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가 끝나고 나서 나현은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나현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어트린 채였다. 무언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눈은 괴로움을 참는 듯 했다. 다연은 나현의 그 모습이 나현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잘했어.”


다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 말에 나현은 살짝 미소 지어보였다. 그는 조금은 지쳐보이기도 하다. 다연은 멀리서 자신과 나현을 보는 시선이 따가움을 느꼈지만, 나현을 응원하는 의미로 어깨에 손을 잠깐 짚었다가 내려놓았다. 뒤이어 지현도 잘했다며 나현을 격려했다.


“중간부터 목소리가 좀 떨리던데? 연습 때는 잘했잖아.”


서영이 그렇게 말해서 다연은 책상 아래로 서영의 다리를 살짝 꼬집었다. 서영은 악 소리를 내더니 다연을 째려보았으나 별 말을 하진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현은 그 말에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미안. 갑자기 할 말이 기억이 안나서.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냐, 진짜! 너무 잘했어.”


다연이 그렇게 열심히 어필하자 나현은 깜짝 놀랐는 지 눈을 크게 뜨다간 베시시 웃었다. 그런 다연을 보던 지현은 한 마디 덧붙였다.


“다연이 네가 그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거 처음 봐. 그치, 나현아.”


나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보다 나현의 표정이 풀어져 있어서 다연은 마음이 놓였다.


국어 시간이 끝나자 다연은 한 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조별활동을 한다고 한동안 나현과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제는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예지도 학교로 돌아왔으니, 더이상 나현과 전처럼 대화를 편하게 나눌 순 없다는 생각에 기분은 최저를 찍었다. 반대로 지현은 대놓고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지현이라도 좋으면 된거려나, 다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현도 내심 좋아하겠지, 라며 나현을 저도 모르게 찾던 다연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야.”


“....”


예지가 치마에 손을 얹고는 불량스럽게 다연을 불렀다. 다연은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예지가 이렇게 다연을 대놓고 부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연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한층 더 험악해진 목소리가 들린다.


“귀 먹었어? 나와.”


예지는 선전포고하듯이 말을 던지고 밖으로 나가서 다연은 한숨을 쉬고 예지를 따라나갔다. 혹시나 맞기라도 할까봐 속으로 걱정이 되었으나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지는 복도 벽에 기대곤 따라 나온 다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연은 기 죽어 보이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 별 효과는 없는지 예지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인다. 예지는 입을 뗐다. 나현에 대해 말 할 줄 알았던 예지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네 언니 좀 아파보여.”


다연은 우연의 상태를 떠올렸다. 요 며칠 쌩쌩해보여서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예지는 말을 덧붙였다.


“정신이.”


예지는 머리에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모션을 취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연을 발끈했다. 할 말은 그래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떨리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상한 건 너야. 너야말로 언니랑 잘 놀아놓고 뒤에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니를 위해서 충고해주는 거야. 그리고 논 게 아니라 걔가 날 따라다녀서 어쩔 수 없었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언니를 이상하게 보고 싶어하니까 그런 것만 보이지. 별거 아닌 트집이라도 잡으려고. 언니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하는지 모르겠어.”


다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지의 손이 다연 옆의 벽을 쾅 내리쳤다. 예지는 얼굴을 들이밀며 목소리를 한 톤 내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그쯤 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네 언니 훼까닥한 거 못 느끼겠어? 니가 그러고도 가족이야? 나라면.. 아니다. 그리고 아무튼. 어떤 말로 이나현을 꾀어냈는 진 모르겠지만, 이나현이랑 말 몇번 섞었다고 친한 줄 알지마. 걔랑 더 친한 건 나야.”


예지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다연은 반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다연은 노력했다. 분노에 몸을 맡겨 언성을 높이면 예지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우리 언니는 멀쩡해. 그리고 네가 뭔데? 나현이 엄마야? 아니잖아. 나현이가 친한 줄 알지 말라면 그러겠지만, 네가 말한다고 그러진 않을 거야. 그리고 유치원생도 아니고 누가 누구랑 친하냐고 다투는 거 진짜 없어보여.”


