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머리 사내는 원의를 절벽으로 밀면 분명 명이 구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자신은 그 틈을 타서 여기를 벗어나면 되었다. 

  '여기에서 굳이 개죽음 당할 필요는 없지. 잠시  가욋돈 좀 벌어보려다가 이게 무슨...'

  우두머리 사내는 그래도 말이 새어나갈 염려는 없을것이라 다소 안심하였다. 제 수하들이 다 죽어서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다시 가욋일을 같이 할 수하들을 모으려면 좀 귀찮긴 하겠지만. 사내는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저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젠 더이상 자신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중턱 즈음 왔을까. 아랫쪽에서 많은 횃불들이 어른거렸다. 

  '쳇! 관군들이군. 이쪽으로 가면 안되겠어. 돌아가더라도 저쪽으로 가야겠군.'

  사내는 방향을 반대로 틀어 멀리 돌아가는 길 쪽으로 빠르게 걸어내려갔다. 방향을 튼지 일각(一刻, 약 15분)이 채 되지 않을 때였다. 희끄무레한 물체가 나무 뒷쪽에서 어른거렸다. 

  사내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노려보았다.

  "누...누구냐? 사람이면 나오고, 귀신이면 썩 꺼져라!"

  그의 말에 나무 뒤의 물체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사내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이 한 말대로 나오는 것을 보니 사람일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귀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온몸이 오싹하였다.

  "혼자 살아남아 그리 도망치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사내는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좀전의 두려움이 싹 사라졌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을 보아서는 귀신이 아니라 사람임에 틀림없으니까.

  "누구냐! 누구길래 이 밤중에 내 앞길을 막는 것이냐?"

  사내는 자신이 혼자 살아남은 것을 저 여인이 어찌 아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으니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여인의 복장은 특이하였다. 삿갓 같은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으면서 그것의 테두리를 흰 면포로 두른 상태였다. 옷은 온통 흰 옷이었으나, 소매 끝쪽에 붉은 모란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의 소매 끝으로 시선을 이동시킨 사내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당...당신은?"

  "흥! 알아는 보는구나. 돈에 눈이 멀어 이 붉은 모란도 못알아보는가 했더니."

  사내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검을 잡고 있을 지경이었다.

  저 복장과 소매 끝 붉은 모란은 홍화회(虹花會)를 뜻하였고, 그 중에서도 저리 붉은 모란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은 바로 홍화회주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여기에 왜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이 시각에, 정확히 자신의 앞에. 아까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때 자신이 가욋일을 하던 것을 알고 있는 듯 하였다.

  간신히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그래, 기껏해야 무영단(無影團)의 눈과 귀가 되는 홍화회(虹花會)일 뿐이다. 무영단의 손과 발이 되는 흑연회(黑燕會)와는 달리 첩보들만 다루는 이들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홍화회주를 죽여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신경을 집중하여 주변에 인기척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눈 앞의 이 홍화회주 말고는 아무도 없는 듯 하였다. 안심한 사내의 눈에는 불순한 광채가 돌았다.

  "호오, 여기에서 나를 없애면 모든 것이 묻히겠다고 생각하는가보지? 그래, 여긴 나 혼자 왔고, 나만 죽이면 넌 자유의 몸이다. 허나..."

  홍화회주의 뒷말은 우악스러운 사내의 검격(劍擊)에 끝맺지 못했다. 아니 끝맺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짓쳐 들어오는 바보같은 이의 검날에 한숨이 말보다 더 먼저 나왔을 뿐이었다.

  가볍게 사내의 일격을 피한 후에도 여러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내었다. 사내는 홍화회주를 베어내지 못하자,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홍화회인데 어떻게..."

  "어떻게 네놈의 검을 피할 수 있는 것이냐고? 그래, 네놈은 흑연회에서도 고위부에 속하지 않으니 모르는 것이 많을테지."

  흥미가 없다는 듯이 홍화회주는 다시한번 자신을 향해 검을 내리치는 사내의 손목을 빠르게 쳐내었다. 그가 떨어뜨리는 검이 땅에 닿기도 전에 발등으로 걷어 올려 손에 검을 쥐고는 단 한초식에 그의 목을 베었다.

