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지적 독자 시점 단행본 3부에 수록된 성남대참사 외전 직후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 스포 주의!










수영은 보란 듯이 나태한 자세로 늘어졌다. 마음이 못내 불편했기 때문이다.


야, 나는 오늘 처음 입주한 거니까 니들이 나 대접해. 그래요, 알겠어요. 여기까지는 수영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 뒤 ‘난 요리 못하니까 앞으로도 요리는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다, 다른 집안일도 대부분 마찬가지다’라고 지껄였을 때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오자 수영은 거들먹거리던 태도를 잃고 말았다.


누군가와 같이 산 적이 없는, 심지어 부모와도 제대로 같이 살아보지 못한 수영일지라도 가사분담이 원활한 동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흔쾌히 면제해준 두 사람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특히 유상아에게 그랬다. 이수경이야 제 아들 생각나서 그랬다 쳐도, 유상아는 한수영에게 그다지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연장자인 이수경을 빼고 둘이 집안일을 도맡자고 닦달할 성격이 아닌가.


수영이 어리둥절하다 못해 불편해하든 말든 유상아와 이수경은 식사 준비를 거의 끝내가고 있었다. 자작나무 합판으로 만들어진 식탁 위에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찬이 속속들이 올라왔다. 몇몇 재료가 괴수에서 비롯됐다는 것만 빼면 멸망 전의 가정식과 다를 것도 없었다. 수영은 갓 지어 김이 오르는 흰 쌀밥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더더욱 열정적으로 건방진 자세를 취했다. 이 뜻밖의 환대에, 그리고 두 사람의 관대한 태도에 당황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뭐해요?”

“뭐? 뭐가.”

“왜 누가 잘못 뱉어놓은 껌처럼 앉아있냐고요.”



수영은 불분명한 욕을 뇌까리며 몸을 추슬렀다. 거만한 자세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꼴사나운 모습이 됐던 듯하다. 상아가 그 우스꽝스러운 자세에 대해 뭐라 더 말을 붙이기 전, 다행히도 수경이 수저를 놓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배고프지? 밥 먹자.


유상아가 집밥이 나쁘지 않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 건 허세가 아니었다. 유중혁이 한 음식만큼 대단하진 않았어도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내놓기 부끄러울 솜씨들은 아니었다.


손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한수영은 구성원이 아니라 객(客)이었다. 청객이냐 불청객이냐의 문제일 뿐, 언제까지고 이방인일 것이다……. 그 정도의 거리감이라면 손님인 한수영에게 관대하게 구는 것도 당연했다. 수영은 그 추측이 정답이 아님을 마음 한구석으론 알면서도 그렇게 의문을 묻어두었다.



“일촉즉발이었구나.”

“네. 이계의 신격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것치곤 소환되자마자 잽싸게 달려가던데.”

“수영 씨가 할 말은 아니죠.”



유상아와 이수경은 성남에서 일어난 일을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활발한 대화 탓에 식사 속도는 조금 느렸다. 수영은 둘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낄 생각이 없었으나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가 자신이었기에 자연스레 한두 마디 거들게 됐다.


유상아와 이수경의 대화를 적당히 맞받아치면서 수영은 슬쩍 수경의 눈치를 봤다. 대화의 화제는 당연하고 확실하게도 김독자에게로 향했다. 떠나간 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괴롭지 않을까 했지만 이수경은 둘의 입으로 전해지는 김독자의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아무래도 이수경 역시 유상아처럼 김독자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근거도 없이 믿는 쪽인 거 같았다.



“잘된 일이야. 셋이라면 훨씬 든든하지.”

“이제 보니 날 부려먹으려고 데려온 거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어차피 시나리오 대부분은 힘을 합쳐 클리어했잖아요.”



김독자 컴퍼니의 일원들은 분명 강력한 화신들이다. 그러나 김독자가 없는 지금, 컴퍼니의 두뇌 역할을 할 사람은 사실상 이 둘밖에 없었다. 유중혁도 가능성이야 있지만, 배후성이 홍길동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역마살이 낀 놈이라 지휘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능으로든 통솔력으로든 자연스레 둘이 참모처럼 김독자 컴퍼니를 이끌어 왔을 것이다. 수영의 박한 평가로도 두 사람은 지금까지 상당히 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올라가는 난이도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수영의 도움을 필요하게 됐으리라.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던 ‘한수영 손님설’보다는 이쪽이 수영을 더 납득시켰다. 여전히 수영은 이방인의 위치였지만, 적어도 주는 만큼 돌려주는 계약은 익숙했던 덕이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이어지던 때 아닌 담소는 수영이 머물 방 이야기가 나오며 끝이 났다. 대뜸 같이 살자는 말을 꺼낸 주제에 수영이 머물 방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아는 준비된 줄 알았으나 침대가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상태란 걸 뒤늦게 알아챘다고 하겠다.


여기서 자면 된다고 매트리스를 손으로 누르자마자 폭삭 주저앉는 침대를 보고 유상아가 어찌나 당황하던지 수경도 수영도 참지 못하고 실소하고 말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서 한 번도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이 없단다.



