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시기 전, 본 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어지는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독사

1




  고서아. 슬기 서 예쁠 아. 슬기롭고 예쁘게 자라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입이 닳도록 고서아에게 하는 말이었다. 오죽했으면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숨을 헐떡이며 한 말이 슬기롭고 예쁠 우리 서아 가 마지막 말이었겠는가. 고서아는 그래, 정말 그 말대로 예뻤다. 존나게 예뻤다. 여자들은 걔를 동경했고 남자들은 사랑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서아를 좋아했고 예뻐했다. 게다가 어찌나 슬기롭던지.


“여주야. 우리 같이 올라가서 잡지 보자!”


슬기롭다 못해 그년은 영악했다. 자신에게 향하는 눈들을 즐기고 신경 썼다. 서아는 예쁜데 착하기까지 하네. 그러면 항상 고서아는 쑥스럽게 웃으며, 아 가증스럽게 웃으며


“여주가 더 착한데요,뭘..”


가만히 옆에서 입다물고 있는 나를 엿 맥였다. 왜그러는지는 모른다. 18년동안 나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고서아가 왜이렇게 나를...


“입 못 털겠으면 좀 웃기라도 해, 나까지 눈치 보이잖아.”


싫어하는지. 아무래도 나는 알지 못하겠지. 내가 숨을 거두고 내 영정 사진을 볼때 쯤이면 입을 열려나.

고서아는 나와 방으로 올라와 침대로 몸을 던져 한정판 잡지를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으로 넘겨댔다. 나는 익숙하게 책상에 의자를 빼고 문제집을 꺼내고 서랍에 처박혀 있던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공부를 조온나 못해도 세상 편한 고서아와는 달리 나는 연필 심이 닳을때까지 교과서 종이가 바랠때까지 공부를 해야했다. 그게 내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응 지금? 당연히 가지.”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아 고서아의 전화를 엿듣게 됐다. 고서아는 이 사실을 알면서 신경 쓰지 않는건지, 멍청해서 모르는건지 신나게 통화를 해댔다. 그리고는 교과서 문제집이 잔뜩 있는 내 책상 옆 값 비싼 화장품들이 놓여져있는 화장대로 가 앉았다. 오른쪽 어깨로 핸드폰을 귀에 지탱하고 립스틱을 바르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출국? 재민이가 와? 진짜?”


또 웬 남자를 사귄 것인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붉은 고서아의 입을 타고 흘렀다. 새삼 대단하다 싶었다. 고서아는 핸드폰을 타고 흘렀던 남자의 이름에 더욱 신나하는 듯 했다. 응,응 이따봐. 다른 이의 귀에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겠지만 방금까지 웃기라도 하라는 목소리와 겹쳐 들려 속이 뒤틀렸다.

고서아는 마스카라까지 덧바르고 제 침대 옆에 있는 옷장을 활짝 열었다. 하나하나 살펴보려는 듯 옷가지들을 전부 침대 위로 내팽겨쳤다. 반짝 반짝 하기 그지 없는 명품 옷들. 진주가 박혀 있는 것도 있었고 샤랄라한 레이스가 박힌 원피스도 있었다. 옷 하나하나를 전신 거울에 대보던 고서아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지 드는 족족 다시 내팽겨치며 신경질을 냈다. 


 아, 근데 얘가 정녕 간탱이가 부었나?


고서아와 나는 방을 같이 쓴다.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때 왼쪽이 고서아 침대와 옷장, 화장대 오른쪽이 내 침대와 옷장, 책상이 있는데 고서아는 지금 내가 이어폰을 꼽고 안 들리는 줄 아는 것인지 까치발을 들어 살금 살금 내 옷 장을 열고 있다.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치고 싶지만 일을 크게 만들지도 모르고 나섰다가는 안들리면서 이어폰은 왜 꼈냐 통화를 엿들었냐 같은 개 좆같은 소리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자연스레 연필을 쥐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어서면 안돼 연필을 움직이자.

