서늘한 한 마디가 전부였다.


위무선은 뭉글뭉글 부풀어 오르던 뜻 모를 감정이 단번에 피시식 식는 기분에 ‘얼씨구, 이것 봐라? 남잠이 해시 넘어서 밖으로 나갈 까닭 나밖에 없으니 분명 날 찾으러 나온 것일 텐데, 잡은 꿩엔 관심 안 준다 이거지?’ 하고 슬그머니 뿔이 났다. 이렇게 당당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아직 남망기가 절 사랑한다곤 짐작 못 하고.


그러던 차에, 반 넘게 기운 달빛이 부드럽게 비치는 침상 머리맡에 오늘 낮에 허술하게 그 손에 끼워주었던 꽃반지가 곱게 놓인 걸 보면 지조라곤 쥐뿔도 없는 마음이 또 살랑살랑 들떠버리고야 말았다. 뿌리 잃은 꽃의 말로는 언제나 같은 꼴이라 어둠 속에서도 시들한 기운을 감출 수 없었는데, 그 하찮은 풀꽃이 뭐 그리 귀하다고 아래에 새하얀 손수건까지 받쳐준 걸 보고 있자니 뭔가… 뭔가 좀, 그랬다.


안심이라 하기엔 이상하고 우월감이라고 하기도 어긋맞은 이 마음이 대체 뭘까 고민하던 위무선은 허리에 감긴 팔에 묵묵히 힘이 실리자 에고, 암만해도 이 팔에서 벗어나긴 무리지, 빠르게 체념하곤 사지에서 힘을 빼고 남망기의 몸 위에 편하게 엎드렸다.


뭔가 많은 게 바뀔 수 있는 하루였는데, 끝날 무렵이 되니 여전히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제 품에 안은 사람을 향한 마음이 사랑인 것 이미 잘 아는 남망기는 이것으로 충분하단 쉬운 만족에 젖었고 위무선은 제 위로 쏟아지는 게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흠뻑 젖은 채였다.


다음 날 아침, 분명 다 같이 누워 눈을 감을 때까지만 해도 멍청하게 풀린 낯으로 곱게 누워 자고 있던 모현우가 어째서 함광군 등에 업혀서, 정말 하필이면 업혀서 계단을 내려오는 꼴을 지켜보는 금릉의 눈매가 평소보다 배는 사나워진 건 당연히 위무선이 아닌 남망기가 감내해야 할 몫일 테다.

난릉 금씨 후계자의 제 숙부 지키기는 앞으로도 험난할 모양으로.

 

 



11.

감히 짐작 못 할 사건의 내막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듯하나 정작 그 폭풍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일행들의 하루는 여전히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무언가 까닭이 있어 험로를 골라가며 걷는 것 같아 한동안은 꿋꿋하게 참던 위무선이 기어이 ‘호젓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숲길은 나 이제 싫습니다. 언제까지 땅을 침상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사시려구요.’ 하고 마구잡이로 투정을 부리기 시작하자 남망기는 또 그 혼자만 아는 난감한 낯으로 하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겨우 며칠 노숙했기로서니 여태껏 반지르르 빛이 나던 피부에 두어 겹 피곤이 덧씌워진 것을 발견하면, 그만 사정과 이치를 따지기도 전에 그리하자는 대답부터 덜컥 튀어나가고 말 테였다. 결국 남망기는 소년들이 지친 것을 알면서도 무리해서 어검으로 산 두 개를 간신히 넘고 저 멀리에 마을 어귀가 보일 무렵에야 조금 쉬었다 가자며 뒤처진 아이들을 챙겼다.


고강하신 함광군의 품에 안겨 온 위무선이야 두 소년들의 헐떡임이 제 알 바 아니라 평소처럼 실실 웃는 낯으로 다가가서 너네 앞으로 수양에 독하게 힘써야 할 것 같다 놀리기에 바빴다. 남경의는 혹시라도 남망기의 귀에 들어갈까 호흡까지 한껏 낮춰 씨근덕거렸다. 지금 불난 집에 기름 부으세요? 위무선은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너 설마 불 끌 때 물 부어야 하는 것도 모르니? 운심부지처는 어찌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았담?”



그 천연스러운 법석에 열이 바짝 오른 남경의는 인내를 삽시간에 똑 끊어먹고 버럭 소리치려다 시의적절하게 등허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서늘한 시선이랑 딱 맞부딪히곤 속으로만 내 비록 영력은 함광군에 대자면 초라하기 짝이 없더라도 이 온전치 못하신 분과 함께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평생 주화입마 걱정은 않을 정도로 정신력만은 굳건해질 것이라 꿍얼거렸다.


적어도 저는 이제 이 모 공자가 하는 꼬라지를 지켜보면서도 남계인처럼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 눈 까뒤집는 일은 없어졌으니 말이다.

 

길은 여전한 오솔길이었으나 그래도 목적지 없는 산속을 헤매는 게 아니라 마을로 향하는 길인 걸 아는 위무선은 제법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자연히 그 팔랑거리는 뒷통수를 바라보던 남망기도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잖아도 혹시 모를 증거를 찾기 위해서라곤 해도 귀한 것만 주기에도 아까운 사람을 자꾸 흙바닥에서 재우는 게 줄곧 염려스러웠던 참이었다. 물론 흙바닥에 노숙한다고 해도 위무선이 자는 자리가 그닥 달라지진 않았을 테지마는. 매일 밤 남망기의 가슴팍 위에 드러누워 자는 것은 똑같았으니 말이다. 