“잠자리도 없는데 무턱대고 데려왔냐.”

“실수했어요. 일단 오늘은 제 침대에서 주무세요.”

“미쳤냐? 내가 니 침대에서 왜 자. 기분 나쁘게. 아까 보니까 소파 있던데 당분간 거기서 자지 뭐.”



멸망 이후 길바닥에서 노숙한 적도 많아 소파 정도면 하루이틀 지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상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적어도 매트리스라도 구해보겠다며 문을 나섰다. 제 딴엔 뼈 아픈 실수였는지 다소 다급한 외출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수영에게 나쁠 건 없었으므로 놔두었다.


오늘은 시급하게 처리할 일도 없었기에 수영은 한껏 나태함을 발휘하여 소파 위에 누웠다. 그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금세 인기척이 끼어들었다. 수영은 싫은 티를 숨기지 않으며 다가온 수경을 쳐다봤다. 불쾌할 정도로 흐뭇해하는 얼굴이었다.



“뭔데.”

“둘이 점점 친해지는구나.”

“그 나이에 벌써 노망이 왔나. 이계의 신격이랑 싸울 때 쟤가 날 죽여버리겠다고 했다고. 내 방식이 맘에 안 든다면서.”

“멀쩡히 살아있잖니.”

“그야 내가 더 세니까 그렇지.”



수영은 목 뒤에 불편하게 뭉친 후드 모자를 빼내기 위해 뒤척였다.



“……굳이 따지자면 쟤가 마음이 약하기도 하고.”



죽인다느니 뭐니 어울리지도 않은 소리를 꺼낸 주제에 상아의 모든 공격에는 살의가 없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유상아보다 한수영이 더 나쁜 년인 건 수영 본인조차 잘 알고 있는데도. 하지만 수경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정말 죽여야겠다고 결심했으면 네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셌어도 죽을 각오로 맞서 싸웠겠지. 이런 세상에선 깨끗한 척 할 일을 미뤄두면 안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니까.”



수경의 말에는 너도 다 아는 사실 아니냐는 기색이 은근히 깔려 있었다. 수영은 이계의 신격이 출현하자마자 곧장 달려온 유상아나, 뼈를 깎아내는 얼굴을 하고선 화신들의 목숨을 거둬가던 유상아를 떠올렸다. 여전히 적에게마저 자비가 앞서는 유상아지만 제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이 자신의 신념과 동료들의 안위보다 우선순위는 아닌 인간이었다. 수영도 그것은 알았다. 하지만…….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네가 398명을 정말로 죽이진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공격하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야.”



비릿한 조소가 수영의 입가를 점령했다. 수영과 그 여자 사이에 신뢰라는 말을 끼워 넣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첫 만남보다 사이가 온화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오로지 김독자라는 끈 때문이었다.



“걘 그저 <김독자 컴퍼니>의 일원에 손댈 수 없었을 뿐이야. 날 믿은 게 아니라.”

“유상아 씨에겐 그 두 문장이 그다지 다른 의미가 아닐걸.”



수영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수경은 그저 김독자와 지독히도 닮은 미소를 지었을 뿐, 끝끝내 설명해주지 않았다.










수영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수영은 글을 쓰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수영의 손가락은 멸망 전 가지고 있던 노트북 자판 위를 끊임없이 두드렸다. 그 작업은 몇 시간이고 계속됐지만 수영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자신의 글이 누군가가 살아가는 이유가 됨을 알았으므로.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시각, 수영은 목표했던 것만큼의 분량을 마무리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글을 업로드 하려고 마우스에 손을 뻗었을 때, 모니터 안의 검은 활자가 난데없이 부풀어 올랐다. 온 화면을 검게 물들인 활자는 기어코 화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새까만 물결이 수영을 삼켰다. 세상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암흑 속에 갇힌 수영은 급격한 무기력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영에게 글을 쓰는 일은 자아를 지탱하는 토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걸까 싶을 때, 균열과도 닮은 빛이 스며들었다. 수영은 그 빛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 빛은 점차 면적을 늘려가며 자꾸만 웅성웅성 귀찮게 굴었다. 수영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팔을 뻗었다. 손이 빛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빛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수영은 그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세상이 밝아졌다. 머리카락을 잡힌 미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발 뭐야?”

“유상아예요. 정신 들어요?”

“…….”

“정신 들면 손 좀 놔요.”



유상아는 잠버릇 참 고약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수영은 투덜대며 손을 놓았다. 그리고 일어나 앉았다. 몸 구석구석이 여전히 쑤셨지만 그래도 기절해있는 동안 유상아가 제대로 처치해준 듯 상태가 아주 나쁘진 않았다.



“얼마나 흘렀어?”

“2시간이요. 그거 좀 드세요.”

“잘 끝난 거야?”



그렇게 물었지만 수영은 마냥 잘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최악의 상황은 면한 모양이지만, 잘 끝났다면 이렇게 급조된 쉘터에서 머무를 이유가 없으니까.


