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2000년대의 잼동과 공공즈입니다.



"얼굴 보기 힘드네 동."

"못본 새 왤케 구려졌어? 안습이다"


  맥도날드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장마가 계속되다 며칠 만에 해가 떠서 그런지 매장엔 손님들로 인산인해였다. 덥다며 옷자락을 펄럭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노와 인준이를 찾아 앉았다. 스투시 나시 입은 이제노 옆에 타미힐피거 럭비 티 입은 황인준. 와 서면 나온다고 깔롱직였네. 방학하자마자 염색했는지 둘 다 머리색이 맥주 색이었다. 아직 인사도 안 했는데 음식을 갖고 오자마자 대뜸 구리다며 나를 살폈다. 왜 이거 얼마 전에 산 거야. 가슴팍에 대문짝만 하게 써진 루트안스 오프더월. 반스 브랜드는 신발밖에 모르는데 오프더월 글자 하나 때문에 샀다. 새가슴을 당당히 펴고 말하자 황이 가자미눈으로 아니 옷 말고 얼굴말야 티는 예쁘네 하며 받아쳤다. 


"야 이 얼굴이 어떻게 구릴 수가 있어. 농담두"


  더워서 손목에 찼던 시계를 풀었다. 존나 작동 안 된지 꽤 됐는데 일품 가오용으로 끼고 다니던 거였다. 버리길 진작에 버렸어야 했지만 생각보다 유구한 역사가 있는 녀석이라 미련이 남았었다. 중학교 졸업할 땐가 유행했었는데 졸업 반지 대신 시계나 맞추자며 제일 친했던 친구 몇몇과 맞췄던 것이다. 학생 신분에 가격이 꽤 나가서 황이 처음에 이 얘기를 듣고는 카시오나 맞추지 고장 낼 거 만다꼬 지샥 샀냐고 뭐라 했었다. 동 너는 물건을 좀 소중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해. 이번 주에만 잃어버린 볼펜이 몇 개야? 미안 미안해. 고장 난 걸 알면 고치든가 버리든가 그 꼬라지로 놔둔 게 몇 개야 지금? 미안 미안해. 비단 물건한테만 그런 게 아니ㄹ. 미안 미안해 이제 그만. 말 끊지 말고. 아 우짜라고.


"농담이 아니라 얼굴이 그냥 개떡인데?"

"그러게 왜저래. 감기걸렸냐? 코가 다 헐었는디?

"아픈거 아니면 저 얼굴에 이유는 없어야 해."


  감기가 아니라 어제 컴퓨터 끈 뒤로 하루 종일 울어서 코가 다 헐어버린 거였다. 얘네가 말하는 얼굴은 눈가고 볼이고 다 터버려서 짓물리고 부어버린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시치미 떼자니 손가락만큼 두꺼워진 쌍꺼풀이 무거워 양심에 찔렸다. 울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심각하게 걱정하거나 심각하게 놀리거나 둘 중 하나일게 뻔했기에 그냥 아무 말도 안 했다. 야 초코콘 누가 만들었다냐 존나 맛있네 진수성찬이다.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리니 황이 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삐죽였다.


"울었으면 뒤진다. 가오 다 죽었어"


  입을 열라는 듯 쏘아보는 황과 모른 척 아이스크림만 할짝대는 나. 둘 사이에 흐르는 애매한 신경전 속에서 제노는 감자튀김을 세 개씩 집어먹고 있었다. 쟤는 왜 감자만 조진대? 못 들은 척 딴청 피우니 황은 아예 내 턱을 잡곤 요리조리 돌려봤다. 뚫어져라 쳐다봐도 내 입에서 나올 말은 없었다. 몇 초를 그러다 황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이더니 잡았던 고개를 팩 내쳤다. 뭔 일 있으면 말을 해 학교도 안 나오고 간만에 봐선 얼굴이 이게뭐냐. 에어컨을 틀어놔도 꽉 찬 사람들 덕에 데워진 공기가 살에 붙었다. 초코 코팅한 아이스크림도 살살 녹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눈알만 사방으로 굴려댔다. 냅둬 말하고 싶을 때 말하겠지. 제노가 무심히 한 마디 던지고는 캐챱이 모자라다며 더 받아 온다 일어섰다. 드르륵- . 뻘쭘한 침묵에 놓였다. 왁자지껄 저마다 떠드는 가운데 우리 테이블만 조용했다. 황은 아직도 뭔가를 알아낼 표정이었다. 


"별 일 아냐. 어제 열아홉 순정 재방송 보다 자서 그래."

"장난하나"

"장난 둘."

"..."

"아 미안미안. 아니 진짜로. 국화가 고생하는게 넘 맘 아프더라구."

"...너어는 진짜... 됐다. 치아라. 물어본 내가 똘추지."