이윽고 눈앞에 마을이 나타나자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나 간단 말도 없이 호다닥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작은 마을이어도 장터는 그럭저럭 활기가 넘쳐 위무선은 양옆에 늘어선 가판대며 좌판을 빠짐없이 구경하며 저잣거리를 노닐었다. 타고난 친화력은 헌사 이후에도 변함이 없어 금세 노리개며 자잘한 장신구 따윌 파는 방물장수와 죽이 맞아 시시덕거리던 위무선은 문득 예전에 남망기에게 만들어줬던 노란 꽃반지가 떠올랐다.


우리 자상하신 함광군 손에 가락지라도 하나 끼워드릴까.


위무선이 대뜸 뒤를 돌아 한 발자국 뒤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남망기의 품을 제 것마냥 뒤적거리기 시작하자 남경의가 육성으로 질색하기 전에 남사추가 먼저 몸에 익은 동작으로 재빠르게 친우의 눈을 가려주었다. 경의는 주화입마로 죽기엔 아직 어립니다, 모 공자. 그런 부탁은 당연하게도 속으로만 읊었다.


남망기는 소리는 없어도 무표정으로 당황해 딱딱하게 굳었는데, 품을 더듬던 손이 길고 넓게 늘어진 소맷자락으로 옮겨가 파고들다 급기야 그 안으로 얼굴까지 들이밀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위무선의 어깨를 붙잡아 반대편으로 살짝 밀었다. 혹시라도 힘이 과할까 세 손가락만 단정히 얹은 배려가 퍽 곰살맞았다.

뭘 찾아. 남망기의 물음에 위무선은 애교스럽다 못해 교태가 자르르 흐르는 눈웃음을 살살치며 두 손을 곱게 모아 내밀었다.



“저 용돈 주세요, 부군!”



제 노잣돈이 저이 것 된 지 오래라 남망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왼쪽 소매에서 염낭을 꺼내 통째로 쥐여주었다. 달라 했으면 진작 주었을 것을. 조금의 의문도 만류도 없이 선뜻 돈주머니를 내어주자 헤실헤실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한 위무선은 그 길로 떨어져 나가긴커녕 주머니를 쥐여주는 손을 덥썩 잡고 또 한참을 만지작댔다. 그 뻔뻔함에 남망기는 두 번째로 얼음 동상이 되어야만 했다.


비록 오래도록 학대받았을지라도 노역한 적은 없어 굳은살 없이 말랑한 손이 그와는 정반대로 마디가 불거지고 단단하게 못 박인 손가락을 길게 쓸어내리자 꼭 지독한 희롱이라도 당하는 기분에 남망기는 저도 모르게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을 꽉 주먹 쥐어 버텨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따끔한 손톱의 감촉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겨우 떨리는 숨결을 가라앉힌 남망기가 재차 이번엔 뭘 찾느냐 묻자 나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 이것까진 당신 도움 없어도 된다 웃던 위무선은 바쁜 눈으로 방물장수의 좌판 위를 주르륵 훑다 얇시리한 백옥가락지를 하나 사 그 손에 냅다 끼웠다.



“딱이네요, 함광군!”



이 나이 먹도록 혼사는 물론이고 여인네 손목조차 잡아보지 않았을 아정한 사내 손에 떡하니 기혼자임을 증명하는 옥가락지를 끼워주니 그게 또 그렇게 우습고도 좋았다. 위무선이 도무지 웃음을 그치지 못하니 고양이도 죽이는 호기심이 사람이라고 살려줄 리 없어 남사추의 손을 떨쳐냈던 남경의는 제 경악에 앞서 오늘 일이 운심부지처까지 흘러 들어가면 그 뒷감당을 어찌할까 싶어 졸지에 얼굴이 새하얗게 탈백되었다.


여기 시장 한복판이라고요! 보는 눈이 몇 갠데!


남경의의 솔직하고 격렬한 반응은 위무선의 기쁨만 부추겼다. 지나치게 즐거운 나머지 심술마저 슬금슬금 올라와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웃은 위무선은 곧장 남망기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쫑알거렸다.



“부군, 제 손은 아직 비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귀신의 작간인지. 분명 난감한 표정을 짓거나 무뚝뚝하게 무시할 것 같았던 남망기는 뜻밖에 순순히 위무선의 손에서 염낭을 받아들더니 그보다 조금 작은, 그러나 누가 봐도 한 쌍으로 보이는 반지를 사서 위무선의 손가락에 끼웠다.


세상에, 남잠은 내 손가락을 만져보지도 않았는데 크기가 어쩜 이리 딱 맞지?


위무선은 신기한 마음에 오래도록 그것 들여다보느라 남경의가 눈 뜬 채로 졸도하여 남사추가 업어 드는 것도 몰랐다. 남사추는 해탈에 가까운 온화한 낯으로 의식을 잃어 한층 더 무거워진 몸을 추켜올렸다.

