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마지막입니다. 다음부터는 종장으로 들어갑니다. 의혹(7)과 혜고(9)랑 연결된 이야기인데, 제가 요즘 엔솔 원고도 하면서 진이 많이 빠져서 생각한 것만큼은 못 썼습니다. 소장본 낸다면 고칠지 모르겠네요. 소장본 수요조사 받고 있습니다.(7월 20일까지)


논어 안연편 숭덕변혹장(덕을 높이고 의혹을 분별하는 방법에 관한 장)이 있는데, 그곳에서 '변혹'만 따가지고온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유혈 묘사와 15금 비슷한 느낌이 있습니다. 캐붕은 뭐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고요^^;;


이제까지의 연빙(淵氷, 연못과 얼음) 시리즈
1부1. 눈사람2. 백마장군 공손찬이다. 3. 경화수월4. 남가일몽5. 식적휴영6. 象(상)
2부7. 의혹8. 여반장9. 혜고10. 곡속약11. 아비12. 변혹




변혹(辨惑)

의혹을 분별하다.





하늘이 내린 수명을 타의로 빼앗는 것이 살인이다. 처음 검으로 사람을 베어 그 목숨을 빼앗을 때를 기억한다. 의병을 결성하고 처음으로 전쟁에 나갔을 때였다. 벌써 아득한 꿈같은 이야기. 오합지졸 오백 병사를 이끌고 오만의 황건적과의 대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방에서 포위하고 달려오는 적의 수. 뒤늦게 깨달은 현실에 머리가 새하얗게 될 때, 당당하게 나서 모두를 구하는 두 동생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람을 베는 감각은 나무토막이나 짚인형을 베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새로 벼려져 예리한 검이 사람의 살점을 가르고 뼈와 부딪히는 충격, 검을 거둘 때 뜨겁게 용솟음치던 붉은 피. 그날 전투가 끝났을 때, 양 손바닥에 물집이 가득해 주먹을 쥐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대승을 거둔 것이 기뻐 아픈 줄도 몰랐다. 동생들과 부하들을 껴안고 환호성을 가득 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가 해쳤던 자들이 몇이었을까? 그 살인에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들 모두 역적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해친 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제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한심하다.’


유비가 활시위를 집어 당겼다. 새하얀 눈 사이에서 갈색털 노루가 선연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거리를 헤아린다. 활쏘기는 집중이 중요하다. 하지만 유비는 결국 팔힘을 풀고 활을 내리고 말았다. 새하얗게 된 손끝에 빠르게 피가 몰리고 있다. 유비는 두 손을 입가로 모아 입김을 후후 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은 나무가 빼곡하게 자라 있다. 새들이 화들짝 놀란 듯, 어지럽게 흩어져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사냥이 한창인 모양이었다. 유비는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나만 이도저도 하지 못하고 있구나.’


두 동생은 그의 곁에 없다. 사냥을 알리는 북이 올리고도 유비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가장 늦게 출발했다. 애초에 유비는 사냥을 즐기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저 심심해하던 장비를 위해서 온 것이었다. 내내 사냥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던 장비는 누구보다도 가장 앞서 출발했다.


‘아무쪼록 내일을 즐겨주렴, 이번 사냥은 사실 너를 위해 계획한 거란다.’


그래도 공손찬을 생각하니 토끼 한 마리라도 잡아야할 것 같아서 뒤늦게나마 말을 탔지만.


‘역시 재미삼아 다른 생명을 빼앗는다는 게 내키지 않아.’


낚시질은 했지만 그물질은 하지 않고, 활은 쏘았지만 둥지에 있는 새는 쏘지 않았다. 옛날 공자의 생명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설명한 문장이다. 살면서 다른 생명을 해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다. 미물도 이럴 진다 하다못해 사람은……. 유비는 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깨닫고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장수가 이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지금 그의 상태가 좋지 않긴 않은가 보다. 분별력이 몹시 흐려졌다는 걸 느낀다. 말을 모는 것에는 제법 재주가 있는 편이지만, 거친 산길인지라 아무리 천천히 말을 몰아도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래로 내려간 산길을 따르니 몸이 위아래로, 양옆으로 크게 휘청거리는데 꼭 자신의 앞날도 그런 듯 느껴졌다. 만약 지금이 전쟁터라면 유비는 벌써 죽었다. 생명을 해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장수라니. 하지만 아직도 유비는 가끔 악몽을 꾼다. 목이 졸린 채 몸부림치던 도적들을, 그 피로 물었던 설원을.