수영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세히 살펴보아도 역시나 급조됐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주변의 폐자재를 대충 끌어모아 세운 벽은 어쩔 수 없이 군데군데 구멍이 있었고, 뼈대가 된 철근은 온통 녹이 슬어 있었다. 수영을 눕혀 놓은 자리도 흙먼지 가득한 마대자루를 깔아놨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유상아는 맨바닥에 앉은 채였다. 제대로 구색을 갖춘 건 중앙의 모닥불밖에 없다. 근거지도 없이 아무 데서나 잠을 자야 하던 때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상아는 일어나 앉은 수영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시나리오 초창기부터 종종 구워 먹곤 했던 괴수종의 다리였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체력 회복을 위해서라도 배를 채워두는 것이 좋을 테다. 잘 익은 다리에 입을 대는 수영을 보며 상아는 수영이 기절해있을 동안 일어난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삼두룡은 죽였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있겠지.”

“사람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건 실패했고요.”

“……전부 죽은 거야?”

“전부는 아니고, 반은 살았어요.”

“그럼 됐어. 우리 아니었으면 나머지 절반도 죽었을걸.”

“정말 그걸로 된 걸까요.”



유상아의 되물음에는 회의감이 깔려 있었지만 수영은 무시했다. 위로는 성미에 맞지 않았고, 그리고 수영이 생각하기에 이건 위로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난이도와 심각성만 본다면 이번 시나리오보다 성남에서 있었던 일이 더 어려웠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결과만 따져본다면, 성남에서 있었던 일은 분명히 ‘잘 끝난’ 일에 속했다.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긴 해도 전략은 잘 먹혔고, 이계의 신격이 출현한 것에 비해 피해는 거의 없었으니까.


한수영과 유상아를 비롯한 김독자 컴퍼니는 분명 일원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돌파해왔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깔끔하고 완벽한 성공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통과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유상아처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안위까지 신경 쓴다면 그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는 일이 더더욱 드물었다. 모르는 사람이 죽어 나갈 때마다 유상아를 위로했다면 수영은 지금쯤 ‘위로의 달인’이라는 수식언을 얻은 성좌가 됐을 것이다.


물론 유상아도 오래오래 청승을 떨지는 않았다. 매번 그렇게 지랄맞게 굴었다면 아무리 자비로운 김독자 컴퍼니 멤버들이라도 유상아를 버텨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유상아는 그 어느 때라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유상아의 신념이 변질되는 일은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가혹해지는 듯도 했다. 수많은 죽음에 무뎌지는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수영이 정말 신기했던 건,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의 목숨은 유상아에게 그다지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상아는 자기 바운더리 안의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구분이 예상외로 철저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유상아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신념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왜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봐요?”

“볼 게 너밖에 없으니까.”



생각에 깊게 잠기다 보니 시선 처리가 미흡했던 모양이다. 수영은 반쯤 억지를 부리고선 곧장 화제를 돌렸다.



“근데 왜 공단으로 안 돌아갔어? 시나리오 다 끝난 거 아니야?”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번 시나리오에선 삼두룡 처치와 결계 해제 시간은 별개래요.”

“뭐? 그럼……,”

“네. 앞으로 두 시간 정도는 이렇게 있어야겠네요.”

“아, 빌어먹을. 이 고집불통이랑 두 시간이나 같이 붙어 있으라니.”

“같이 사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듯하네요.”



시큰둥하게 핀잔을 주고선 유상아도 괴수 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수영이 더 시비를 걸지 않았으므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번 시나리오는 12시간 내에 머리 셋 달린 용을 쓰러트리고 온갖 위험 요소가 득시글대는 결계 내부에서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굳이 깨지 않아도 되는 서브 시나리오였지만 그 보상이 이후의 진행에 상당히 유용하게 쓰일 아이템이었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수영은 알림창에 떴던 퀘스트 내용을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목표가 ‘살아남는’ 것이니 보스 몹을 쓰러트려도 결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멀지 않은 고향’을 남겨 뒀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로 다 죽었을 거예요.”

“지금 우리가 고립돼서 뒈지게 생겼거든?”

“안 죽어요. 엄살 부리지 말아요.”



상아의 쌀쌀맞은 대꾸가 거짓은 아니었기에 수영은 콧방귀만 뀌고 말았다. 상아의 말대로 삼두룡이 죽은 이상 이 시나리오에 두 사람이 견디기 버거운 위험은 없다. 2시간만 잘 버티면 시나리오가 끝나 결계가 해제되고 이 구역은 정상화될 것이다. 컨디션이 최고조는 아니지만, 부상도 다 치료했고……. 상아를 훑던 수영은 그제야 상아의 허벅지에 피 묻은 붕대가 감겨있다는 걸 눈치챘다. 피는 선명한 선홍색이었다. 스며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리라. 자신을 치료했던 것처럼 유상아도 모든 상처를 치료했으리라 여겼던 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왜 안 치료했어? 회복템 충분히 들고 왔잖아.”

“사람들 나눠줬어요.”

