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을 제외한 모든 기업명, 인명은 모두 허구입니다. 해당 도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문화 등 실제와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 미드 '다이너스티'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BY. 꾹꾹님



#1.


뭐 통상적인 위네트카의 사교파티였으니 저택에 도착한 시간은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사용인들도 전부 퇴근하지 않은 상태. 술에 취하지도 않은 지민은 운전기사에게 고생했다며 팁을 주고는 퇴근을 명했다. 저택의 정문을 열어재끼자 하필이면 필립의 약혼녀 제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지민은 그녀의 눈을 피하고는 바로 2층 계단으로 향하는데 그녀의 카랑한 목소리가 높은 천장까지 울렸다.


"이번 파티는 재미가 없었나봐?"

"뭐?"

"술에 취하지도 않고~ 이 시간에 집에 돌아오다니. 맘에 드는 남자가 없었던건가?"

"...날 언제 봤다고 이런 저런 추측성 발언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버지 장난감이면 그냥 장난감처럼 조용히 지내."

"곧 새엄마가 될 사람인데 그런 말을 하면 쓰나."

"지랄하네."


지민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계단을 올랐다. 스쳐지나가며 본 그녀의 표정이 썩어있었는데 그딴 것 알바가 아니었다. 그깟 재혼. 어차피 친엄마와 이혼한 후에 수없이 이뤄진 재혼 중 하나일 뿐.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도 금세 싫증을 내고 이혼할 것이 뻔했다. 뭐 약혼녀'들'이나 새엄마'들'은 이득을 보았겠지. 엄청난 위자료를 받고 이혼하니까. 이번에도 그런 여자 중 하나일거야. 지민은 머리를 대충 털어버리고는 방으로 향했다. 바닥에 대충 수트를 벗어버리고 셔츠만 걸친 채 침대로 뛰어들어버렸다. 좀만 쉬었다가 씻어야지. 지민은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한 몇분을 그렇게 있다가 다시 눈을 번쩍 뜬 지민은 낡은 책상 위에 다가갔다. 책상 위에 놓인 액자 하나. 지민은 그 액자를 들어서 한참을 바라봤다. 액자 안에 든 빛바랜 사진에는 헨리와 지민의 어릴 때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아이 둘을 세워두고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엄마가 있었다. 필립은 어딨는지 모르겠지만 지민이 기억하는 한 이 사진이 유일하게 셋이 찍은 사진이었다. 

지민은 액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욕실로 향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습기에 괜히 마음마저 울적해지는 것은 착각일까. 지민이 고작 4살이었을 무렵. 엄마와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 형인 헨리에게는 어머니의 기억이 좀 남아있을지는 몰라도 지민에겐 아니었다. 엄마의 따뜻함따위는 모르고 자랐다. 지민이 성장하며 아버지 필립은 재혼을 여러번 했다. 처음엔 그런 새엄마들에게 키워지며 즐거웠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 자주 바뀌다보니 지민도 결국 마음을 닫아버렸다. 아직 생각이 다 크지도 못했던 10대에 필립이 데려오는 약혼녀들이 가소로워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금방 떠나버릴 사람이니까. 

내게 하는 모든 친절은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행동의 일환일 뿐. 혼자 대단하게 성장해야만 했다. 이 지랄맞은 성격에 기여한 것이 아버지의 무신경한 태도였을지도. 지민은 뜨거운 물을 뿜어내는 샤워기를 끄고 샤워가운을 걸쳤다. 드디어 침대 입성. 그날 밤 지민은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의 따스함을 느끼는 꿈을 꿨다. 



#2.


아침식사 시간에 맞게 일어나 수트를 차려 입었다. 어제의 꿈 때문인지 지민은 눈이 조금 부어있었다. 꿈에서만 운 것이었는데 실제로 눈물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지민은 조금만 울어도 눈이 빨갛게 부어버려 누구나 그가 울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 다이닝룸에 들어가니 이미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신선한 과일과 샌드위치. 지민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으며 포도 한알을 따 입에 넣었다. 그렇게 제인이 함께하는 어색한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한참을 조용하던 필립이 먼저 입을 열었다.


"COO자리는... 제인에게 주겠다."


