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은학은 윤의 연습시간에 맞춰 찾아왔다. 약속했던 대로 오백 원까지 확실히 챙겨왔는데, 윤이 박장대소 하면서 진짜로 들고 왔다고 배꼽을 잡다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은학은 영문 모른 채 머리만 긁적였다. 숨을 크게 돌리고 안정을 되찾은 윤이 돈 안 받을 거니까 오백 원은 도로 저금통에 갖다 넣으라고 말하는 것으로 연주 감상 값 이야기는 끝났다.


그 날 이후 은학은 윤이 피아노 학원을 가기 전 한 시간 반 가량 꼭 피아노 연주를 듣고 갔다. 윤이 피아노 학원으로 출발하기 전 경화가 차려주는 간식까지도 사이좋게 나누어 먹기도 했다. 주말엔 아침에 잠에서 깨어 씻고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오전 나절에 그 옆집을 찾아 들어가기 일쑤였다. 얼마 전엔 경화를 종종 찾아오는 손님이 은학을 보고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달리 피해가 되거나 윤의 연습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은학은 얌전히 들어와 밝게 인사를 나누고 나선 피아노가 있는 윤의 방으로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만 했다. 윤도 제 옆에 있는 은학이 귀찮거나 신경 쓰이진 않았다. 오히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잊지 않고 박수를 치는 열렬함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형-.”

“왜?”

“오늘도 학원 같이 가면 안 돼?”

“은학아 그건 언제가 됐든 간에 안 되는 거래도.”

“선생님한테 물어봐주면 안 돼? 나 집에서처럼 엄청 얌전히 있을게. 응?”


굳이 곤란한 점을 꼽자면, 윤이 학원 갈 시간이 되면 그와 떨어지는 게 싫은 은학이 조금 매달린다는 것뿐이었다. 아주 초반엔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갈수록 욕심이 생기는 건지 어떤 건지, 2주가 지나고 난 무렵에는 윤의 손목을 잡고 우는 소리를 하기까지 이르렀다. 울상이 되어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이 초딩을 어쩌면 좋을까. 고민을 하던 윤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딱히 뾰족한 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는데 그럴듯하게 떠오른 핑계를 한 번 던져보기로 했다.


“은학아. 그럼 우리 내일부터는 형아 학원 갔다 오기 전까지 은학이가 방에서 피아노 치고 있을래?”

“나 칠 줄 모르는데?”

“에이-! 형이 내일부터 가르쳐주면 되지!”

“그럼 형은 피아노 언제 쳐?”

“형은 은학이 30분 가르쳐주고, 한 시간 연습하고 학원 가서 또 하면 되지.”

“진짜 그래도 돼?”

“그럼 되지. 그동안 피아노 쳐보고 싶지 않았어?”


윤의 질문에 은학이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은학이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그 사이에 은학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발견했기 때문이다.


“형 없을 때 한 번 씩 쳐보지 그랬어.”

“피아노 형 거니까…….”

“하하하하하! 그래서 안 쳤어? 괜찮아. 마음대로 쳐도 돼.”


윤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학이 건반 하나를 꾹 눌러보았다. 맑고 정확하게 울리는 도 음계 하나에도 은학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곧 나가야 할 시간을 앞두고 있는 윤이 책장을 뒤져 예전에 쳤던 악보들 몇 개를 꺼냈다. 그리고 그 중에 그나마 가장 치기 쉬운 곡의 페이지를 열어서 악보 위쪽 귀퉁이를 꾹 접어주기까지 했다. 내일부터 가르쳐준다고 하면 또 잠 한 숨 못자고 기다릴 테니 조금만 가르쳐주겠다며 샤프를 꺼내 오선 위의 음계를 짚었다. 음계는 알지만 악보를 볼 줄은 모르는 은학을 위해 윤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한 번 씩 훑어주었다. 은학은 윤의 설명을 즐겁게 귀 담아 들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도 있었다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윤에겐 마냥 귀여워 보였다. 그 다음에 가르쳐준 것은 피아노 위에 손을 올리는 법이었다.


“손가락을 쫙 펴는 게 아니라 살짝 둥글게.”


윤은 건반 위에 바르게 올라가 있는 은학의 손을 잡고 살짝 주물렀다. 마디마디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손의 긴장이 풀리게끔 톡톡톡 손가락 하나하나를 만져주다가 마지막엔 작은 손 아래로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 위에 손가락이, 은학의 손등 위에 윤의 손바닥이 맞닿았다.