“어이구, 성녀 나셨네.”

“애초에 이 상처는 수영 씨가 낸 거잖아요.”

“누가 덤비래?”



수영은 삼두룡 던전에 진입하기 직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의견 차이가 심해져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 이번에는 죽이네 살리네 하는 수준까진 아니었으나 온건함과는 거리가 먼 전투였다. 하지만 맹세코 크게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다. 아주 잠시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려 했을 뿐, 저 정도 상처를 남긴 건 정말로 실수였다. 살의를 보이지 않는 유상아여도 수영이 대충대충 상대할 만큼 약하지 않기에 힘 조절에 온전히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상아는 수영의 빈정거림에 뭐라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한 표정이 됐다.



“참, 그러고 보니 동대문 쪽 들러서 불꽃놀이 사기로 했는데 깜빡했네요.”

“불꽃놀이? 무슨 불꽃놀이?”

“불꽃놀이 몰라요?”



그러더니 입으로 피융 소리를 내면서 검지를 치켜들어 천천히 하늘을 찌르는 모션을 한다. 그러더니 제 머리꼭지에 다다르자 팡, 소리까지 낸다. 그 손끝을 어이없이 쳐다보면서 수영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건 뭐에 쓰려고.”

“파티하려고요.”

“파티?”

“곧 올해가 끝나잖아요. 송년회 할 때가 됐죠.”

“이야, 여유롭다. 누가 보면 세상 원상복귀 된 줄 알겠어.”

“사람들에겐 숨 돌릴 틈도 필요해요. 분명히.”



수영은 대답 없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상아의 말에 공감했으나 겉으로 맞장구쳐주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경계선이 변화하는 불꽃을 보며 수영은 상아가 그만 입을 다물어주기를 바랐다. ‘세상이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가치’ 같은 건 수영이 좋아하는 화제가 아니었다. 상대가 유상아라면 더더욱.



“올 거죠?”



그러나 상아는 수영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또다시 침묵을 깼다. 수영은 놀랐다는 기색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 모닥불에 고정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말했다.



“내가 거길 왜 가. 분위기 망칠 일 있냐.”

“공단은 물론 다른 지역 협력자들까지 초대하는 큰 파티예요. 수영 씨 하나 온다고 망가지진 않아요.”

“넌 몰라도 정희원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규모가 크다고 했잖아요. 불편하다면 마주치지 않게 자리를 배정할 수 있어요.”

“혼자 구석에 처박혀서 혹시나 정희원이라도 마주칠까 전전긍긍하고 있으라 이거네.”

“혼자가 아니면 올 건가요?”



수영은 이번에야말로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유상아의 질문에 내포된 뜻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파티 때 나랑 있겠다고?”

“그래요.”

“……제정신이야?”

“그렇게 자기비하를 할 필욘 없어요. 물론, 수영 씨가 같이 있기 피곤할 정도로 사람 속을 긁어놓는 건 맞지만요.”



그 장난스러운 태도가 수영을 더욱 당황하게 했다. 만약 유상아가 상냥하고 다정한 어투로 어르고 달래고 양보하는 태도로 나왔다면 수영은 상아의 제안을 무자비할 정도로 잘라냈을 것이다. 싸구려 동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비겁한 마음이라 매도하면서. 하지만 유상아의 말 어디에서도 같잖은 동정이라고 트집 잡을만한 구석은 없었다.


상아가 던진 폭탄 발언에 수영의 사고는 상아가 ‘같이 살까요’라고 물었던 날까지 튀었다. 처음에는 단둘이 같이 살자는 이야기인 줄 알고 이계의 신격이 상아의 정신에 지대한 상처를 남긴 게 아닐까 고민했었다. 둘만 같이 살자는 뜻도 아니고, 효율적인 협업을 위한 제안임을 알고 금세 페이스를 되찾았지만.


주거공간 내에서의 상아는 일할 때보다 훨씬 부드럽게 수영을 대했다. 그건 예상 범위 내였다. 수영에게는 고집불통으로 으르렁대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긴 했으나, 근본적으로 유상아는 사회생활에 능숙하고 선량한 인간이었으니까. 수영을 난처하게 했던 건 상아의 태도 완화가 괜한 충돌을 피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는 날이 아니라면 늘 밥을 같이 먹으려 했고, 시시콜콜한 주제로도 말을 붙였다. 김독자 컴퍼니의 그 시답잖은 친목질에 수영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시나리오와 하등 상관없는 아주 일상적인 일을 수영과 함께하려는 시도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유상아는 수영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왜 말이 없어요?”

“……조용히 해봐. 생각 중이니까.”

“그게 이렇게까지 고민할 제안은 아닌 거 같은데.”

“글쎄, 유상아 씨도 같이 있기 피곤할 정도로 속을 긁어놓는 사람이라.”



