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 동아리’



창균은 내심 무언가가 가슴께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 옛날 골동품점에서 발견한 재고 떨이 영화 dvd를 처음 재생 해 봤을 때처럼 말이다. 아마 그 영화의 이름이 ‘빛바랜 클로버’였나. 이제는 나름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지만 첫 영화라는 명목하에 제목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기억을 해낼 수 있는 정도였다. 어린 임창균은 그렇게 영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수 많이 섭렵한 영화들 중, 임창균에게 가장 특별한 영화라 함은 단 한 가지만을 꼽을 수가 있었다.


「악마는 우리 곁에」


누군가가 들으면 중2병에 걸린 것이냐 코웃음 칠 수 있겠지만, 나름 내용은 심오했다. 인간의 성선설, 성악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인간의 선한 면과, 추한 면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수없이 고통받다 피폐해져 가는 한 남자의 삶을 그린 영화였다. 어린 창균은 그 영화를 보기엔 기초 지식이 터무니 없이 부족했다. 다만 그럼에도 끝까지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스크린 속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또래 남자아이 때문이었다. 물론 남자주인공의 아역이었기에 극 중 차지하는 시간은 짧은 편에 속했지만, 신들린 연기력 덕분인지 ㅡ창균은 그 남자애가 진짜 귀신에 들린 건 줄 알았다고 한다ㅡ 그 짧은 시간 안에 임창균을 사로잡아 버린 것이다. 자칫하면 발연기라 불릴지도 모르는 그런 감정표현을. 그 어린 아이가 마치 본인이 주인공 그 자체인 양,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창균은 그렇게 꿈이 생겼다.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영화를 구성해 저런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그 것이 어린 창균의 꿈이었다. 창균은 그때부터 영화에 미쳐 살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할 것 없이 창균은 점심을 먹고 축구를 하러 가자는 친구들의 말에도 거절하고는 늘 독서실에 들려 시나리오를 쓰거나, 시청각실에 들려 짧게나마 영화를 보고는 했다. 친구들은 그런 창균을 보며 괴짜라고 칭했지만, 창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고에 갈 것이다. 예고에 가서, 단편 영화를 제작하며 감독으로써의 길을 닦을 것이다. 임창균은 오로지 예고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창균은 동아리방 문을 열었다. 동아리 활동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균은 조금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기다리면 오겠지. 그렇게 동아리방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이불이 널브러져 있는 소파, 제대로 정렬되지 않은 테이블과 의자들, 먼지 쌓인 빔프로젝터. 그 외 기타 등등.도대체 먼지는 왜 쌓여있는 거야? 창균은 검지 손가락으로 빔프로젝터 위를 한번 쓱 훑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티슈 없나. 물티슈. 손가락에 끼어있는 먼지를 닦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물티슈를 찾아 나섰다. 서랍, 캐비넷 등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이 방은 아무도 쓰는 사람이 없다는 것처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


창균은 도둑질을 하다 걸린 것 마냥 화들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웬 키 큰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일단 느낌으로 보아 자신과 같은 신입생은 아닌 것 같았다. 선배인가. 창균은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짧은 찰나 고민을 했다. 그 사이, 문에 서 있던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이불이 널브러져 있는 소파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남자는 창균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처음 보는데.”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괜히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말대꾸하는 신입으로 낙인찍히기 싫어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음… 신입생이요. 남자는 소파에 반쯤 누운 채 팔로 머리를 받치고는 더욱 노골적으로 창균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허여멀건한 피부, 얼굴의 반은 차지하고 있는 큰 눈. 그 큰 눈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부스스한 반곱슬의 긴 앞머리. 언뜻 본 그 남자의 가슴팍에는 노란색 명찰이 달려있었다. ‘채형원’. 그의 이름 석 자였다.


“이름이?”

임창균이요.

“임창균. 이름 잘 어울리네. 근데 무슨 일로?

“영화 제작 동아리 아닌가요, 여기.”

아아. 동아리. 맞지.


형원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채형원은 예의상 말을 꺼낸 것이다. 왜냐면 진짜 처음 보는 애였거든. 딱히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름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나보네. 형원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런데, 여기 아무도 안 와. 창균은 제 앞의 채형원이라는 선배가 자신에게 농담을 건넨 줄로만 알았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형원의 말을 곱씹고 있었는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형원이 성큼성큼 다가와 창균의 어깨를 격려하듯이 두어번 톡톡 두드리고는 쌩하고 동아리방을 빠져나갔다. 미세한 담배 냄새가 임창균의 코 끝을 스쳐 지나갔다. 뭐지, 이 상황. 그리고 동아리 활동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곳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뭐? 너 어디 들었나 했더니, 영화 제작이였어?