다연은 각오를 다졌다. 한 대 맞을 각오로 말했으나 예지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그러나 눈은 싸늘하게 가라 앉아 있다. 입술을 짓이기며 예지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다.


“이나현이 좋아? 그렇게 좋아 미치겠어? 이,”


다연은 예지의 말을 중간에서 끊고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했다.


“어 좋아. 좋은 걸 어떡해. 좋아한다는 감정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예지 네가 뭐라고 하든 내 감정을 안 바뀔거고, 네가 원하던 대로 하지도 않을거야.”


다연은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다짐을 더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지가 무섭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뒷전으로 하고 싶지 않아졌다.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내 마음을 묻어둔다면.’


다연은 그 때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아이가 이사를 가버리고 난 후를. 연락이 뜸해지고 나서 다연은 연락을 하지 않는 그 애에게 토라져서 다신 연락하지 않을 거라며 번호를 삭제해버렸다.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다연은 그런 가정을 가끔 했다. 먼저 꾸준히 연락해서 가끔 만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항상 그 애가 먼저 다가와 줘서 자신이 먼저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다연은 그런 후회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예지가 화를 못 이기고 눈이 벌개져서 다가왔다. 다연은 예지의 광기 섞인 눈을 보곤 뒷걸음질 쳤다. 몸싸움을 한다면 다연은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다연이 마음을 굳히고는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네..”


“..이나현.”


얼굴이 창백해진 나현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계단에 서서 둘을 내려다 보고 있다. 나현의 눈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나현은 조용히 둘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너 또..! 정학당하려 그래? 그만 좀 해. 수업 시작했으니까 빨리 들어가. 수업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하자.”


예지는 대꾸를 하고 싶은지 입을 움직이다가 그만두고는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현은 뒤를 돌아서 다연을 바라본다. 다연은 나현이 듣고 있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서 자신의 발끝만 보고 있다. 이렇게 알려 줄 생각은 없었는데.. 혹시나 역겹다며 욕이라도 들을까봐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현은 자신에게 관심이라곤 없을 텐데.. 나현이 그럴리는 없겠지만 정말 만의 하나 학교에 소문이라도 나진 않을지 다연의 머릿속엔 온갖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일단 자신이 정신 없이 내뱉은 말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연이 입을 열었다.


“저... 그러니까..”


자신의 감정을 묻어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주절 주절 변명을 늘여놓으며 거짓을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니 어쩐지 본능적으로 반항심이 들었다. 다연은 생각했던 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내뱉은 건 이런 말이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처음 봤을때부터 신경쓰였어. 시간이 지나고 가끔 대화를 하고 가까워질 때마다 설레고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졌어. 너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어서 주위를 멤돌기도 했는 데 그걸 알았을 지는 모르겠다. 이런 마음 싫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기적이지만.. 말할게. 좋아해..”


다연은 말하면서 눈이 따가웠다. 거절당할 걸 알면서 하는 고백은 생각보다 더 비참했다. 서영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앞으로 서영에게 잘 해줘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연은 나현의 표정을 보지 않고 천천히 돌아섰다. 교실 문을 열고 닫고 들어갈 때까지 나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연은 그게 제일 슬펐다.


***


다연은 지나다니면서 가끔 나현과 눈이 마주치곤 했으나, 나현은 매번 눈을 피했다. 평소 하던 인사도 하지 않았다. 다연은 그럴 때마다 마음이 쓰렸다. 같이 다니던 신아는 이상함을 눈치채곤 다연에게 물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다연은 뜸을 들였다.


“싸운거라고 해야할지..”


싸운 건 아니지만 싸운 것보다 최악인 결과가 아닐까.. 다연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신아라도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건 조금..


그런 생각을 할때쯤 뒤에서 누가 헤드락을 걸어와서 다연은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기침을 하며 돌아보니 익숙한 낯이 있다. 장난기섞인 표정이 특징인 서영이다.


“좀 우울해 보인다?”


