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셨어요, 아가씨? 어?"

릴리 혼자 있는 줄 알았는지 모르는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로라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차에 남아있는 동안 다듬는 중이었는지 붉음 금발을 풀어 내린 채였다. 릴리는 그냥 빨리 이 남자를 보내고 마차에서 욕이나 해줄 생각으로 만만이어서 로라가 편한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행히 예의 없는 차림은 아니었다. 로라가 옅은 빛깔 눈을 불안한 듯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살폈다.

"저어……. 아가씨, 이쪽은?"

누가 나올 거란 생각을 못 하기라도 했는지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롱겟은 깜짝 놀랄 정도로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로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릴리나 필리엔 앞에서도 뻣뻣하던 모가지와 허리를 잘도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롱겟 파타주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이안드를 지킨 데안트레 백작의 삼남으로 제 의무를 다하는 중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로라 일레인이에요. 저는 그레이스 아가씨를 모시고 있어요."

"그렇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롱겟이 점잖은 척을 하는 걸 보며 릴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로라와 앞으로 교류가 있을 것도 아닌데 롱겟이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늘어놓는 건 또 뭐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건방지게 구는 것도 싫더니만 예의 차리는 모습을 봐도 좋아지지는 않는 게 참 희한한 남자였다. 잘은 몰라도 아마 재수 없는 모습은 필리엔이나 릴리 앞에서만 보이고 싶은가 보다. 남자의 복잡한 마음을 릴리가 이해할 날은 오늘도 요원해 보였다. 

로라는 롱겟의 내숭에 깜빡 속았는지 그냥 공손히 인사를 주고받은 뒤 돌려보내었다. 저 정도로 깜찍하게 속였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롱겟을 보내고 문을 닫을 때까지도 로라는 저 남자의 실체를 꿈에서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릴리의 표정이 썩어있었으므로 뭔가 있다는 눈치를 아예 못 챌 수는 없었다. 로라가 딱히 보이지도 않는 바깥을 힐끗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마침내 나온 로라의 적절한 질문에 릴리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네. 필리엔 주위에 왜 이리 유난 떠는 나이 든 남자들이 많은 거지? 온 세상이 나서서 나를 방해하려고 하는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온 세상이 아가씨를 괴롭히는 건 아니겠죠.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어휴~ 들어봐, 로라. 이게 내가 이상한 거야?"

릴리는 일어난 일에 약간의 양념을 쳐서 중간중간 이것저것 끼워 넣으며 정신없이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릴리의 과장된 감정 토로에 중간중간 조금 놀란 듯한 맞장구를 보여주긴 했지만 로라는 그러려니 하며 듣는 기색이었다. 아니면 그냥 느긋하게 하던 빗질을 계속하는 중이라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어두운 마차 안에서 붉은 기운이 덜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로라가 달래듯 차분하게 말했다.

"원래 중서부 남자들이 기가 세데요."

"필리엔은 안 그래! 리르먼 씨도 안 그랬단 말이야. 게다가 베르타네 동생도 거의 안 그랬잖아. 베르타네 파티에서 만난 남자들도 다들 활기찼지 저렇게 어이 없지는 않았다고."

"으음."

릴리는 씨근덕거렸고 로라는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필리엔은 원래 성격이 그런 데다 릴리를 좋아하고, 리르먼은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정이고 베르타의 제종제인 딜란도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로라가 옆에서 보기엔 릴리에게 예의를 차렸을 뿐이지 기가 약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물론 송별회니 뭐니에서 본 사람들도 주최인 베르타의 기분을 살폈고 공작과 친분이 있다는 이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는 간 보기를 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하지만 평생 로렌의 후계자로 동부에서만 살아온 릴리는 편하게 그런 점을 간과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주위에서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오늘처럼 제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보다도 황당하게 느끼곤 했다. 더군다나 그게 남자였으니 더 놀라셨겠지. 