지민의 손에 들려있던 실버웨어가 그대로 손을 떠났고, 바로 아래 있던 고급진 접시 위에 떨어졌다. 어떻게 잘 맞았는지 접시가 쨍 소리를 재며 두동강이 나버렸다. 지민은 시선을 필립에게 고정한 채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폭탄 발언에 헨리도 놀랐는지 아버지... 라며 작게 탄식했다. 제인은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엄청나게 기쁜지 웃음을 숨기지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겨우 세레니테의 마케팅팀 말단 직원이었던 그녀가 COO자리까지 한번에 승진 한 것에 기쁜 것인지, 얄미웠던 지민을 이긴 것이 기뻤던 것인지. 지민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여전히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립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지민이 그런 반응을 보이든 말든 평온한 모습으로 아침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민은 충격이 심했는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가버렸다.


"아버지. 지민에게 너무 가혹한 것 같은데요."

"...난 제인을 정말 사랑해. 그동안의 스쳐지나간 여자들과는 다르지. 이 사람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너희들이 가족으로 부디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지민이 제인에게 꽤 심한 태도를 보였더구나. 그런 인성을 가진 지민이 어떻게 몇천명의 직원들을 책임지는 COO자리에 오를 수 있겠니."

"그래도요... 하. 뭐,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지민은 COO자리를 위해서..."

"그만. 그만 됐다. 그나저나 헨리. 언제 떠날거냐?"

"이젠 저보고 나가라는 말씀이신가요?"

"우리의 약혼식이 끝나면 바로 가는거냐? 그렇다면 결혼도 바로 진행해야하니까 말야."

"...아직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냥 부르셨으니 집에서 얹혀지내는 것 뿐이죠. 약혼식은 언제인데요?"

"제인?"

"다음주 토요일이요."


헨리는 제인의 말을 듣고는 별 반응을 하지 않고 다시 아침식사에 집중했다. 신나게 약혼식에 대해 보고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제인은 헨리의 표정을 보고는 기분이라도 나빴는지 눈알을 살짝 굴리다가 자신의 접시만 바라봤다. 이 집안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거야. 제인의 생각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식사를 멀리서 지켜보던 집사 리처드가 살짝 웃음을 지었다.



#3.

 

속에 들어간 아침식사가 부대끼는 것 같았다. 지민은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을 해왔는지... 지민의 눈엔 생리적으로 발생한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있었다. 서러움이 몰려들었다. 어릴때부터 이 거지같은 집에서 온갖 교육을 받아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런 교육을 시켰다는 것 자체가 당연히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기 위함 아니었나. 지민은 배신감이 컸다. 이 나이를 먹을 때 까지 유일한 목표는 세레니테였다. 나만큼 회사에 애사심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해! 지민은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메슥거려 변기에 얼굴을 쳐박고 있었다.


마침 지민이 걱정되었던 헨리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올라왔다. 소심한 노크소리 이후 방문을 열어보더니 안에서 들려오는 구토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왔다. 


"너 괜찮아?"

"...형이라면 괜찮겠어?"

"나도 놀랐어. 어떻게 그러실수가 있지."

"...내가 지금까지 한건 뭐야."

"그 여자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네가 어제 한 이야기? 그것도 다 알고 계시더라. 약혼식도 다음주 토요일에 한대. 아버지는 완전히 제인한테 빠졌어."

"그년이 일러바친거겠지. 그리고 뭐? 다음주 토요일? 그렇게 빨리? 아니 부자 티나는 약혼식을 하려는게 아닌건가? 왜 이렇게 급하지? 설마..."

"임신? 그건 아닐걸. 와인도 아무렇지 않게 마시던데 뭐."

"하아... 모르겠다. 가족에게 배신당할 줄이야 생각도 못했어."

"...일단 몸 추스르고 아버지랑 얘기 나눠봐."

"고마워 형."


헨리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지민은 변기 물을 시원하게 내려버렸다. 내가 이렇게 혼란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야. 감히... 감히 내게 이런 모욕감과 충격을 줘? 그래도 아버지는 가족이라고 제인이라는 여자가 미워질 수 밖에 없었다. 거의 처음 얘기를 나눠보는 거였는데 그렇게 내 성적취향 같은걸 비꼬는 말을 꺼낸건 제인이야. 하, 어이가 없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거야? 지민은 이를 우득 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글로 입안을 헹궈내고는 휴대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지민이에요."

