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오랜, 만임다.”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던 시간만큼 어색한 인사는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미도리마는 멍하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얼굴은 이제 더 이상 청춘의 발랄함이 남아있지 않았다.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로 당황함을 능숙하게 감춘다. 미도리마는 감정을 감추는 것은 원래 그의 직업적 특징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어른’의 얼굴을 한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 없어서 기분이 묘해졌다.


“…잘 지내죠?”


“물론, 잘… 지낸다는 것이야.”


정말 잘 지내고 있는가? 사실 미도리마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은 정말 잘 지내고 있는가?

그와 헤어지고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꼭 좋은 변화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 유명한 대학병원을 그만두었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와 헤어졌다고 해서 엉엉 울지는 않았지만, 기쁘게 웃어본 적도 없다. 미도리마는 거짓말을 하는 것에 여전히 능숙하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의 소식은 굳이 수소문하지 않는다면 알기 어려웠겠지만, 그의 소식은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들을 수밖에 없을 만큼 화려하게 매일 같이 일본 전역을 뒤흔들었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매회 고공행진을 했고, 드라마 시청률 랭킹을 갈아치우곤 했다. 모델로서도 훌륭한 행보를 걷고 있는 그는, 이제 해외에서 러브콜이 쏟아지는 명실상부 일본 최고의 연예인이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어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야.”


오랜만에 이루어진 만남은 자꾸만 대화에 마가 뜨게 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듯 어색하게 이야기를 던질 뿐이었다. 말이 서툰 사람끼리 만나 이러고 있으려니 미도리마는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어색함에 주머니를 뒤지려니, 손가락에 걸린 물건 때문에 제가 왜 가게 입구로 나왔는지 기억이 났다.

그를 의식해 잠시 주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미도리마는 이내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에 이제는 익숙해진 손놀림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알싸한 향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에 미도리마는 눈을 감았다. 대번에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곁눈질로 바라본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는 것에 미도리마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담배, 언제부터 피운 겁니까?”


“한… 4년 정도 전부터?”


“환자를 상대하는 의사는 청결이 중요하니까 담배 냄새가 나면 안 된다면서요.”


“의사, 아니라는 것이야.”


예상 밖의 발언이었는지 그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역시 그는 자신과 달리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잊고 지냈던 모양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한 것인지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다시 다물어 버렸다.

의과 레지던트 마지막 과정을 집어던진 지 4년이나 되었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작은 출판사 편집부의 일반 직원에 불과하다. 기적의 세대라는 명성도, 의사가 될 사람이라는 떠받듦도 사라진 지 오래다.

부모에게는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어서, 그냥 패륜아가 되어버렸다. 여동생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챘는지 한숨을 게워낼 뿐이었다.

사실 외과의의 길을 집어 던졌을 때, 제일 먼저 들어왔던 권유는 타카오의 ‘농구재개’였다. ‘신쨩이라면 충분히 재활할 수 있어!!’라며 확신에 찬 타카오의 말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와의 추억이 가득한 코트로 돌아가서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 당시의 자신에게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무기가 가진 냉혹함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때의 미도리마 신타로는, 기적의 세대로서 강인하게 버티고 있던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니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랬겠지.”


힐난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쩐지 날카롭게 말이 나간 것 같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미도리마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담배를 비벼 껐다. 이제는 익숙한 그 일련의 동작마저 그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서 저런 얼굴을 해봐야 늦었다. 미도리마는 재킷에 묻었을지도 모를 담뱃재를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그럼 난 안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먼저…”


“…미도리맛치.”


울먹이는 목소리, 익숙한 애칭. 하지만 이제는 머나먼 과거의 것이 되어버려 현재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이름.


“더 할 말 있냐는 것이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님다.”


“가보겠다는 것이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는 솔직하지 못하다.


그때, 그날도 그랬다. 미도리마는 솔직히 그날의 자신을 떠올리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다지 둘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자신이었는데 그날만큼은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둘의 관계가 끝나게 된다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자신이 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정작, 진짜 끝이 다가왔을 땐 그렇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붙잡았다. 그와 그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잔뜩 겁에 질린 그는, 그대로 미도리마의 곁을 떠나버렸다.

등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미도리마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볼 필요가 없는 관계였다. 오늘의 만남은 우연이 가져다준 것일 뿐, 다시 이어질 필요가 있는 만남이 아니다.