그 말은 상아의 시비에 어울려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반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유상아와 무엇이 옳은지,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지를 두고 싸우는 일은 늘 수영에게 짙은 피곤함을 남겼다. 그리고 그렇게 충돌할 때마다 수영은 상아와 자신의 사이에서 까마득한 골이 있음을 느꼈다. 유상아와 한수영이 정신 개조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좁혀질 리 없는, 아주아주 아득하고 끝이 없도록 깊은 골 말이다.


유료화 이전이라면 그냥 참 안 맞네 뒤돌아서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가치가 모두 무너진 세상에서 두 사람은 동료보다는 적으로 남는 게 어울리는 사이였다. 김독자가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렇게 됐을 것이다.


유상아 역시 그 지독한 간극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수영과 유상아는 영원한 평행선을 달린다. 수영의 냉소가 자신의 신념과 충돌하는 그 어느 때라도 상아는 수영에게 칼을 겨누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싸움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상아는 명백하게 한수영과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수영은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랑 단둘이서 뭐 하라는 건데. 그리고 넌 주최자니까 이거저거 바쁠 거 아냐.”

“주최자가 저 혼자가 아니라 괜찮아요. 어쨌든 가면 자연스레 뭐라도 하겠죠. 둘이 싫으면 수경 씨도 부를까요?”

“인원수가 문제가 아니라……. 난 그런 파티 자리에는 안 어울려.”

“그냥 노는 거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어딨어요.”

“내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였던 첫 번째 사도라도?”



마지막 말은 뱉지 말걸. 수영은 뒤늦게 혀를 찼다. 저렇게 말하니 마치 자행한 짓을 후회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수영은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는 일은 극히 적어졌지만, 여전히 이런 세상을 살아가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 중의 하나란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수영은 그저 넌 그런 나를 싫어해야 하는 게 아니냐 묻고 싶었을 뿐 후회를 토로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상아는 말없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다시 돌아온 그 손에는 부지깽이를 대체하려고 갖고 온 게 분명한 녹슨 파이프가 들려있었다. 상아는 그 끝으로 차근차근 몸집을 늘려가는 잿더미를 뒤적였다. 불이 사그라들 기미는 딱히 없었으니 대답을 유예하기 위한 행동이 분명했다.


상아의 옆얼굴을 흘끔거리던 수영은 결국 먹던 괴수 고기를 내려놓았다. 일렁이는 불빛에 따라 숱하게 음영이 변화하는 얼굴을 보니 마실 거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점차 번져나갔다. 상아는 수영의 갈증이 초조함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기 직전에야 잠갔던 입을 열었다.



“수영 씨는 아직도 저희가…, 제가 불편한가요?”



다소 직설적인 질문이었으나, 수영은 그것보다는 뉘앙스가 더 신경 쓰였다.



“넌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전 아니에요.”



상아는 말을 잃은 수영을 보며 장난스레 눈썹을 들썩였다.



“안 짜증 난단 소리는 아니고요.”



별것 아닌 시비에 쉽게 당해줄 순 없다는 오기가 정신을 들게 했다. 놀랐다는 사실을 이미 고스란히 들켰음에도 수영은 일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럼 내가 편하다는 말이야?”

“불편하진 않아요. 수영 씨가 불편하면 같이 살자 했겠어요?”



표정에 신경 쓴 게 무색하게도 수영은 한 번 더 당황했다. 같이 살다 보니 그럭저럭 익숙해진 것도 아니고, 그 전에 이미 불편하지 않았기에 제안한 거라니. 과거를 되짚어봐도 수영은 어떤 계기로 상아가 저를 향한 불편함을 누그러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너 오늘도 나랑 싸웠잖아.”“그랬죠.”

“그런데도 내가 안 불편해?”



비단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닌,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을 포괄하는 질문이었다. 수영은 그 속뜻을 구태여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유상아는 말하지 않은 속뜻을 읽지 못할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한수영 씨랑은 계속 부딪히겠죠. 오늘보다 더 심하게 싸우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고…….”



상아의 서두는 그동안 수영이 내렸던 결론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질 말만은 짐작할 수 없었기에 수영은 저도 모르게 상아의 입술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집중했다. 있는 힘껏 노려보면 그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미리 알 수라도 있는 것처럼.



“하지만 처음처럼 꺼림칙하진 않아요.”

“그러니까 왜.”

“수영 씨, 우리 같이 일한 지 2년이 넘었어요.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요.”

“고작 그런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영은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까지 친한 척 굴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지적하려 했다. 그러나 상아는 수영이 딴죽을 걸 것을 정확히 예상한 사람처럼 시원스레 말을 잘랐다.



“수영 씨와 저는 소중한 것이 같으니까요.”



잘못 들을 여지가 없는 뚜렷하고 분명한 어조였다. 그렇기에 더욱 불가해한 말이기도 했다.



“나한테 제일 소중한 건 내 목숨이야.”

“저도 비슷해요.”

“네가? 웃기지 마. 너보다 자기 목숨 등한시하는 건 김독자밖에 못 봤어.”



