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점심시간에 급식실에서 있던 일을 묻는다면 꽤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다.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숙적, 주연 자리를 두고 일어난 알력 다툼, 모종의 연유로 벌어진 사랑싸움. 다만, 사랑싸움의 청 샅바와 홍 샅바는 차고운과 연보라가 아닐 뿐이었다. 이미 졸업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 부장 선배의 존재가 구전 설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차가운 년, 미친년이네.”


 친구들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둔 연보라를 에워싸고, 그 어깨에 손을 올려 공감을 표했다.


 어깨에 국물이 쏟아지자마자, 다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재킷의 어깨 부분을 물로 헹구어 낸 연보라는 급식실로 돌아왔고, 분기탱천한 연보라의 모습에 싸움을 직감한 몇몇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자리로 돌아온 연보라는 좌우를 둘러보며 차고운을 찾았는데, 그 곱고 뻔뻔한 낯짝은 급식실 어디에도 없었다. 차고운과 밥을 같이 먹는 친구 셋만 주변에서 쭈뼛거리며 밥을 먹고 있었는데, 연보라가 다가가자 한 명이 자진해서 말을 했다.


 추운 줄도 모르고, 재킷을 손에 쥔 채 한달음에 2학년 9반 교실로 찾아간 연보라는 텅 빈 교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 분노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발마저 한 번 구른 연보라가 씩씩대며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사물함에 넣어둔 체육복 상의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는 것과 이제껏 쥐고 다닌 재킷을 ‘탁!’하고 털어 의자 등받이에 거는 일이었다. 그리고 책상 위로 엎어져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연보라를 친구들이 일으켜 세웠다.


 “또리 오늘 연극 연습 아니야?”

 “어? 맞네. 야, 오늘 가서 그년 뺨을 갈겨.”


 연보라의 기분을 풀어주려 다소 과격하게 말하는 친구를 올려다보는 연보라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내가 때리면 걔 날아갈걸?”

 “이 와중에 생각해주고요?”


 키득거리며 연보라의 어깨부터 목까지 어루만져준 친구들을 두고, 양선우는 칫솔을 손에 쥔 채 다가왔다.


 “양치질이나 하자. 세면대 막히기 전에.”


 이제 생각났다는 듯 저마다 사물함에서 좋아하는 치약을 짜서 모인 친구들은 화장실로 향하며 칫솔 위의 치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흔들거렸다.


 “걔는 얼굴만 예쁘지.”

 “연극이 언니도 걔 성격에 질렸을걸?”

 “연극이 언니 만인의 연인이었는데….”


 옛 기억을 더듬듯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의 푸른 하늘을 보며 깔깔거리던 아이들은 줄을 길게 늘어선 화장실 앞에 서서 망설이다 방향을 틀었다. 아직은 추워서 외부의 수돗가는 인기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네 사람은 빠르게 걸어 건물을 빠져나왔고, 응달에 검게 고인 물을 흘금거리며 수돗가로 향했다. 같은 생각을 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비어있는 곳에서 아이들은 수도가 얼지 않았기를 빌며 수도꼭지를 돌렸고, 처음에는 팍팍 하고 튀어나오는 물을 예상했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가 성큼 다가섰다.


 “근데 그거 진짜야?”

 “뭐?”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칫솔만 움직이는 연보라의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은 양선우를 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연극이 언니랑 차가운 년. 진짜 둘이 사귄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다. 연극이 언니가 우리 학교 연예인이라니까?”

 “아…. 절대 알 수 없다.”

 “너는 너희 오빠들이나 파세요.”

 “너는 연극이 언니 왜 좋게 보는데? 그냥 머리가 짧아서?”


 치약 거품이 뚝뚝 떨어지는 칫솔을 입 밖으로 빼든 아이들은 대화를 잇기 위해 입을 헹구기 시작했다. 조용히 양치질을 마친 연보라는 그런 친구들의 뒤통수를 보다 입가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머리 짧아서 좋으면 나나 좋아해라.”