중식으로 나온 돈까스를 꽤나 행복한 표정으로 입에 넣으려던 준섭이 별안간 창균의 말에 들고 있던 돈까스를 식판에 내동댕이치며 적당히 큰 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호들갑이야. 깨작깨작 밥을 먹던 창균이 혀를 내둘렀다. 준섭이 안경을 치켜올린다. 저 새끼는 지가 코난인 줄 알아. 준섭과는 대충 같은 반이자 옆자리에 앉게 되어 어찌어찌 급식 메이트가 되고, 흔히 말하는 학교 친구가 되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준섭에게 말했더니 돌아오는 건 이준섭 특유의 별거 아닌 일로 오바떨기, 였다.


너, 거기 양아치 소굴인 거 모르고 간 거냐?

뭔 소리야?"

소문 쫙 돌았잖아. 우리 바로 윗 학년들이 제일예고 흑역사들이라고.

알아듣게 좀 말해.

지금 2학년들 한마디로 존나 양아치들만 모였다고.


이준섭의 설명대로라면 이러했다. 예술 특성화 고교인 제일예고는 상당수의 최상위권 대학 합격생들을 배출해내며 금세 예고 쪽에 떠오르는 학교로 우뚝 섰다고 한다. 그러나, 학생들의 인품은 물론이거니와, 실력 또한 보장된 이 학교에 하필이면 돈 많고 일탈을 좋아하지만 ‘예술’을 좋아하는 명문가 자재들이 한 순간에 모여 형성된 게 바로 지금의 2학년들이라는 것이다. 흡연은 물론이요, 수업 땡땡이도 서슴없이 하는 그들은 집안에 돈이 많다는 이유로 모든 행동에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제일예고의 소문은 아니었나보다.


어느 날은 저기 학교 앞 삼거리에서 제일예고 교복을 입은 애들이 단체로 담배를 피고 있더라, 또 어느 날은 제일예고 교복을 입은 애들이 누군가를 협박하고 있더라, 또 시끄럽게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더라. 또 밤늦게 술 먹고 돌아다니더라. 등등. 제일예고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내는 소문들이 자자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악의 축이라 불리우는 현 2학년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 번에 많은 학생들을 징계 처분하면 따라올 꼬리표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체로 그들은 무언가 믿을 구석이 있는, 소위 말하는 빽이 빵빵한 자들이었기에. 학교 측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이 큰 사건만큼은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선에서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건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현재 창균의 학년부터는 입학에서 인성 검사는 물론이거니와 세세하게 그들의 중학교 생활마저도 면밀히 검토하여 입학생을 가려낸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 제일예고의 2학년들이 말 그대로 유일무이한 악의 축 그 자체라고. 창균은 오전에 마주친 형원의 몸에서 얄팍하게나마 풍긴 담배냄새를 떠올렸다. 그 형도 그럼 2학년인 건가. 눈동자를 굴려 급식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하필이면 급식실에 막 들어오는 형원과 눈이 마주쳤다.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서 결론은, 하필이면 2학년 양아치들만 그 동아리에 있다는 얘기야.

왜?

그 동아리 인원이 없어서, 2학년 선배들이 일부러 그 동아리에 들어갔대. 학교 X뱅이 까려고.

“그냥 유령 동아리네.

맞지, 그 동아리 담당 선생도 없을걸? 그냥 명분 때문에 유지 되고 있다고 들었어.


아, 씨발. 정확히 속았네, 라고 창균은 생각했다. 요즘 가장 네임밸류있는 예고랍시고 왔는데. 다른 예고에는 없는 영화 제작부가 있다는 말만 듣고 1지망으로 적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창균아, 안 늦었다. 그냥 다른 동아리 들어. 동아리 활동 시간 앞으로 많이 늘어날 텐데 힘들잖아. 창균은 자신이 노트에 적어둔 고등학교에 관한 내용을 떠올렸다. 아마 중3 때 적어둔 것 같았는데, 거기엔 버킷리스트랍시고 고등학교 생활 때 해볼 것들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첫 번째. 영화 관련 동아리 들기. 일단 이건 성공이라고 치자. 두 번째. 단편 영화 만들기ㅡ배우 지망생들이 있을 테니 캐스팅은 쉽지 않을까ㅡ라고 생각하며 적어둔 것이었다. 오늘 당장 집에 가서 두 번째 항목을 찢어버릴 예정이었다.