수영은 비리비리한 얼굴을 떠올렸다가 확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마음가짐 자체는 비슷한가……. 다만 모두의 저지를 뚫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력이 김독자에게는 있었고 유상아에게는 여태 없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저 제 목숨 그렇게 가벼이 안 여겨요. 그리고 독자 씨도 그런 마음은 아닐 거예요. 물론……, 독자 씨가 돌아오면 그 점은 진지하게 이야기해봐야겠지만.”



수영은 코웃음 쳤다. 비웃는 걸 숨기지 않자 상아는 억울한 듯 진짜예요, 강조했다.



“넌 지금도 사람 살리겠다고 쉬운 길 돌아돌아 가잖아.”

“돌아서 가도 될 정도로 힘이 생겼으니까요.”

“웃기지 마. 유료화 시작부터 그랬다는 거 김독자한테 다 들었어.”



수영은 김독자가 이길영, 이현성, 유상아와 어떻게 가치증명을 해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김독자를 제외한 모두가 패닉에 빠진 순간에도 유상아가 사람을 도우려 했다는 사실도. 참으로 김독자답고 유상아답다는 감상을 주는 이야기였다. 수영이 그때를 언급하며 넌 처음부터 그랬다고 재차 매도하자, 상아는 도리어 빙그레 웃었다.



“수영 씨는 정말로 저를 천사쯤으로 여기는 거 같네요.”

“아니? 천하의 머저리라고 생각하는데.”

“한수영 씨. 저는 그 가치증명 시나리오에서 살아남았어요.”

“내가 유령이랑 대화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겠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맞장구보다는 빈정거림에 가까운 수영의 대꾸에도 상아의 어조는 큰 요동 없이 이어져갔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들었어요?”

“김독자의 벌레 쇼 말이야?”

“네.”



상아는 맨손으로 벌레를 움켜잡았던 그 날을 떠올리는 듯 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흔들리는 듯 이겨낸 듯 복잡미묘했다.



“벌레를 잡아서 살 수 있는 사람 수는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정말 아비규환이었어요. 수영 씨는 작가니까 쉽게 떠올릴 수 있겠죠. 제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될까 말까 한 작은 메뚜기 하나에 수십 개의 손이 달려드는 장면 말이에요.”



수영은 어렵지 않게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고작 벌레 한 마리 때문에 서로를 밀치고, 할퀴고, 잡아 뜯으며 절박하게 손을 뻗는 사람들. 그리고 그 참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수십 개의 절박한 손을 꺾었다는 의미다. 수영은 그제야 상아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저는 살고 싶어요. 제가 살아남는 것이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하더라도.”



이해와 반발심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러나 그 두 감정 중 어느 하나라도 표현하기도 전에, 불길한 기척이 목 뒤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수영의 전신이 곧장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상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지?”

“모르겠어요……, 대단한 존재는 아닌 거 같은데.”



상아는 기척이 나는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쉘터의 틈으로 눈을 댄 상아가 곧 정체를 잡았는지 희미하게 미간을 모았다. 수영도 같은 행동을 했다. 4미터쯤 되는 도마뱀 형상의 괴수가 혀를 날름거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별것 아닌 괴수네요.”

“냄새를 맡은 거 같은데.”



수영은 둘이 먹다 남긴 괴수 다리 쪽으로 눈짓했다.



“자리를 옮기는 게 낫겠어요. 싸웠다간 오히려 다른 것들도 불러모을 수 있을 테니.”

“시나리오 종료까지 얼마나 남았지?”

“1시간 정도요.”



수영은 1시간 정도면 저 정도 급 괴수들과는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유상아가 치명적이진 않아도 부상을 입은 상태라는 게 맘에 걸렸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위험한 놈이 튀어나오면 곤란해진다. 수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상아는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새롭게 머무를 자리를 찾기 위해 은밀히 이동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간에 한 번 들킬 뻔하긴 했지만 다른 곳으로 주의를 끌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상아는 그때도 자기가 미끼가 되겠다는 멍청한 소리를 했다.



“역시 넌 네 목숨 소중한 줄 모르는 게 맞아.”



폐건물의 유리창 너머로 희미하게 동이 트는 게 보였다. 새로운 쉘터로 삼은 폐건물은 내부는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으나 외관은 그럭저럭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이한 수준의 괴수 사이에서 30분쯤 버티기에는 아주 충분해 보였다. 두 사람은 이번엔 불도 피우지 않은 채 건물 구석, 적당히 앉을만한 곳을 찾아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앉았다. 안전하다는 확신을 얻자 수영은 조금 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30분간의 이동 시간 동안 수영의 마음은 반발심 쪽으로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오늘따라 집요하네요.”

“네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수영은 어이없다는 감정을 더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 팔짱을 꼈다.



“그건 생존본능이야. 막 유료화가 시작돼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을 때고.”



몸을 벽에 기댄 채로 앉아있던 상아가 무릎을 굽혀 당겼다. 그 위로 턱을 괴고 수영을 빤히 쳐다본다. 어쩐지 흥미로워하는 투였다.



“다시 돌아가도 저는 그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살아남을 거예요.”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건 달라.”

“똑같이 사람이 죽는데도?”

“존나 다르다고.”



