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는 이런 일로 무영님의 얼굴을 볼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하는 거였는데 투덜거리지 마. 처음에 얼굴만 비추고 빠졌으면서."

"당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아직 모르겠는데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진님과 다시 마주해야 했던 제 심정도 좀 이해해주시죠?"

"네가 그 정도인데 무영이 형은 어땠겠어. 솔직히 크게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자윤 쪽 기억이 거슬려서 원."

"하아.....진짜 당신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차차웅 두 명 기억이랑 인격이 섞인 존재한테 뭘 바라냐. 나도 나를 알다가도 모르겠는데."

"......."



"아무튼, 이런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테니까 신경 꺼. 형도 이 정도 했으면 괜찮겠지."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아니."

"그럼 그냥 묻겠습니다. 당신이 신무영을 '형'이라고 부르는 건, 자윤의 기억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니면 뭐. 그 애송이 왕의 잔재라도 남아있을 것 같아서? 유감스럽지만 땡이야. 그러니까 무영이 형이 나한테 신경 안 쓰는 거잖아. 뭐, 나야 그게 편하니 다행이지."

"...역시 그런가요."



"너도 이제 '유진'은 잊어버려.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으로 치든, 단순히 죽은 인간으로 치든. 이걸로 끝이니까."

"....네."




1.5


개인적으로 비윤(비각+자윤)의 설정 날조는...많이 부드러워진 비각 내지는 많이 날카로워진 자윤입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정서는 두 인격의 가운데로 설정. 예를 들어 이런 느낌이려나요.

인간: 진짜 너무 싫다(비각)+꽤 괜찮다(자윤)=별로다(비윤)'

연화: 각시탈? 내가 죽였는데 관심없어(비각)+연화야.......(자윤)=떠올리니까 우울해(비윤) 

신무영: 그게 누군데(비각)+.......(자윤)=조금 불편하다(비윤)

유진: 애송이 왕(비각)+자기 의식이 아니라서 잘 모른다(자윤)=나랑 별 상관 없다(비윤)

류거흘: 자기 용마인데 관심없다(비각)+잘 모른다(자윤)=몰라 관심없어(비윤)

네, 이상 선동과 날조였습니다. 얘 공식 설정을 모르겠네요 원작 본 지 한참돼서...후기에 떴던가....?(가물가물)




2


초가을 어느 날, 무영을 찾아온 비윤은 자윤의 마지막 의지에 따라 마지막으로 유진으로 하루를 삽니다. 누구를 위한 한풀이인지... 무영은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입니다. 애초에 화를 내야할 대상은 이제 없고. 정확히 무엇 때문에 화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유진의 생일은 겨울입니다만 비윤은 그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 부분만 임의로 유진의 기억에 손을 댔습니다. 그래서 유진은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가을인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유진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일을 기약하고, 자신의 집(?)에 돌아와 문을 열고 안쪽에 들어서서 문이 닫힌 바로 그 순간 비윤으로 돌아옵니다.

'꽃, 절명(絶命)'이라는 제목은 그 순간을 나타내는 제목이었습니다. 인간 유진의 죽음인 셈이지요. 개인적으로 쓰고 싶었던 제목을 무사히 써서 기분이 좋습니다. 퇴고는 죽을 맛이었지만요!

결국 쓴 건 신무영 멘탈케어인지 신무영 멘탈파스스인지 둘 다인지 모를 무언가네요. 유진무영이라 표기했지만 무영이가 유진이에게 느끼는 사랑은 어느 한 종류(특히 미자한테 느끼면 안 되는 종류)의 것이라기보단 가족애와 경애 사이의 무언가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그 느낌...아시죠.....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아무튼 그 느낌 있잖아요 무성애적이지만 맹목적이고 아주 약간은 종교적인 무언가() 암튼 유성애는 아닙니다 저는 최애를 건강한 상식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래 쓰고 싶은 장면이 더 많았는데...기력이 달려서 이쯤에서 끊었습니다. 원래 대관람차도 타고 장미정원도 노닐고 그럴 예정이었는데...뭐 저희가 못 보는 동안에 다 그러고 놀았으리라 믿습니다.




3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무영은 그 아주 얇은 틈새 너머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고 있다. 가무러지는 불꽃놀이의 긴 잔향. 밤하늘에 스며드는 소리의 긴 꼬리가 유성우처럼 늘어져 자꾸만 피부로 스몄다. 눈을 막고 귀를 닫아도 자꾸만 들어왔다. 뇌를 거치기도 전에 심장으로 박혀드는 웃음소리처럼.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차마 어떻게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 그것은 그저 불꽃놀이의, 불타는 꽃잎이 떨어진 흔적인 셈이다. 숨이 끊어진 꽃의 여린 목울대가 출렁인다. 밤새 토해낸 숨소리가 불꽃의 꼬리가 되어 흐른다. 찰칵. 그것은 문 닫히는 소리가 귀를 찌르고서야 그친다.

억눌린 울음처럼 숨을 토해내고 죽어가는 사람처럼 신음을 흘렸다. 하루가 밝는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되새겼다. 마지막이라고. 진짜 마지막이라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인간 유진'은 정말로 죽는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부여잡는다.

문을 열고 그 안이 비어있음을 확인하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허탈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래, 끝이구나. 안쪽까지 들어가볼 것도 없이 그냥 밖으로 나와 버렸다.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을 빈집의 문을 닫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푸름이가 전학을 가게 되면서 남매의 거처는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옮겨졌다. 다시 공허로 가득 찬 집을 어쩔가 망설이다가 결국 그 아이가 살던 모습그대로 복원했다. 순전한 변덕이었다. 10년을 떠내려보냈는데 이 정도 변덕은 부릴 수 있지. 물론 마음만 먹으면 이 집을 팔 수도 있고, 헐거나 증축할 수도 있고, 그저 언제까지라도 방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이 집은 영원히 빈집일 것이다. 텅 비어있는 집. 

아무리 잊으려 해봐도 잊어지지 않던 기억과 미련을 밀어넣는 하루가 저문다. 비윤-이제 비각도 아니고 이매탈도 아닌 그저 타인에 불과한 차차웅-은 자윤이 원했던 거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진의 탈을 뒤집어썼다. 하루, 단 하루. 진아, 그걸 정말 너라고 부를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오늘 하루가 간절했다고, 나는 생각해. 무영은 꽃대가 꺾인 꽃을 떠올리며 왈칵 쏟아져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낸다.

하늘에서 깜빡이는 등잔들과 짧디짧은 밤과 잠을 이룰 수 없을 때마다 서성이던 집의 문간. 사랑 때문에 고뇌하던 시간조차 헛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발걸음을 애써 옮긴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된 사랑들을 자근자근 밟으며, 비틀거린다. 아주 기나긴, 행복하고 처참했던 꿈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기분으로, 빈집을 뒤로 한다. 그 닫힌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되뇌이면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ー기형도,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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