서영이 씩 웃으면서 말을 건다. 그러자 신아는 다연을 자신 쪽으로 휙 당기면서 볼을 부풀리며 서영을 노려본다. 서영은 눈썹을 까딱인다. 얘 뭐냐는 뜻이다. 다연은 ‘이쪽은 신아야.’하고 신아를 소개하곤 신아에게는 ‘이쪽은 서영이야’라며 서영을 소개했다. 둘은 가만히 서로를 쳐다본다. 신아가 먼저 말을 꺼낸다.


“다연이 괴롭히지 말아줄래? 싫다잖아~”


서영은 팔짱을 끼며 말한다.


“괴롭힌 게 아니라 장난 걸은 건데? 우리 그만큼 친한 사이야. 넌 그만큼은 아닌듯?”


신아는 다연을 확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더 먼저 친해졌거든? 다연이 내가 먼저 발견했거든?”


다연은 서로 유치하게 말다툼하고 있는 신아와 서영을 보면서 웃음을 참았다. 상극인 거 같아보였는데 서로 잘 노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신아와 서영이 서로 눈으로 스파크를 튀기는 걸 보면 둘이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다연만 그렇게 느끼는 듯 했다. 신아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너 다연이랑 같이 밥 먹은 적 있어? 밖에서 만난 적 있어? 난 맨날 같이 밥 먹고 밖에서 영화 본 적도 있어.”


서영의 얼굴이 티가 나게 일그러져 간다.


“씨.. 야, 너 짜증나. 생긴 게 좀 반반하면 다야?”


말다툼으로 서영이 신아를 이길 순 없는 것 같다. 벌써 할 말이 떨어진 서영은 부들거리면서 이를 갈며, 별 쓸데 없는 걸로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그런 서영을 신아는 여유롭게 받아친다.


“나 예쁘다고? 고마워~ 우리 잘 어울리지?”


“야!! 그런 말 한적 없어! 그리고 안 어울려! 절대!!”


얼굴을 붉히면서 바락거리는 서영의 모습을 다연은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모습이 졌다는 걸 입증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둘은 다연을 사이에 놓고 한참을 투닥거리다가, 수업 종이 치는 걸 서영은 확인하고 신아에게 혀를 내밀고는 다연을 잡아당겼다. 말투는 얄밉게 변해있다.


“우리는 같은 반인데.”


“...”


이번에는 신아가 밀렸는지 신아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 다연은 신아에게 손을 흔들고는 서영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말없이 걷고 있자 서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진짜 뭔 일 있어?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다연은 잠시간 고민했다. 자신의 생각을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그러나 고민은 잠시였다. 다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서영은 더 가까이 붙었다. 다연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미안해.. 너를 거절해서.. 용기 내서 말했을 텐데..”


서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 눈을 크게 뜨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는 그저 말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말이 나온거야.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되는데. 혹시 새삼스레 미안해서?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나?”


다연은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그건 아닌데... 나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말했었잖아.. 사실 차인 것 같거든.”


서영은 화들짝 놀라며 묻는다.


“뭐야? 고백했어?”


생각보다 큰 목소리에 다연은 다급히 손으로 서영의 입을 막으며 손으로 쉿 표시를 해보이니, 서영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이 조용해진 걸 확인하고 다연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응.. 어쩌다 보니까 내 마음을 말해버렸는데, 후회가 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너도 이랬어?”


서영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눈을 굴렸다.


“음.. 난 후회는 없었는데. 오히려 내 감정을 더 잘 알게 되어서 좋았어. 말로 내뱉으니까 더 구체화되서 객관적이게 보게 되는거, 뭔지 알아?”


다연은 서영의 그 말에 곰곰히 그 때를 떠올렸다. 사실 나현의 표정이 보기가 무서워서 얼레벌레 말을 쏟아놓고 도망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자신이 떨리는 마음을 늘여놓을때, 자신이 이렇게, 이만큼 나현을 좋아했구나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다연은 서영의 말에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다연을 보며 웃더니 손을 들어 머리를 헝클였다.


“그럼 우리 이제 동지네.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 차인 동지.”


“...”


서영이 해맑게 말해서 다연은 그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서영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은 많이 쓰렸을 거다. 평소같으면 머리는 만지지 말라고 했겠지만 다연은 서영이 머리를 흩트리는 대로 가만히 손길을 받았다. 다연 나름의 위로 방식이었다. 그 와중에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린다.