수영은 답답해서 발이라도 구르고 싶어졌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에 성공했단 이유만으로 실패한 자에게 죄책감을 품어야 한다면 시나리오 전부터 사형감인 사람이 발에 챘을 거다. 그 당연한 생태계에서 승리자의 위치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도태된 사람들까지 되돌아보다니. 그것만으로도 유상아가 어떤 인물인지 뻔했다.



“그리고 저는 불살주의도 아니에요.”

“어차피 널 위해서 죽인 것도 아니면서.”

“지금껏 제가 한 모든 살생은 저를 위한 거였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요?”

“어, 그래. 질질 짤 거 같은 얼굴로 사람 죽이던 거 똑똑히 기억하지.”



유상아의 이름조차 잘 모르던 때였지만 수영은 그 당시의 상아가 ‘내가 독하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동료들이 어쩌고저쩌고’라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음을 바로 알아보았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자 수영은 난데없이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누가 누굴 위로하나 거슬리기 시작한 게 짜증의 첫 번째 이유였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최근 유상아의 행보가 생각났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다 됐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건 너 성흔 남발하는 거로 얘기 끝 아니냐? 너 요즘 죽고 싶어 작정한 수준이던데.”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아요.”

“어쩔 수 없긴 뭘 어쩔 수 없어. 네가 그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거 자체가 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증거라고.”



어느 시점부터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수직상승 중인 것은 맞았다. 수영이 가진 정보가 통하지 않는 시나리오 역시 늘어났다. 그러나 그놈의 ‘모두를 살릴 방법’과 적당히 타협하기만 했었어도 유상아는 고작 3년 안에 설화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수준까지 도달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 상아가 다친 것도 수영의 힘 조절 실패가 아니라 유상아의 상태가 악화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정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수영에게 상아는 뜻밖에도 부드러운 웃음을 돌려주었다.



“감동인데요.”

“뭐야?”

“수영 씨가 이렇게나 절 위로하고 걱정해줄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수영은 대량의 코인을 뜯긴 듯한 표정이 됐다.



“작가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겠다. 어떻게든 너 좋을 대로 해석해서 이야기 만드는 게 노벨문학상 급이네.”

“문학적 재능보단 합리적인 추론이라 해주시겠어요?”



합리성은 어디 괴수한테 먹이로 던져준 거 아니냐는 소리를 필두로 수영은 어이없다는 감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것을 잔잔하게 미소 지은 채로 듣고 있던 상아는 수영의 기세가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정말로 제 목숨이 가장 소중한 거 맞아요. 그리고 그 때문에 덜 소중한 걸 포기하고 짓밟을 각오도 했고요.”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그건,”

“다만 제 삶 앞에 조건이 붙을 뿐이에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이라는.”



상아가 수영을 똑바로 직시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자리를 잡고 굳건해진 눈이었다.



“저만 살아남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 모든 희생도, 살생도 삶의 이유를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고, 모두 저를 위한 게 맞아요.”



점차 고개를 내미는 해가 창가에 앉아있던 유상아에게 어슴푸레한 역광을 드리웠다. 수영은 역광에 어두워지는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1분 1초 밝기를 더하는 빛에 유상아의 색소 옅은 머리카락이 더욱 옅어지고, 몸의 윤곽선이 빛무리처럼 불분명해졌다. 그 모습이 며칠 전 성흔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던 때를 연상시켜 가슴 한구석이 술렁였다.



“저는 살고 싶어요.”

“…….”

“소중한 사람들이랑 함께, 될 수 있는 대로 오래오래…….”



스스로를 돌아보듯 늘어지던 말꼬리가 이내 제 소망을 끝맺었다. 수영이 유중혁만큼 회귀한다고 해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복잡하면서도 무거운 결단이 담긴 소망을.



“정말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선 두 사람 다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어색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길어지고 나서야 수영은 자신이 숨죽이면서까지 상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영은 침묵 따윈 없었던 것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럼 적어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들만이라도 포기하면 되잖아.”

“그것밖에 답이 없다면 그렇게 할 거예요.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오래 살고 싶다며? 수명이 깎이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러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지.”

“저 지금도 <헤르메스 시스템>은 제 소원을 이루고 싶을 때 써요. 그리고, 수명이 깎이는 것과 삶이 끝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예요.”

“몰라. 네 말 들어도 난 이해가 안 가. 하고 싶지도 않아.”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싸우나 봐요. 사실 그 점에선 저도 수영 씨가 이해되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거든요.”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한 상아가 자리를 옮겼다. 기존의 자리보다 수영에게 훨씬 가까워진, 바싹 붙지는 않아도 수영의 옆자리라고 부를만한 자리였다. 햇볕을 피하기 위한 위치선정이라기엔 미묘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한 직후 제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 이상해 수영은 긴 대화의 시작을 다시금 상기했다.



“근데 왜 자꾸…….”



왜 자꾸 친한 척하냐고 물으려던 수영은 같은 뜻을 다른 표현으로 전달하기로 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을 파티엔 왜 초대해?”