 연보라 다운 농담에 피식 웃은 친구들은 입가에서부터 턱까지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닦아냈고, 연보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했다.


 “나 조끼만 입어서 추워…. 얼른 들어가자.”


 양선우는 연보라의 팔뚝을 대신 문질러주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는 보라랑 먼저 들어갈게.”


 아이들은 입안 가득 머금을 물을 뱉으며 OK 사인을 만들었고, 양선우는 연보라를 끌고 가듯 팔을 안았다. 그리고 운동장을 빙빙 도는 무리를 뚫고 운동장 한 가운데 노랗게 죽은 잔디 위로 발을 옮기며 말했다.


 “보라야, 고운이 약점. 그거….”

 “아! 그래! 아씨…. 이거 말하다 그 꼴 났네.”


 다시 떠올랐는지 이를 드러내고 입술을 열었던 연보라를 곁눈질로 본 양선우는 작게 한숨 쉬었다. 연보라는 쉬지 않고 다음을 말했다.


 “걔 약점이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단점도 없을 것 같은 애인데…. 솔직히 걔 성격? 그냥…. 나쁘지 않아. 근데 모두 좋을 필요는 없잖아.”

 “어?”

 “성격. 굳이 좋을 필요는 없다고.”

 “왜?”

 “그냥 그런 성격도 있어야지. 안 그러면 세상이 너무 극단적이야.”


 제 답이 마음에 드는지 작게 키득거리는 연보라를 보고, 양선우가 물었다.


 “말 전하는 거 같아서 미안한데…. 차고운은 네가 아까 그….”

 “아까? 뭐? 내가 나도 모르게 걔한테 국그릇 던지기라도 해?”


 양선우는 손을 세차게 휘둘러 부정했다.


 “아까 연극부 언니랑 고운이 이야기. 차고운은 그 이야기를 네가 퍼뜨렸다고 착각하는 거 같아.”

 “내가? 왜? 나는 아니야….”

 “나도 직접 들은 건 아닌데…. 눈치가 그래. 근데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니까.”


 연보라는 주위를 뱅뱅 도는 아이들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차고운도 어지간히 복잡하겠다. 그렇지?”

 “그렇지….”


 목소리만 낮추면 될 것을 거북이처럼 목마저 낮춰서 감출 듯 움직이던 연보라가 다시 서며 말했다.


 “저녁에 연습 가면 사과 받아야지!”

 “보라야, 고운이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어쩌다 보니 변호해버린 말에 놀란 양선우가 걸음을 멈췄고, 한 발자국 앞섰던 연보라가 발을 뒤로 움직였다.


 “알아. 나쁜 애 아닌 거. 그렇다고 내가 걔를 좋아하는 건….”


 뒷말을 잇지 못하던 연보라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웃으며 말했다.


 “얼른 가자. 나 추워.”


 양선우는 저 뒷말의 복잡함을 짐작하려다 포기했다. 봄이지만 아직은 추워서 마음마저 미처 녹지 못했다고 여기고 싶었다.


*****


 무엇이든 때를 놓친 말은 어정쩡하게 공중에 부유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흩어지고 만다. 연극 연습이 다 끝나서야 차고운이 겨우 꺼낸 사과가 그러했다. 내내 두 사람 분위기를 살피던 아이들이 놀랄 만큼, 연보라는 차고운의 사과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이는 사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기보다 굳이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의 연습이 지나고, 달력이 넘어가는 때가 다가왔다.


 사과는 여전히 미완이었다.


 “뭐야?”


 분명 오늘 연습하기로 해놓고 아무도 오지 않은 아이들, 비어버린 연습실을 보고 연보라는 혼잣말을 뱉었다. 토요일, 분명 학급 활동을 마치고 연습실에서 만나자더니…. 동기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덜렁거리며 등에 달고 다니던 가방을 내려둔 연보라는 연습실 뒤쪽에 붙여둔 책걸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의자 세 개를 연이어 붙여 두고, 그 위에 길게 누웠다. 잠시 누워있다가 답답한 공기에 창문을 슬쩍 열어 둔 연보라는 창문 반 틈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감상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코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간질거렸다.