하하 황 너는 날 너무 좋아해. 꺼져 못생긴 애랑 친구 안 해. 아앙 야아. 언제 냉랭했냐는 듯 금방 분위기가 풀어졌다. 인준이는 말은 저렇게 해도 늘 나서서 나를 챙겼다. 방학식 날에도 그날 까지 학교를 결석한 내가 걱정돼서 전화를 걸었던 것일 거다. 제노는 별 말 없어 보여도 나 모르는 대서 내 편들고 목소리 높이다 우는 애였다. 그런 사람들인 걸 알아서 걱정해주는 게 고맙고 또 미안하지만, 내가 겪은 감정이나 기분을 솔직하게 토로하기엔 정말 쥐뿔만큼도 용기가 안 났다. 미안 미안해. 나도 알고 있는 내 단점. 자신감은 있지만 자신이 없었다. 너네는 날 이해할 수 있어?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정말 그래줄 수 있어? 어제 나한테 있었던 일들을 다 털어놓으면 내 기분이야 가볍겠지. 나쁜 새끼 무슨 새끼 욕하고 떼쓰고 악에 받치다 그러고 말면 시원하겠지. 더럽고 옹졸한 맘으로 헐뜯으면 너넨 내 편을 들어주겠지. 상대방이 누군지 몰랐을 때에는 그렇겠지. 근데 얘들아, 나는 무서워. 너네가 내 친구라 무서워. 너넨 빨간 펜으로 아무 말이나 다 쓸 수 있는 갱지가 아니잖아.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떡해. 남자 좋아하는 새끼랑은 친구 안 한다 하면 어떡해. 운 좋아서 그런 거 다 이해해 준다고 해도, 내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알든 모르든 걔를 욕할 친구들을 상상하면 마음이 무너졌다. 욕먹을 사람은 난데 왜 걔가. 안 해도 될 욕을 할 친구들도 마음 아팠다. 그게 아니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가 무서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믿고 의지하는 만큼 걔네 입에서 나를 탓하는 말이 나온다면 나는 일어 설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약 알게 된다면, 어떤 모습이든 걔네가 갈등할 그 모든 상황들이 다 내 마음에 멍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기적일까. 어찌 됐든 내 슬픔의 원인은 인준이와 제노가 이해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솔직함과 이해심 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있는 법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친구니까. 내가 왜 울었는지 내 친구들이 알아선 안 됐다. 친구잖아 우린. 그래서 사실은 내가 제일 나쁜놈이야. 이 모든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실은, 아마 평생 솔직해지지 못하겠지만 사실은, 내가 제일 나쁜놈이야.


여름 더위가 무색하게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햇볕만 가득한 길거리에도 사람이 쏟아지니 시원한 매장 안의 상황은 말 안 해도 우루과이까지 소문이 났을거다. 점심시간이라 그런가 시장통 보다 복잡한 카운터 앞 행렬이 시끄러웠다. 내가 황이랑 시답잖은 걸로 떠들 동안 북적거리는 손님들 틈에 한참을 기다린 제노가 한 손에 캐쳡을 한 움큼 받아들곤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다른 손엔 전화를 받는 모양인지 손등 위로 얼마 전 여자친구랑 맞춘 핸드폰 고리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웬 흰색 웃고 있는 강아지 인형인데 삼보에서 사격으로 뽑은 걸 혜주(제노여친, 여고다닌다, 만나면 어색해서 몇 번 못 봤다)가 너 닮았다며 귀엽다고 꼭 걸고 다니랬다나. 저런 거 싫어하면서 혜주 말에는 껌뻑 죽었다. 자기만 하면 좀 그런데 걔랑 맞춘 거니까 하는 거라며 스윗한 척 했었다 우웩 재수탱. 휘적휘적 걸어오는 도중에 갑자기 캐챱이 터질 듯 주먹을 쥐었다. 어렵게 기다려서 얻은 캐챱 터지면 어떡할라고. 흰색 나시에 시뻘겋게 묻을 캐챱이 상상됐다. 저렇게 만든 통화 상대는 아마 나재민이겠지. 맥도날드에 모여서 같이 점심 먹고 표 끊으러 가자고 약속했는데 약속시간이 삼십분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안 보였다. 물론 나도 지각했지만 무난히 넘어갈 수준이었는데 얘는 항상 늦어서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제노가 화가 났는지 아 그래서 어디쯤이냐고 출발은 했냐? 닦달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재민 또 지각이네. 황 니가 오면 한 마디 해줘라"

"뭘. 이제 지쳐. 그런데 힘 뺏기고 싶지도 않다"


황은 질렸다는 듯 다 먹은 콜라 빨대나 질겅 씹었다. 저러다 관짝 들어갈 때도 지각하라지. 열 내는 열정맨 제노를 보며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방이 한심하단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통화를 받았다는 건 양심상 약속 장소 언저리에 다 와 간단 소리일 텐데 잠시 뒤면 마주칠 상황에 약간 긴장되기 시작했다. 몰래 땀도 삐질 난 거 같았다. 아 괜히 긴장해서 삐걱대면 어짜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굴어야지. 나는 어제 국화 땜에 운 거야. 외국 서 온 애가 너무 고생하잖아. 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 하면서 흐린 눈으로 굴러다니는 감자튀김 몇 개를 주워 먹었다. 제노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기껏 캐챱 갖고 왔는데 감자 다 식었네 세상 사람 다 맥날왔나 오늘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밥 먹을 데가 여기밖에 없어? 나재민이 어지간히 짜증 나게 했는지 받으러 갈 때랑은 딴판으로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어디쯤이래 다와간대?"

"태화 보인대. 아 금마 언제 한번 깨워줘서 고마워 찍어야 돼 맨날 늦어"

"또 늦잠이라나. 그냥 우리가 일어나줘서 고마워 찍는게 빨라"

"우리제노 화가 많이 났구나. 감자 먹어" 


성난 팔뚝으로 캐챱을 죽죽 짜내는 제노가 약간 무서웠다. 캐챱은 왜 하필 빨간색인 거야. 조용히 내 몫의 감자까지 앞으로 밀어줬다. 태화가 보이는 정도면 앞으로 6분 후에는 나재민과 마주해야 했다. 걔는 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니까 딱 6분. 아니다 이미 지각해버린 거 아주 유유자적으로 걸어 올테니 한 10분 정도이려나. 아니야 걔는 맨날 내 예상을 빗나갔으니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거 같았다. 아가들 안녕~ 오늘 덥다 그지? 어어 늦어서 먄~ 이러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시간이나 재다가 딴 생각으로 빠졌다. 멍때리는 거 처럼 보였는지 황이 눈 앞에대고 손을 휘저었다. 저기요 눈뜨고 주무세요?. 번뜩 정신 차려 초점을 맞추니, 늦게 주문한 내 감자는 식지 않았는지 제노가 만족한 듯 매장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찍어 먹는게 보였다. 알러뷰 오땡큐~ 음음 감튀보다 좋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걸~. 