“신타로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아…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랬구나! 지금 딱!! 신타로군 차례야! 술술술~~ 술 들이켜~~~”


새롭게 쌓은 인연도 나쁘지 않다. 이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은 즐겁다. 무료하게 아무런 낙도 없을 줄 알았던 인생에 새롭게 찾아온 흥미였다. 글을 읽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 옆에서 그를 돕는다는 것. 출판 일은 힘들지만 보람이 있었다. 어떤 일이든 그렇겠지만, 다시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에게는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언제 이렇게 마음을 내주었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이들에게 마음의 많은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과거의 영광에 내주었던 마음은 점점 작아졌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일 뿐이라고 과감하게 넘길 수 있게 됐다. 미도리마는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보며, 슈토쿠에 진학하는 것으로 한 단계 성장했던 자신이 새롭게 발돋움하여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미안해, 신타로군.”


“괜찮…습니다.”


편집장의 요구는 꽤나 뜻밖의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절대 못 하겠다고 하거나 피하고 싶다고 말하면, 이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작은 출판사에서 그를 섭외한 것도 기적인데, 다른 사람이 인터뷰를 하러 가서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하고 오게 되면 곤란해질 것이 뻔하다. 차라리 안면이 있는 자신이 가는 게 맞다. 미도리마는 이틀 후로 잡혀 있는 취재 일정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터뷰 콘셉트도, 질문도 확고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자신은 그저 그 내용을 숙지만 하면 끝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날의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회도 당황스러웠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껄끄러웠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직장에서 그를 인터뷰해서 월간지에 싣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그들에게 나름의 빚이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저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어떻게든 열심히 해서 도움이 되고 싶었고, 이 인터뷰 건으로 도움이 된다면 그와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껄끄러움 쯤은 감내할 수 있었다.


미도리마가 일하고 있는 출판사 『PINE』은 다양한 종류의 글을 위주로 싣고 있는 《pine grove》라는 월간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 월간지 안에서 최고 인기를 얻고 있는 건 로맨스 코미디 <Sweet Rainbow>였다. 얼마 전 월간지 안내란을 통해 진행한 그 소설의 남자 주인공 ‘마츠모토 아키라’에 어울리는 연예인 투표에서 ‘키세 료타’가 당당히 1위를 했다. 이번 인터뷰는 그 1위에 대한 것이고, 저는 ‘덤’ 같은 거다.

겸사겸사.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을 테고, ‘농구를 그만둔 미도리마 신타로’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은 더더욱 없겠지만, 일본의 톱스타 ‘키세 료타’와 중학교 동창이자, 고교 시절 라이벌이었던 ‘미도리마 신타로’에게는 아마, 관심이 생길 테니까.


누군가에게는 추억팔이로, 누군가에겐 새로운 호기심으로.


인터뷰의 조율은, 미도리마의 사수가 진행했다. 출판사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이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걸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혼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사수가 함께 간다고도 했다. 인터뷰는 함께 진행할 예정이며, 사진도 찍어야 하니 혼자 가는 건 무리라는 게 그 이유였다.

미도리마는 둔한 남자가 아니었다. 분명 그의 독사진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투샷도 실리게 될 거란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사수는 아닌 척 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을 깔끔하게 숨기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웃음으로 대하며, 미도리마는 속으로만 한숨을 게워냈다. 자신은 이미 이 사람들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떨까.

그가 자신과의 인터뷰와 투 샷 사진 촬영을 받아줄지에 대해, 미도리마는 확신할 수 없었다. 프로라면 당연히 받아주겠지만, 과연 그가 껄끄러운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사수가 찬찬히 설명하는 모습을 미도리마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예전에 미도리마가 알던 철부지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옆에 있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과 몇 마디를 주고받던 그는, 농구 시합 중이 아니라면 잘 보여주지 않던 매우 진중한 얼굴로 사수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오늘 만나고 처음으로 자신과 눈을 맞춰왔다.

멀끔하게 내밀어 진 하얀 손이 농구를 그만둔 것을 알려주듯 고와서,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미도리맛치. 한… 4년? 만이던가요?”


“5년이란 것이야.”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흘렀군요…”


지난번의 우연한 만남은 꿈결이었던 것처럼, 정말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말을 걸어오는 것에 속으로는 헛웃음이 흘렀지만 미도리마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반가움에 흘리는 예쁜 미소로 보일만 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태클을 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함께 살을 맞대고 지낸 시간이 있는 만큼 미도리마에겐 통하지 않을 미소에 불과했으니까. 차라리 대놓고 찡그리니만 못한 미소에 미도리마는 그와 재회한 후 일상이 되어버린 한숨을 속으로 삼켜낼 뿐이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카페는 규모가 작아서 3시간 동안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학기 중의 평일 낮엔 손님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카페 쪽에서는 흔쾌히 OK를 했다는 듯하다. 하긴, 톱스타 ‘키세 료타’가 다녀간 곳이라고 하면 여자 손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텐데 고작 3시간 장사 못 하는 게 뭐 얼마나 대수겠는가.

촬영이 끝나고 해도 늦지 않을 텐데 카페 주인장은 벌써 그의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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