경의야, 아직 수양이 부족하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남망기는 네 볼일 끝났느냐 시선으로만 조용히 물었다. 위무선은 녹녹히 기쁜 낯으로 아주 제 것인 양 남의 팔을 답싹 끌어안곤 배가 고프다 칭얼거렸다. 야렵 할 마을에 당도했으니 지역 유지를 찾아가 인사를 하고 설명을 듣는 게 바른 순번이었으나, 잠시 망설이던 남망기는 곧 객잔을 향해 앞장섰다.


이 사람이 언제고 이렇게 남 손에 질질 끌려 정正에서 벗어나는 일이 빈번했으랴. 나중엔 우리 둘 사이 어찌 될지 몰라도 그때도 이 날을 떠올리면 내 웃을 일 넘치리라 생각한 위무선은 사이 좋게 기댄 어깨를 타고 제 가슴팍으로 미끄러진 흰 말액을 손가락에 휘감아 돌리며 장난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이고 우리 군자님君子, 군자는 군자시되 이젠 함광군含光君 말고 아주 내 낭군郞君 하시려고.”



위무선이야 놀릴 의도 다분했다고 해도, 정작 남망기 듣기엔 하나도 거칠 것 없는 말이라 그냥 고개만 끄덕해주고 말았을 것이다.






12.

그 마을에서 딱 이틀을 머무른 동안 각종 횡액을 말끔히 물리쳐준 일행은 다시 운몽으로 먼 길을 떠났다. 시종일관 발바닥에 날개라도 달린 양 팔짝거리던 위무선은 남망기보다 앞서 물길을 건넜다. 지나치게 들떠 넘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돌 위에서 미끄러진 위무선은 상체가 완전히 물에 잠기기 전에 바닥을 짚어 강에 빠지는 것만은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떠돌이 방물장수의 좌판에서 파는 가락지가 좋은 물건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손을 잘못 짚어 바위에 정통으로 부딪힌 가느다란 옥반지가 쩡, 하는 작은 단말마만을 남기고 챙그랑 깨져버리자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하게 넋을 놓았던 위무선은 한발 늦게 제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감정이 낯설어 얼굴을 꾹 찌푸렸다.


뒤따라오던 남망기는 놀란 마음은 둘째 치고 유난히 들떠 보이는 발걸음을 뻔히 보고 있었으면서도 조심하라 주의 주지 못한 제 탓이라 책하는 게 첫째였으리라. 위무선이 비록 남망기는 고스란히 맞이한 세월을 공으로 흘려 꼬박 13살이 어리다곤 하나, 그 역시 본래 약관 언저리는 되었던 청년이란 점은 자연스럽게 도외시 되었다.


그야, 사랑에 빠지면 다 애가 된다지마는.


옷이며 머리카락까지 흠뻑 젖은 사람을 빠르게 건져내어 제 품에 안고 우선 다치진 않았나 그 손과 손목부터 세심하게 살펴주는데 평소라면 나 넘어져서 아프다, 혹은 당신 사준 반지 깨졌으니 어찌하냐. 도로 사내라 우는 소릴 해도 모자랄 사람이 입을 앙다물고 말이 없으니 남망기 또한 침묵으로 불안을 지켰다.

이게 뭐라고. 나 그저 장난칠 마음에 네게 사달라 졸랐던 건데.


위무선은 위무선대로 남망기가 잃은 반지를 언급하지 않으니 처음엔 다행이라 안심했다가도 공연히 너한텐 나 하는 일 다 의미 없나 어긋맞게 비틀린 마음이 꽁하게 뭉쳤다. 그 와중에 제 몸 붙들어 안아 올린 남망기의 손엔 여전히 백옥가락지가 끼인 걸 보자 더욱 속상해 물기 때문에 미끄러지는 손으로 몇 번 낑낑거리던 위무선은 기어이 남망기의 손에서 반지를 빼내 남망기가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똑같이 물속으로 휙 내던졌다.


햇살 아래 흰빛으로 반짝이는 반지는 떨어지는 포물선을 눈으로 쫓기도 아주 쉬워서. 돌다리를 건너다 말고 작은 파문이 퐁당 일어난 자리에 눈이 붙박인 남망기의 걸음이 망부석 된 양 우뚝 멈췄다. 위무선은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 남망기의 목을 꼭 끌어안아 제 얼굴을 파묻곤 ‘나 풍한이라도 들면 밤새 지키셔야 할 텐데 계속 이리 두시려구요?’ 하고 다소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 매서운 재촉에 남망기는 다시 발을 움직이면서도 여상하게 답했다.



“그리되면, 내 당연히 네 곁 지킬 것이다.”



그에 또 마음 상하고, 속 울렁거리고, 기분이 분명 나쁜 것 같은데 붕 뜨기도 하고. 고작해야 이틀 남짓 끼고 있었던 반지가 사라진 자리가 왜 그리 허전하게 느껴지는지 위무선 본인도 이유를 몰랐다. 손가락으로 쓸어 문질러보면 난 자리만 더 선명해질까 주먹을 둥글게 말아쥔 위무선은 다음 마을을 찾아 객잔에 들어설 때까지 남망기의 목에만 죽어라 매달려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 정체불명의 감정이 썰물처럼 쓸려나가기 전에는.