"야 김태우 목소리 개좋다. 이 노래 혜주 땜에 알게됐는데 짱 좋은 거 같애."


아나 시팔 MC몽. 어제 내 맘에 비수를 꼽았던 누구네 싸이 브금이 또 내 귀로 들렸다. 저는 MC스나이퍼가 더 좋다니까요? 매니저님 노래 다른 거 틀어주세요. 어디서 노래를 트는 건지 시끄러워서 들리지도 않았는데 개사까지 해가며 불러대는 통에 계속 귀에 박혔다. 다리가 달달 떨렸다. 제노가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가 마법의 주문마냥 효과를 발휘해 눈앞에 어제 봤던 스티커 사진이나 다이어리, 일촌평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걔가 붙여 논 스티커 개수까지 샐 수 있을 정도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새 그걸 다 기억했어? 앵간치 충격 먹었나 보다 혁아. 그 기억력으로 공부나 하지 그랬어. 속으로 달래도 끊임없이 생각났다. 


"아가들~안녕~ 오늘 날씨 좋다 그지?"


다리 떠는 속도가 미싱보다 빨라졌을 때쯤 나재민이 들어왔다. 1시 47분. 통화를 끝낸 후 정확히 3분 만에 도착한 것이다. 거봐 얘는 항상 예상한 시나리오 밖으로 다닌다니까. 청바지에 빈폴 반소매 남방 입은 나재민. 안에 받쳐 입은 꼼데가르송 하트가 비열하게도 웃고 있었다. 볼 때마다 입도 없는데 눈 빛이 이상해서  나는 그게 꼭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저 하트 뭐가 예쁜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면 걔는 그냥 웃었었다. 너랑 닮았는데 동혁아? 되도않는 말로 입을 다물게 하는 능력도 있었다. 30분 넘게 지각하고도 여유로운 작태에 제노는 먹던 감자튀김 한 조각을 던졌다. 나재민한테는 아니고 트레이 위로.   


"와 뻔뻔한거 봐라. 기다려 본 적 없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얼굴이야"

"에밀리, 참아 에밀리. 한 번만 봐주자 우리가 한 번만 봐주는거야."


황이 제 주먹을 부들거리다 겨우 진정시키며 강아지 어르듯 달랬다. 왼손은 로버트 오른손은 에밀리. 밥샵과 효도르의 이름을 붙여서 키우고 있댔다. 맞짱 뜨면 이소룡이랑 삐까뜨고 공고 꼴통으로 유명한 오뎅도 GG치고 토낀다고 조심하랬다. 오뎅은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유명한 공고에 다니는 앤데 먹자골목에서 맨날 오뎅만 먹는다고 오뎅이었다. 걔랑 분식 먹으러 가면 떡볶이도 오뎅만 나와서 항간엔 부산어묵집 아들내미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는데 내가 알기론 세탁소 집 막내둥이다. 우리 학교랑은 옛날부터 학교끼리 사이가 안 좋아 마주치면 좋은 일이 없었다. 오락실이건 공터건 자리싸움이 심해서 멀리서 교복만 봐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황이 맨날 무언가 비교하거나 비유할 때 걔를 인용했었다. 니 이번에 골 못 넣으면 걍 오뎅. 주로 안 좋은 쪽일 때가 더 많았지만. 나재민은 걔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 누구를 싫어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걔는 좀 특별한 케이스였다. 제노는 뭐, 사실 로버트와 에밀리를 갖고 있는 건 제노였어서 그런가 시비가 붙으면 싫은 티를 내도 지나면 별 감흥도 없어 보였다.  


"미안해 잠깐 볼일 좀 보고 오느라고 늦었어."

"늦잠 잔게 아니라고...? 무섭다. 오늘 지구 종말 오는거 아냐?"

"오바는. 근처에 누가 알바하고 있대서 마실거 주고왔어."


 나재민은 비꼬는 제노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더니 황이 남겨놓은 콜라 뚜껑을 열어 얼음을 털어 넣었다. 아 왤케 덥냐 근데 아가들 우리 영화 몇 시 꺼 봐? 입에 얼음을 잔뜩 문 채로 웅얼거리면서 저가 입은 셔츠 색 마냥 하얗게 웃었다. 황은 은근슬쩍 넘어가는 걔한테 질린지 오래라 두시 오십분 하고 태연하게 대답해줬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맑게도 미소 띈 얼굴에 궂은 소리 할 사람은 없었다. 나재민도 눈치챘는지 먄해~ 오래 걸릴 줄 몰랐엉~ 나나 한 번만 봐조라~ 특유의 쏟아지는 애교를 부려댔다. 그러면 제노는 금세 알겠다며 듣기 싫으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귀를 막았다. 아아아 안들리. 황은 이미 눈 까뒤집고 귀 막은 지 오래였고. 나는 그 웃긴 꼬라지를 보다가 픽 웃었다. 시트콤이 따로 없네. 걱정한 것과 달리 평소와 다를 거 없는 분위기에 긴장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래 원래 이랬잖아 우리는. 감추고 숨길 필요 없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딱히 무언갈하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이랬기 때문에 내 마음을 들킬 일은 없을 거다. 아무도 모를 거야.