[지민! 오랜만이에요. 무슨일이시죠?]

"저희 아버지 약혼 파티. 진행하고 있는 업체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제가 파티 아이디어 하나는 잘 내잖아요?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정말... 가족 사랑이 대단하세요. 음... 아마 제가 들은게 맞다면....]

.

.

.

"고마워요. 언제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거 알죠? 다음에 제 파티는 당신에게 맡길게요. 잘 부탁해요."

[어머, 곧 약혼하시나요? 세레니테엔 좋은 일만 있네요! 꼭 불러주세요.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지민.]

"고마워요. 곧 연락할게요."


지민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운전기사를 호출했다. 곧바로 도착한 검은 세단의 뒷좌석에 앉은 지민은 열심히 전화를 하기에 바빴다. 지민이 도착한 곳은 시카고 시내의 한 레스토랑. 지민이 도착하자 매니저가 나와 별실로 그를 안내했다. 방금 예약한 듯 한데도 이미 테이블 세팅까지 마쳐진 상태였다. 지민은 매니저를 향해 웃어보이며 의자에 착석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별실에 들어온 손님은 리아였다. 리아는 오자마자 불만을 뱉어냈다.


"넌 무슨 당일에 약속을 잡아? 내가 그렇게 한가해?"

"낮엔 한가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아니, 무슨일인데?"

"전부 얘기하자면 너무 길어지고. 일단 뭐 마실래?"

"마가리타. 음식은 네가 원하는 걸로. 난 다이어트 중이라."

"곧 패션위크지?"


지민은 서버에게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는 먼저 나온 와인을 들이켰다. 지민이 무슨 얘기를 꺼낼까 긴장하고 있던 리아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입에 머금은 술을 뿜어버릴 뻔 했다.


"미쳤어?"

"진심이야."

"아니... 약혼이라니. 우리 오빠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소리야?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거야? 내가 알기로 둘은 파티에서 두번 만난게 끝인데? 어떻게 이야기가..."

"아, 네 오빠는 몰라."

"뭐? 진심 미쳤니 너."

"네 오빠. 원하는게 세레니테 아냐? 나랑 약혼하면 세레니테를 먹기 더 쉬워질텐데?"

"네가 세레니테를 포기할 리 없어.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나 알지? 언제나 화제의 중심은 나야.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하든, 몇번의 약혼을 하든 카메라 세례를 제일 많이 받는건 나잖아. 그런 내가 지금 COO자리에서도 사랑에 미친 아버지와 못된 여자 하나때문에 밀려났어. 이게 무슨 추태야? 아버지가 날 배신했다면 내가 돌려줄 것도 배신이야. 가족을 배신하면 그가 세운 엠파이어도 무너질 수 있다는걸 보여주겠어."

"...네가 가지지 못하면 없애버리겠다는거야? 무슨 또라이같은 소리야 이게."

"리아. 그냥... 받아들여. 내가 한다고 하면 무조건 하는거 알지."

"말도 안나온다. 참나...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알아서 해. 난 몰라. 발 뺄거야."

"좋아. 그대신 약혼 파티는 도와줘."

"미쳤냐!!! 발 뺀다고 방금 얘기했잖아!"


지민은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리아도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이 미친 소리에 놀라 마가리타 한잔을 전부 마셔버렸다. 박지민 얘는 진짜 미친거야. 시카고에 얘보다 또라이가 있음 나와보라고 해. 오히려 리아도 웃음이 터져버렸다. 메인요리가 나오자 둘은 세세한 약혼파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발을 뺀다던 리아도 파티 얘기로 넘어가자 그 누구보다 진지한 모습이었다. 약혼식 의상은 맡겨만두라는 얘기까지... 지민은 리아에게 역시 넌 내 절친이라며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정작, 약혼식의 주인공이 될 태형은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4.


지민과 리아의 비밀회담이 이뤄진지 며칠 후, 한 가십지 표지에 기사가 떴다. 