채형원이라고 알아?

그 형은 왜?

아까 동아리방 갔는데 만났어.

아,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무슨 소문?

그 형도 영화 제작부인데, 다른 형 누나들 다 학교 뺑이 칠 때 그 형은 거기서 맨날 잔다고 들었어. 그 형이랑 무슨 얘기했어?

별 얘기 안 했어. 나 있는 거 보고는 그냥 나가더라.

야, 다행이다. 그 형 조오오올라 소문 많던데.


예로부터 눈치에는 잔뼈가 굵은 준섭이었다. 외모도 평범. 키도 평범. 성적도 평범. 성격도 평범. 딱히 눈에 띄지도, 그렇다고 아예 존재감이 없는 건 아닌 무난한 부류. 준섭은 딱 그런 부류였다. 10대. 아직 사회에 발도 들여놓지 못한 이들이 쉴 새 없이 학교라는 정글 안에서 본인들만의 먹이사슬을 형성해나갈 때, 준섭은 비로소 자신의 뛰어난 점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눈치였다. 준섭은 그렇게 눈치빠르게 요리조리 피해가며 편한 학교생활을 해왔고,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정보가 곧 경쟁이다. 그리하여 준섭은 제일예고에 입학 했을 때, 닥치는 대로 모든 소문을 듣고,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국 도달한 내용은,


 채형원이라는 형과는 엮이면 안 돼.


일단 담배는 기본이고, 여자친구가 엄청 자주 바뀐대. 저번엔 학교에서 그런 짓 하려다가 어떤 선생한테 들켰다던데. 엄청 더울 때 빼고는 목티를 굉장히 자주 입고 다니는데, 그 이유가 목에 있는 키스마크를 가리려고 한대나 뭐래나. 아, 특히 남자친구 있는 여자들이랑 그렇게 놀아난대. 그리고 금요일 밤 학교 앞 번화가에 가면 만취 상태인 모습을 되게 자주 볼 수 있대. 뭐, 그 외에 빽도 엄청나고 오토바이도 가끔 타고, 길거리에서 시비 붙으면 상대방은 완전 작살난다더라.


완전 영화 주인공이네. 창균은 형원의 소문을 들으며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갑자기 머릿 속에서 시나리오 한 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항상 가십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 하지만 그 가십은 모두 헛소문일 뿐이었고, 그런 주인공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한다. 음, 너무 뻔한 스토리인가. 그럼 여기서 조금 틀어버리는 거다. 사실 그 가십은 다 진짜였고… 존나 막장이다. 그만두자. 창균은 혀를 쯧. 차고 고개를 두어번 저었다. 아무튼, 소문 속의 채형원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동아리 어떡할 거야?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창균에게 준섭이 말을 걸었다. 


 나와야지.


어떡하지. 이미 다른 동아리는 인원이 다 찼어.

어떻게 그래요?

이번에 폐부된 동아리가 몇 개 있어서, 동아리 수용인원이 다른 곳들도 다 꽉 찼어. 오히려 초과된 곳들도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


좆 됐다. 담임선생의 절망적인 말에 창균은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영화 제작부 동아리실에 들어오게 되었다. 제일예고는 평소 학과별로 수업이 진행되고, 그 외의 시간은 학과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 활동 시간으로 편성 되어 있었다. 창균은 중학교 때 써놓은 시나리오를 제출해 제일예고 문예창작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과 수업은 어려운 것이 없었다. 예로 부터 공부머리가 뛰어났던 창균은 어렵지 않게 성적을 챙길 수 있었고, 영화와 더불어 각종 문학들을 섭렵한 덕분에 수업 또한 어렵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영화 제작 동아리에 할애할 시간이 꽤 있었다는 뜻인데, 동아리 상태가 이 지경이다 보니 창균은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정돈 되지 않은 책걸상들 중 하나에 끼어앉아 그대로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드르륵.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 창균이랬나?


살짝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 하지만 듣기 싫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전에도 들어봤던 그 목소리다. 창균은 고개를 들었다. 채형원. 이제보니 소문의 일부와 일치하게 그는 교복 셔츠 안에 검정 목티를 입고 있었다. 형원이 소파에 자리 잡는다. 창균과는 적당히 떨어져 있는 위치였다. 형원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 형은 키도 크고 얼굴도 작은 게 꼭 모델 같네. 모델과인가. 긴 팔을 휘적거리는 형원을 보며 창균이 머릿 속으로 되뇌였다. 아, 없네. 형원이 낮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 담배있니?

