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애영이 맹수같이 눈을 뜨고 정형행동 하는것처럼 엘리베이터 앞을 왔다갔다 거렸다. 강수정이 그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박무현은 한참전에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찌르는 하얀 LED등 빛에 건조한 눈꺼풀을 자꾸만 비비다가 눈알 하나에 얼마의 돈을 들였는지 떠올리고 억지로 손을 내리길 반복했다. 보통 21시를 넘으면 주백색으로 색이 바뀌고 조도도 낮아지지만 새벽 한 시를 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 조명은 아직도 병원마냥 밝았다.

중앙엘리베이터는 해적들이 타고 올라가서 제1해저기지에 멈춘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미국,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러시아의 엔지니어가 와서 한번씩 조작판을 건들였지만 수확은 없었다.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리베이터 앞에 40~50명의 사람들이 혹시 모를 상황의 변화를 기다렸지만 엔지니어들이 차례로 실패하자 배고픔과 지겨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의외로 사람들은 지나치게 겁에 질리거나 충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히 짜증을 내거나 대한도에 구조팀이 온게 분명하다며 근거없이 확신했다. 당장 생명에 위협도 없고 더 새로운 소식도 없으니 사람들은 음식을 찾거나 샤워를 한다며 흩어졌고 백호동 숙소 복도에선 빈방을 차지하기 위해 간간히 경쟁이 일었다.

숙소에 이층 침대가 있는 방이 있기도 해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방에 자리를 잡았으나 여전히 복도와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노점상처럼 늘어져있었다. 하나같이 밝은 빛을 감당하길 거부하고 벽쪽으로 몸을 돌린채 누워있거나 얼굴을 옷으로 가리고 있었다. 휴게실과 창고 등 중앙제어시스템으로 조명이 조절되지 않는 실은 인질 이송 과정에서 부상입은 사람들이 차지했다. 결함을 일으켰던 메딕 한 대를 오스트레일리아 엔지니어가 손봐 부상자들은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메딕 본체 안에 내장되어 있는 응급 약품중에 소독제와 드레싱이 있어 박무현은 알렉산더에게 전달해주었다. 데보라가 주변에 물어 나프록센을 몇개 구하기도 했다. 알렉산더는 의료용품을 가져다준 박무현에게 큰 포옹과 함께 뺨에 입을 맞추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바닥에 다리를 끌어안고 앉아있으니 점점 허리가 아리고 다리가 저렸왔다. 박무현은 한국에서 택배로 받은 따뜻한 차렵이불이 있는 숙소침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차마 이 상황에 들어가 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인력이라는 걸 알아도 성의는 보이고 싶었다.

앉은 자세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때 차가운 물체가 목 뒤에 닿았다. 퍼뜩 고개를 드니 서지혁이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나 이거 안 먹는데." 정상현이 코코넛이 그려진 음료를 들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 옆에 앉아있던 김재희가 정상현과 자신의 음료를 바꿔들었다. 정상현은 이번에도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지혁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백애영을 잡아 세워 손에 억지로 음료수를 쥐어주었다. 백애영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음료수를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땅에 떨어뜨리고 어딘가로 척척 걸어갔다. 사람들의 고개가 백애영을 따라 돌아갔다.

백애영은 불꺼진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올 땐 작은 손도끼를 들고 있었다. 도끼의 무게를 가늠하듯이 손에 쥐고 손목을 이쪽저쪽으로 돌려보며 광장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러다가 15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우뚝 멈춰서더니 도끼를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 전속력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달렸다. 문 바로 앞에 퍼질러있던 김재희가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비켜나는 것과 동시에 백애영이 온몸을 이용해 손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깡! 하는 금속음이 묵직하게 가라앉아있던 광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잠들어있던 사람들이 느닷없는 굉음에 벌떡 일어났다. 백애영은 비상용 손도끼로는 생채기만 겨우 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거듭 내려찍었다. 몇몇 사람들이 시끄러우니 당장 그만두라며 성을 냈지만 백애영은 이를 악물고 더 세게 팔을 휘둘렀다.

여섯번째 도끼질은 엘리베이터문에 닿지 않았다. 서지혁이 뒤에서 도끼 든 백애영의 손목을 잡았다. 백애영이 안간힘을 쓰며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서지혁이 아랫팔뚝의 힘줄 부위를 엄지손가락으로 세게 누르자 들고 있던 손도끼를 놓쳤다.

"배고파서 그래, 배고파서. 무현샘. 같이 방에 좀 가주실래요? 애영이 방에는 레이디들이 주무시고 계셔서리."

박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섰다. 그는 잠깐동안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강수정과 짧은 대화를 마친 백애영과 서지혁이 그의 뒤를 따라 38호실에 들어왔다.

서지혁은 부지런히 물과 비스킷 따위의 포장지를 벗겨 책상 위에 늘어놓고 백애영을 의자에 앉혔다. 백애영은 분을 이길수 없다는 듯이 숨을 크게 몇번 몰아쉬고 입안에 음식을 우겨넣었다. 그 옆에서 서지혁이 물을 홀짝였다.

"신 팀장님한테서는 무슨 연락 안왔나요?" 박무현이 여전히 어질러진 이불을 대충 정리해 그 위에 앉았다.

"현무동에 갇혔다십니다. 본인 말고도 숨어있던 채굴팀 직원 두 명이랑 같이 있었는데 탈출정 태워서 올려보냈답니다." 서지혁은 무사히 탈출한 사람에 대해 전혀 기쁘거나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이 코를 찡긋거렸다.