옷을 갈아 입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침대에 있는 향수를 두어번 뿌리고 달그락 샤넬 크로스백을 어깨에 두른채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탁, 방문이 닫히자마자 거칠게 이어폰을 뽑아내고 고서아의 손이 닿았던 옷장을 활짝 열아 제쳤다.


“..미친년.”


하나밖에 없는, 아빠의 품이 갑갑하다며 5년전 도망친 엄마가 유일하게 고서아가 아닌 내게 잘 어울린다고 주었던 흰색 원피스를 입고 갔다. 기가 차서 욕이 절로 나왔다. 온통 무채색 밖에 없는 내 옷장 중 제일 예쁘고, 제일 화사하고, 제일 아끼는 옷을 멋대로 입고 갔다.

고서아가 노는 곳은 질이 좋지 않았다. 상류층 자식들이 놀고 먹고 약하는 곳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고서아는 그곳에서 여왕벌이었다. 남이 보기엔 그저 여왕벌 흉내를 내는 일벌에 불과한데.


12시가 지나도 잠에 들지 못했다. 다시는 그 옷을 못 입을 듯 해서.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릿해졌다. 위로해줄 사람 하나 없이 청승맞게 우는건 죽을 만큼 싫어서 팔을 멍이 들만큼 아프게 꼬집어 눈물을 삼켜냈다. 그래서 내 팔에는 멍이 수도 없이 많았다.

눈물이 어느 정도 그치자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소음이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 이불을 걷히고 조심스레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서아야 집 다 왔어.”
“...으응..”


차를 타고 온건지 남자가 조수석에 있는 고서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한껏 상기된 얼굴의 고서아가 남자의 품을 파고 들었다. 고서아의 등을 남자가 익숙하게 쓸어냈다. 한두번이 아닌 듯한 손짓이었다. 서아야. 서아야. 듣기 좋은 목소리가 고서아의 이름을 두어번 불렀다. 고서아. 남자가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렀을때, 고서아가 품에서 고개를 들더니.


“...”


순식간에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맞댔다. 남자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는 고서아에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왠지 보면 안될 것을 본 것 같아 눈을 돌리려는데 고서아가 입고 있는 내 원피스가, 새하얀 원피스에 있는 와인을 엎지른 듯한 얼룩이 눈에 들어찼다. 창문 틀에 있던 손이, 온 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기어코, 고서아가 저질렀다.

생각할 틈도 없이 책상 위 놓여있던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를 켰다. 네가 먼저 시작한거야. 일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메라 초점이 빠르게 맞춰졌다.


“...”


아. 무료한듯 눈을 감고 고서아의 일방적인 입맞춤을 받아내고 있던 남자의 눈이 떠졌다. 정확히 내 카메라를 힐끔 댄 놈은 고서아의 뒷통수를 당겨 깊게 입을 맞췄다. 고서아가 했던 것은 아이들의 장난 수준으로 느껴질 만큼 깊게.

나는 핸드폰을 놓치고 몸을 숨겼다. 눈이 마주쳤어. 그 날 밤 놈은 정확히 내 카메라를 바라봤고 입술만 부비적 대던 고서아에게 키스했다. 쿵쾅 거리는 심장을 주체 하지 못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낯간지러운 소리가 창문을 타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또 다시 속이 매쓰꺼워 손바닥으로 입술을 세게 짓눌렀다.




독사




  일요일 주말 어젯밤 술을 먹고 들어온 고서아는 아침 부터 일어나자마자 아빠에게 불려갔다. 그저 내게 보여주기식 면담이랄까. 고서아는 혼나지도 꾸짖음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빠가 얼마나 고서아를 좋아하는데. 정확히 5분도 안돼서 돌아온 고서아가 지끈 거리는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내게 다가왔다.


“네가 일렀니?”