"애교 점점늘어 재민이. 이러다 나 따라잡겠어"


먹금하는 친구들 틈에서 우스갯소리로 칭찬 한 마디 해줬다. 동혁이 너는 애저녁에 따라잡았지. 어쭈 뜰래? 뜰까?. 야야 제발 그만해라 둘 다 그런 건 너네만 있을 때 해줘. 막힌 귀로 용케 들었는지 나재민과 나의 애교 배틀 소식에 황이 질색하며 말렸다. 지각쟁이도 도착했겠다 애당초 목적이었던 영화를 예매하려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오기 전부터 많이도 먹었는지 널브러진 햄버거 껍질이 3인분이 아니었다. 한쪽으로 모으자 산 만큼 쌓인 쓰레기에 황과 제노가 민망했는지 큼큼거리다 한참 클 때잖아 하며 냉큼 트레이를 들고 자리를 비웠다. 허 웃겨서 피식대다 남은 내 자리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벗어놨던 가방을 다시 매고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지샥 시계도 다시 찼다. 검은색과 금색이 들어간 뭉툭한 시계. 방금 와서 치울게 없던 나재민이 아직 앉은 채로 내 폼을 지켜봤다. 


"니 그거 아직도 안 버렸나"


시곗줄을 조이던 손이 잠깐 멈췄다. 턱을 괴곤 한 손으로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내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띠링-뚜룽 띠링-뚜룽 띠링-뚜룽. 규칙적으로 기계음이 울렸다. 대답을 재촉하는 듯 반복되는 소리에 나는 그냥 시계나 마저 찼다. 나재민은 이 시계에 불만이 많았다. 어쩌면 황보다 더 많이 버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황은 고장 났으니 버리라 했고 나재민은 그냥 버리라고 했었다. 종국엔 저가 생일선물로 더 좋은 시계를 사주면 버릴 거냐고까지 물어봤었다. 친구들과 맞춘 것이기에 그럴 수는 없다 하자 삐져서는 한동안 풀어주느라 바빴다. 


"못 버린다니까."

"고장난거잖아"

"수리 맡기면 살아날 수도 있어."

"지랄 앞면 다 깨져서 수리는 무슨 수리야."


걔 말대로 내 시계는 앞면 유리가 박살 나서 시곗바늘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완벽하게 시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고물덩어리. 톱니가 다 드러나서 사실 흑금이 아니라 그냥 흑에 가까웠다.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잔뜩 먹어서 부서진 부분도 있었다. 이게 다 유구한 역사래도. 다 의미가 있는 거야 재민아. 뚜룽-탁. 나재민은 한 발 째려보다 엉덩이를 뗐다. 그제야 계속되던 기계음도 멈췄다. 제일 늦게 와놓곤 먼저 걸어가는 걔를 보다가 주변에 빈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멀뚱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우리처럼 다음 일정으로 옮긴 건지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꽤나 줄어들어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생각보다 잘하는데 나. 어색하게 굴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시켰더만 실내에 있어도 약간 더웠다. 밖은 얼마나 더울까. 입구 쪽에서 기다리는 친구들이 보였다. 그 옆에 삐딱하게 서서 문자를 하는 나재민도 보였다. 아직 하루는 길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뱉어냈다.


괴물을 볼지 스승의 은혜를 볼지를 두고 약간 말다툼이 있었다. 여름이니까 당연히 공포영화지, 괴물 재밌다는데 그냥 이거 보자 느낌이 천만이야. 애당초 괴물을 보자고 상영 시간표까지 보고 모여놓곤 오늘 개봉한 영화 포스터 앞에서 마음이 갈팡질팡했던 거다. 나는 공포영화는 질색이어서 저만치 떨어져 뭘 시킬지 메뉴판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황과 제노가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근데 그거 18세잖아 우리 못 보는 거 아냐? 갈릭과 카라멜 사이에서 고민하다 넌지시 물어보니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괴물로 네 장 예매한다. 나재민이 재빨리 매표소 쪽으로 사라졌다. 


"야 18세면 우리 볼 수 있는 거 아니가? 우리 열여덟이다이가."


황이 흐뭇하게 괴물 포스터를 챙기는 제노를 뒤로하고 내 옆으로 와서 섰다. 만으로 따지는 거 아니야? 아 그런가. 알아보고 담에 또 보면 되지 뭐 오늘 개봉했잖아. 니 또 잠수탈까봐 그러지. 아 따거, 왜 이러셔 나 이동혁이야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세말 네말 해서 문제잖아.


"황... 삐졌어? 아이, 잠수 그거는 그냥 더워서 학교 안 간거야."

"안 삐졌어. 누가 사물함에 아무 것도 없다고 구라까는 바람에 나 혼자 다 치우긴 했는데 삐지진 않았어."

"엥? 안에 뭐 들어있었어? 나 진짜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알잖아 뭐 안 넣어 놓는거."


주변 자리는 좀 더럽게 써도 사물함에 뭘 넣어 놓는 성격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마다 가지러 가기도 귀찮았고 크기도 코딱지만 해서 수납하기 시작하면 1학년 때처럼 분명히 혼자서 두 개 세 개씩 쓸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주변에 하도 널브러뜨려 놔서 담임이 특별히 용인해 준거였고 이번 담임은 무관심하기 짝이 없어서 내가 얼마큼 어지럽히든 신경을 안 썼다. 덕분에 몰래 맨 뒷줄 자리 두 개를 혼자 쓰는 게 가능했다. 방학식쯤에는 집으로 하나씩 들고 가서 치울 짐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 번호가 매겨진 사물함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누가 잘못 넣어둔 건가?