“그게 그렇게 납득이 안 가요?”

“대답해.”



수영이 다그치자 옅게 한숨을 내쉰다.



“아까 말했잖아요. 전 한수영 씨 안 불편하다고. 그 심술궂은 얼굴 하루쯤이라도 느슨하게 풀면서 즐겼으면 해요. 서로 절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해도, 아무튼 수영 씨랑 저는 소중한 게…, 목적이 같으니까.”



수영은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대신 질문을 대체할 시선을 보냈다. 상아는 어렵지 않게 그 뜻을 읽고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말이에요.”



분명 형식은 대답이었는데 의문의 해소는 없고 더 깊은 의문만 불러온다. 수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내가,”

“내가 대체 누굴 좋아한다고~ 뭐 이런 말을 하겠죠. 얼굴만 봐도 뻔하네요.”

“뻔한데 왜 그런 개소리를 해?”

“결국엔 한수영 씨나 저나 최종적으로는 비슷한 결과를 추구하잖아요. 솔직히, 저는 저보다 수영 씨가 자기 목숨으로 줄타기하는 편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 줄타기로 김독자 컴퍼니를 누구 하나 낙오되지 않게 해줬고요.”

“보통 그런 방식이 보상도 좋고 장기적인 시나리오 클리어에도 이득이니까.”



김독자와 무언의 약속을 했다는 것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그 하나만을 숨겼을 뿐 나머지는 진심이었는데도 유상아는 비웃음에 가까울 정도로 짓궂은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요즘 부쩍 느끼는 건데, 수영 씨는 독자 씨를 닮은 구석이 있어요.”

“너 왜 갑자기 욕질이냐?”

“제가 언제 욕을 했어요?”

“김독자 닮았다며.”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게 욕이 아니라는 건 수영도 알았다. 유상아가 김독자를 나쁜 의미의 비유로 쓸 리가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신의 어떤 면을 김독자에 빗대는 건지 알 수 없었을 뿐이지. 김독자를 닮은 구석이 있는 건 오히려 유상아였다.



“아무튼, 파티는 오는 거예요.”

“왜 얘기가 그렇게 튀어.”

“안 오겠다는 소리 안 했잖아요.”

“지금 해버리면?”

“제한시간 끝났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마냥 기막힌 타이밍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시나리오 종료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상아는 알림창을 읽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일어섰다. 수영도 그렇게 했다.


폐건물의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세상이 일렁였다. 일렁임이 가라앉은 세상은 조금 전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수영은 그것이 결계가 깨지고 시나리오화됐던 지역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임을 알았다.



“돌아가죠.”



유상아는 별뜻 없이 말했을, 아주 평범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그 순간 극히 평범한 그 문장이 수영의 내부 어딘가에 숨어있던 감성적인 면을 건드렸다. 수영은 이 멸망한 세계에서 고정적으로 돌아갈 장소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 장소를 처음 제안한 것이 눈앞의 여자, 유상아라는 사실 역시 새삼스러운 감정으로 얼룩졌다.


거리는 아직 스산했다. 하지만 시나리오화가 끝나고 아침이 찾아오자 빠른 속도로 활력을 되찾아가는 중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반쯤은 무너지고 반쯤은 재건된 서울 한 귀퉁이를 걸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도, 대화도 없었지만 수영은 자꾸만 상아를 의식하게 됐다. 2시간가량이나 유상아의 속마음을 들었기 때문에? 돌아갈 장소라는 표현에 감성적인 기분이 되어서? 무엇이 이런 기분을 들게 하는 걸까 고민하던 수영은 곧 원인을 알아챘다. 수영은 상아와의 거리를 신경 쓰고 있었다.


수영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과 일상을 같이 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는 여자를 보았다. 당신을 죽여서라도 막겠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한다. 굳이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도 바로 옆까지는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도 그랬다. 때로는 상아가, 때로는 수영이 앞서 걷기도 했으나 두 사람의 거리는 일정 이상 멀어지지도 일정 이상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그건 의도된 것일까, 의도했다면 어째서일까……. 그런 의문이 희미하게 번져나갔지만 수영은 말로 꺼내는 대신 속으로 삼켜버렸다.


왜요? 수영의 시선을 느낀 상아가 물었다. 너 말고 해 뜨는 거 보고 있었어. 가볍게 둘러댄 수영은 시선을 발끝으로 돌렸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공단으로 돌아갔다. 친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러나 같이 걷는 것이 분명한, 절묘하고도 기이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독없3년 외전이 나왔는데 원작 기반을 안 쓸수가 없죠

같이 산 이후로 1년 안에 어떤 식으로 급격하게 가까워질까 가볍게 망상 좀 해보다가 갑자기 상아씨 캐해에 대한 생각이 많아져버린 작품.... 원작 상아씨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복습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면이 눈에 들어와서 늘 쓰기가 어려워요

상아씨 시점의 뒷이야기도 있긴 한데 시간 모자라니까 그건 연재물 쓰다가 또 딴짓하고 싶어질 때 쓰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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