  사내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즉사하였다.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그의 눈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왜 단순 첩보만 다루는 홍화회의 사람에게 죽어야 하는지 영영 알 수 없었다.

  홍화회주는 피가 묻은 검을 쓰러진 그의 주검 위에 던졌다.

  "홍화회가 단순히 웃음을 팔면서, 이야기를 퍼트리고 수집하면서 홍화회로써 존재하는 줄 아는가보지? 쯧쯧. 그러니까 네놈은 고위부가 아니니까 모른다는 것이야. 흑연회에서 특별히 선발된 이들만 홍화회로 간다는 것을... 네놈은 모르는 것이지. 홍화회는 불필요한 무력을 쓰지는 않을 뿐... 아니, 그런 무력을 쓰기도 전에 모두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야."

  홍화회주는 천천히 면포를 걷어 올리고는 죽은 사내에게 침을 뱉었다.

  "흑연회의 일이 아닌 사사로이 돈을 벌기 위해 흑연회 인원을 써서 한 것을 단주께서 아시면, 네놈이 이렇게 곱게 죽을 수 있었을까? 나 정도 되니까 네놈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것이다."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홍화회주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며, 산 윗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자신이 가려고 했던 길을 관군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소식을 너무 늦게 받는 바람에 이 일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우두머리 사내를 해치운 것에만 만족해야 할 듯 싶었다. 자신 역시, 이 죽은 사내와 마찬가지로 사사로이 움직이는 것이니 더이상 나설 순 없었다. 관군들이 먼저 산 위에 올라가 그들을 발견하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그들이 무사한 상태로 제때에 발견해주길 바랄 뿐.

  '도련님, 아씨.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뿐인 듯합니다. 부디 무사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하셔야 그분의 힘이 되어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제발 무사하소서.'

  그녀는 걷었던 면포를 다시 드리우고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석의 어이없는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가 따갑게 세 명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원의와 일월의 얼굴은 급속도로 창백해지면서 얼어붙었다. 명 역시 굳은 표정이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채 받아낸 연희를 제 뒤에 있는 원의에게 건네었다.

  "하하하! 네놈, 아니, 네년... 계집이면서 감쪽같이 속였구나! 이제 네년의 목숨은 엎드리고 빌어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아버님이 네년을 아낀다해도 계집이란 것을 알고도 그러하실까? 아니, 강상의 도(道)를 어긴 죄(罪), 그리고 계집임에도 사내로 속이고 과거를 봤으니, 임금을 속인 기군지죄(欺君之罪)를 어찌 눈감아주실까? 아니지, 아니지, 우리 대쪽같은 성미의 아버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지. 흐흐흐. 결국 이러나저러나 네년은 곧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지!"

  석은 뜻밖의 발견으로 오늘의 모든 낭패가 한꺼번에 해결되는 듯하였다. 이로써 눈엣가시같은 명도 없애고, 보란듯이 일월이를 제 첩으로 데려갈 수 있을테니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을까. 돈을 좀 들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아니 최상의 결과였으니 만족할만 했다.

  석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만면에 띄고 있을 때 명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그... 그건..."

  일월이 바라본 명의 모습은 혼란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만약 저라면 단 네 명만 있는 이 자리에서 석만 해치우고 조용히 없는 일로 하리라.

  하지만, 그리 못하는 것은 명의 성정에 제 피붙이를 제 손으로 죽일 수 없을거니와, 지금 석의 손에 잡혀있는 자신이 다칠까봐 손쓰기를 주저할 것이리라.

  "서방님, 여기엔 우리 넷 밖에 없습니다. 이 짐승같은 놈만 없애시면 모든 일은 오늘 밤 어둠 속으로 묻혀버릴 것입니다."

  일월이 명을 향해 외쳤다. 자신의 안전일랑 신경쓰지 말라는 그녀를 명은 슬픈 눈으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흥! 열녀났네. 하! 내 친히 네년의 목숨을 거둬가야겠다."

  석이 세상 더러운 것을 본 것마냥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지껄였다.