"어. 브이콘 졸라 많이 들어있던데. 니 체육복이랑 줄넘기랑 옥편...? 무슨 종이쪼가리 몇 개랑."


좀 당황했다. 브이콘은 내가 좋아하던 매점 간식이고 그걸 아는 사람은 꽤 많았다. 아니 그거 때문에 당황 건 아니고, 그 뒤에 나오는 말 때문에. 내 체육복이랑 줄넘기 옥편. 브이콘만 들어선 누가 내 사물함에 그런 짓을 해놨는지 몰랐을 텐데 이것들엔 짐작 가는 바가 좀 있었다. 다리를 분지러뜨리며 체육복을 입을 일이 없었다. 줄넘기는 당연하고. 그래서 그걸 전부 필요하단 사람한테 빌려줬었다. 나재민. 옥편도 매한가지였고. 우리 반 담당 한자 쌤은 옥편을 안 써서 1학기 내내 빌려줬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그 세 개의 범인이 나재민이면 브이콘도 걔인가? 종이는 또 뭐람.


"아아 나 뭔 지 알거 같애. 근데 브이콘이랑 종이는 뭐야. 난 그런 거 모르는데."

"난 알겠던데. 너 먹으라고 준 거 아냐? 한 네다섯개 있었던 거 같은데."

"종이쪼가리는 뭔데?"

"편지 비슷한 거 같던데. 안 펴봐서 내용은 몰라. 누가 준지도 안 써져있더라."


편지? 문자 기술이 발달한 06년대에 촌스럽게 웬 편지래. 종이 쪼가리라 표현한 걸 봐서는 제대로 된 편지는 아닌 거 같았다. 행운의 뭐시기 그런 거 아냐? 영국에서 시작된 찰리 어쩌고. 황의 부연 설명을 들어보니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무슨 잡지인가 문구류에 있는 편선지랬다. 접으면 과자 모양도 되고 대일밴드 모양도 되고. 동생이 수집하듯 갖고 있어서 어떤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엠알케이 와와 같은 걸 말하는 거였다. 그래서 그것들이 지금 다 어디 있냐고 물어보니 황은 씩 웃었다. 브이콘은 같이 남아서 청소한 애들끼리 먹었고 나머지는 다 나재민 줬어. 


"아니 걔를 왜 줘? 내 거 잖아."

"아 그러면 니가 진작에 챙겼어야지. 걔가 계속 썼으니까 끝까지 책임지라고 그냥 던지고 갔어."


방학식인데 것 땜에 붙잡혀 있기 싫었거든. 편지도?. 어 걍 싹 다. 마침 눈앞에 지나가길래 줬어. 아 나는 카라멜. 황이 어찌 되든 관심 없단 어조로 저 먹고 싶은 거나 얘기했다.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붙이려는데 나재민이랑 제노가 왔다. 아 여기는 영화 티켓이 너무 못생겼어. 나재민이 표를 보여주며 말했다. CGV가 예쁘긴 하지. 제노가 포스터를 넘기며 대꾸했다. 물어볼까 말까. 체육복이나 다른 건 사라지든 말든 상관 없었는데 편지는 좀 궁금했다. 누가 언제 보냈는지 무슨 내용인지. 같이 넘겨받았다니 버리지 않았으면 분명 자기가 갖고 있을 텐데. 대뜸 물을 순 없으니까 어떻게 물어봐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했다. 편지...받았어? 아 아니야 내가 보낸 거 같잖아. 우리 정리할게 좀 있지 않나? 아이건 대부업체 같고. 너 혹시 내 연애편지 봤어? 아 니가 강호동이냐고 물어보면 어떡해. 고르고 골라도 좋은 말이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쪼꼬 똥매려워? 왜이렇게 끙끙대?"


제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진 건지 나재민은 나를 훑었다. 똥 마렵냐면서 화장실은 저쪽이라고 손짓까지 해줬다. 아 한두 번 오냐고 나도 알거든? 그리고 똥 매려운 거 아니거든? 아무래도 지금 당장 물어보긴 그른 것 같았다. 아직 영화 시작까지 삼십분은 더 넘게 남았으니 삼보나 가자며 건물을 내려왔다. 주말도 아닌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엘리베이터는 죄다 만원이었다. 기다리는 시간 아까우니까 계단으로 가자. 비상계단을 내려오며 황이 발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희미해진 옛사랑이 왜 또다시 생각나지 희미해진 옛기억이 왜 또다시 날 찾는지 정말 내 맘 나도 모르는 거니 문득 떠오르는 사랑 그만 내 기억에서 떠나. 은지원이냐? 어엉 울 누나가 팬이었잖아. 황의 노래가 끝나자 타이밍 맞게 비상계단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오자마자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불 있는 사람? 너나 할 거 없이 담배를 물었다. 해가 머리에 떠 있을 시간이라 그늘진 곳이 얼마 없었다. 담벼락에 다슬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연기를 뿜었다. 나는 핸드폰이나 열었다 닫았다. 필 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냄새를 맡아도 피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근데 나잼 누구 보고 온거? 마실거 까지 사들고"

"아 나도 궁금했었음. 누가 무슨 알바 하시길래 우리보다 중요하다고."