제 발로 걸어온 게 아니니 지치긴커녕 기운이 팔팔해야 마땅한데 안겨 오는 내도록 하도 나쁘다 나쁘다 안 좋다 되뇐 탓인가 그만 정말로 속이 안 좋아진 위무선은 그날은 석반도 거르고 방으로 올라가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남경의는 그 환장할 꼬라지를 노상 지켜보면서 덩달아 심란함을 감출 수 없었다. 반지를 잃은 위무선의 상심이 정말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어리다곤 해도 예리한 눈치는 타고난 것이라 저 사람 종종 거짓으로 함광군께 치대는 것 아닌가 갈라보고 있었는데, 오늘 하는 행동을 보니 설마 여태 진심으로 함광군을 연모한 것인가 싶어서 뾰족했던 마음이 공연히 껄끄러워졌다. 이러는 것을 보면 남 눈에 제 하는 짓이 어찌 비치는지 알 턱이 없는 위무선보다 남경의의 생각이 훨씬 깊었다.


평소 해시는 가뿐히 넘겨 자는 위무선의 그릇된 생활을 잘 아는 남망기는 위무선이 침상 위에 눈 감고 누웠더라도 끼니는 챙겨 먹여야 할 것 같아 차선책으로 석반 대신 술상이라도 차려서 방으로 날랐으나 오늘은 그 좋아하던 술도 먹기 싫단다. 아예 반대편으로 팩 돌아누운 태도가 제겐 더 익숙해야 마땅한데,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자 적응의 생물이라고, 지난 몇 달간 얌전히 제 품에 안겨 마주하고 자던 사람이 등 돌리고 있으니 그것 참 못 견딜 일이라.


혼자 좌탁 앞에 한참 앉아있던 남망기는 느지막하게 침상으로 옮겨앉았다. 위무선이 누운 자리 옆에 걸터앉아 열이라도 올랐느냐 나직하게 물으면, 위무선은 보지 않아도 그 표정이 어떨지 자연히 생각나 닫은 입술을 더 사려 깨물곤 앞으론 허튼 장난은 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남망기가 절 걱정하는 목소리는 더 듣기 싫어 애써 자는 척에 매진했다.


차마 이불을 들칠 생각은 못 하는지 몇 번이고 근처를 배회하기만 하던 손도 얌전해지고 제 숨소리도 고르게 풀릴 때쯤, 인기척 죽인 발소리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에 위무선은 돌연 설움이 왈칵 올랐다. 나도 내 맘 모르겠는데 저이가 내 속 못 헤아리는 것도 당연하지. 그렇게 빈말로 구시렁거려도 그게 정말 당연하게 느껴지진 않아서.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달란 건지 저도 형언 못 하는 주제에 애꿎은 남 탓만 하기도 아주 염치없지 않겠는가.


어둡고 적막한 방에서 면벽 수행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있어도 암만해도 요동친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자꾸 뒤척이다 보니 정말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머리끝까지 가렸던 이불을 갑갑함에 밀쳐내고 서늘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지금은 남망기도 없는데 도망가기엔 절호의 시기 아닌가?


가뜩이나 속은 술렁이고, 얼굴 보긴 싫고, 그렇다고 혼자 있는 건 더 싫던 참에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방심의 끝은 대개 후회로 맺는 게 온당한 처사라 속으로 ‘잡은 토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거야, 남잠.’ 하고 흰소리를 지껄인 위무선은 곧바로 소심하게 끌어내렸던 이불을 홱 떨쳐내고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창문을 벌컥 열고 턱 위로 한 발을 걸쳐 올리는데 하필이면 딱 그때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 깜박 중심을 잃은 위무선은 휘청이는 상체를 위험하게 창문 밖으로 기울였다. 자칫하면 엉망으로 굴러떨어질 찰나에 위영! 하고 크게 부르는 목소리는,


너 그렇게 내 이름 목놓아 불러도 되냐 묻고 싶은데,

또 처음 들어보는 간절함이라 그만 목이 턱 막혀서.


순식간에 익숙한 품에 안겨 창가에서 멀어진 위무선이 어벙한 눈을 깜박이는 동안 손짓 한 번으로 방문과 창문을 모조리 닫은 남망기는 혹여나 위무선이 도망칠 새라 아예 이불로 둘둘 감은 뒤 침상 위에 앉아 품 안 가득히 끌어안았다.


이걸…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평소처럼 정신 놓은 모현우인 양 행동 하면 될 텐데 이 사람도 놀라고 저도 놀랐는지 하얗게 빈 머리와 팔딱이는 심장으론 도무지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 대신 체온만 오가는 채로 얼마나 안겨있었을까. 먼저 움직인 것은 남망기 쪽이었다. 조심히 이불을 헤치고 손 하나만 겨우 끄집어내 잡은 남망기는 어둠 속에서도 망설임 없이 움직여 맥없이 늘어진 위무선의 손가락에 진줏빛이 은은히 감도는 가느다란 옥반지 하나를 끼웠다.


위무선은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 또 깨지게 만들려고.