  "그럴 순 없습니다! 어찌 아주버님께서 서방님의 목숨을 말할 수 있으십니까! 이 모든 일을 저지른 것은 바로 아주버님, 당신 아닙니까? 서방님이 사내로 속인 것은 자신의 의지로 그런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목숨까지 거둬갈 일은 아니지요! 허나! 가족들을 해(害)하려한 아주버님의 행태는 그것보다 더 중(重)합니다."

  원의의 침착하면서도 날카로운 꾸짖음이 석의 심기를 뒤틀리게 하였다.

  "흥! 웃기고 있네! 아하! 네년도 계집이 좋아 이년한테 시집온 것이로구나! 하하, 세상 말세네, 말세야! 미친 것들이네! 셋이서 몽땅 짜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일테지! 어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갖고 나를 겁박하려 하느냐? 오냐, 여기에서 저 천한 년 하나만 내 손에 죽으면 네년들의 입장은 내 말하지 않고 넘어가주지. 어떠냐, 차라리 여기서 내 손에 죽을테냐, 아니면 이년들 모두 망신당하고 쫓겨나가면서 네년도 죽을 것이냐?"

  명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일월은 마주보고 있는 명의 표정이 혼란스러움에서 마침내 마음을 굳히는 쪽으로 천천히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명의 저 표정은 분명... 잘못되었다.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기어코 들고 있던 검을 석의 발치 아래에 던져주는 명이었다. 석은 검을 얼른 주웠다. 그 와중에 일월은 놓지 않은 채로.

  "안돼! 안됩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시시비비를 가려도 늦지 않습니다. 어찌... 어찌... 목숨을 내놓으려 하십니까?"

  원의가 절규하듯 명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연희를 안고 있는 두 손이 남지 않았기에 천천히 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이는 명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절규하며 울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제가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것이라면, 부인과 일월이라도 괜찮은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이치 아니겠습니까. 미안합니다. 부인."

  명이 살짝 돌아보며 울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아직도 석에게 붙잡혀 그의 앞에 여전히 속박된 일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내가 그랬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키겠다고."

  웃는 그 얼굴이 너무 슬퍼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명이 없이 자신이 살아갈 수 있을까? 

  저 얼굴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 짧은 시간 일월의 머리엔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명이 석을 향해 한발짝 더 다가섰다. 석이 한껏 웃음을 띄우며 검을 들어 명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흠, 뭐 이렇게 끝내려니 싱겁네. 일월이 이년은 내가 잘 데리고 살아주마. 네년이 그리 좋아해 마지 않는 저 천한년이 내 손에 죽기 직전인데, 앞으로 서방될 사람으로써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는 주지. 흐흐."

  징그러운 웃음이 더욱 기분 나쁘게 귓가를 어지럽히자 일월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곤,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천천히 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지켜준다는 그 약속, 대신 다른 약속으로 바꿔주면 안돼?"

  마치 지금 옆에 자신을 잡고 있는 석과 그가 들고 있는 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안돼.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이번엔 내가 널 지켜줄 차례야."

  명 역시 담백한 웃음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재희랑 연희, 그리고 너까지 셋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다른 약속으로 바꿔달래."

  다시한번 싱긋 웃으며 가벼운 농담처럼 말하였다. 명의 등 뒤에 서 있는 원의는 하릴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명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의 시선을 느꼈던 걸까. 명이 살짝 고개를 돌려 원의를 바라보고 사랑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곱게 휘어진 눈꼬리와 평소보다 쳐진 눈썹에서 진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부인께는 미안합니다. 이번 생에서 못다한 시간은 다음 생에서 꼭 갚겠습니다. 못난 제가 부인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이 방법 밖에 없어서 송구합니다."

  명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목례하였다. 원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인데, 이리도 허무하게 함께하는 시간이 사라지다니.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하고 싶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준 명이었기에 그리하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명이 잠시 그녀의 곁에 다가와 꽉 끌어 안았다.