카악 퉤-. 가래가 뱉어지고 재가 날렸다. 멀리서 매미소리도 들렸다. 이런 도심 속에도 매미가 우네. 장마가 끝나자마자 찾아온 매미떼가 더위와 함께 여름을 장식했다. 그늘에 쪼그려있어도 삐질 흐르는 땀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애들이 물어본 질문에 나재민은 태평하게 하늘이~ 옷 가게에서 알바해 하고 답했다.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 까만색 티셔츠가 하얀 옷 입은 나재민이 받을 열까지 흡수하는 것 같았다. 여자친구 보고 왔구나. 우리 약속시간엔 늦었으면서 여자친구한테 갔다 왔구나. 거기는 늦지 않게 도착했으려나. 숙인 머리로 피가 쏠리는 듯했다. 아아 그래 야 담에 더블데이트인가 뭐시기 하자 혜주가 그런 거 해보고싶댔어. 제노가 언제 늦은거로 화났었냐는 듯 혜주 얘기를 하며 실실거렸다. 커플 나부랭이 꼴 보기 싫어서 한 걸음 옆으로 옮겼다. 황이 내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필래?. 멘솔 향 나는 담배가 한 까치 올라 와 있었다. 나는 말없이 받아 물었다. 아 레종 존나 맛 없어.


"뭐야 동. 웬일이래. 야 필거면 같이 피지 애매하게. 나잼 한 대 더 깔 거?"


나재민이 벽에 기대선 채로 비스듬히 나를 내려다봤다. 정면에 비치는 건물 유리창에 모습이 비쳤다. 나는 됐다고 손사래 치고 호흡을 빨리했다. 이러면 됐지?. 연초가 빠르게 타들어갔다. 됐어 천천히 펴. 나재민이 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지졌다. 아직 길게 남았던 거 같은데. 힐긋 쳐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길래 나도 똑같이 올려다봐줬다. 연기를 길게 뿜었다. 그제서야 눈이 다른 데로 돌아갔다. 황은 다 폈는지 무릎을 탁탁 털고 있었다. 나도 일어나 재를 한 번 털고는 담배를 짧게 고쳐 잡았다. 먼저 걸어가는 애들 옆에서 천천히 걷다가 뒤쪽으로 튕겨 던졌다. 다시 앞을 돌아보니 나재민이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라 말을 붙이려는데 금방 등을 돌리곤 제노 옆에 가서 붙었다. 쩝. 오랜만에 입에 댄 담배가 맛없었다. 골목을 나와서 삼보로 걸어갔다. 

오락실 앞으로 뽑기 기계나 펀치 기계 해머 머신 따위가 늘어져 있었다. 그 앞에 으레 저들끼리 죽치고 앉아서 물 흐리는 까까머리들이 몰려있었다. 몇은 바닥에 쪼그리고 몇은 뽑기 기계 위에 불량스레 앉아서. 머리는 샛노래서 여기저기 구멍 뚫어놓고 팔뚝엔 긴팔 반팔 이레즈미가 있는 애들도 있었다. 사실 머리는 황이랑 제노도 샛노랬는데 그거랑은 달랐다. 쟤네는 이상한 금목걸이 하고 일수가방 들었잖아. 나이에 맞지도 않는 조폭룩으로 깔롱직인 걔네가 보이자 황은 인상 썼다. 아 오뎅 있어. 제노랑 나재민은 아직 못 봤는지 둘이서 얘기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 들으니 더블데이트 얘기 같았다. 나는 그냥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황 말대로 오뎅이 보였다. 펀치 기계를 하려고 하는지 앞에서 요란하게 몸을 풀어댔다. 주변에서 따까리들이 온갖 알랑방구를 떨어대는 게 보통 비데가 아니었다. 삐리링- 돈을 넣자 돌아가는 펀치 기계 앞에 오뎅이 섰다. 180은 거뜬히 넘을 거 같은 키에 유도선수 같은 몸통. 짧게 쳐낸 스포츠 까까머리에 다 터져서 만두마냥 부푼 귀. 폴로 럭비티가 우습게도 꽉 꼈다. 드러난 팔뚝에 길게 내려온 붉은색 야차이레즈미 그 끝에 빛나는 흑금 지샥. 오른팔을 붙든 왼쪽 손목 위로 자리하고 있었다. 황급히 왼손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쾅!!! 자동차끼리 처박히는 소리도 이거보단 작을 거다. 소음공해 수준을 넘어선 굉음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뒤돌아봤다. 제노와 나재민도 이제 눈치챈 듯했다. 오뎅은 남들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즐기는지 덩치에 안 어울리게 방방 뛰며 와하학 웃어댔다. ~9!9!9!~. 삐리리리링 올라가는 점수가 마침내 최고점을 알렸다. 와~ 맞으면 좆 되겠노 행님요~. 씨~바꺼 이름 새로 새길 필요도 읎겠네~ 아하학. 이 근방에 펀치 기계에는 전부 오뎅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최고점 그냥 오뎅, 그 밑으로는 컨디션 안 좋은 날의 오뎅, 왼손으로 친 날의 오뎅 등등. 걸음을 안 멈추고 계속 걸어갔다. 황이 옆에서 옷을 잡아 끌며 그냥 일찍 영화관으로 들어가재도 멈추지 않았다. 왜 나 노래 부르고 싶어졌어. 니가 부른 거 은지원. 뒤에선 제노와 나재민도 걸음을 붙여왔다. 오뎅이네 재수 없게. 나재민은 그냥 조용했다. 


"얼~ 이게 누꼬, 간잽이 혁이 아이가~. 요즘 장사 잘 되나?"


