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윤은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윤기가 내내 신경 쓰였는데 이번 일로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향했다. 


명오가 그때 신중한 표정으로 영윤을 따라 일어나며 지그시 바라보더니 말을 꺼냈다. 


“그간 어지간해서 인간과 어울리지 않으시더니,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리고 이번엔 인간들하고 어울려 볼까. 싶기도 하고.”


어쩐지 서늘한 영윤의 표정이 차가웠다. 어울려 본다는 영윤의 속뜻은 아마도 나쁜 장난이라도 칠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평일은 학교 끝나고 5시부터 8시까지 3시간, 주말은 아침 10시부터 밤 8시까지 10시간의 노동이었다. 임금은 최저시급 9,620원.


여러 가지 고려할 부분에서 가장 큰 점은 학생인 점을 감안하여 일주일 동안 총 35시간 근무였다. 336,700원의 주급을 받기로 계약했다. 


윤기는 계약서도 처음 써봤고, 사회생활의 첫발을 이렇게 내디뎠다. 20만원이든, 10만원이든 뭐든 좋았다. 


일단 다른 노동보다 훨씬 편안한 직장이 아닌가, 패스트푸드점에서 패티를 굽지 않아도 되고 캐셔로 바코드를 찍지 않아도 되니. 허리가 굽어질 정도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족하지만 내일부터 정말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일을 잘하려면 성격을 고쳐야 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이참에 반드시 고칠 수 있으리라. 윤기도 각오를 다졌다. 


스스로 뭔가를 처음으로 도전해서 성취해 낸 기분이 들어 벅차오른 감정이 윤기의 볼에 맺혔다. 상기된 볼이 붉은 노을처럼 어렸다. 


호원도, 명오도 사람 접대는 어려우니 ‘인간’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있으면 괜찮으리라. 영윤의 판단과 생각은 아주 적절하고 적중했다. 


호원과 명오와 다른 방향으로 접대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건 알고 있었지만 맡은 바 성실했고, 손님이 오면 적어도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 정도는 건넬 수 있었다. 


덕분에 영윤은 가게에 대한 걱정과 마음을 놓고 백호를 찾아 방방곡곡을 다니며 며칠씩 가게를 비울 수 있었다. 


윤기는 영윤을 둘러싼 이 모든 것이 특이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처음 느꼈을 때의 그 신비한 분위기는 죽어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앞치마를 매고 바닥을 쓸고 닦은 윤기는 젊은 꼰대처럼 서 있는 호원을 두고 일장 연설을 들었다. 


“자, 잘 들어.”

“네.”


윤기는 수첩에 받아 적을 준비했다. 


“가게의 어떤 물건도 팔아서는 안 된다.”


윤기에게 내려진 가게의 방침. 


“…팔지 말 것. 예? 팔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왜… 가게를….”

“응, 여기 있는 물건은 모두 영윤이 하나하나 수집하고 사용한 것들이야. 그래서 팔면 안 돼.”


팔면 안 된다는 방침에 윤기는 또 하나의 할 일을 잃었다. 


카운터에 앉은 윤기 옆으로 호원이 엉덩이를 들이밀며 나란히 앉았다. 


‘역시나 여기는 독특하고 특이한 곳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도 좀… 신기하고.’


그때 윤기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물건을 팔지 않는다면 그럼 골동품 가게는 왜 연 거지?’


윤기의 교육 담당인 호원이 자랑스럽게 속마음을 꿰뚫고 대답했다. 


“우리가 이 가게를 연 이유는 물건을 사들이기 위해서야.”

“…….”


‘소,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물건이나 사는 건 아니니까, 함부로 매입하겠다고 하면 안 돼, 거기다 적어놔.”

“…아, 네, 넵!”


힐끗 눈짓으로 받아적는 모습을 보고 호원은 이어 말했다. 


“만약 물건을 팔러 온 손님이 있다면 나나 명오가 살 물건을 판단 할 거니까. 그런 손님이 오면 우리를 부르면 되고.”

“아아, 네. 그럼 저는….”


‘여기 왜 채용돼서 앉아 있는 거죠?’


이번에도 속마음을 읽어낸 호원이 말했다. 


“너는 인간 접대를 하는 거지, 난 살아 있는 건 딱 질색이니까, 명오는 평민들과 말 섞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허름한 감투라도 써야 말 한마디 나눠 볼 수 있어. 그리고 영윤은 인간을 싫어하니까.”

“아아…, 예, 그렇군요….”


물음표가 연달아 머릿속에 둥실둥실 해소되지 않고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차차 그 비밀을 알게 되지 않을까. 


사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어쩌겠나. 윤기는 소중한 아르바이트 자리를 날려버릴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시간은 흘렀다. 점점 일주, 이주… 시간이 약처럼 윤기는 여기가 의심했던 만큼 보통의 골동품점이 아님을 확인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있던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하기 전까지 의심했지만, 이제는 확신이었다. 


***


영윤이 ‘무언가’를 찾겠다고 가게를 비운 지 삼 일째 되던 날이었다. 윤기는 찾는 게 뭔지 모르지만, 영윤에게 엄청 소중한 것이라고 눈치껏 알아차렸다. 


‘사장님이 찾는 그게 뭘까?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영윤 사장님이… 대체 그렇게 애타게 찾는 게….’


수업 시간에도 골동품점의 일이 생각났고, 영윤이 찾는 걸 자신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싶은 생각이었다. 받은 은혜를 어떻게든 갚고 싶었다.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어쩌면 윤기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에이 설마… 위험한 걸 찾으려고?’


학교를 마치고 아르바이트하러 윤기는 골동품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강아지 캔 사료도 하나 샀다. 