“봐봐. 형 손을 살짝 잡고 있다는 이 느낌으로 두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와아…….”

“도부터 천천히 오른손은 이렇게 움직일 거야.”


윤은 은학의 손 모양을 바로 잡아준 다음에 바로 한 음계씩 짚어나갔다. 뒤이어 왼손의 움직임도 막 가르쳐주었고, 은학은 제법 흉내를 잘 내는 편이었다. 학원 시간에 늦겠다며 거실에서 언성을 높이는 경화의 목소리에 윤은 어쩔 수 없이 급히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섰다. 피아노 좀 더 치다가 가도 된다는 윤의 말에 은학이 아주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이 나간 다음 은학은 한참을 멍하니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오래도록 진정시킨 다음에야 그날 배웠던 것들을 다시 복습할 수 있었다.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 여기랑 여기가 도. 손가락 번호는 여기가 1번. 손가락은 쫙 펴지 말고. 손은 형의 손을 잡았던 것처럼 둥글게. 은학이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듯이 읊조리며 도부터 두 옥타브 위의 도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길 몇 차례 반복했다. 그의 생애 첫 피아노는 그게 다였다. 그러나 연주할 수 있음이 감격스러워 빛이 났다.



*



은학은 뭐든 빠르게 배우는 편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흥미로워 하고 즐거워했다. 그 덕에 윤도 그를 가르치는 시간이 즐거웠다. 처음엔 분명히 30분 수업 후 한 시간을 자신의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점점 제 연습시간까지 줄여가며 은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뭐든 스펀지처럼 쏙쏙 흡수하는 은학이 마냥 신기했다. 하기 싫은 내색은커녕 갈수록 더 즐거워하는 모습이 선했다.


전에는 학원에 데리고 가라며 고집을 부리던 아이가 이제는 피아노 앞에서 비키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윤은 결국 주말 낮의 은학을 위해 누나 하민의 방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당시의 민은 일찍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 있는 상태였으니 빈 방의 피아노나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고 한 방에서 같이 피아노를 치기엔 윤 자신의 연습시간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 이 방법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누나가 없는 동안엔 이 방 피아노를 은학이 네 피아노라고 생각하라며 윤이 생색을 내기도 했다. 뭘 알 리가 없던 그 때의 은학은 잠시나마 자신의 피아노가 생겼다는 것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좋아 죽겠다고 쿵쾅쿵쾅 뛰는 바람에 경화에게 살짝 잔소리를 듣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윤은 어제까지 가르쳤던 곡 페이지를 펼치며 샤프로 악보에 표시를 남겼다.


“여기까지 다 배웠으니까 처음부터 이만큼 치는 거 열 번 연습하고 형 불러. 알았지?”

“우움-. 나 다른 거 하면 안 돼?”

“안 돼. 이거 열 번 다 치면 다른 거 시켜줄 거야.”

“그럼 다른 거 미리 갖고 있으면 안 돼?”

“그래 알았어. 뭐가 하고 싶은데?”

“내가 가지러 갈래!”


은학은 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냉큼 윤의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방 피아노 아래 있던 작은 책꽂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학은 나란히 정리되어 있는 악보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뭘 아는 것처럼 하나를 골라 소중히 품에 안고 나왔다. 윤은 파란 파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가 좋아하는 곡들 악보만 인쇄해서 모아놓은 파일이라 은학보다 훨씬 더 잘 아는 것이었다.


“여기 있는 거 할 거야!”

“이거 너가 하기엔 좀…….”

“그래도 하고 싶어.”

“왜? 왜 그거 하고 싶은데?”

“이거 잘 치면 형이 칭찬해 줄 거니까!”

“푸핫! 꼭 그거 아니라도 은학이가 잘하면 칭찬할 거야, 걱정 마.”

“그래도 형이 좋아하는 거 할 거야.”


윤이 큭큭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학은 파란 악보를 자신이 옆에 소중히 올려놓고 윤이 숙제로 내준 곡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윤은 열심히 하라는 응원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저도 슬슬 자기 연습을 다시 하려는데 좀처럼 아까의 은학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두 눈에 고집이 그득한 게 제법 독기 품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쇼팽 곡이라 조만간 당장 들을 순 없을 게 분명하다 생각했다. 몇 년 뒤에 꼬맹이가 조금 더 크거든 그 때나 듣겠다며 손을 풀었다. 그러다 막 연습하던 곡을 시작할 때 즈음 또 든 생각 하나. 내가 좋아하는 곡들만 모아놓은 건 쟤가 어떻게 알았지? 저 파일을 그렇게 끼고 살았나? 금방 사라질 잠시간의 의문이었다.


