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워.


오늘도 황현진의 주둥이에선 어김없이 귀엽단 말이 터져 나왔다. 정인은 픽 콧방귀를 불었다. 아아, 네- 어련하시겠어요. 지나가는 도토리도 귀여우실 황현진께서.


"정인, 안녕."


그래. 이 도토리는 좀 귀엽긴 하다. 인정. 아니, 이게 아닌데. 정인은 저도 몰래 손을 뻗어 도토리의 제멋대로 잘린 앞머리칼을 쓰다듬다 흠칫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진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던 도토리는 이내 민호 형이 기다린다며 쫑쫑 뛰어가 버린다. 멀리 사라지는 동글동글한 뒤통수에 대고 쐐기를 박는 황씨.


"아, 용복이 귀여워."


너 대체 세상에 귀엽지 않은 게 있기는 하니. 정인은 결국 폭발하고 만다.


"세상 모든 게 다 귀여워서 참 좋으시겠어요."

"엉?"

"아주 행복하고 좋겠어."

"어어, 뭐…. 근데 갑자기 왜 그래?"

"됐고, 연락하지 마 나한테."


그리곤 저쪽을 향해 냅다 뛰었다. 뒤에서 멍청이 황현진의 목소리가 저를 애타게 불러댔지만 알 게 뭐야. 주둥이만 퉁퉁한 게. 뛰기도 잘 뛰면서 왜 안 쫓아오냐고.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안 든다.



황현진에게 고백을 받은 건 반년이 조금 안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죽죽 쏟아지던 팔월의 어느 날. 탱크보이 하나씩 물고 나란히 서서 쭉쭉 빠는데 느작없이 현진의 귀여워가 터졌다.


'정인이 귀여워.'


귀엽다는 말 싫어하지만 그날은 더웠고 귀찮았고…, 익숙했고. 그냥 여러 이유로 가만히 있었다. 현진은 이어 제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흩뜨려놨다. 아, 땀 흘려서 젖었는데 더럽지도 않나 저 형은. 고개를 삐뚤어 손길을 거부했다. 이어진 현진의 말만 아니었다면 평소같이 발걸음을 나란히 걷다가 헤어졌을 터였다.


'좋아해.'

'…네?'

'귀여워서 좋아.'


귀엽다는 수천 번 들었지만 좋다는 건 처음이었다. 정인은 조금 당황했다. 저게 무슨 뜻이지 열심히 짱구를 굴려도 너무 모호한 말이다.


'정인아. 우리 사귈까?'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끝내는 그냥 넘겼을 텐데. 정인은 물고 있던 쭈쭈바를 툭 떨어뜨렸다. 현진은 저에게서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정인은 그냥, 도망쳐버렸다. 현진은 그때도 쫓아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그대로 있었다.


고민을 하다가 밤을 꼴딱 새우고 퀭한 몰골로 학교에 출석 도장을 찍은 것이 무색할 만큼, 그 자리에 그대로.


'어, 정인이 왔어?'


모든 것이 제자리.


'오늘도 귀엽네.'


그리고 이 겨울이 왔다.


황현진은 여전히 귀여워 밖에 모르는 바보였고, 세상에 귀여운 게 너무 많았다. 자기 집 까미도 귀엽고, 지나가는 고양이도 귀엽고, 동그란 돈까스도 귀엽고, …과 동기 도토리도 귀엽고. 그래.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아. 짜증 나게. 그러니까, 양정인의 불만은 그거였다. 황현진의 세상에 귀여운 게 너무 많다는 것.


한참을 달리다가 아무 데나 멈춰 섰다. 찬 공기가 속을 괴롭게 긁어 팠다. 타이밍 좋게 벨소리가 울린다. 정인은 잠시 더 숨을 고른 후에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에 뜨는 세글자는 현진 형도 아닌 황현진이다. 정인은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안 받아.


"정인아, 왜 화났어."


황현진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상하다? 안 받았는데. 정인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까만 화면. 전화를 받은 게 아니다.


"정인아."


정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뒤다. 뒤에서 그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안 쫓아왔는데 언제 따라왔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일단 터질 것 같은 숨에 섞어 하고픈 말을 해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못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아무한테나 귀엽다고 하지 마! 나 좋다며? 너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한테나 귀엽다고 하냐?!"


빽-.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만큼이나 터질 것 같은 새빨간 얼굴. 현진은 그 얼굴을 보며 잠시 고장이 났다. 당최 저게 무슨 소린지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자, 일단 아무한테나 귀엽다고 하지 말래. 왜? 자길 좋아하니까. 그리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한테나 귀엽다 남발한다며 소리를 빽. 질렀어. 황현진은 입꼬리가 들썩이는 걸 참지도 않았다. 그 퉁퉁한 주둥이를 자꾸 움찔거리더니 와하학 웃어버리는 것이다. 아, 양정인 진짜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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