얘가 뭐라니. 정작 아빠한테 별 소리 안들었으면서, 내게 와 화풀이 하는 것을 보아하니 어제 그곳에서 지 맘에 들지 않은 일이 있는 듯 했다. 뭐 새로운 여왕벌이라도 들어왔나. 어제 밤의 여파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해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고서아의 빽빽 거리는 목소리를 듣자하니 머리가 울려대는 듯 했다.


“내가 일러서 좋을게 뭐가 있는데.”


내 대꾸에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게 화풀이 한게 확실해졌다. 상대해주기 싫어 이불을 걷히고 씻기 위해 옷가지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도중,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내 흰 원피스를 발견했다. 가까이서 보니 와인 얼룩이 짙었다. 내가 원피스를 주워들자 고서아는 당황한듯 빠르게 다가와 내 손에서 원피스를 채갔다. 내 시선을 피하며 원피스를 뒤로 숨기는 모양새가 꼴 나사웠다.



“내놔.”
“..내거야.”
“내놓으라고.”



손바닥을 보이며 내놓으라고 하자 고서아는 뒷걸음질 치며 더욱 원피스를 뒤로 숨겼다. 훔쳐 간것도 모자라 발뺌을 하는 고서아를 보며 치가 떨렸다. 예쁜 옷들을 나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원피스가 내게 어떤 의민지 잘 알면서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놓으라니까!!”



결국 큰 소리를 내며 고서아의 손에서 원피스를 앗아갔다. 고서아가 처음 보는 내 고함에 놀라 뒤로 넘어졌다. 원피스에서는 술냄새와 갖가지 안줏거리들이 베어 냄새가 났으며 얼룩은, 또 말할 것도 없었다. 아, 버려야되네.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뭐하는거야, 지금.”



내 고함에 올라온 듯 아빠가 방문을 열고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나와 고서아를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고서아를 향해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눈물을 흘리는 고서아를 보고는 아빠는 벌떡 일어나 팔짱을 낀채 나를 내려다봤다. 약간의 화가 난 듯한 눈빛. 왜 나한테 그 눈빛을 보이는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명해.”



왜 나한테 설명하라는거지? 잘못은 쟤가 했는데. 싸늘한 아빠의 눈빛과 말을 대하고 싶지도, 옆에 울고만 있는 고서아를 보고 싶지도 않아 등을 돌렸다. 고여주. 내 이름을 낮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는 책상 옆에 놓여진 쓰레기통에 옷을 던졌다. 고여주! 단단하고 무서운 고함에 옆에 있던 고서아가 몸을 움찔 댄다.



“잘잘못 따지는거면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어요.”
“뭐?”
“도둑질하고 거짓말 한건 쟤니까.”



손가락을 길게 뻗으며 고서아를 가리키니 아빠는 지금 누구 앞인데 뭐하는 짓이냐며 내게 다가올 기세를 취했다. 씻고 입으려고 했던 옷가지를 책상 위에 두고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갔다. 활짝 열어 놓은 창문에 문에 세게 닫혔다. 바람이 고마웠다.





  잠옷 바람으로 나온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 일것이다. 돈도 없도 핸드폰도 없는 나는 쌩 거지나 다름 없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고 나오지 못해 슬리퍼가 자꾸만 벗겨졌다.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나올걸. 사무치게 후회가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반동에 그네가 끼익 소리를 내며 살짝 흔들렸다. 갈 곳도 없어 온 곳이 고작 집 앞 놀이터라니, 누가 들어도 비웃음 거리가 될것이 분명해. 학교 애들만 안만나게 해주세요 속으로 바랬다.


“가출?”


그렇게 빌었는데 역시 신은 없나보다. 옆에 있던 빈 그네가 소리를 냄과 동시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살짝 기울여 옆을 바라보니 다행히도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아 다행이다, 반쪽 짜리 신은 있나봐. 아는 얼굴이 아님에 감사하며 다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생판 처음 보는 남한테 가정사를 말해야하는지, 무시가 답이겠거니.