저 담배 필 것 같이 생겼어요?

아니. 혹시나 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말고.


형원은 입맛을 쩝, 다시고는 소파에 일자로 누웠다. 마치 제집 안방인 것 마냥 누워있는 폼이 한 두 번 있어 본 게 아닌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형원이 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창균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 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 동아리의 회원이고, 이 동아리는 사실 유령 동아리다. 그러니까, 이름만 존재하는. 그 속은 이미 2학년의 양아치들이 점령해버린 일진들 소굴이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무서운 것은 없다. 어차피 이 동아리방엔 거의 안 온다고 했으니까. 저 채형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렇지만 채형원은 딱히 나를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기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때 쯤, 창균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혼자서라도 한다. 다음에 왔을 때는 청소나 해야겠다. 특히 빔프로젝터. 저걸로 영화라도 보면서…


있잖아.


적막한 분위기 속 다음 동아리 시간 때 챙겨올 물건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쯤,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형원은 자세를 고쳐 앉아 다리를 꼬고 깍지를 껴 팔로 머리 뒤를 받친 채, 창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 생각하고 있을 때 되게 멍한 표정 짓고 있는데, 그것도 다 봤으려나. 창균 또한 형원을 쳐다봤다.


나 여기서 되게 많이 자. 내가 잠이 많거든.


어쩌라는 건지. 또 마음속으로만 내뱉는 말이었다. 이미 그 얘기는 준섭에게 들었다. 창균은 예의상 무슨 뜻이냐며 형원에게 네? 하고 대답했다. 잠깐만. 형원이 휴대폰을 꺼내 들어 어디론가 문자를 보낸다. 또 다시 침묵. 형원은 느릿느릿 자신의 눈꺼풀을 긁는다. 침묵 속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친다.


그, 여기 안 왔으면 좋겠는데.

무슨 뜻이에요?

아, 미안. 기분 나쁘게 하려는건 아니고. 말 그대로야. 난 누가 나 방해하는 거 싫어해서.


존나 별로다. 그냥 존나존나 별로다, 라는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임창균은 채형원이 그냥 존나게 웃겼다. 지가 뭔데 나보고 나가라는 거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또한 나오지 않았다. 채형원이라는 형과는 엮이면 안 돼. 준섭의 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임창균 그가 누구인가. 자신의 꿈을 위해 이런 저런 활동들도 마다하고 한 곳에 몰두해 괴짜소리를 들어가며 지내온 게 임창균이었다. 임창균은 채형원에게 개기고 싶어졌다. 아니, 존나 억울하잖아. 지는 여기에 조또 관심도 없는 양아치인데, 나보고 꺼지라고 하는 게. 창균이 반박하려 입을 열려던 찰나,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렸다. 형원의 폰이었다.


어, 민혁, 담배 이써? 어. 어. 알았어, 올라갈게. 꽤나 간단한 용건만 주고받은 형원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채형원은 긴 다리로 느릿느릿 창균에게 다가갔다. 설마 때리는 건 아니겠지. 준섭이 말해준 여러 소문 중 시비 붙은 상대방이 작살났다는 소문이 하필이면 생각났다. 형원은 창균이 앉아있는 책상 앞에 걸터앉았다. 꽤나 가까운 거리였다. 형원에게는 적당한 담배냄새와 함께 꽤 비싼 듯한 향수 냄새가 은은히 섞여 있었다. 어떻게 아냐고? 돈을 쳐바른 향수는 향이 거짓말을 치지 않거든. 첫 만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형원이 창균의 어깻죽지를 두어번 가볍게 톡톡 두드린다.


다음엔 여기 말고 꼭 다른 곳에서 보자. 그땐 먼저 인사해.


협박이었다. 채형원의 말투는 상냥한 것 처럼 들린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의 속에는 가시가 박혀있었다. 다시는 이 곳에 오지 말라는 협박. 골 때리네, 진짜. 창균은 자신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손을 한번 쳐다보고는 형원을 올려다본다.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더 입체적이었다. 진짜,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노네. 형원은 마지막으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한번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동아리방을 떠나는 형원의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쾅. 동아리방 문이 꽤나 거세게 닫혔다.