  "살아주세요. 부디. 제 대신 살아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재희, 연희를 예쁘게 잘 키워주세요. 부인을 이리 혼자 두게하여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그 누군가가 죽어야만 한다면 제가 되어야 합니다. 부인, 저와 약속해주세요. 절대로 제가 없어도 나쁜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네?"

  명은 그녀의 의마에 짧게 입맞춤을 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명의 품에 안겨 흐느끼던 원의는 아랫입술을 꽉 문 채  고개를 들어 명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가득한 눈을 명의 얼굴에 고정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하셨서요. 고마워요. 부인."

  더이상 그녀를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싱긋 그녀에게 웃어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곤 다시 석의 앞에 다가섰다.

  "푸하핫! 미친 것들. 지랄도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래, 죽기 전이니까 눈 감아주지. 자, 준비됐냐?"

  여전히 풀어헤쳐진 상투머리와 굳은 피를 얼굴에 덕지덕지 묻힌 석이 웃으니 그 표정이 가히 기괴하였다.

  "잠시만요. 죽더라도 꼭 한가지만 약조 받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도적들에게 죽은 것이고, 형님께서 이들을 구해내신 것으로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모든 것은 그대로 묻어주시는 것으로 해주시지요. 또한, 재희와 연희는 형님의 자식들이나, 원의 아씨, 아니 부인과 일월이가 맡아서 같이 키우는 것으로 해주신다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형님 손에 죽는다해도 원망치 않을 것입니다. 약조... 해주시는 것입니까?"

  각오가 서린 얼굴로 그에게 묻는 명의 목소리는 매우 굳어 있음면서도 상대방에게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 그래. 그렇게 하지. 어찌 되었든, 네놈, 아니 네년만 죽으면 내 앞길도 훤할테고, 내 속도 후련할테니 그까짓것들은 네년이 원하는대로 해주지. 그러니, 이제 그만 지껄이고 내 손에 죽기나 해라."

  말이 끝나자 마자 석은 명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 표정은 마치 희열에 찬 야차(夜叉)와 같은 모습이었다.

  명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기 보다는 자신을 찔러오는 검 끝에 시선을 두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기에 자신이 죽는 그 순간을 담고 싶었다. 검이 자신에게 가까워져 오는 것은 분명 매우 빠른 시간에 이뤄졌을텐데, 매우 천천히 보였다. 자신이 그 검날을 잡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아, 죽기 전에는 많은 것들이 천천히 보인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내심 포기하며 자신을 향해 가까워져 오는 검날을 지켜보던 명의 눈에 갑자기 의아함이 번졌다. 가까이 다가오던 검날이 잠시 끝이 흔들리더니 다시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인가 보았을 때는 이미 석의 몸뚱아리가 절벽쪽으로 위태롭게 밀려가고 있었다. 

  명의 시선은 석이 아닌 그의 옆에 있던 일월로 옮겨 갔다.


  일월이는 왜 저기에 있는걸까?

  월월아, 뭐하는거야?

  이리와, 거긴 위험해. 절벽이잖아. 

  왜 네가 그 방향으로 가는건데?


  "안돼!!!!!!"

  팔을 뻗었다. 어느 새 그녀의 몸이 절반 밖에 보이지 않았다. 먼저 보였던 석의 몸뚱아리는 절벽 밑으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황한 눈동자는 서둘러 일월을 찾아 더듬었다. 

  "꺄악!"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은 원의가 비명을 질렀다. 

  일월이 절벽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 명은 미친 사람처럼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보법을 쓰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빠르게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충분히 잡아채기 어려울까 초조함에 온몸의 근육을 채찍질하듯 깨우며 몸을 날리며 팔을 뻗었다.


  - 탁!


  가까스로 그녀의 팔을 잡아채었다. 

  "잡... 잡았어. 흑흑... 일월아, 내 팔 꽉 잡아!"

  절벽 끄트머리에 엎드려 절벽 아래 공중에 있는 일월의 팔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한 손으로는 그녀를 끌어올릴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한 팔을 급히 뻗어 그녀의 팔을 감쌌다. 

  "막동아..."

  그녀가 자신의 팔을 감싸고 있는 명을 바라보았다. 

  "바보야! 왜!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왜!"

