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아직도 회색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방 안의 습도가 높았다. 그는 어쩐지 눅눅하게 느껴지는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물었다. 차칵,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올라온 불꽃은 담배의 꽁무니를 쫓았다. 그는 불이 붙은 담배를 물고 훅 숨을 들이켰다. 깊게 들이쉰 뒤 후-하고 뱉은 연기는 하얗고 연약해서, 그의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던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는 그가 손을 들어 그 가운데를 가볍게 휘젓자 이내 얇은 허리가 끊어지며 사라졌다. 그게 내심 아쉬운지, 그는 몇 번 더 연기를 붙잡으려 부드럽게 허공을 저었다. 후, 하 하는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갔을 때, 침대 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작게 앓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비척거리며 침대를 벗어나려 애쓰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제 힘으로 이불을 걷어내지도 못하면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일어났구나? 답지도 않게 반가운 척을 하자 소년의 움직임이 멈췄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잖아.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다가가자 바짝 힘이 들어간 채로 굳어있는 하얀 몸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간 그가 침대 한 쪽에 엉덩이를 붙이자, 몸이 가벼운 탓에 침대가 이 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다. 그는 소년이 정말 담배 연기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벼워 아무렇게나 휘저으면 부서지고, 사라지고.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난 널 잡을 수 있지. 그는 담뱃재를 대충 바닥에 한 번 턴 후 다시 입에 물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소년의 겨드랑이 사이에 두 손을 끼워 번쩍 들었다. 전기가 통한 사람처럼 그의 손이 닿자마자 눈에 띄게 굳은 몸과 얼굴이 꽤나 볼만하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앉혀진 채로 덜덜 떨어대는 것을 보고, 그는 짐짓 친절한 척 등을 쓸어내리며 두어 번 토닥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움찔거리던 소년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들썩이는 앙상한 어깨와 짧게 자른 뒷머리 밑으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보자 당장이라도 송곳니를 박아 넣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등을 토닥이던 손을 옮겨 얇은 목을 쓰다듬는데, 목울대가 크게 꿀꺽 움직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년이 입을 열었다.


"왜, 왜... 날 죽이지 않죠?"


내내 억눌린 비명을 뱉느라 목이 상해 소년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쇳소리가 났다. 죽음. 의외의 질문에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쳐다봤더니, 애써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응시하는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남아있었다. 어쩜, 가엾기도 하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소년은 아직까지도 모르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멈췄던 손을 움직여 주인을 닮아 부드럽게 자라난 머리칼을 헤집으며 픽 웃었다. 그리곤 담배 피울래? 묻는 듯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 줬지만 소년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무안한 기색도 없이 침대 옆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담배를 비벼 끄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가에 서있으니 토독, 톡 하고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한참동안이나 밖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사람은 말이야, 크레덴스."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을 들은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퍼뜩 몸을 웅크렸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따뜻해서,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금방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진심이 아니면서, 그렇게까지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소년은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어 바둥거렸다.


"죽은 걸 먹지 않거든. 먹으려고 죽일 뿐이지."


아아,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소년이 무너졌다. 말을 마치고 조용히 웃는 그의 귀에는 소년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쿵쾅쿵쾅쿵쾅, 떨어지는 빗방울보다 더 빨리 내달리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어쩜 그렇게 너를 닮지 않은 게 없을까. 한 올 한 올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카락도, 피죽도 제대로 못 얻어 먹고 자란 주제에 가지런한 치열도, 전단지를 나눠주는 길쭉한 손가락과 그 끝에 붙어있는 손톱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줄창 달음박질을 해대는 심장도 모두 다 소년을 닮았다.


"넌 벌써 죽었어. 그런 널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겠니? 크레덴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소년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움직여 스스로를 끌어 안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네가 살아나는 걸 보고 싶을 뿐이야. 네가 진짜 '괴물'이 된다면 그때 제일 먼저 날 죽여주겠어?"


그의 말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공을 들고 튀어나와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하자! 외치는 사내아이 같기도 했다. '괴물'이라는 말을 들은 소년의 몸은 더욱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 게임할까? 러시안 룰렛. 네가 괴물이 되면, 나를 죽이는 거야. 나는 네가 괴물이 될 때까지 술래를 할게."


결국 소년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터져버린 울음과 함께 역겨운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우웩,하며 침대 위에서 헛구역질을 하는 소년을 보며 마침내 그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빗소리와 구토 소리, 웃음 소리가 섞여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참을 낄낄대던 그는 곧 웃음을 멈추고 소년을 바라봤다. 엎드린 등에는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의 흉터가 가득했다.


"네 차례가 언제 올까, 크레덴스. 너무 기대되지?"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처럼 달콤하게 말을 건넨 그는 답을 기대하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엄지와 검지를 펴 손가락으로 총 모양으로 만들고 소년을 향해 겨누며 작게 빵, 소리를 냈다. 흐느끼는 소년을 두고 방을 나서는 그의 뒤로 쿵 소리를 내며 무겁게 닫힌 문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Henry Shaw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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