‘검을 버리지도 못하면서.’


유비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검은 왜 들었더라? 황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그의 고향이, 친구가, 가족이 위험해진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장각이란 사이비에게 홀린 황건적은 모두 빼앗고 죽였다. 소중한 사람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관우,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하지만 그때 유비의 마음에 사욕은 정말 없었던가?


‘어허∼ 내가 나 좋자고 이러나? 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거지. 안 그래? 유장군.’


아직도 기억난다. 의병장을 망설이던 자신에게 장비가 불러준 유장군이란 호칭. 몹시 설레었다. 그때 유비의 마음에 공명심이 없다고 차마 말 못한다. 하지만 정말 공명심만을 탐냈다면 유비가 동탁에게 등 돌릴 이유도 없다.


‘어어∼ 우리 유현덕이∼? 일루 와 봐∼ 함 안아보자∼’


동탁의 그의 눈앞에서 황건적을 죽였을 때, 유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은 시신 위에 옷을 덮어 예를 표하고 떠났다. 그가 괘씸하다고 소리 지르는 동탁을 뒤로 한 채. 아무리 출세가 좋다고 해도 사람답게 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기회는 언젠가 다시 올 거라고 믿으며. 이윽고 우중랑장 주준의 연락을 받아 완성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우여곡절 끝에 안희현의 현령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몇 해 되지 않은 이야기인데도 벌써 아득한 기억이 된 것 같다. 독우를 팼던 순간을 떠올리자 입술 사이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니 죄를 니가 알렷다? 어…… 막 백성들 폭행하고……? 여튼…… 그랬다며?’


그때 유비가 뇌물로 바칠 돈이 있었다면 오늘날 그의 인생도 달라졌을까. 독우 앞에서 그를 감쌌던 안희현의 백성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감히 그의 도주를 도왔다고 핍박을 받았으려나. 아예 독우를 때리지 않다면……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유비는 독우를 팼으리라. 눈앞에서 독우에게 얻어맞는 할머니를 보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어떤 계산도 하지 못하고 주먹부터 나갔다.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를 따르는 두 동생들은…….


‘언제까지 숨어다녀야 돼!’


추격자를 피하며 밤낮없이 도망치던 나날들. 독우는 분명 백성들을 학대하고 나라를 좀먹는 죄인이었음에도, 그런 그를 응징한 그들은 역적이었다. 분통을 터뜨리는 장비와 유비의 눈치를 보며 장비를 말리는 관우를 보며 유비는 생각이 많아졌다. 장비의 말이 맞았다. 평생 도망 다닐 수는 없었다. 그 하나라면 모르지만, 두 동생들까지 그렇게 할 순 없었다. 고심 끝에 하진군 밑에 가기로 결심했다. 공을 세우면 무죄라 했다. 그들 같은 죄인이어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받아준다는 것을 보면 상황이 얼마나 험난한 지 짐작 가능했다. 이건 의병장이었을 때와 상황이 달랐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유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계산이 있었다.


‘반란군을 죽여 신원을 회복하고 벼슬을 받는다.’


그와 동생들의 실력이면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그 뒤로 수차례 죽을 위기를 넘겨가며 공을 세웠다. 그때 죽인 반란군의 숫자 역시 모르겠다. 그들을 죽이면서 단 한 차례도 죄책감을 느꼈던 적도 없다. 유비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절박했다. 살아남는 것, 오직 그의 하나 목표였다. 유비는 잠시 한 손으로 얼굴을 눌렀다. 다들 사냥에 열중에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기 위해. 그 모든 행보의 결실이 오늘 여기라니.


하진군에서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받은 현위 벼슬을 거절한 것이 과욕이었나. 그렇게 죽을 고생을 몇 번이나 넘기면서, 쓰레기같은 음식도 참고 먹었던 유비에게 현위는 성에 차지 않았다.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작은 벼슬이어도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생각은 함에도 현위는 그들에게 보상이 되기엔 너무 부족했다. 또 독우같은 놈이 감찰관이랍시고 찾아와 뇌물을 요구하겠지. 아, 안 된다. 두 동생들에게 다시 이런 꼴을 겪게 할 수는. 부끄러움에 귀가 절로 화끈거렸다. 유비는 자신이 난세에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도 난세에 맞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눈을 딱 감고 오게 된 곳이 이곳 북평이지만.