허나, 가슴 가득히 들어찬 노기는 일언반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음에도 네 무에 화났는지 다 안다는 듯 귓가에 나지막하게 영옥永玉이라 쉬이 깨질 일 없을 것이다 속삭여주는 목소리에 위무선은 울분으로 망그라지던 두 눈을 놀람으로 동그랗게 키웠다. 영옥이라 함은 본디 명망 높은 선문세가에서 적장자의 혼인예물로나 쓸 법한 귀한 옥인지라 잘 깨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가진 의미부터가 남달랐다.


아니 이 사람아, 내 장단에 어울려주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위무선은 급기야 남망기가 절 따라 미치기로 한 것인가 싶어 오래 숨겼던 얼굴까지 번쩍 들고 절 안고 있는 남자의 기색을 살폈다. 화촉 하나 밝히지 않은 방 안에서도 옅은 금빛으로 요요한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배 속이 홧홧하게 달궈지고 입안이 마르는 것만 같았다.


그 뜨거운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 녹이라도 슨 듯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이리저리 바삐 굴려보던 위무선은 그만 잔뜩 웅크렸던 긴장을 확 풀어냈다. 물과 마음이 흐르는 길을 어찌 인사人事로 막겠는가.



“나 열 오르나 봐… 정말 풍한에라도 걸렸으면 어쩌지…….”



어리광 같은 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힘없이 나불거렸다. 모현우의 몸은 꼭 이만큼 약했다. 약간의 노고와 심마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그러니 남망기의 심려는 오래 내리는 비처럼 그칠 새가 없었다.


다섯 살은 무슨, 세 살도 모자라 보이는 찡얼거림에도 열 오른 이마를 자못 다정한 손짓으로 쓸어준 남망기는 밤새 네 곁 지켜주겠다 약조하지 않았느냐고 답했다. 위무선은 그 말에 무한정 안심되어, 이 다정한 사내야. 내 병은 풍한이라 며칠 앓으면 낫는다지만 네 다정은 무엇으로 낫게 하랴. 하고, 속으로만 핀잔이 차고도 넘쳤다.


한동안 남망기의 부드러운 쓰다듬을 받던 위무선은 없는 기력을 바닥까지 쥐어 짜내 또다시 남망기의 가슴팍이며 소맷자락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이번엔 놀라지 않은 남망기는 순순히 품속에서 조그마한 목함을 하나 더 찾아 열어주었다. 그 안엔, 짜 맞춘 듯 똑같은 한 쌍의 반지가 있어서.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남망기의 손에 그것을 끼워준 뒤에야 만족스럽게 웃은 위무선은 열에 들뜬 정신을 풀썩 놓아버리고 절벽에서 떨어지듯 까무룩 잠들었다.


이 다정이 진정 병이라면 영영 낫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형편없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헌데, 네가 다정이라 여긴 것, 실은 사랑이라 하더라.





13.

본래 남경의는 위무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가볍고 촐랑거리는 태도도 그렇고 제겐 하늘 같은 선배님인 남망기를 마구잡이로 희롱하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타인과는 얕은 접촉을 하는 것조차 꺼리는 남망기가 어째서 그런 무뢰배를 가만히 놔두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성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남사추가 ‘모 공자’를 제대로 말리지 못하니 저라도 그 역을 떠맡아야 한단 의무감이 더해져 남경의는 한동안 눈에 불을 켜고 위무선을 단속했다.


한 사람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로 인해 남경의는, 결코 본의는 아니었으나, 귀수를 쫓는 일정이 석 달가량 이어졌을 무렵엔 어느새 위무선의 지킴이 따위로 전락한 자신을 발견하곤 치를 떨었다.


설령 그리한들 이미 몸에 익은 습관이 사라지겠느냐마는.

 

어느 날 언제나처럼, 이젠 없으면 아주 섭섭해지는 일상으로 남망기와 함께 나선 야렵길에서 우연히 금릉을 마주친 남경의는 인사보다 발이 먼저 튀어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샛노란 금성설랑이 새겨진 옷자락을 마구 잡아 흔들었다.



“야, 네 개! 영견! 선자! 선자는 어디 있어?”



남경의의 다급함을 헤아리지 못한 금릉은 남의 개를 왜 네가 찾냐며 투덜거리면서도 휘파람을 휙 불어 자신의 영견을 불러주었다. 남경의는 낭랑한 휘파람 소리를 듣자마자 제자리에서 외발 흉시처럼 껑충 뛰어오르며 기겁을 했다.



“누가 부르랬어? 가라고 해! 얼른! 안 그러면…!”

“내가 내 개 부르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안 그러면 뭐!”

“아악, 살려줘!! 남잠, 남잠남잠남잠, 나 살려줘!!”



안 그러면 어찌 되긴. 저 꼴 나는 거지…….


오늘은 모처럼 ‘제정신인 척’ 하는 시간이 길었던 위무선은 남사추와 제법 말쑥한 귀공자처럼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던 것도 잠시, 멀리서 들려오는 멍멍 개 짖는 소리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남망기의 품을 향해 돌진했다. 흰 장포 안으로 두 팔을 집어넣어 있는 힘껏 남망기의 단단한 흉통을 끌어안은 위무선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두 다리를 남망기의 허리에 얽어 감은 뒤 단정하게 여며진 옷깃 사이에 제 얼굴을 마구 비벼 파고들었다.