채형원. 제일예고 최고의 가십맨. 이슈 메이커. 사슴같이 예쁜 눈, 날렵한 콧대, 보기좋게 도톰한 입술.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 적당히 허여멀건한 피부. 태생부터 타고난 어깨 골격. 딱 보기 좋게 길다란 목. 그에 걸맞는 자그마한 얼굴. 180은 가볍게 넘는 훤칠한 키. 이 모든 매력 포인트들을 몇백 배로 증폭시켜주는 빵빵한 재력의 집안까지. 그의 특징을 나열해 놓는다면 만화 작가들 또한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존재해? 제일예고에는 존재했다. 제일예고 2학년 실용음악과 보컬부 채형원. 채형원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가 모델과인줄로만 알고 있지만, 그것은 형원이 흔히 받는 오해 수십 가지 중 단 하나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그를 따라다니는 학교 내의 소문에 대해 알아보자. 첫 번째, 채형원은 담배를 핀다. 이건 소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전교생들은 아마 거의 다 알 걸? 진실. 두 번째, 채형원은 여성 편력이 심하다. 채형원은 당장 지금 제 옆에 있는 여자애 조차도 얼마 전에 사귀게 된 건지 기억을 못했다. 음, 그러니까… 얘 이름이 혜정이였나…? 진실. 세 번째, 채형원은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 민혁의 전화를 받고 옥상으로 올라 온 형원은 민혁으로부터 담배 한 개피를 건네받아 자연스럽게 불을 붙였다. 담배를 빨아들이느라 볼이 깊숙히 패인 모습 마저 썩 보기 좋았다. 채형원. 오늘 밤 너네 집에서 콜? 대충 술 마시자는 얘기였다. 오늘 마침 제집이 비는 건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이민혁은 쓸데없이 알고 있는 게 참 많았다. 이민혁 존나 양아치 같애. 형원이 그런 민혁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혜정이 너도 올 거지?


풉. 민혁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혜정이라 불리운 여자애는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아, 나 또 이름 잘못 불렀나보네. 채형원은 코를 긁적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그 여자애의 명찰을 쳐다본다. 윤세희. 세희였구나. 아아, 미안. 세희야. 갑자기 우리 친척 누나가 생각 나서. 이름이 채혜정이거든. 그저께 우리 집에 놀러 왔어. 능청스럽게 변명ㅡ저번주까지 같이 놀았던 여자애라고는 절대 말 안 했다ㅡ을 늘여놓은 채형원이 세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미친 새끼야. 걍 사과해. 되도 않는 변명 하지 말고. 이민혁 뒤질래? 세 번째 소문 또한 진실…인 것 같다, 아니 진실. 그 외의 소문들은 안 봐도 뻔할 터 였다.


채형원은 멍청하지 않았다. 적어도 채형원은 본인을 쫓아다니는 수십 가지의 소문을 대충 알고 있었는데, 몇몇 과장된 게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차마 다 거짓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여자가 자주 바뀌는 게 맞다. 하지만 그들이 형원을 먼저 좋아하고, 채형원 또한 여자를 좋아한다. 서로 사귀면 그것이 윈윈 아닌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 채형원의 연애 철학이었다. 남친있는 여자를 자주 만난다고? 본인은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걔네들이 먼저 다가왔을 뿐. 오토바이? 안 탄다. 괜히 탔다가 사고 나서 이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라도 나면 어떡해. 싸움? 상대방이 먼저 시비를 건다. 거기에 맞장구 쳐줬을 뿐.


하지만 소문이란 것은 가끔 본인에게 유리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형원은 애써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문을 접한 학생들은 채형원을 귀찮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엮이고 싶지 않아서 피해 다니는 게 맞지만. 본래 자신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딱히 관심을 주는 편이 아니었던 채형원은 본인을 둘러싼 소문의 그러한 점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꽤나 편한 학교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별안간 동그란 뒤통수가 머릿 속에 떠오른다. 아까 오전에 동아리방에서 봤던 뒷모습이었다. 임창균. 그 짧은 시간 마주한 임창균의 첫인상은 별거 없었다. 한 성깔 하게 생겼네. 단지 그 정도? 채형원은 딱히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본인의 영역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순간 얘기는 살짝 달라진다. 대충 잘 알아들으라는 식으로 경고를 줬고, 임창균은 더 이상 동아리방에 모습을 비추지 않을 터였다.



 걔 쫌 불쌍하네.



다음에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막대사탕이라도 쥐여줄 셈이었다. 그래도, 쫓아낸 건데. 사실 일말의 연민따위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종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채형원은 동아리방 문을 열어제꼈다. 예상대로 텅 비어있었다. 휘파람을 불며 익숙하게 소파로 걸어가 몸을 뉘었다. 아, 그새 또 졸리네. 그렇게 채형원은 눈을 붙였다. 자그마한 소음 하나 없이 잔잔한 동아리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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