‘선배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걸까, 아니면 변한 걸까.’


공손찬이 어떤 사람이냐고 장비가 물었을 때, 좋은 선배라고 대답했던 것이 떠오른다. 유비의 눈빛이 흐려졌다. 밤중에 홀로 그를 찾아 온 공손찬. 토벌을 마쳤다고 했었다. 토벌…… 그때 안겼던 그의 품에 피냄새는 없었나. 모르겠다. 그냥 기쁨과 설레임이 가득했던 것만 기억난다. 말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려 유비는 말고삐를 다시 움켜쥔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정신을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한 번 떠오른 생각들이 미친 듯이 이어진다. 품에 넣어둔 담배가 간절히 생각나던 때.


“아, 안 돼!”


내리막길에서 또 한 번 몸이 크게 휘청거리던 유비가 말고삐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말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사를 따라 비탈길을 굴러 내려갔다. 쾅 하고 몸이 두꺼운 나무 밑기둥에 크게 부딪히면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유비가 반쯤 가물거리던 의식을 겨우 잡았다. 사람의 발자국이 거의 닿지 않아 눈이 두껍게 쌓여서 그래도 낙마의 충격이 덜했다. 머리가 흔들려 토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비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떨어진 걸까. 위쪽을 바라보는데 말이 보이지 않는다. 말이 아마 놀라 도망친 모양이었다. 활은 잃어버렸지만, 두 검은 몸에 단단히 매어놓아 여전히 그와 함께였다. 온 몸이 욱신거린다. 나무 기둥에 기대어 바로 앉았던 유비가 뒤늦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한심하다, 정말. 이제는 말조차도 못 타네.”


유비는 담배를 꺼냈지만, 품속에 눈이 들어갔는지 불이 붙지 않았다. 잠시 쉬던 유비가 검 한 자루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역시 그가 의지할 건 검뿐이었다.


“다시 올라가야지, 살려면 다시 올라가야지…….”


결국 이게 문제라니까. 이렇게나 자신이 싫고 비참하게 느껴지는데도, 이럴수록 더 강하게 와 닿는 삶에 대한 욕구.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다. 위를 올려다보며 유비가 햇빛에 눈을 찌푸렸다. 눈밭이 태양을 반사해 내리막길 전체가 빛나는 것 같다. 그래도 대략 헤아려보니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 다시 원래 위치로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다. 공손찬이 말도 잃어버리고 엉망이 되어서 돌아온 그를 보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사냥을 매우 잘 즐기고 있답니다, 선배님.


측면으로 돌아서 감에도 눈길이 너무 미끄러워 몇 번이나 더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손끝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눈 덮인 산 속이라 이렇게나 추운데도 온 몸에 땀이 비오듯 흘렀다. 나무가 주변에 울창해진 게 더 깊은 산속에 올라온 것 같다. 그래도 이제부터 길이 원만해져 다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비는 긴장감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온다.


“내가 하는 일이란 항상 이렇다니까.”


뭘 해보겠다고 하면 결국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유비는 그때 현위 벼슬을 순순히 받고 공손찬에게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런 부질없는 가정을 하며 자학했다. 그는 공손찬의 학살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찬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대체 뭘까. 그를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공명심을 탐해서일까.


‘사랑이라…….’


사랑했지. 분명 공손찬을 사랑했다. 그의 품에 안겨있을 때, 두 동생이 곁에 있을 때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그와 처음 입술을 겹쳤던 순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를 보던 공손찬 눈동자에 떠있던 열망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취기라고 변명할 수 없었을 정도로. 감히 그가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지위에 올라간 상태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다정하고 자상했던 선배를 사랑했다. 그를 보던 그 또렷한 눈동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 그 감정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공손찬은 그때 설원에서 그의 마음까지도 베어버린 걸까.


‘막사에 너를 위한 선물을 마련해 두었다. 사양하지 말고 쓰렴, 내 마음이니.’


‘아무쪼록 내일을 즐겨주렴, 이번 사냥은 사실 너를 위해 계획한 거란다.’