“누구랑 다르게 까칠하네?”


알아 듣기 어려운 말을 하며 어딘가 모르게 나를 아는 듯 말하는 남자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이번엔 똑바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내가 자신을 보자 입안에 있던 막대 사탕을 굴리며 실룩 웃었다. 말간 낯. 이 근방에서는 처음 보는 낯. 내가 잘 안나가서 그런가, 어쩌면 고서아는 알지도 모를 얼굴이었다. 꽤 잘생겼으니 말이다.

가만히 뚫어져라 남자를 쳐다보고 있자 자신의 큰 두 손으로 눈을 제외 하고 얼굴을 가리더니 이내 그렇게 쳐다보면 좀 부끄러. 라는 개소리를 해댔다. 아 진짜 미친놈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네에서 일어났다. 한발 뗄 때마다 발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모래에 기분이 더욱 바닥을 쳤다.



“나랑 밥 먹을래?”
“...”
“고기 먹자.”



배고플거 아냐. 모래 사이로 푹푹 빠지는 발을 힘겹게 떼고 있는데 앞을 막으며 하는 말이 밥 먹자고. 상습적 납치범? 갑자기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납치 당하면 어떡하지, 몸이 굳어짐과 동시에 입술이 메말라간다. 애써 혀로 입술을 축이고 꽤 키가 큰 남자를 올려다봤다. 아 정정하면 째려본게 맞을 것이다.



“..그냥 가세요. 싫으니까.”
“왜? 고기 싫어해? 그럼 파스타?”



가지가지다. 아침으로서는 둘다 최악인데. 남자는 개구진 낯으로 실룩대는 반면 내 얼굴은 초상집 이었다. 자신보다 키도 크고 몸집도 큰 남자가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는 한적한 놀이터에서 가던 길을 막고 밥먹자고 하면 네 좋아요 하고 따라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응? 먹자.”


저 얼굴을 보면 몇명은 갈지도 모르지만, 난 죽어도 아니다. 내 몸이 주체를 못하고 조금씩 신호를 보낸다. 무섭다고 존나 무섭다고. 조금씩 떨리는 내 몸을 남자가 미간을 찌푸린채 내려다봤다. 여기서 빠져 나가는 법은 내가 이 모래 지옥에서 슬리퍼를 내팽겨치고 옆으로 줄행랑을 치는 것 뿐이려나. 아직까지도 심각한 낯으로 날 내려다 보고 있는 남자에 침을 크게 삼키고는 몸을 앞으로 내딛었다.


“아..!”


몸에 체중을 실음과 동시에 보기좋게 모래에 파묻힌 슬리퍼는 내 발을 버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자 눈을 꽉 감았다. 고기와 파스타 대신 모래를 처먹게 되네. 생각이 미치자 입술도 꾸욱 다물었다. 한치의 모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어허 조심 조심.”


원래라면 혼자 보기 좋게 고꾸라져야만 하거늘, 내 등 양쪽 날개뼈를 단단히 감싼 손 덕에 넘어져 다치지도 않았고 모래를 처먹지도 않았다. 이 어이없고도 황당한 상황에 눈만 껌뻑이니 정수리 위에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 구해줬네.”


맞는 말이긴 했다. 고꾸라져 얼굴 깨질뻔한걸 막아줬으니. 남자의 말에 아랫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는 밀착 되어있던 몸을 떨어트렸다. 나쁜 사람은, 아닌거 같기도, 남자의 말간 낯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구세요?”


그래 우선은 이게 먼저지.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한 내 얼굴을 보던 남자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통성명이 웃기나. 남자가 크게 웃으면 웃을 수록 내 미간은 그에 비례해 더욱 찌푸려졌다. 위험한 남자는 아니지만 이상한 남자.


“넌, 그럼 넌 이름이 뭔데?”