  명의 울음 섞인 핀잔에 일월은 해맑게 웃었다.

  "바보... 내가 언제 지켜달라고 너 죽으래? 그런건 우리 막동이한텐 안어울리지."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잠시 찌푸려졌다.

  "이... 이익! 이 미친 것이! 날... 날 밀어 떨어뜨려?"

  명은 낯익은 목소리에 놀라 절벽 아래를 쳐다보았다. 일월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 저 미친 놈 명줄이 긴가봐. 내가 있는 힘껏 밀쳐서 떨어뜨리려 했는데..."

  석의 무거운 몸무게가 자신의 다리를 잡고 버티고 있는 것이 아픈지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일월아, 괜찮아?"

  명은 일월에게 석을 떨어뜨릴 수 있냐고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자신을 위해 석을 낭떠러지로 밀어 떨어뜨린 일월에게 차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을 잡고 버티며 끌어올리려 애를 쓸 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내가 끌어올릴께."

  그때 옆에서 원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방님! 횃불입니다. 사람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밝아진 그녀의 목소리에 땀을 흘리며 일월의 팔을 잡아 당기던 명의 표정도 밝아졌다. 아마도 성철에게 부탁한 관군일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자신들을 부르는 성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일월아! 아버님이 오셨어. 관군들과 함께. 조금만 기다려. 지금 나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관군들이 오면 끌어올릴 수 있을거야."

  명이 희망에 찬 목소리로 웃으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흐흐, 아버님이 오고 계신다고? 그래, 일월아, 저년 손을 꼭 잡고 있거라. 흐흐흐."

  석의 목소리가 자신의 다리 밑에서 들려오자 일월은 온몸에 소름이 끼쳐 올라왔다.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버티고 있는 석도 싫었지만, 저 말이 더욱 그러하였다.

  일월은 다리를 흔들어 그를 자신의 몸에서 떨어뜨리려 애를 썼지만, 이내 포기해야만 했다. 이젠 관자놀이에까지 굵은 혈관이 붉게 올라 더욱 벌개진 얼굴로 버티는 명의 얼굴이 힘들어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움직임 때문에 명의 몸도 조금씩 절벽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일월은 자신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고 하는 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월 한 명의 몸무게라면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저 밑에 매달려 있는 석의 무게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리고, 관군들과 성철이 함께 도착하여 자신은 물론이요, 석까지 끌어올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저 석이 분명 아까 자신들을 겁박한 것처럼 분명 명의 정체에 대해 떠들 것이 분명하였다. 일월은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일월아, 조금만 더 버텨. 버티면..."

  "아니."

  명은 멍하니 일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담았다. 아니, 담겨졌다.

  "바보야."

  "응?"

  "바보 막동이. 그동안 고마웠고, 즐거웠어. 내가 얼마나 널 좋아했는지... 사랑했는지... 너는 모를거야."

  "아냐! 아냐... 알아! 네가 날 얼마나 위해주었는지 당연히 알지. 내가 왜 몰라?!"

  다급하게 말하는 명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있었다.

  "후후, 그래. 그런 걸로 하자. 그래도, 내가 너보다 더 좋아해."

  "응, 맞아. 그래, 맞으니까, 얼른 내 손 잡고 올라와, 응?"

  명의 다급한 말에도 일월은 그저 웃기만 하였다.

  "막동아, 알잖아. 저 밑에 있는 저 사람... 살게 되면, 네가 살 수 없는거."

  "알아! 아니까! 내가 살지 않으면 되니까, 넌 그냥 올라오면 돼. 넌 살 수 있는거니까 그냥 올라와. 응? 제발, 일월아."

  말하는 명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림과 함께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일월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응, 그래. 그런데... 알잖아. 나... 제멋대로인거.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재희, 연희 잘 부탁해. 응?"

  "아니, 아니! 나한테 부탁하지마! 그냥 네가... 네가 키우면 되잖아! 난 모르겠어. 그런거, 네 부탁같은 거 모르겠어."

  "바보. 그러니까 바보라고 맨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놀린거잖아."