은학을 가르치며 윤도 전보다 더 피아노에 재미를 붙였다. 어떻게 하면 연습을 좀 덜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하게 없어졌고, 그 고민이 있던 자리엔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나도 그만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찼다. 피아노 앞에 멍하니 앉아 이미 다 알고 있는 악보를 보기만 하고 있는 행동과는 이별했다. 평소보다 더 열정적인 윤의 가까이에서 보던 그의 강사도 아주 좋은 자세라며 두 손 들고 환영할 정도였다.


윤이 잠시 연습을 멈추었다. 손목을 풀어주려 살살 스트레칭도 했다. 이쯤이면 은학이 자신이 내 준 숙제를 열 번은 다 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출장을 다녀온 승철이 주말 오후가 된 무렵에서야 도착한 성 싶었다. 윤이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 일어났다.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드리려 방 문을 열고 나섰는데 신발 한 짝도 채 벗지 않은 승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현관에 서 있었다.


“아빠 왜 그래요?”

“네가 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네?”


자기 연습을 하느라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영문을 모르던 윤이 피아노 소리를 뒤늦게 알아챘다. 은학이 있는 맞은 편 방에서 녹턴이 들려오고 있었다. 느린 속도의 단조와 감미로운 선율. 윤이 매일 듣고 매일 치는 곡이니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틀림없는 쇼팽 녹턴이었다. 다른 걸 치고 싶다며 악보를 가져간 지 4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승철은 물론이고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윤까지 놀라서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은학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점점 피아노 소리가 작아지며 녹턴이 맺어졌다. 승철은 들어간다는 언질도 없이 냉큼 하민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문이 벌컥 열리는 큰 소리에 은학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에 뒤이어 들어오는 윤을 보곤 속사포처럼 변명을 늘어놓느라 바빴다.


“나, 나 열 번 다 쳤어, 형! 다 치고 한 거야 진짜로!”


그 열 번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은학은 윤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딱 봐도 윤보다 훨씬 더 어려보이는 아이를 보며 승철이 놀라움을 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윤아, 누구니 얘는?”

“옆집 애…….”

“……얘 피아노 배우던 애야?”

“아니 그게……. 저- 제가 가르치던 앤데요.”

“네가? 왜? 아니 어떻게? 이걸? 쇼팽을? 얼마나 가르쳤어?”

“저어-는…….”

“얘야 너 몇 살이니?”


승철은 마음이 급했다. 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학에게로 시선을 돌려 두서없이 질문을 하고 혼자만의 통성명을 했다. 아저씨는 윤이 아빤데-부터 시작하여 방금 친 거는 어디서 배운 거냐는 말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내뱉는 바람에 은학이 더 당황하여 입을 꾹 다물고 윤의 옷자락을 꽉 비틀어 쥐었다.


“아빠, 애 놀래요.”

“아이고-. 나야말로 지금 너무 놀라서. 후우-. 미안하다. 아저씨가 너 피아노 너무 잘 쳐서 놀라서 그랬어. 그래, 옆집 친구는 이름이 뭐니?”

“……은학이요.”

“그래 은학아. 만나서 반갑다. 피아노 배워본 적 있니?”


숨을 고르고 천천히 진정해가는 승철이 다시금 차분하게 은학에게 말을 붙였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을뿐더러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자꾸 윤의 눈치를 살폈다. 보다 못한 윤이 은학의 어깨를 살살 토닥이며 다독여주었다. 은학아 괜찮아. 형네 아빠야. 아저씨도 피아노 치는 분이라 궁금해서 그런 거야. 그제야 안심한 은학이 승철을 올려다보았다. 승철은 웃는 얼굴로 몸을 낮춰 앉았다. 반대로 은학을 올려다보게 된 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방금 친 건, 윤이가 가르쳐준 거니?”

“……아뇨.”

“그럼? 그냥 혼자 보고 쳤어?”

“네…….”

“정말 피아노를 잘 치는구나. 아저씨 깜짝 놀랐어.”


은학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고개를 들어 윤을 쳐다보았고 윤은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은학아. 정말 멋있었어.”


바라던 이에게 기대했던 말을 듣고 나서야 굳어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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