이와중에 역질문. 한치 앞을 알 수가 없는 놈이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역으로 질문 하는 남자를 올려다보다 그래, 먼저 물어본 놈이 을이지 을.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메말라진 입술을 열었다.


“고여주요.”


아침을 알리는 듯, 볕이 뜨겁게 얼굴을 들었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햇빛을 등지고 있던 남자가 내게서 햇빛을 완전히 가리고는 일그러져 있는 내 미간에 손을 뻗었다.



“이동혁.” 



남자는 자신을 이동혁이라 했다. 이동혁, 미간에 닿은 그 놈의 손은 뜨거웠다.




독사

※ 다시 한번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쓴 글 임을 알려드려요.





  일이 왜이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이동혁 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를 긍정의 뜻으로 받아 들였다. 나 또한 구태어 말을 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요앞 분식집에서 김밥 한줄이나 먹겠지, 놀이터를 벗어나기 전까지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였다.



 어디서 나타난건지 검은 세단이 놀이터 앞으로 부드럽게 정차했다. 몸을 돌려 피해가려던 내 어깨를 이동혁이 돌려 세우고는 뒷 자석 문을 열어주었다. 진짜 신종 납치 아냐? 또다시 엄습한 불안감에 주춤대자 이동혁은 콧방귀를 뀌더니 제 자켓 안쪽 주머니를 뒤져 반지르르한 명품 지갑을 꺼냈다.



“담보. 여기 돈이랑 카드 다 있거든?”
“...”
“못 믿겠으면 갖고 튀어도 돼.”



우리 아빠 지갑보다도 더 값 비싼 지갑을 손에 들고 있자니 아빠의 돈을 훔치려 지갑을 더듬대던 고서아의 모습이 떠올라 일순간 기분이 엿같아졌다. 괜히 짜증나서 이동혁을 보지도 않은채 품에 지갑을 다시 쥐어주고는 세단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은은한 놈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 맨날 웃어. 차 문을 쾅 닫았다. 문을 닫고 도리어 내가 놀랐다. 비싼 차인데 너무 험하게 다뤘나 싶어서, 고작 차 문 하나 닫은 것 뿐인데 쩔쩔 매는 내 모습이 나조차도 한심하기 그지 없었다.



“시티 백화점이요.”

“백화점이라뇨?”

“가출 한거 동네 방네 티 낼거야?”



내 잠옷 바람과 모래를 가득 머금은 슬리퍼를 턱으로 가리킨 이동혁에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지가나가는 꼬맹이가 봐도 내 꼴은 최악일 것이니, 남자의 목적지에 맞받아칠 말이 없었다. 


비싼 차는 역시 다른건지 부드럽게 미끄러지 듯 굴러가는 차 안에서 이동혁와과 나는 오고 가는 말이 없었다. 놈은 흥얼 거리며 핸드폰을 들었고, 나는 창문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고여주 지금 뭐하는 거냐. 풍경을 바라보다 그대로 눈을 감고 머리를 시트에 기댔다. 아, 나 머리 안감았는데 하며 바로 머리를 떼었지만.



“피곤하면 좀 자도 돼. 손가락 하나 안 건들일테니까.”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건지 한 손으로 타자를 치던 이동혁이 별안간 내게 말을 붙였다. 감았던 눈을 뜨지 않고 꼿꼿하게 허리를 피고 앉았다. 죽어도 안잔다는 뜻이었다. 이 뜻을 알아듣기라도 한건지 신경 쓰지 않는건지 이동혁은 다시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감각 없던 눈꺼풀이 스르륵 떠졌다. 몽롱한 정신에 정신을 다잡으려 눈을 몇번 깜빡이다가 기울어진 상체와 내 머리를 굳건히 받치고 있는 어깨에 상황 파악을 하려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 설마, 



“드디어 일어났네.”