시끄러운 저들 틈에 몰래 들어갈랬는데 결국 잡혔다. 사실 들키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그냥 얼굴 보이면 꼭 이렇게 시비조로 말을 붙여와서 그게 싫었다. 그러면 꼭 시비가 걸리더라고. 그렇다고 피하거나 도망가는 건 더 싫었다. 그냥 지나가려 하니 아까 있는 힘껏 기계를 내려친 두툼한 손으로 팔을 턱 붙잡았다. 어데 가노 마 친구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비죽거리며 나를 끝끝내 저 앞에 돌려세웠다. 덕분에 바지 주머니에 쑤셔놨던 왼손이 튀어나왔다. 나를 붙잡고 있는 팔에도 똑같이 달려있는 빅페이스 흑금. 오뎅은 그걸 보더만 픽 비웃었다. 


"아직 잘 하고 다니네? 걸레짝 돼서 버릴 줄 알았드만."


나보다 한참 큰 애를 노려보다 힘을 줘 팔을 비틀었다. 어우 야 팔 뿌아질라. 오뎅 뒤에 서있던 애들이 킬킬 웃어댔다. 몇몇 아는 얼굴도 보였다. 걔네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대로 뽑기 기계 위에 앉아 있었다. 웃지도 않았다. 고개를 돌려 걔네를 보니 눈을 피했다. 우습게 돌아가는 상황에 황이 눈치 보는 게 느껴졌다. 로버트와 에밀리 둘 중에 고민하고 있는 거 같았다.  


"지는. 좀 놔줄래. 나 노래 까먹을 거 같거든."


다른 팔로 걔 가슴께를 퍽 쳤다. 오뎅 만큼은 아니지만 힘을 꽤 실어서 치는 바람에 걔 몸이 살짝 밀려났다. 풀려난 팔을 빙빙 돌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제노가 빵 터져 선 박수까지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 쪼개기 바빴던 오뎅네 애들은 그새 입을 싸물었다. 나재민은 아직까지도 말이 없었다. 오뎅이랑 우연으로라도 마주쳐서 심기 불편해 보였다. 황은 곤란하단 눈치로 오뎅을 흘기곤 거의 굴러다니는 제노를 챙겨 들어왔다. 야 니가 때리면 어떡해. 우리 에밀리 드디어 피 맛 좀 볼랬는데. 때린 거 아냐 비켜달라 주먹으로 말한 거지. 제노는 간신히 진정하는 듯하더만 또 자지러졌다. 와 짱이다 동. 상반기 허세 부문 최고의 플레이어 상 드립니다. 파하학파하학 웃음 끝에 결국 에어하키 기계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야 제노야 진정해 너 그러다 토하겠어. 황이 제노의 등을 두드리며 쪽팔리니까 그만 빠개라고 압박했다. 나는 오래방 기계로 직행했다. 주머니 졸라 달린 카코 바지 어디에 동전을 넣어뒀더라 생각하며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동전을 넣자마자 문이 다시 열렸다. 나재민이 들어왔다. 한 명만 들어가도 좁은 기계 안에 둘이나 들어오니 비좁아 죽을 거 같았다. 야 비잡다 좀 옆으로 가. 나재민은 아직도 말이 없었다. 


"아 황이 부른 노래 제목 뭐지. 은지원만 기억나네."


걔는 대답 없는 저 때문에 공기가 가라앉는 줄은 모르고 팔짱 낀 채 금영 로고만 떠다니는 노래방 티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뻘쭘해서 혹시 아냐고 말을 걸어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이럴 거면 얘 왜 들어왔지. 밖에서 제노 등이나 뚜들겨주지. 에어컨이 안 돌아가 후덥지근하게 달아오르는 실내와 다르게 손은 자꾸 식어갔다. 노래방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다. 은지원을 검색해 걔가 낸 노래를 죄다 뒤져 볼 생각이었다. 으..ㄴ..ㅈ..ㅣ...ㅇ... . 


"문득."

"어?"

"문득이라고. 아까 인준이가 부른 노래."

"아... 응. 고마워."


ㅁ..ㅜ..ㄴ..ㄷ..ㅡ..ㄱ... . 64029. 야 이거 랩 파트 니 할래? 니 랩 잘 하잖어. 시작 버튼을 누르려다 마이크를 나재민한테 돌렸다. 눈앞에 마이크가 들이밀어지니 그제야 화면에서 시선을 땠다. 틈도 없이 붙어 앉아 어깨가 닿았다.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나로 향했을 뿐 나재민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 아니, 마이크는 두 개잖아... 너도 있는데 나 혼자 랩하고 노래하고... 좀 그르치 않냐..?. 인중을 늘리며 말을 이었다. 어색한 침묵에 눈알이 도로록 하고 굴러가는 소리가 숨소리보다 크게 들릴 거 같았다. 


"왜 하필 이노래야?"

"엥 어 어?"


계속 무시하다 겨우 입을 여나 했는데 하는 말이 당최 종잡을 수 없었다. 이런 건 시나리오는커녕 여태까지도 없었던 전개였다. 왜 이 노래냐니 아까 황이 불렀으니까... 별 이유는 없었는데 왜냐고 묻는 나재민이 뭔가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거 같아서 가벼운 대답은 해선 안 될 거 같은 기분이었다. 말을 고르고 있었는데 그 잠깐을 못 기다렸는지 나재민이 말을 이었다. 이거 예전 사람 그리워하는 노래잖아. 뚫릴 듯 똑바로 쳐다보는 통에 피할 틈도 없었다. 무슨 뜻인지 머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나 랩 안 해, 은지원 싫어 난 에쵸티가 더 좋더라 하며 고개를 팩 돌리는 나재민이었다. 야 왜. 아니 랩 왜 너 잘하잖아. 야아니 은지원 괜찮거든? 아니 왜 안 해? 너 이럴 거면 왜 들어왔어? 비잡아 디지겠구만 더버죽구로. 빠르게 흘러가는 플로우에 뒤죽박죽으로 얘기했다. 돈을 넣어놓고 예약을 안 하자 검색 화면이 사라지고 다시 금영 로고가 떠다녔다. 와중에도 서로 말이 안 통하니 왜 이러냐고 묻는 사람과 침묵 스탠스만 유지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밖이 잠깐 소란스러워지더니 우리가 들어앉은 오래방 문짝이 확 열렸다. 방음은 개 똥만큼도 안되는 얇은 판떼기가 천 조각 마냥 휘청거렸다. 여전히 팔짱 끼고 앞만 보는 나재민 뒤로 잔뜩 성이 나서 울그락 불그락 해진 오뎅이 보였다. 