그렇게나 다정한 사람인데, 이제 그가 버겁게 느껴졌다. 유비는 과연 공손찬을 사랑하는 걸까. 그게 이렇게나 고통을 주는 감정인가. 지금의 공손찬은 그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 아니었다.


‘백성이라니, 말은 잘 해야지. 도적이다, 비야.’


그의 곁에 있으면 자신이 이상해질까 무섭다. 난세가 공손찬을 이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걸 유비가 못 봤던 걸까. 유비는 동탁을 떠나듯 공손찬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이 마음 속 거부감, 이게 사랑인 걸까. 아니면……. 공손찬이 보여주었던 표문이 떠오른다. 도적을 죽인데 유비가 큰 활약했다며, 그에게 벼슬을 내려달라던.


‘형님이,,, 아우가,,, 떠나는,,,’


간밤 관우의 악몽을 몰아내기 위해 필요한 건……. 유비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신음하던 순간.


‘뭐지?’


감각이 예민해졌다. 뒤늦게 유비는 검을 고쳐 잡으며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사람의 인기척은 없고 오직 나무와 하얀 눈만이……. 아니, 아니야. 저건…….


‘빨간 눈.’


유비의 몸이 흠칫 굳었다. 처음엔 눈 덮인 산 사이에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둥둥 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다시 보자 짐승의 형상이 보였다. 하얀 늑대 한 마리가 조금 멀리서 거리를 둔 채로 유비를 보고 있다. 방심했던 동안 이만큼이나 거리를 허락하다니. 유비가 아주 조심스럽고 천천히 검 한 자루를 빼며 자세를 취했다. 하얀 늑대라면 길조라고 여겨지지만, 지금의 유비는 탈 말도 없이 혼자였다. 늑대는 절대로 홀로 있지 않는다. 무리 짓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이렇게까지 없다. 여기서 그가 죽는 걸까? 늑대의 움직임에 따라 거리는 서서히 좁혀지고 있지만, 도망은 칠 수 없다. 짐승의 눈빛이 사납다. 이대로 등을 돌리면 꼼짝없이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하지만 곧 유비는 이상함을 느꼈다.


‘무리가 다 사냥당한 모양이군.’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유비는 다시 늑대에게 집중하면서 다른 한 검을 마저 뺐다. 늑대가 커다란 송곳니를 보였다. 짐승이어도 무리를 잃었으니 복수심이 가득하다. 곤란하다. 살인에는 익숙해도 짐승 사냥에는 익숙하지 않다. 하물며 독이 오른 짐승이라면 더. 스스로의 생각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참은 순간, 그 짧은 허점을 눈치 채고 늑대가 튀어 올랐다. 유비는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전장에서 닳고 닳은 장수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정도로 순간적인 움직임이었다.


서로가 필사적이었다. 유비는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늑대를 위협했다. 검 끝에 베인 늑대가 움찔하고 거리를 벌렸을 때, 유비는 발 밑의 눈에 갑자기 미끄러지고 말았다. 뒤로 자빠면서 검 하나를 놓쳤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늑대가 먼저 달려들었다. 짐승은 급소를 노릴 줄 안다. 가까스로 검을 쥔 다른 손으로 늑대를 막았지만, 목은 이미 송곳니에 긁힌 다음이었다. 까딱하면 목덜미를 물어뜯긴 채 죽을 뻔 했다. 공포가 실감되면서 눈앞이 하얗게 되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유비는 늑대 위에 올라타 검으로 찔러 죽인 상태였다.


“헉, 헉,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유비는 늑대의 눈에서 생명이 다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짐승의 빨간 눈에서 서서히 생기가 사라져 갔다. 유비를 바라보는 짐승의 눈가가 젖어있는 것 같다. 쟁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유비는 완전히 숨을 거둔 늑대의 눈꺼풀을 감겨준 뒤,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덜미를 문질렀다가 다시 손바닥을 보니 피가 가득했다. 눈에 손을 문질러 닦는데 갑자기 가득한 피를 보니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날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 나는, 나는…….’


유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떨어지자 눈밭이 핏빛으로 젖어들었다. 얼굴에 튄 피도 같이 흘러내린 탓이었다. 잔뜩 베고 찌른 흔적들. 그가 죽인 늑대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눈밭이라서일까, 벌써 늑대의 시신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유비의 뺨에서는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촉하는 쟁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이윽고 유비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늑대를 들쳐 업은 채 일어났다.