'세레니테와 아웃스캔드의 결합?'


시카고의 고층 건물 중 하나에 아웃스탠드가 있었다. 거의 최상층 전망이 좋은 회의실에서는 꽤나 진지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매년 벌어지는 신년보고. 직원들은 온통 긴장한 상태였고, CEO인 태형은 가차없이 질책하기도 하고 좋은 일은 아낌없이 칭찬도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중요한 회의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회의 분위기를 깨듯이 문을 거칠게 열고 들이닥친 태형의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오자 태형은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일인데요?"

"회장님. 가십지에 기사가 떴습니다."

"고작 기사로 신년보고를 망쳐요?"

"사실..."


꽤 언짢은 표정이던 태형은 비서가 귓속말을 끝내자 눈을 크게 뜨고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올해의 신년보고는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태형이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모두가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태형은 나머지 보고는 서면으로 올리라는 얘기만 남기고는 바쁜 걸음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버렸다. 직원들은 돌발 상황에도 침착하게... 더이상 혼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회의장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태형은 회의장을 빠져나오면서 비서에게 얘기해 차를 대기시켰다. 업무용 차량이 아닌 태형의 개인 차량이었다. 잘빠진 애스턴마틴에 탑승한 태형은 화가 난 표정으로 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이시간에 무슨 일...]

"박지민 집 어디야?"

[어?]

"박지민. 아니, 리아 너도 알고 있던거야? 내가... 내가 박지민하고 약혼을 한다고?"

[아... 나...나는 모르는 일이야.]

"너 거짓말 못하잖아. 왜 알고 있으면서 말도 안했어? 아니 박지민 걔는 미친거야?"

[나도 몰라 오빠... 둘이서 얘기해 봐. 나 오픈준비 해야해. 끊어.]

"리아. 책임을 묻지는 않을테니 박지민 집주소나 보내."


대답없이 뚝- 매정하게 끊어진 전화에 태형은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내 약혼식을 가십지 기사로 알아야해? 가십지에서 퍼진 기사는 순식간에 메이저 언론사에도 들어갔다. 무슨 입장을 표명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얘기가 퍼져버렸고 먹잇감을 물어버린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은 금방이라도 아웃스탠드를 포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전에... 빠져나가야한다. 마침 띵- 소리를 내며 주소 하나가 왔다. 태형은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찍고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애스턴마틴의 육중한 엔진음이 시카고 시내에 울렸다.


고풍스러운 저택. 넓은 정원을 지나 분수대 앞에 차를 세운 태형은 사용인이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남의 집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갈 수도 없으니 일단 차를 세워두고 현관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집에 있는게 맞겠지? 고민하다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내집인데 그쪽은 누구?"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태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오후에 아주 여유롭게 승마복을 차려입고 있는 지민이 있었다. 하얀 가죽바지가 허벅지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만 보였다. 태형은 자기도 모르게 보고있던 시선을 거두고 지민의 눈을 쳐다봤다. 지민은 자신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 하며 눈이 커졌다.


"내 약혼자잖아?"

"...지민. 내가 널 두번밖에 못본 것 같은데 맞지?"

"응 그렇지? 그런데 왜 반말이야?"

"너도 하고 있잖아. 그래서. 뭔데 당사자 없이 약혼 얘기가 진행된거지? 난 그걸 왜 언론을 통해서 알아야 하고?"

"아... 먼저 말하고 했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사실 하나도 안미안하지만. 솔직히 태형. 당신에게 유리한 이야기 아닌가? 세레니테를 먹고 싶다며?"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인수합병 할 생각은...!"


"일단 진정하고. 들어와. 손님을 현관에 세워둘 순 없지."