송견은 어찌 된 일인지 산으로 돌아가지 않고(영윤에게 송견은 산에서 산다고 들었다) 골동품점을 거점으로 지내고 있었다. 


골동품점에서 일하는 건 전혀 힘들거나 어렵지 않았다. 할머니도 처음에는 공부하지 않고 학생이 무슨 일이냐며 만류했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들인 거 같다며 좋아했다. 


영윤과 가게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름대로 역사 공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에게는 그렇게 얼버무려 놓았더니 큰 별말이 없었다. 


학교 끝나고 바로 버스를 타고 골동품점에 가면 정확하게 5시였다. 그때부터 바닥을 쓸고 닦는데 20분이면 끝난다. 가끔 먼지 털기를 하거나, 진열된 물건을 마른걸레로 닦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은 조금 더 걸리긴 하지만 보통은 20분 정도였다. 


딱히 물건을 팔지 않지만, 간혹 구경하러 들어오는 사람이 접객의 전부였다. 며칠 전에는 드라마 제작팀이 와서 사진을 찍어갈 정도였고, 어느 날은 영화 제작사라며 소품으로 협찬 문의가 왔었다. 이런 이벤트 말고는 가게에 오는 사람은 한두 명이 될까 말까. 


내성적인 윤기에게는 아주 딱 적당하고 적정수준의 낯섦이었다. 처음에는 접객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덕분에 많이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했음을 윤기는 스스로 느꼈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며칠을 지루하게 띵까띵까 놀면서 보냈더니, 호원이 벼락같은 잔소리를 퍼부었다. 


“할 일이 없으면 저기 앉아서 공부나 해, 거기 서서 맹하게 놀지 말고.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놀면 뭐 할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일하러 와서 공부한다니… 이런 걸 누가 감히 꿈이나 꿔볼까.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되나 싶지만 윤기는 호원의 말에 못 이겨 눈치를 보며 카운터에 구겨져 공부했고, 여기 있는 사람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윤기는 첫 주급으로 받은 돈으로 싸구려 핸드폰을 드디어 샀다. 336,700원에서 15만 원을 써야 했지만 아깝지 않았다. 다음 주에는 할머니에게 드릴 핸드폰을 한 대 같이 살 생각이었다. 


일하니까 학원은 등록할 수 없지만, 교육방송이나 인터넷 강의는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까. 남은 돈으로는 참고서와 문제집 몇 권 샀다. 


오늘도 반질반질하게 청소를 끝내고 카운터에 앉아 윤기는 핸드폰으로 강의를 틀어놓고 문제집을 꺼냈다. 샤프로 국어 지문을 읽던 윤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호원이 형.”

“응? 뭐 모르는 거 있어? 내가 다 알려줄게. 내가 이래 봬도 영윤 옆에서….”

“아니, 그게 아니고… 다른 궁금한 게 있어요. 영윤 사장님은 뭘 그렇게 찾는 거예요?”


순간 호원의 표정이 굳어지자, 뭔가 잘못된 질문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주제넘은 오지랖에 윤기는 작은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과 동시에 문제집 지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다리는 건지, 찾는 건지… 이제는 헷갈린다.”


한숨 섞인 말꼬리를 길게 남기며 알쏭달쏭한 말만 남기고 호원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윤기는 가볍게 자기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그들의 상처를 건드린 듯한 질문을 한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똑같은 지문을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시각이었다. 윤기의 퇴근 시간이 1시간을 남겨두고 누가 헐레벌떡 가게로 들어왔다. 


“영윤! 영윤 있어?”

“어서 오세요.”


윤기가 황급히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빛나는 황금색 테를 한 안경을 쓰고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여성이 등허리에 느슨하게 묶은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여성은 오히려 이상하게 윤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목을 쭉 빼 자세히 살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상당히 무례하다고 느낌만큼 과한 시선이었지만, 윤기는 여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걸 알기에 머리를 긁적였다. 


여성은 분명 잘못 봤으리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다시 안경을 고쳐 쓰며 한 번 더 살펴보고 한마디를 툭 내뱉는다. 


“인간?”


역시나. 


“뭐, 예…. 하하-….”

“여기에 웬 인간?”


허탈하게 웃는 윤기는 자신이 보기에도 눈앞의 그녀도 인간처럼 보였지만, 말투로 봐서 인간이 아니리라. 여에 오는 사람들은 그녀처럼 범상치 않은 사람들뿐이었다. 


윤기는 이제 ‘인간’ 취급당하는 게 조금 익숙해져 민망한 미소로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닭살 돋게 인간의 인사는 됐고, 영윤은? 영윤 알지? 영윤 어딨어?”

“아, 그… 사장님은 지금 출장 중이신데요.”

“뭐라고? 정말…, 지금이 딱인데.”

“오시면 말씀 전해드릴까요? 성함이….”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윤기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들어 이층을 향했다. 


“그럼, 명오는 있어?”

“그게….”


소리를 들었는지, 이층 계단에서 차분하게 명오가 내려왔다. 오늘은 쓰리피스에 새까만 정장 차림이었다. 오른손 팔목에는 여전히 지팡이가 있었다. 


“명오!”


그녀가 반갑게 불렀다. 


“이런…, 누가 이리도 경박하게 소란을 피우나 했더니, 오랜만입니다. 토월(兎月) 님.”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뻘쭘하게 서 있는 윤기에게 호원이 슬쩍 다가와 보충 설명했다. 


“아, 저 분은 달토끼.”


호원의 입에서 ‘분’이라는 존칭이 나온 것도 신기했지만, 자신과 똑같은 인간처럼 보이는데 달토끼라는 것도 신기했다. 여기는 이렇게 신기한 존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1차 BL 질문 https://peing.net/ko/avril_s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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