“형님!”


멀리 군영이 보인다. 그가 가장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유비는 지쳐서 아예 늑대를 눈밭에 끌고 있었다. 관우를 보자 긴장감이 풀어진 건지, 유비의 무릎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쓰러지려는 그를 관우가 부축해주었다. 그 품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익숙한 동생의 체향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한 발자국 늦게 들어온 장비가 대신 늑대를 들어주었다.


다시 검을 지팡이 삼으며, 잠시 발밑만을 본 채 걷던 유비가 고개를 들었다. 제일 앞에 우뚝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공손찬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그랫듯 유비를 보는 공손찬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유비가 우뚝 멈추어 선 채 공손찬을 바라보았다. 별안간 아직도 늑대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같은 착각이 든다. 피비린내가 어디선가 물씬거리는 것 같다. 유비가 천천히 미소지었다. 오늘 그는 난세에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깨달았다. 검을 쥔 손에 핏줄이 가득 섰다.







“비야, 많이 다쳤니.”


공손찬이 막사를 찾아오자, 유비는 그의 상처를 돌봐주던 두 동생을 내보냈다. 공손찬이 유비의 목에 난 상처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아얏, 따가워요…….”


유비는 공손찬의 손끝을 살짝 저지하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애정이 가득한 초록색 눈동자가 부담스러운 듯 유비가 눈을 피했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도 영광의 상처죠?”


결국엔 이런 거였다, 난세를 산다는 건. 웃고 있는 유비의 가슴은 서늘했지만, 천하의 공손찬도 그 사실은 모를 터였다. 한동안 몽롱하던 유비의 머릿속도 지금은 더없이 맑고 깨끗하다.


“늑대 가죽은 백규 형께 드릴게요. 어제의 답례입니다. 드디어 저도 드릴 게 하나 생겼네요. 별 것 아니지만…….”


이런 말을 눈 하나 깜빡 않고 할 수 있다니, 유비는 자신이 놀라웠다. 사람의 변덕은 정말 종 잡을 수 없구나. 목덜미 흉터가 별안간 따갑게 느껴졌다. 공손찬이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유비에게 말했다.


“역시 사냥이 네게 도움이 된 거니?”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해요, 백규 형.”


유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공손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유비는 잠시 눈을 움찔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맞닿은 입술 사이서 섞이는 뜨거운 살덩이. 공손찬의 한 손이 유비의 허리띠를 풀어내고, 다른 한 손이 옷 사이에 스며든다. 공손찬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가 목덜미에 닿았을 때, 유비가 그의 팔을 붙잡고 가냘픈 목소리로 저지했다.


“아, 형, 지금 여기서는…….”


“네 동생들도 없잖니, 비야…….”


공손찬이 잠시 멈칫했다가 피식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더 노골적으로 유비의 목을 핥았다. 순간 유비의 표정이 흔들렸다. 만약 지금 공손찬이 그를 보았다면 위화감을 느꼈을 정도로. 이윽고 유비가 공손찬의 등에 두 팔을 휘감았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백규 형이 제게 해되는 걸 할 리가 없잖아요. 저를 아끼시니까요…….”


공손찬의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유비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유비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잠시 혀가 얽혔다가 떨어졌다. 공손찬이 감격한 눈빛으로 유비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력적이던 목소리가 더욱 귓가를 사로잡는다.


“비는 내 사람이지?”


유비는 공손찬의 손을 잡아서 자기 가슴 위에 올린 채 미소 지었다. 흥분감에 거칠게 펄떡거리는 심장에 공손찬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상처가 다시 따끔거리지만, 아무도 유비를 비난할 순 없다. 그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은 난세인 것을. 그를 강하게 끌어안는 공손찬에 잠시 숨을 쉬기 힘들다.


‘비야, 너는 내가 죽으면 울어 줄 거지?’


공손찬이 만약 지금 물어본다면, 유비는.





공자에게 제자 자장이 의혹을 분별하는 법을 묻자 그가 답했다. 사랑할 땐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땐 그가 죽기를 바라나니 이미 그가 살기를 바라고 또 죽기를 바란다면 의혹될 뿐이다. 진실로 사랑해서가 아닌, 매력에 잠시 의혹된 것이다.



다크써클님(@anzkakzk12)께서 한 장면을 그려주셨습니다 >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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