"신팀장님은 안나가시고요?"

"여기 보호대상이 다 있는데 그 인간이 나갈리가 없죠."

"어제 뭘 보신 거예요?" 백애영이 책상 위에 있던 음식을 의무처럼 해치우고 대뜸 물었다. 박무현은 그게 자신을 향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서지혁을 올려다봤다.

"어제요. 저희 팀장님이랑 대한도 올라갔었잖아요. 팀장님이 밤에 내려오자마자 저희한테 생존배낭 만들어놓으라고 했어요. 어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팀장님한테 말해두신 거예요?" 백애영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박무현에게로 몸을 숙였다.

"네에? 아뇨! 전, 네? 제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신해량씨랑은 잠깐 바람쐬고 온게 전부입니다. 왜 이런걸 물으시는 겁니까?"

백애영과 서지혁은 입을 꾹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놈들이 총이라도 가지고 있을 때 움직여야 했어. 괜히 눈치보다 개털됐어." 백애영이 혼잣말에 불과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단 자자. 세시간 교대? 특별히 내가 먼저 해준다."

서지혁은 가지 않으려는 백애영의 등을 떠밀어 방으로 보내기 위해 나갔다. 그동안 박무현은 어질러진 책상을 치우고 이불을 곧게 폈다. 서지혁이 돌아올것 같은 기색이었기 때문에 박무현은 침대 끄트머리에 불편하게 앉아 안절부절 하다가 엉덩이 아래에 딱딱하게 베기는 감각에 이불자락을 젖혔다. 하루종일 잊고 있던 패드는 배터리가 방전되어 화면엔 충전아이콘만 깜빡거렸다.

패드 뒤에 부착식 충전기를 끼우고 잠시 기다리자 전원이 켜지면서 밀려있던 메시지가 한꺼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피명령을 알리는 AI의 메시지가 가장 처음 떴다. 요란한 알림음을 내며 패드에서는 성별을 알 수 없는 합성보이스가 즉각 대피하라며 각층의 엘리베이터와 탈출정, 그리고 수밀격벽이 내려오는 공간의 위치를 반복적으로 읊었다.

그는 업무메시지와 해저기지 내 공지사항들은 읽지도 않고 넘기다가 엔지니어 가팀 팀장 신해량의 이름으로 13시간 전에 들어온 메시지를 보고 눈을 한번 깜빡였다.

[안전하십니까?]

그게 끝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박무현은 어쩐지 놀랐다. 신해량이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예상못한 일이었지만 해적이 처들어온 상황에서 이미 해저기지는 안전과 가장 먼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말이었지만 일상에서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는 질문이었다.

신해량의 연락이 한참 전에 온 걸 알고 있어도 이 질문이 컵 위에 마지막 한방울처럼 느껴졌다. 울컥 치미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그는 아무런 기대 없이 신해량에게 답장을 보냈다.

[어디십니까?]

그러나 메시지는 보낸것과 거의 동시에 답장이 왔다.

[현무동입니다. 다치셨습니까?]

박무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패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왜 거기 계세요?]

[아직 나갈 방법을 못 찾았습니다. 백호동 상황은 어떻습니까? 애영이나 지혁이랑 지금 연락이 안됩니다.]

[중앙엘리베이터 작동시킬 방법을 찾다가 쉬러 갔어요. 여긴 아무일도 없습니다. 그냥 갇혀있어요. 해적들도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고...]

그는 주절주절 메시지를 입력하다가 첫번째 문장만 남기고 지운 뒤 왜 탈출정을 타지 않았냐고 물었다.

[백호동 문을 열 방법이 없으면 그때 올라갈겁니다. 선생님은 괜찮으십니까?]

[여기 대한도에서 내려온 환자도 있고 맞아서 다친 사람도 있습니다. 신해량 씨. 경호원이라고 왜 말 안했습니까?]

[지혁이가 말했습니까?]

[한국인들 경호가 단순히 업무인지 알았으면...]

박무현은 중간에 끊긴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스크린 위로 뚝 떨어진 액체 한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밀어서 닦았다. 흐릿한 시야에서 완성시키지 못한 메시지의 나머지 내용이 잔상으로 떠올랐다.

뭐. 이 말을 정말 할꺼야? 박무현은 속으로 제게 가혹하게 물었다.

신해량, 네가 사람들 해치게 둔 거 날 신경써서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일인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뒀을거야.

감정의 맥락에 따라 같은 행동이 보호였다가 폭력이었다 판단을 바꿀 순 없었다. 물론 정상참작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지만 그게 개인의 애정의 여부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절대선이라는게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박무현 스스로가 지키고 싶은 선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구불구불하고 얇아지는 선.

젖은 손가락이 패드 위를 방황하고 있을 때 신해량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 얼굴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박무현은 신해량의 메시지에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피부는 건조하고 턱 밑에는 수염이 조금 돋아 거칠었다. 아침에 일어나 제대로 씻지도 않아 머리도 얼굴도 엉망이었다. 백호동에 있는 사람 전부 그랬다. 어디 내보일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소매를 당겨 자국이 남은 스크린을 닦고 신해량에게 조심하라며 답장을 보내고 박무현은 서늘하게 식은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약간 맘에 안드는데 나중에 퇴고할때 생각해야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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