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가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1992년 4월. 날씨는 계절감을 잊은 듯 마냥 추웠다. 동주는 소매 끝을 끌어 당겨 찬 손을 소매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 순간 도착한 열차의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두서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낯선 그 모습이 무서웠는지, 동주는 자신도 모르게 엄마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런 동주를 돌아보지도 않고 엄마는 앞만 보며 걸음을 재촉하듯 걸어갔다. 그래도 동주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많지 않은 짐이었지만 나약한 동주 엄마를 충분히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코 쉬지 않고 단숨에 높다란 계단을 올라 단칸방 반지하에 자신과 동주의 몸을 뉘었다. 찬 냉기가 이불을 뚫고 몸속으로 침입했지만, 그래도 동주는 엄마 손을 잡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손을 잡았다면, 형의 손을 잡았다면. 동주는 분명 후회했을 거라고.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되어, 형과 동주는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할지 결정했어야 했다. 동주가 특별히 형을 따랐던 건 아니지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 혼자 떠나보낸다는 건 너무 슬픈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 동주에게 형은 돌덩이 같은 말을 가슴에 던졌는데, 그 돌에 맞아서 동주는 한참을 울었다.

"너랑 나랑은 이제 가족 아니야!" 


 키가 작고 약한 동주는 또래 친구들이 무시하거나 괴롭히기 일 수 였고, 가난 때문인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혼자가 된 엄마와 함께 살아서 동네 어른들의 귓속말에 익숙해 져야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문방구에서 샤프심을 훔치다 들켜, 주인아저씨 앞에서 붉어진 한쪽 뺨을 양손으로 감싸 안고 눈물을 흘릴 때였다.

"아저씨, 제가 대신 낼게요"

불쑥 동주 앞에 나타난 아이는 동네에서 처음 보는 깨끗한 얼굴에 옷은 새것처럼 반짝거렸고, 신고 있는 운동화에는 유명한 브랜드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당당하게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는 모습을 보자, 동주의 기분이 사나워졌다. 샤프심을 쟤 앞으로 내미는 아이의 얼굴을 동주는 무섭게 노려보았다. 정말 필요해서 훔쳤던 건 맞았다. 절실함은 있었지만.

아이의 손에서 뺐어 든 샤프심을 보기 좋게 얼굴에 던져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주는 달렸다.

"아!" 

'툭'

멀리서 낮은 비명과 샤프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자신의 나이 9살, 처음으로 자존심이란 걸 세웠다. 순간 동주는 예전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그렇게 삼키지 못한 감정을 안고 집으로 달려 갔다.  높다란 계단 중간에 다다르자, 좀 전 문구점에서 만났던 그 아이가 동주 앞에 서 있었다. 아이의 하얀 얼굴에는 선명하게 붉은 상처가 왼쪽 눈썹 근처에 보였다. 분명 좀 전의 일 때문이겠지. 하지만 동주는 그 아이를 아랑곳 하지 않고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을 무시하듯, 그 아이는 갑자기 동주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야!" 

동주가 짜증 난 목소리로, 아이의 손을 뿌리치려 할 때였다. 아이는 잡고 있던 동주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어, 힘겹게 올라온 계단을 다시 굴러 내려가야 했다.

 동주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얼마나 그 곳에 누워있었던 걸까. 눈 앞에 놓인 샤프심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찾을 수는 없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다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상처에 난 피는 그대로 굳어있었다. 쩔뚝 거리며 집에 겨우 도착해 문을 여니, 낯선 아저씨와 엄마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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