가까이 들리는 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떼고 상체를 다잡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 할 틈도 없이 몸을 돌려 차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과 뜨끈한 햇빛에 잠시 제자리에 없던 정신이 본래 자리를 찾았다. 지금 그러니까 내가 만난지 많아야 30분 밖에 되지 않은 남자 어깨에 기대 처자버린거야? 앞으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먼저 건드린건 너다.”



내 어깨 비싼데. 놈은 장난스레 혀를 차며 등을 돌려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 잠을 설친게 시발이야 시발점.





  “고객님은 피부가 하얘서 이런 색도 잘 어울리시는데요?”



직원은 전신 거울 앞 내 앞에 값 비싼 원피스들을 하나 하나 대보며 내가 아닌 뒤에 다리를 꼰채 앉아있는 이동혁의 눈치를 보았다. 나한테는 땡전 한푼 없는게 어지간히 드러났다 보다. 고서아라면 환장을 했을 테지만 나는 원체 옷에는 관심이 없는터라 화려하기 그지 없는 이 원피스들이 아무 감흥 없었다.



“어때?”

“뭐가요?”

“옷들. 어떠냐고.”



이동혁은 턱을 괸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쳐다봤다. 거울로 마주친 놈의 두 눈은 잔잔했다. 필요 없다고 해야하는데 직원이 아부를 떨며 꺼내놓은 수십개의 원피스 더미가 보여 그럴 수도 없었다. 무심하기 그지 없는 눈빛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기 어려워 직원이 내게 보여준 형형색색의 원피스들을 지나쳐 가장 안쪽에 있었던 마네킹에 전시되어 있는 원피스들에 묻혀있던, 흰색 원피스를 꺼내들었다. 얼핏 색깔만 봤을때는 몰랐지만 엄마가 내게 준 것과 비슷했다. 



“그거?”

“...네.”



이동혁이 괴던 손을 내려놓고는 내게 걸어왔다. 내 손에서 원피스를 가져가 위 아래 훑어본 놈이 이번엔 원피스를 내 얼굴 옆에 대고 번갈아 바라봤다. 역시 나는 보눈 눈이 없는것인가, 놈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지만 자꾸만 시선이 사선으로 빗겨갔다. 


원피스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놈은 아무말 하지 않고 원피스를 카운터로 가져갔다.



“뒤에 저것들도.”



흰색 원피스만 사도 충분한데, 놈은 쌓여있는 원피스들을 쳐다 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새카만 카드 하나를 꺼내들었다. 진짜 미친건가, 대충 어림 짐작만 해도 몇백만원 아니 몇천만원? 그냥 필요 없다고 말해야겠다 싶어 카운터로 다가가니 이동혁이 점원에게서 텍이 떼어진 흰색 원피스를 받아와 내 앞에 내밀었다.



“입고 나와.”



또 놈의 입꼬리가 씰룩댔다.



 이미 결제한 원피스 임에도 혹 머리카락 한올 이라도 묻을까 조심 또 조심해서 입었다. 뒤에 지퍼가 있어 혼자 좀 낑낑 대느라 힘들었긴 했다. 땀이 다 날듯 더웠다. 어영 부영 지퍼까지 올리고는 피팅룸 밖으로 나오니 뒤로 수십개의 쇼핑백을 든 남자들 앞으로 이동혁이 팔짱을 낀채 서 있었다. 이동혁이 쭈뼛대며 걷는 내 발걸음에 뒤를 돌았다. 다시금 허공에 두 눈이 마주했다.



“잘 어울리네.”




한쪽 입꼬리를 올린채 잘 어울린다는 놈. 괜히 얼굴이 홧홧해져 시선을 또 피했다. 잘 어울려. 이게 나한테, 잘, 어울린다고. 부드러운 원피스 끝 자락만 움켜쥐었다. 사이즈가 안맞는 것도 아니었고 디자인이 마음에 안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동혁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어째서인지 한 없이 초라해보였다. 