그 남사스러운 짓거리를 끝내 막아내지 못한 남경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펴 제 눈을 덮어 가린 뒤 옆에 있던 남사추가 소리 없이 경악할 정도로 상스러운 욕설을 나직하게 짓씹었다. 남경의보다도 위무선의 기행에 익숙해지지 못했던 금릉은 마찬가지로 시허옇게 뜬 얼굴로 기껏 주인을 찾아 달려온 영견을 다시 먼 곳으로 돌려보냈다. 딱딱 맞부딪히는 잇새를 비집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야… 너네 함광군……,”

“양심이 있으면 입 다물어, 금 아씨.”



그냥 품으로 기어들어가기만 했더라면 좀 좋았으랴. 기어들어 간 게 아니라 숫제 타고 올라간 모양새에 아름답고 쾌청한 한낮의 대로변에서 졸지에 사지 멀쩡한 남정네 하나를 몸에 두르고 조용하게 눈을 깜박이던 남망기는 한참 만에야 ‘내려와’ 하고 낮은 목소리로 위무선을 을렀다. 물론 공포에 눈이 돌아간 위무선이 순순히 그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빽 소리를 지르는 비명에 절로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싫어! 날 죽이려고!”

“…죽이지 않는다.”

“그래도 싫어! 개, 개가 있잖아!”

“개는 갔어.”



남망기의 음성은 시종일관 담담했으며 사람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아마 동물이었더라면 꼬리털까지 빳빳하게 일어설 만큼 잔뜩 긴장해 손가락 끝까지 와들와들 떨던 위무선은 삽시간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특히 발아래를 주의 깊게 노려보았지만 남망기의 흰 옷자락만 바람에 살랑대고 있을 뿐 네발 달린 짐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눈이 마주친 남사추는 사뭇 어색한 표정으로 아하하, 하고 웃었다. 남망기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차분함이 마침내 위무선의 두려움을 몰아냈다.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입술을 우물거리던 위무선은 비난의 화살을 남망기에게로 돌렸다.



“……부군, 제게 어찌 그리 냉정하세요? 반려가 이리 놀랐으면 우선 안아서 괜찮다, 괜찮다 상냥하게 달래주셔야지 내려가란 말만 한세월이시고!”



이미 부군 운운하며 놀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위무선의 놀란 마음은 다 가라앉았을 테지만 그런다고 비정상으로 보이던 행색이 뒤늦게 정상으로 보일 리 없어 뭇사람들 시선에 둘은 이미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리고 아주 이상한 한 쌍으로 단정 지어진 지 오래였다.


난감히 웃던 남사추가 다가와서 ‘모 공자, 개는 이미 갔습니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공손히 달래도 위무선은 나 너무 놀란 나머지 네 말은 하나도 안 들린다 시위라도 하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팩 돌리고 제가 양팔로 그득 안은 남망기의 머리만 더 꽉 끌어안았다. 덕분에 엉겁결에 위무선의 가슴팍에 노골적으로 얼굴이 문질러진 남망기의 손끝이 미약하게 곱아들었다. 가늘게 들이마신 숨결이 달콤했다.


늘 함께 지내고 잘 때도 한 몸처럼 포개어져 자니 이제 위무선에게도 남망기의 향이 얼핏 옮아갈 때도 되었는데, 그 품에선 여전히 서늘한 단목향보단 아침부터 입에 한가득 물고 우물거리던 당과의 단내나 남망기에게 까달라고 졸라 몇 개나 받아먹었던 상큼한 과일 내음만 폴폴 풍겼다.


넓은 소맷자락이 자꾸 이마며 뺨에 치대어 그 틈바구니로 간신히 눈을 뜨고 있던 남망기는 그래도 아까 세 겹 빠듯하게 갖춰 입은 옷 너머로도 느껴지던 미친듯한 심음은 거진 가라앉았으니 이만하면 위무선이 충분히 진정했다고 생각하고 제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간 이를 살짝 끌어 내려 보았다. 그러자 그 악력을 못 이기고 반강제로 맞붙었던 몸이 조금 떨어진 위무선이 대번에 당신 대단히 무도하단 눈빛으로 서럽게 남망기를 흘겼다.



“함광군… 이젠 제가 싫으세요…?”



회보랏빛 동그란 눈동자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듯 물기가 촉촉하게 감도는데 그 너머에 감추인 건 분명한 장난기라. 오늘은 또 어디에서 이 사람 심기가 이 방면으로 틀어졌나 싶어도 애타는 간절로 기다린 세월이 하도 길어 이젠 누가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한대도 차마 나 너 싫단 소리는 못 하는 가여운 남망기는 그만 한 팔로는 위무선의 엉덩이 아래를 단단히 받치고 다른 팔로는 어깨를 붙잡아 당기다 말고 그대로 멍청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끝났나? 하고 얼굴 덮은 손을 치워내고 슬그머니 눈을 뜬 남경의는 그 꼴에 다시금 이를 악물고 두 번째로 험한 소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금릉은 어쩐지 이 모든 게 다 제 탓인 것 같아 질끈 감은 남경의의 두 눈 위로 머뭇머뭇 제 손을 한 겹 더 덮어주었다.