 “아…. 씨발….”


 까무룩 잠마저 들 즘에 익숙한 목소리가 낯설게 들리자, 연보라는 눈 깜박이는 것을 멈추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웠던 연보라는 손끝이 저릿해 조심스럽게 팔을 빼고,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와 따라 움직이는 눈. 회색의 철골 구조가 얼기설기 얽힌 책상의 다리 사이로 익숙한 곡선이 눈에 들어왔다. 구멍 난 스타킹 따위는 단 한 번도 걸쳐본 적 없을 것 같은 다리. 앙상해 보이는 다리가 연습실을 서성거렸다. 아마 연보라의 혼잣말과 비슷한 의미였을 것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친구들을 두고 하는 작은 탄식. 하지만 저 작고 붉은 입술에서 나오는 단어가 영 주인과 어울리지 않아 연보라는 속으로 웃었다. 괜히 지금 나가면 안 그래도 어색한 사이가 더욱 서먹해질까 봐, 연보라는 밖으로 내민 발을 슬그머니 움직여 바닥에 떨어진 슬리퍼를 발끝으로 끌어왔다.


 차고운은 자신이 악역이 된 것에 익숙했다. 줄곧 그랬으니까, 누군가 가해자 역할이라면 그것은 차고운에게 지워지고는 했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응당 연보라도 같은 굴레를 씌우고 자기 입맛대로 차고운의 평판을 끌고 가리라 예측했다.


 다만, 연보라의 태도는 차고운의 예상과 달랐다. 연보라는 차고운에게 달관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돌발상황마저 다 이해한다는 듯, 그래서 정말 그 사과에 괘념치 않겠다는 듯 행동했다. 가까워졌다고 여기던 연보라가 일순간 벌려버린 거리감에 차고운은 적응하지 못했다. 연습 때면 나와서 감독 선생님 지도를 함께 받고, 대사를 맞추고, 동선을 맞출 때는 함께 있었지만…. 차고운이 느끼기에 연보라는 극 중 ‘나’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연극 연습이 끝나면 연보라는 신기루처럼 존재했다. 분명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다가가면 사라지는 신기루 같았다.


 “너…. 왜 여기 있어?”


 어딘가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도 그런 것의 일종이라 여겼다. 하지만 꽤 요란하게 울리는 진동의 진원은 연습실 한쪽 벽면을 채운 거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엇갈려 쌓인 책상과 의자 사이.


 거울을 흘깃거린 차고운 눈에는 굴절 상이 나타났다.


 “아…. 안녕?”


 때를 놓친 인사도 때를 놓친 사과만큼 덧없이 떠다닌다.


 “애들은?”


 그래서 그 인사는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했다. 차고운은 연보라의 인사를 못 들었다는 듯, 다급하게 물었다.


 “어…. 몰라.”

 “왜 몰라? 연락 안 했어?”

 “어련히 알아서 올까….”


 차고운은 짜증 섞인 얼굴로 왼손 전체를 이용해 얼굴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통화 내용이 오롯이 들릴 만큼 조용해진 학교.


 “아…. 만우절!”


 실장의 뜻 없는 농담 또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곳.


 “만…우절?”

 “어! 당연히 안 속을 줄 알았는데…. 미안해, 고운아…. 혼자라 무섭지? 미안….”


 차고운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연보라는 아까 들었던 욕을 다시 듣게 될 것 같아 귀를 쫑긋거렸다.


 “혼자…. 아니야.”

 “응?”

 “보라도 같이 있어. 둘이 하고 갈게.”

 “아! 나는 애들이랑 나와서…. 미안…. 아니면 다음 주에 우리 다 같이 하자. 응?”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창밖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연보라를 응시하며, 차고운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입술 사이에서 봄바람을 닮은 따스하고도 건조한, 어딘가 부드럽고 달콤한 숨이 새어 나왔다.


 “둘이 할게. 둘이 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연보라는 봄볕을 닮은 차고운의 눈빛을 보며, 어쩌면 차가운이 따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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