“..죄송한데 진짜 이거 못 받을,”

“앉아봐.”



숨을 조여오는 듯해서 못 받겠다는 말을 잇기도 전에, 놈이 내게 앉아 보라며 소파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소파 끝자락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동혁이 돌연 무릎 한쪽을 굽히더니 어디서 또 사온건지 흰색 플랫 슈즈 하나를 꾀죄죄한 슬리퍼 옆에 놓았다. 떡하니 박혀 있는 명품 로고. 고서아가 가지고 싶어했던 슈즈였다. 


내가 신지 않고 보고만 있자, 놈의 손이 내 오쪽 발목을 감싸쥐었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너무 놀라 말릴 틈도 없이 놈은 더럽지도 않은지 내 발바닥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기까지 하더니 플랫 슈즈 한 쪽을 가져와 내 발에 신겨주었다. 슈즈는 작지도 크지도 않고 딱 맞았다. 



“제가,제가 할게요.”



남은 발목 한쪽을 그러쥐려는 놈을 막았다. 잠은 이미 다깼는데 정신이 몽롱해지는 듯했다. 이동혁은 손사레 치는 나를 올려다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굽혔던 무릎을 피고 일어섰다. 슈즈를 신기 위해 숙인 머리 위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마저 남은 슈즈까지 신고 일어서니 놈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아직도 관문이 남았단 말인가. 이 불편한 상황은 계속해서 나를 좀먹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이동혁과 최고급 해산물 코스 요리를 먹었는데 당연히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본인은 먹지는 않고 가만히 쳐다보는데 체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였다고.

잘 가. 그렇게 꾸역 꾸역 넘어가지 않는 밥을 속안으로 밀어내고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수십가지 쇼핑백들을 내 손에 쥐어준 놈은 차 문을 내리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받아 먹은게 있으니 고개를 까딱 숙였다. 딱딱하기는. 이동혁이 웃으며 창문을 다시 올렸다. 창문을 올리자마자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쇼핑백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직까지도 발목이 홧홧했다.


“여주야..!”


낑낑 대며 집 안으로 들어왔을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엄마? 5년전 돌연 없어져 버린 엄마였다. 엄마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현관에 벙져 있는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내 양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여주야 엄마야...”


진짜 엄마다. 5년 사이에 주름살이 늘고 귀와 목에 반짝이는 보석의 갖가지 장신구를 했지만 우리의, 나의 엄마였다.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올듯 코끝이 찡해졌다. 5년전 나를 버리고 도망친 엄마 였는데, 미움보다는 그리움에 사무쳤다.

내 어깨를 잡은 엄마 뒤로 탐탁치 않아보이는 얼굴의 아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너..어디 다녀오는거야?”


고서아가 내 옷차림과 백화점 쇼핑백들을 훑으며 콧김을 내뿜었다. 뭐가 그리 분한 것일까. 고서아의 말에 엄마도 그제사야 내 옷차림을 살폈다. 엄마가 아는 고여주는 고서아와는 달리 쇼핑을, 명품을 즐겨하지 않았으니.


“...너 설마 아빠 돈 훔쳤어?”


양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황당해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고서아의 개소리에 아빠의 얼굴이 터질듯 달아오르더니 이내 벌떡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내 뺨을 칠 것만 같았다.


“진짜 너,”
“훔친건 너잖아.”


고서아가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다시 입을 열다가 내 말에 막혀 들어갔다. 뭐? 대신 되묻는 말투가 돌아왔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고서아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모든 서러움과 분노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발악을 하는 것일지도.


“아빠 지갑에 손 댄것도 너고, 엄마가 나한테 준 흰색 원피스 훔쳐가서 망가트린 것도 너잖아.”
“...허?”
“나한테 뒤집어 씌우는거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


고서아는 내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전부 사실이니까, 전부 자기가 한 짓이니까. 아빠는 처음 듣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했으며 엄마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예상한 얼굴이었다. 주먹을 쥔 부들 거리는 고서아를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몇십년동안 네 발 밑에서 다 참아줬잖아. 다시 입을 열기도 전, 엄마가 부드럽게 내 어깨를 잡아 챘다.