  "이... 미친 것들! 지금 이 상황에 뭐라고 지껄이는거냐! 빨리 날 끌어올리지 않고!!!"

  밑에서 석의 악다구니가 울려왔다.

 "거봐. 저 놈... 끝까지 우리 막동이 발목을 잡을거야. 그러니까, 우리 막동이 앞날은 내가 깨끗이 정리해 주고 갈께."

 웃으며 말하는 일월의 말에 명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아니, 일월아! 그러지 말고 내 말 들어봐. 응?"

  그 사이 가까이 다가온 관군들과 성철의 목소리가 바짝 다가섰다.

  "명아!!! 괜찮은 것이냐!"

  성철의 목소리가 지척이었다.

  "에잇! 내가 올라가겠다!"

  석의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오더니 일월의 다리를 덥썩 잡고 그녀의 몸을 밧줄 삼아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그만 놔줘."

  "아니, 안그럴거야!"

  "알잖아. 놔야만 할 때도 있다는 것."

  담담하게 웃는 일월의 얼굴이 평안해 보였다. 명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두 볼에는 땅바닥 흙과 함께 눌러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안그럴거야. 네가 죽을 이유가 어디있어. 내가... 내가 지킨다고 했잖아. 얼른 올라와. 제발..."

  어느 새 석은 일월의 허리까지 기어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 버티고 있었다.

  "이것 봐. 이젠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네. 나 지켜준다는 그 약속... 바꾸자. 재희와 연희 지켜주는 걸로. 응?"

  "아니... 아니야. 제발 그런 소리 하지마."

  이젠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물을 훔치고 그녀의 얼굴을 선명히 보고 싶었지만, 제가 잡은 일월의 손을 놓칠 순 없기에 그대로 눈물이 흘러 넘쳐 지나가버리길 기다렸다.

  "하아... 막동오라버니. 이제... 한계야.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줘."

  "싫어! 안놓을거야!"

  빙긋이 웃는 그녀의 얼굴이 순간 영원한 것으로 느껴졌다. 뇌리에 영원히 박제되어 떠나지 않을 그 얼굴.

  "하... 하지마! 그런 말! 제발, 하지마! 아니, 그러지마! 제발!"

  "우리 재희, 연희 잘 부탁해. 원의 아씨 눈에 눈물나게 하지 말고."

  잠시 웃던 그녀의 손이 명의 팔뚝에서 서서히 떨어졌다.

  "사랑해..."

  그녀의 말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아니, 천천히 멀어진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팔을 잡던 그녀 손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아아악! 뭐하는거야! 이년!!!!!"

  멀리 저 아래에서 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월과 함께 멀어지는 석의 목소리라도 가까이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의는 엎드려 목놓아 울고 있는 명의 옆으로 다급히 연희를 안고 달려왔다. 흐느껴 우는 명을 감쌌다. 제 눈에서도 눈물이 하릴없이 흘러내렸다. 까만 절벽 아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월의 모습도, 석의 모습도... 그 누구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덧 절벽 위 평지에 올라온 무더기 횃불들이 어지러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는 천천히,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명아... 어찌된 일인 것이냐? 분명 내 일월이와... 그리고 석이 녀석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명은 성철의 떨리는 물음에도 그저 엎드려 절벽 아래로 팔을 늘어뜨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작은 떨림과 함께 흐느낌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차마 성철의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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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결국... ㅜ.ㅜ 일월아, 미안...
사실 일월의 비중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 정도 분량까지 나올 등장인물이 아니었는데, 어느 덧 독자님들의 사랑을 받더니 쑥쑥 자라 주연에 가깝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네요.
독자님들의 사랑 덕에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가슴 아프지만 원래 그대로 가는걸로 결정했습니다.
일월주식 주주님들껜 죄송함다... ㅜ.ㅜ
늦었지만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창한 5월의 봄입니다. 늘 놀고싶은 초보작가 한량이라... 휴무일엔 계속 놀러가고픈데, 제 글을 기다리시는 독자님들을 생각하며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글 쓰려 노력하고 있습니당. ㅎㅎ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함께 호흡해주시길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초보 작가입니다. 사극 동양풍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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