지민은 먼저 앞서서 현관을 열었다. 지민의 저택에 처음 방문한 태형은 자기도 모르게 여기저기를 둘러보게 됐다. 대를 이어 부잣집이었던 지민의 저택은 어마무시했다. 격이 다른 장식들이 많았다. 온갖 자재들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걸린 유명한 그림들이나 가족들의 초상화까지. 여느 귀족의 저택이라고 해도 믿을 만 했다. 태형의 집은 본인 취향이 더 들어간 곳이라 훨씬 모던하고 현대적인 저택이었기 때문에 이런 고풍스러운 저택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민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큰 소파와 피아노, 벽난로가 있는 리빙룸이었다. 태형이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 언제 나타났는지 나이가 있어보이는 집사가 차를 내어왔다. 지민은 상석에 편히 앉아 태형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

"... 난 당신과 약혼하겠다고 한 적 없어. 왜 당사자도 없이 맘대로 일을 벌리는거야? 난 회의하다 그 소식을 들어서... 직원들 앞에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솔직해지자고. 형. 나랑 약혼하면 세레니테를 인수합병하는데 이득인건 사실이잖아?"

"내가 알기로 너는 세레니테를 엄청나게 아끼지 않나? 그런 네가 생판 남인 나한테 세레니테를 갖다 바치는건데? 누가봐도 수상하잖아."

"난... 우리 가족에게 배신당했어. 그동안의 내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고. 아버지와 그 옆에 붙은 여자의 손에 내 세레니테가 망가질 바엔 그나마 세레니테에 대한 열정이 있는 당신에게 가는게 나아. 난 내 소중한 것이 망가지는걸 보고싶지 않아. 그래서 이런 방법을 생각한거야. 아웃스탠드도 결국 시카고를 떠받치고 있는 소중한 기업이잖아. 우리 둘이서 힘을 합치면 우리의 시카고를 더욱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 않겠어? 세레니테... 나한텐 그만큼 소중하니까."

"...그리고 약혼한다고 해서 세레니테가 내 손에 들어온다는 보장은 없어."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거 아냐? 뭐라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하지 않겠어? 난 전혀 나쁘지 않은 딜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세레니테를 먹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최대한 많은 루트를 열어놔야지."

"너 진짜 또라이구나?"

"익히 들어왔던 말이야. 그래서 받아들일거야 말거야. 아, 참고로 우리 약혼은 다음주 토요일이야."


태형은 생각이 많아졌다. 지민과의 약혼? 뭐 그다지 손해는 아니다. 지민의 얼굴과 몸은 제 취향이었고, 승마복을 입었을 때 본 허벅지가 자꾸 잊혀지지가 않는 것은 인정한다. 거기다 회사를 이렇게까지 아끼는 모습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기 때문에 그의 제안에 망설여지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자신의 안위가 아닌 회사의 직원들을 생각하는거니까. 약혼을 하고 더 진행되서 정말 결혼을 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세레니테를 합병하여 이혼하는 방법도 있었다. 지민과 이해관계가 잘 맞는다면... 혹시라도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일테니까. 태형은 여러 수를 생각해보다가 결국 지민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네 아버지 약혼식이 다음주 토요일 아냐?"

"맞아! 그래서 그때 하는거야. 눈치가 빠르구나?"

"진짜 미친게 분명해."

"고마워."


지민은 태형이 제안을 받아들여 매우 기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숨은 진짜 뜻을 태형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지민은 순수하게 기뻤다. 나의 계획에 대물이 걸려든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제서야 지민은 태블릿을 꺼내 약혼파티 계획에 대해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미 이벤트 업체와 컨택이 되어 세세한 내용을 짜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리아가 가담했는지 의상 관련은 컨펌이 끝난지 오래였다. 태형은 뒷통수가 얼얼한 느낌이었지만, 세레니테를 인수합병하기 위한 인내라고 생각하며 참기 시작했다. 지민은 생각보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형을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얼굴도 괜찮고 좋은 기업의 CEO니까 결혼까지 해도 어쩌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지민은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와 고개를 휘저었다. 갑자기 완전히 마음을 연 태형의 부드러운 표정이나 빤히 바라보는 눈 같은 것에 마음이 이상했다. 그리고 태형 역시도 진심으로 세레니테를 합병하기 위해 지민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본인에게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야만 했다. 


"어디 한번 제대로 준비해봐. 내가 도울게 있다면 말하고. 네 아버지보다 대단한 약혼식을 열어야하지 않겠어? 모든 손님을 다 뺏어와야 할테니까."


태형의 말에 지민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짐른은 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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