여주야. 그리고 내 이름을 불렀다. 엄마가 없는 5년동안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내 이름. 오랜만의 엄마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 팔을 꼬집을 틈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엄마랑 가자.”


엄마는 이곳에 나를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 했다. 아빠와 고서아. 엄마와 고여주. 우리를 버렸던 엄마는 그 5년 동안 새로운 남자를 배우자로 맞이했다.





 “곧 동생이 올거야.”


상석에 앉아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를 썰던 김회장이 입을 여니 양 옆에 앉아 있던 김정우와 이동혁이 먹지 않고 깨작이던 포크질을 멈췄다. 동생? 미국에 있는 놈을 말하는것인가. 또라이의 귀환. 이동혁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얼굴에 인상을 찌푸렸다.


“재민이도 오고, 다른 동생도 올거다.”
“네?”
“아, 정우 너한테만 동생이겠구나. 동혁이랑 재민이랑 나이가 같으니.”


이동혁이 되물으니 김회장은 무릎에 놓아졌던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말을 덧붙였다. 나재민만으로 벅찬데 또 다른 동생이라니, 또 그새 여자를 들인건가. 입맛이 뚝 떨어져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이 사실을 혼란 스러워 하는 이동혁과는 달리 반대편에 있는 김정우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나이프를 움직였다. 김회장이 의자를 빼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니 이동혁이 기다렸다는 듯 등을 의자에 기대고 고고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김정우를 향해 팔짱을 꼈다.


“알고 있었나봐.”
“응.”


조각 낸 스테이크를 포크로 쿡 찍어 입에 넣은 김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이동혁의 입술이 뒤틀렸다. 저 낯이, 저 고고하기 그지 없는 얼굴에 열이 올랐다.

김정우와 이동혁 그리고 나재민. 셋은 모가 다른 형제다. 개중 장남은 김정우이고, 이동혁과 나재민은 나이가 같지만 이동혁의 모가 김회장의 두번째 부인이기 때문에 호적상 둘째가 되었다. 자연스레 나재민은 셋째고. 김회장의 성을 이어 받은건 김정우 뿐이다, 김회장이 정말 사랑한 이는 일찍 돌아간 김정우의 모밖에 없고. 이번에 올 부인 또한 허울 좋은 껍데기 일 뿐일것이다. 김회장은 외모를 보고, 그 부인은 김회장의 재력을 보고 좋아한 것일테니까.


“아버지가 말해줬나보네.”
“아니, 직접 만났어.”


김정우 또한 그 말을 하며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김회장과 똑같은 모습으로 입가를 닦는 김정우에 이동혁의 팔짱을 껴 보이지 않은 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매번 김정우는 이동혁을 한발 앞섰다. 자신이 한발 앞섰다 생각하고 돌아보면 김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항상, 이동혁은 놈의 뒤를 쫓았다.


“어떻게?”
“많이 궁금한가봐. 답지 않게 질문 하네.”


김정우가 입가를 닦고 옆에 물이 든 잔을 들며 피식 댔다. 한 모금 한 모금 넘기는 김정우와는 달리, 열이 오른 이동혁이 물컵을 들어 그대로 입으로 털어넣었다. 진짜 재수없는 놈. 개같은 놈. 좆같은 놈. 별의 별 수식어가 다 붙었다.


“걱정 마.”
“...”
“너한테 매달리는 고서아 보단 훨씬 나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김정우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이동혁이 고서아 라는 이름을 듣자 어젯밤, 카메라를 창문 밖으로 들이밀었던, 고여주의 얼굴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입술에 매달려 있는 물기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자신에게 매달렸던 고서아와의 키스는 그리 썩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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