"마 이동혁. 나온나."


간신히 흥분을 눌러 담고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 애쓰는 유인원처럼 오뎅이 이 악물고 말했다. 대신 그만큼 화를 다른 곳으로 분배했는지 문틈을 꽉 쥔 손이 새하얘져선 철제라도 찌부러뜨릴 것 같았다. 저런 허접 샷시라면 충분히 가능 한 일이 아닐까. 가로도 세로도 좁은 공간에 몰려 어쩌지 고민했다. 일단 여기서는 대화든 싸움이든 좆도 안 될 것 같으니 나가긴 해야 하겠는데 망부석 마냥 팔짱 낀 채로 굳은 나재민이 비켜주진 않을 것 같았다. 얘의 협조 없이 이 방을 나가려면 얘 무릎을 기어서 아주 부담스러운 자세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죽어도 싫었다. 야 재민아... . 템플스테이라도 하는지 나재민은 여전히 침묵 스탠스였다. 어째 표정은 더 험악해진 것 같았다. 아까는 그래도 턱만 죄곰 나와선 나 삐졌어요 정도였는데. 씨발 빨리 안 나오냐? 거기서 처 맞을래?. 사람인 걸 포기하려는지 오뎅의 얼굴은 더욱 벌게져선 당장 터질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잠깐 수치스러운 게 이런 뒤주만도 못한 공간에서 처 맞는 거보단 나을 거 같아서 마이크를 내려놓고 일어서려 했다. 


"이럴 거면 왜 들어왔냐고? 이럴 까봐 들어온거야 동혁아."


나재민이 일어서려는 내 앞을 제 팔로 막아섰다. 황당함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재민은 주먹으로 오뎅 턱을 갈기며 일어섰다. 오뎅이 턱을 붙잡곤 뒤로 휘청이다 넘어졌다.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주먹이 잘 들어 갔는지 아구창이 닫히면서 혀를 씹었는가 보다. 박력 있게 다 때려 부술 듯이 문짝을 뜯어놓고는 가오 안 살게 비틀거리는 오뎅에 제 친구들이 놀랬는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야 시발 개안나? 임마 이거 돌은 거 아니가. 웅성웅성 삼보 안에서 게임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쳐다봤다. 제노는 아예 하키 대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황도 이번 건 웃겼는지 제노 등을 두들기다 그냥 냅다 패버렸다. 야야 인준아 에밀리 진정 좀 하라 그래. 제노가 웃는 와중에도 아프다고 씨부렸다. 

가오만 잔뜩 상한 오뎅이 똘마니들의 부축 사이로 나재민을 힘껏 째려봤다. 피 칠갑을 해가지고는 한 대 맞아놓고 단체로 밟은 거 같은 꼴이었다. 나재민은 다 뜯겨나간 문짝에 기대서 오뎅을 내려다봤다. 으르렁 대는 오뎅에 나재민은 사람의 말로 뭐 라고 대답해줬다. 아아악!! 오뎅이 계속 노려보며 반격을 하려는 듯 일어 서려 했다. 


"야. 주먹보다 센게 뭔 줄 아냐?"

"씨발롬아 니 턱주가리도 날려 줄테니까 거기 딱 서라"

"마이크 똘추새끼야" 


오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재민은 내가 의자 위에 올려뒀던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내 거에서 커버를 벗겨 두 겹 씌우곤 오뎅이 달려들자마자 대가리를 후려 갈겼다. 띠잉 뎅- 삐익-. 마이크에 둔탁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오락실을 가득 채웠다. 오뎅이 옆으로 쓰러졌다. 힘 조절은 했는지 이마만 조금 찢어지고 별로 다치지도 않았다. 사실상 거의 휘두르는 시늉만 하고 오뎅이 저가 들이대다 스쳐놓곤 쫄아서 기절 한 거다. 황이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웃다가 지친 제노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야! 튀어!. 나재민이 곧장 내 팔을 잡고 오래방을 뛰쳐나왔다. 배가 땡겨서 못 걷겠다는 이제노를 양쪽에서 잡고 냅다 튀었다. 황은 즐 뻐큐 엿이나 처 드셈 감자감자 뻐큐 무지개 반사다 찐따들아 아하학 최후방에 끝까지 남아서 적군에게 양손으로 주먹감자 날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제노는 다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나재민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 미친새끼 거기서 어떻게 휘두르는 척만 하냐. 오뎅 지린 거 아녀? 지 혼자 말하다 또 학학 웃었다. 이제는 목이 다 쉬어서 할아버지 기침 소리만큼도 안 났다. 


"걔 귀 봤냐? 그냥 때려갖곤 가오도 못지켰을걸" 


다 부서진 시계도 가오용으로 차고 다니는 나보다 더 일품가오남인 나재민. 우리 학교 동아리 창고 뒤편에 버려진 오뎅의 이름이 없는 펀치 기계의 최고점은 999. 이니셜은 NAN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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