물론 자기 아가씨는 정말로 중요한 인물이 맞았으므로 로라는 릴리가 무례에 익숙해지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시 전쟁터로 갈 생각에 심란한가 보죠."

"이래서 남자들에게 험한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거야. 성격이 거칠어지잖아."

릴리의 말에 로라가 킥킥 웃었다. 로라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어버리자 릴리가 쉽게 끌려갔다. 어차피 롱겟이 무례하다 느껴 화가 난 거지 롱겟이 릴리의 관심사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가씨는 무슨 쉰은 된 사람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몰라. 화나잖아. 얘기 하다 보니까 점점 더 괘씸하네."

로라는 빗느라 풀어 내린 제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넘기곤 빗과 다른 소지품을 보관하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머리 푸세요. 꺼낸 김에 제가 제대로 빗어드릴게요."

"너는?"

"전 다 했어요. 아가씨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릴리는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바로 넘어갔다. 릴리가 대충 머리를 푸는 사이에 빗을 닦아낸 로라가 능숙하게 릴리의 머리를 빗질해주며 익숙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 릴리의 신경을 돌리고 기분을 띄워주었다. 릴리는 금방 기분이 풀려서 다른 화제로 정신을 팔았다. 

"자기가 무슨 얼음 왕자야? 잘났어, 정말! 물론 대현자는 정말로 잘나긴 했지. 능력에 명성에 외모에 작위까지 갖췄잖아. 여자도 그러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근데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아닌가? 다시 얘기가 돌아간 것 같다. 로라는 릴리의 머리를 빗으며 그냥 맞장구만 쳤다. 투덜거리며 험담을 하고 있기는 해도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이었으므로 로라의 목적에 어긋나는 건 아니었다. 아마 아니겠지? 뭐가 됐든 저렇게 로라 앞에서 얘기하고 털어내는 게 훨씬 낫기는 했다.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로라도 생각했다. 

손은 착실하게 빗질을 하며 로라가 릴리의 얼굴을 흘깃거렸다.

"전 그런 거 못 느꼈는데요. 제 앞에선 그냥…… 친절하시던걸요?"

"그치만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니까. 그 냉정한 남자가 친절이라니 말도 안 돼."

"하지만 정말이에요."

릴리가 홱 돌아보는 바람에 안면에 빗질을 할 뻔한 로라가 놀라 손을 거두었다. 릴리는 정성스럽게 손질해 관리한 긴 머리를 늘어트린 채 눈에 힘을 주고 로라를 보았다. 상대가 로라만 아니었어도 노려본다고 표현해 마땅한 눈빛이었다. 릴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내 앞에서 그 남자 편드는 거야?"

"제가 무슨 편을 들어요. 게다가 다른 편도 아니잖아요."

그렇기는 했다. 릴리는 눈에 힘을 풀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래. 아름다우신 공작 각하께 편애 받는다니 누구는 좋겠네."

"편애라뇨."

아니라는 듯 말하면서 로라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적어도 누군가는 기분이 좋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만약 로라에게까지 태도가 나빴으면 내일 아침까지 험담이 이어졌을 테니 화제가 된 남자들에게도 다행이었다. 이런 걸 신경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썩 남성스럽지 못한 중서부 남자들도 로라에겐 표면적으로라도 친절했다. 공으로 과를 덮어 아주 약간의 면죄를 해줄 수는 있겠다. 릴리가 괜히 뭔가 있는 사람처럼 후후 웃으며 말했다. 

"중서부에 왔더니 인기가 썩 많구나. 아무래도 중서부가 로라 너랑 잘 맞나 본데?"

"어휴,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고개나 똑바로 하세요."

릴리가 괜히 로라 쪽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로라를 깜짝 놀라게 한 뒤에 빗질하기 편하도록 다시 자세를 고쳤다. 마차 벽을 바라보며 릴리가 입을 열었다.

"아까 한 말 농담은 아니야. 중서부도 나쁘진 않잖아."