“야! 너 다연이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


멀리서 신아의 목소리가 들려서 다연과 서영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신아가 반에 안 들어가고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신아는 그 말을 하곤 흥 하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들어갔다. 다연과 서영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


“할 말이 뭔데?”


예지는 방과후에 자신을 따로 불러낸 나현을 바라본다. 지현은 혼자 먼저 집에 보내고 둘은 아무도 없는 교실 안에 있다. 예지는 나현의 얼굴을 찬찬히 살핀다. 오랜만에 보니 좋은 기분은 숨겨지지 않는다. 예지는 나현이 대체 뭔 말을 하려고 하나 싶어 기다리니, 나현이 입을 연다.


“우연 언니랑 자주 만나?”


나현이 한 말에 그를 물끄러미 관찰한다.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기 위해 예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현은 가만히 예지의 대답을 기다린다. 예지는 어깨를 으쓱인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만나서 별 건 안해. 그게 왜 궁금한데?”


나현이 한숨을 쉬다가 입을 연다.


“나는 그게 딱히 좋게 안 보여서. 다연이 무슨 생각할지 그런 건 생각 안 해? 그 언니도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좋다고 따라나가서 학교도 안 가고 싸돌아다니는 거 그거 왜 그러는 거야? 너 병원도 네 맘대로 나갔지? 안 봐도 뻔해.”


예지는 인내심 있게 나현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반박했다.


“병원 나간건 내가 잘못했는데, 걔 언니랑 놀아서 김다연이 상처받던 말던 그게 무슨 문제인데? 나를 먼저 불러낸 건 걔 언니야. 그리고 학교도 안 가서 심심한데 난 하루종일 집에 누워만 있으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나한테는 집이 감옥같은데..”


예지는 좁아터진 집을 떠올렸다. 그 집은 둘이 살기엔 너무 좁고 징글맞다. 그걸 나현이 모르진 않을 텐데. 나현은 그 사실을 떠올리곤 당황해서 입술을 씹었다. 예지는 나현이 할 말을 찾고 있을 때 먼저 선수쳤다.


“내가 김다연 싫어하는 거, 소름끼쳐하면서 알면서도 걔랑 말 섞는 이유가 뭐야? 네가 나한테 누구랑 같이 놀러 다닌다고 뭐라할 처지가 돼? 솔직히 서로 쌤쌤 아니야? 솔직히 나는 김다연이 상처받는 게 더 이해가 안돼. 걔는 네가 감싸는 모습을 보려고 그러는 거야. 왜 이렇게 순진하게 구는데.. 너 네 앞가림 잘하잖아. 걔가 너랑 나랑 이간질시키려고 그러는 거 모르겠어?”


예지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나현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있다. 나현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말한다.


“다연이가 왜 너랑 나랑을 이간질 시키려고 그러는데.”


나현의 말에 예지는 바로 입을 연다.


“그야..”


예지는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도 그 말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기는 싫었다. 예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나현은 조용히 읊조렸다.


“날 좋아해서.. 구나.”


예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나현을 응시한다. 그의 표정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서. 나현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떠오른다. 


"내가 어디가 좋아서..? 게다가 난 여자인데.."


예지는 그 말에 자신 마저 상처를 받고 말았다. 자신의 마음을 전한대도 나현은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


"미안. 혼자 있게 해줘.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예지는 고민하고 있는 나현을 두고 다시 교실쪽으로 향했다. 나현에게 굳이 바람을 넣을 필요도 없다. 나현은 그런 애니까. 나현은 여자를 좋아해본 적이라곤 없으니까. 알아서 다연을 거절할 것이다. 다연도 그러면 더 나서지 못하고 알아서 나현에게서 떨어질 것이다. 자신에겐 잘 된 일일테도 예지는 어딘가 마음 한 쪽이 쓰렸다. 아마 자신이 차인 것 같이 느끼고 있어서일거다. 예지는 나현과 사귀게 된다면 물론 좋겠지만, 아직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옆에서 매일매일 같이 있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수업을 듣는 것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직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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