“너… 다음부턴……”

“…선자 안 데리고 올게…….”

“아니 그럼 네가 위험하잖아. 그냥 혼자 야렵 다니지 말라고…….”

“…넌?”

“………난 혼자 야렵 다니고 싶다….”



두 소년이 속닥거리는 것 못 들을 바 아닌 남망기는 평소처럼 그리로 엄한 눈길을 던지려다 머리통을 잡았던 손을 놓고 대신 옥처럼 고운 흰 뺨을 감싸 돌리는 손길에 다시 위무선과 눈을 맞춰야만 했다.



“부군, 아까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지요?”



얼굴은 여전히 울망울망 애처롭기 짝이 없는데 목소리만은 은근한 붉은 기운을 매달고 속살거리는 것도 재주라면 참 훌륭한 재주였다.


아까 한 말? 워낙 경황이 없던 와중에 짧게 스치고 간 목소리라 다시 되짚는 것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남망기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위무선은 당신 고민의 길이마저 제 맘에 달렸단 양 사내치곤 작은 제 손바닥 안에도 답싹 들어오는 얼굴을 가지고 놀기에 여념 없었다. 가지런한 눈썹을 스르륵 따라 그렸다가 관자놀이를 타고 미끄러져서 볼 한 번 찔러보고, 입꼬리 한 번 당겨보고.


위무선이 원껏 장난을 치는 것을 묵묵히 감내하던 남망기는 한참 늦게 위무선이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기억은 났으나,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아 그 후로도 오래도록 목울대만 삼키고 있다 힘겹게, 정말… 정말로 힘겹게 아교를 바른 것처럼 딱 달라붙은 입술을 열어선,



“…괜……찮다… 괜찮…다….”



…하고 등을 토닥이며 달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장고長苦하신 것 치곤 다정도 상냥도 도무지 찾기 어려운 딱딱하게 경직된 목소리에 불과한 것이 몹시 애석한 결과였다. 그러나 위무선은 그마저도 좋아 죽겠다며 파안대소를 했다.


아이고, 너그러운 내가 넘어가 줘야지! 나 아니면 남잠이 언제 또 이렇게 말랑한 소릴 해보겠어?


대신 또 개가 나타날까 무서우니 당신 나 안고 가 달라 조르자 마악 땅에 발 딛고 내려선 몸을 다시 안아 든 남망기는 시간이 이른 것을 알면서도 우선 식당부터 찾아 움직였다. 어디라도 내려놓을 만한 장소를 찾지 않으면 위무선이 결코 얌전히 내려가지 않으리란 걸 이제 남망기도 잘 아는 터라.

 



 

14.

놀랍게도, 암만 얼굴에 거죽 대신 철면을 덮어쓴 듯 행세하는 위무선이라 해도 매일 남망기더러 밥 먹여달라 치근덕거리는 건 아니었다. 위무선을 제외한 누구도 믿지 못할 이유였지만 실은 이따금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모현우의 몸이 과로로 파업을 선언하면 기왕 파업하는 김에 아주 늘어져서 남망기를 놀려먹으려는 의도가 더 컸다.


섬섬옥수라 칭해도 부끄러울 것 없는 남망기의 새하얀 손이 젓가락을 쥐어 드는 걸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찰나는 대개 그러한 때라, 음식을 앞에 놓고 연장자가 먼저 드시길 기다리고 있던 남경의는 우연히 그 요망한 반짝임을 잡아내곤 냅다 위무선의 밥그릇에 반찬 하나를 집어서 올렸다. 위무선은 마침 남망기에게 말을 걸려던 참이라 입술 살짝 벌렸다가 그대로 어엥? 하고 이상한 소리만 짧게 내고 말았는데 그를 대신해 얼어붙은 것은 오히려 남망기의 쪽이었다.


위무선에게 집중하느라 남망기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춘 걸 미처 보지 못 한 남경의는 둥근 탁자에 나란히 둘러앉은 상황에서 제 옆으로 위무선의 허술한 몸뚱이를 끌어당기며 작게 으름장을 놓았다.



“오늘은 함광군 그만 괴롭히고 이리 와요!”



위무선은 어처구니가 없어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듯 미간에 폭폭한 실금을 그었다.



“아니, 내가 언제 남잠을 괴롭혔다고 그래?”

“또 손이 없어졌다며 먹여달라고 할 생각이었잖아요!”



어라, 이것 봐라. 그래도 몇 달 같이 다녔다고 이젠 내 행동 짐작할 줄도 알고. 속내를 간파당한 위무선은 말없이 히죽 웃었다.


사실 헌사로 돌아온 후에도 별달리 생生에 미련이랄 게 없어 제 일상에 신경 쓰던 이라곤 남망기 하나뿐이었던 위무선은 그런 남경의가 딱히 싫지 않았다. 게다가 남경의는 비록 네 주둥아리는 고소 남씨 삼천 가규로도 못 막을 폭주성을 가졌다냐, 내내 의문을 깊게 만들지언정 타고난 성품이 나쁜 애는 아니었기에.