로라는 이게 순수한 농담의 연장인지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릴리의 안색을 살폈다. 로라 쪽을 향해 있지 않아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야 언제나 아가씨 곁에 있을 테니 아가씨께서 결정하실 일인 걸요. 아가씨가 계신 곳이 제가 있을 곳이니까요."

로라는 릴리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았다. 하나 뿐인 후계자가 태생도 변변찮은 남자 때문에 로렌을 떠날 생각마저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로렌의 저택이 다 뒤집어질 일이지만, 로라는 그래도 제 아가씨의 선택이 우선이니까. 한동안 아무런 말 소리 없이 잘 관리해 길고 탐스러운 금발을 빗어 내리는 손만이 부산했다.

"그래. 고마워."

대화가 이어진다기엔 지나치게 긴 침묵 끝에 나온 릴리의 말에 로라가 빙긋 웃었지만 정작 릴리는 꿋꿋하게 마차 벽만 바라보았다. 약한 모습은 거기까지만 보이겠다는 거다. 로라는 그저 릴리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걸로 마음을 대신했다.

"별말씀을요."




의외로 사막은 릴리가 생각하던 것처럼 모래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사막에만 산다는 낯선 생물체 같은 것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부풀었던 기대와 다르게 사막 곁을 지나는 건 의외로 밍밍한 경험이었다는 뜻이다. 

중서부에서 중부로 가는 길에 지나게 된 서부대사막의 언저리는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다. 무장한 병사들이 바글거리니 괴이한 짐승이 달려들지도 않았고 나름대로 길이 닦여 있어서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늪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다르고 날이 내내 맑고 덥기는 했지만 마차 안에 있는 릴리로선 큰 차이를 느끼지도 못했다. 게다가 기후가 좀 다르기는 해도 중서부의 여름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특별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얘기다!

"여긴 정말 아무 것도 없네요."

로라가 밋밋한 지평선을 보며 이렇게 말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릴리는 쌓여있던 불만을 냉큼 털어놓았다.

"그러게. 신비로운 모래언덕과 신기한 생물들, 그리고 모험과 환상이 가득한 땅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오아시스에서 신비로운 가르침을 주는 정령과도 만나고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고. 이렇게 지루한 마차 여행이 계속될 줄은 몰랐어. 박진감 넘치는 모래폭풍 같은 것도 맞이하고 추격전이나 야습도 일어나고 사막은 다 그럴 줄 알았는데."

"전 그 정도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조금 과한 발언에 로라가 슬그머니 발을 뺐다. 릴리가 말하는 건 이야기 속에서나 재밌지 실제 상황이라면 좋은 추억이나 재밌는 경험 보다는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에 속했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은 것이다.

로라가 중서부와 서부 그리고 중부라는 세 지역이 교차하는 황야를 바라보았다. 로라는 자신의 마음이 술렁인다고 생각했다. 릴리의 발랄한 상상과는 좀 다른 이유였다. 세 개의 다른 지역이 교차하는 이곳에 서니 어쩐지 그들의 앞날 또한 어딘가 달라질 것만 같은 묘한 예감이 들었던 탓이다. 

그건 무척 쓸쓸해질 것 같은 이상한 불안감과 아주 높은 곳으로 홀로 걸어갈 것 같은 야릇한 기대감처럼도 느껴졌다. 마른 바람이 황야 위를 떠돌며 노래했다. 로라는 옷깃을 여몄다. 석양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도 해가 지는구나……."

옆에서 들려오는 릴리의 기운이 다 빠지는 목소리에 로라가 소리 없이 웃었다. 멜랑꼴리한 감상에 빠지기엔 챙겨야 할 아가씨가 있는 삶은 퍽 바빴다.

"들어가요, 아가씨, 밤에는 쌀쌀하잖아요. 감기라도 걸리면 더 재미 없으실 걸요."

릴리는 꿍얼거리며 마차로 향했다. 다음날 그들은 중부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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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를 돌본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돌보고 있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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