그러던 차에 누가 옆구리 찌른 것도 아닌데 먼저 저를 챙기겠다 나서니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오늘 일정이 좀 빠듯했던 것도 부정 못 할 맞는 말이라 위무선은 남경의가 잡아끄는 대로 저항 없이 주르륵 끌려가 주었다. 너 기왕 이쁜 맘 먹은 김에 나 좀 잘 챙겨보란 심보였다. 하지만 남경의가 아무래도 위무선을 따라가긴 무리 아니겠는가. 그러다 말액 찢어질 일 있나.


남경의가 밥 위에 반찬을 착착 쌓아주는데도 생글생글 웃고만 있던 위무선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턱 아래 꽃받침을 받친 채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남경의는 얼마 못 산 어린 생에도 난생처음 보는 잔망스러운 애교에 그만 온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게 화가 치밀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온전치 못하신 분께서 얼굴만은 다홍 작약 못지않게 곱상하신 탓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직 이 식탁에서 가장 연장자인 남망기가 아까 굳은 상태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원래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남사추는 발아래에 사르르 서리가 끼는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눈을 옆으로 돌려 외면했다.


함광군, 저는… 사추는 모르는 일입니다…….


남망기는 그 와중에 남경의가 위무선 앞에 집어다 놓아준 반찬이 위무선이 좋아하는 종류가 틀림없음에 또 한 번 길게 뻗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같이 다닌 시간이… 길기는 했지만…… 그러나 저는 십삼 년을 꼬박 기다리며 간직했던 ‘위무선’을 다른 이들은 고작 몇 달 만에 휙휙 파헤쳐 알아내는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남경의의 얼굴은 철판으로 되어있지 않았기에 거기서 굴복해 손수 먹여준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남경의는 양손에 위무선의 손을 겹쳐 잡은 뒤 ‘직접! 드시! 라고요! 이렇게! 이렇게!’ 하고 인형으로 소꿉놀이를 하듯 삐꺽삐꺽 강제로 움직여주고 있었다. 쉽게 말해, 둘이 손을 꼬옥 마주 잡고 있었단 소리였다.


위무선은 거짓으로 아야 아야, 엄살을 떨고 남경의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덩달아 투닥거리고 있는 귀여운 모양새를 어쩐지 멀게 얼어붙은 눈으로 한참 바라보고 있던 남망기는 느릿하게 오른손에 들었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렸다. 불쌍한 남사추도 마찬가지였다. 강아지에 불과한 선자도 그 분위기에선 밥그릇에 머리를 못 들이밀었을 거라.


원한다면 젓가락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식탁에 박아넣어도 으직 소리 하나 내지 않을 능력 출중하신 함광군이 고작 그 단순한 동작에서 달그락 소리를 낸 것은 분명 의도한 것이었을 테였다. 


이를테면 그런 거였다. 공연히 제 등 뒤에 선 사람 눈길 한 번 끌어보겠다고 멀쩡한 활을 점검하는 척 시위를 한 번 튕겨보는 그런 종류의 새침함.


눈치는 없어도 남망기를 향한 오감만은 뛰어난 위무선은 무심코 응? 하고 남망기의 쪽을 돌아보았다가 묘하게 의기소침해 보이는 그 표정을 읽어내곤 그만 또 너무 설레어서 기껏 남경의가 벌려놓은 거리를 단숨에 좁혀 냅다 남망기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이고, 우리 무정하신 낭군! 제 손에 반지 끼워주신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젠 외간 남자가 제 손 덥썩 잡아대는데도 말리질 않으시고!”



위무선이 전력으로 부딪힌대도 머리카락 끄트머리 하나 휘청거릴 연약한 사람이 못 되는 남망기는 제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앉아 그 치근거림을 다 받아주며 모양 좋은 입술을 살짝만 벌려 작게 대답했다.



“……응.”



속으로 ‘응, 은 뭐가 응, 이야’ 하고 박장대소하던 위무선은 탁자 아래로 조심스럽게 기어들어 제 왼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반지 위를 쓸어내리는 섬세한 손가락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뭐지? 나 오늘 정말 무리했었나?


기운이 약간 없긴 했는데 그렇다고 심장이 덜컥이는 건 별개의 문제라 위무선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남망기를 안았던 팔을 풀고 몸 물렸다. 즉각 그 당혹을 눈치챈 남망기 역시 언제 토라졌냐는 듯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남들 보기엔 토라졌을 때나 걱정을 할 때나 마찬가지로 빙벽처럼 싸늘하게 얼었던 얼굴이었지만 위무선은 옅게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서 확실한 걱정을 볼 수 있었다. 심장이 다시 쿵, 떨어졌다. 위무선은 ‘모현우’ 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아니… 아니… 나, 몸이 좀 안 좋은가 봐…….”



그러면 이제 더 앉아있을 이유란 없었다. 언제나 위무선 일신의 안위에 심력을 아끼지 않는 남망기는 곧장 위무선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버리고 함광군의 관심에서 버려진 불쌍한 남사추만 기뻐하며 아까 슬픈 얼굴로 놓았던 젓가락을 꼭 쥐었다.



“경의야, 이제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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