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도대체 왜 저 천한 새끼가 제 처가보다 나은 집 여식과 혼인한 것입니까! 현도 유생에게 들으니, 주상전하께서 그 여식에게 비단도 하사하셨다더군요! 저는 왜 한미한 가문의 여식과 혼인시키시고!"

  패악스럽게 외치는 석의 고함에 소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하거라. 넌 그저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이나 잘 정진하거라. 그 놈 보다 더 빨리 대과에 입격해서 네 아버지한테 인정 받아야지."

  "어머니! 지금 성균관이 문제입니까? 지금 장남인 제가 이 집안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요! 그 계집같이 생긴 새끼한테!"

  "계...집?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새끼 목간할 때 얼핏 봤는데, 사내새끼 몸 같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그래서..."

  석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흐렸다. 분명 사내같지 않은 몸이었는데, 그렇다고 계집이란 것도 자신의 생각일 뿐 딱히 근거가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아니, 그냥 그렇단 말입니다. 어쨌든 그 계집 같은 놈한테 아버님께서 집안을 물려주시겠다구요? 절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눈에 불꽃을 튀기며 말하는 석에게 소현이 차분하게 답하였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조만간 네 당숙이 너를 보러 여기 올 것이다. 당숙 또한 천것을 집안에 들인 것을 마뜩치 않아하고 있으니, 당숙과 함께 그 놈을 어찌 몰아낼 지 상의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때 밖에서 여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석반상 올리겠습니다."

  "오냐."

  문이 열리며 야윈 얼굴의 여인이 상을 들고 들어왔다.

  조신하게 상을 들고 들어온 여인은 조심스레 상을 내려놓고는 방을 나가려 뒤를 돌아섰다.

  "이게 사람 먹으라고 한 밥상이더냐? 여태껏 우리 귀한 아들에게 이런 밥상을 차려준 것이야?"

  소현의 날카로운 소리에 여인이 움찔하였다.

  "그게... 어머님..."

  "이 집안의 맏며느리라는 것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 한미한 집안의 여식이라니... 쯧쯧... 이게 다 석이 네 녀석이 더욱 더 학문에 정진해야하는 이유다. 천한 것 보다 더욱 더 정진하여 높은 벼슬로 나아가야 네 아버지한테 인정받을 것 아니냐!"

  석은 제 어미의 말에 기분이 확 상했는지 인상만 찌푸린 채 애꿎은 제 부인에게 화풀이 하였다.

  "어머니 심기 불편하시지 않게 빨리 나가보지 않고 뭐하는거야? 재수없게스리. 어디서 굴러 먹었는지 눈치는 더럽게 없어!"

  여인은 온몸을 떨면서 방 밖으로 재빨리 나갔다.

  "쯧쯧... 어디서 저런 년이 굴러와서. 석이 네가 대과에 입격하고 조정에 나아가면 그때 저년과 이혼하고 그때 들어오는 명문가 여식과 혼담을 진행할 것이니 더욱더 학문에 정진하거라. 그리고, 저년이 네 씨앗을 회임하지 않도록 하고."

  소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과연 같은 여인에서 나오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잔인하였다. 

  "그런데, 어머니! 제가 장남인데 왜 본가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살아야 합니까? 혼인해서 분가하더라도 천한 새끼가 나가야지 왜 제가 이리 분가해 나와있어야 하는건지 전 당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부인이 나간 문을 응시하며 씩씩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그런 석의 모습을 소현이 한심한 듯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말문을 열었다.

  "다 이 어미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버님께는 그 천한 놈의 애새끼들이 밤낮으로 빽빽대고 울어대니 제 학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제가 분가한다고 말씀드리셨지 않습니까? 그런 이유면 그 놈이 지 새끼들 데리고 분가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건 다 아버님이 그 놈만 예뻐해서 그러신건데, 그걸 또 어머니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소자, 많이 섭섭합니다."

  제 생각만 하고 제 어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둔한 자식을 어찌 끌고 나아가야하나 계속 한숨만 나오는 그녀였다.

  "휴우... 그럼 어미가 왜 그리 했는지 이야기 해주면 넌 수긍하고 어미 뜻을 따를 것이냐?"

  감정이 절제된 소현의 눈빛이 석의 얼굴 정면을 향해 쏘아졌다.




 

  "그래, 초야는 잘 치루었느냐."

  성철은 제 앞에 곱게 차려입은 원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일러주신대로 지키며 잘 행하였습니다." 

  성철의 물음에 머뭇거리다가 명이 답하였다. 원의는 옆에서 수줍은 듯이 고개를 살짝 빗기고 있자, 그 모습들을 본 성철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허허'하고 웃었다.

  "그래, 잘했다. 이제 적장자 소식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성철의 그 말에 명은 더욱 더 고개를 숙였다. 원의의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사흘동안 머물면서 그녀의 손 한번 잡지 못하였다. 아니, 안하였다. 손을 잡으면 얼굴도 만지고 싶고, 얼굴을 만지면 입술을 탐하고 싶고, 입술을 탐하면... 

  끝없이 밀려들어 올 욕망을 절제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첫날 밤에도, 다음 날 밤에도, 그 다음 날 밤에도, 술을 핑계로 그저 그녀 옆에 누워 잠든 척 하였다. 그럴 때마다 원의는 한숨만 내리 쉬며 조용히 뒤척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녀가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 자신도 그제서야 잠을 청하였다.

  그리고, 친영(親迎)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절을 올리고 인사를 한 참이었다. 하지만, 소현은 분가해 살고 있는 석의 집에 갔다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명과 원의는 성철에게만 인사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명은 제 옆에 앉아있는 원의를 슬쩍 바라보았다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원의 역시 명을 똑바로 보지는 못하고 흘깃하고 살짝 보고는 이내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성철이 보기에 그 모습은 이제 막 혼례를 올려 이런 이야기가 부끄러워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되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그때는 그럴 때이지.'

  성철이 흐뭇한 미소로 명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였다. 

  "요즘 이 아비가 바빠져서 네 학문을 봐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이번에 아버님께서 좌의정에 오르셔서 더욱 바빠지시지 않았습니까? 나랏일 하시는 아버님께 근심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겠습니다."

  정답같은 말만 하는 명이 어찌나 대견한지 명을 바라보는 성철의 눈에선 인자한 눈빛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 요즘 도성 내 도적 잔당들이 양반집들을 털고 다는 통에 전하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재조사건이 끝나면 좀 편하게 여유를 찾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자신을 좌의정에 제수시킨 왕은 도적 잔당에 대한 제반 처리를 저더러 하라고 지시하였다.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은 가문의 자랑이라 하겠지만, 그 일을 모조리 도맡아하는 건 가문 전체가 아니라 오로지 성철 혼자이므로 이래저래 힘들고 피곤하였다.

  "아,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하였구나. 아침부터 서둘러 오느라 피곤하였을텐데 얼른 별채로 돌아가 쉬거라. 며늘아가, 네 시어머니가 오늘 자리에 있지 않다고 서운해하지 말거라. 석이네에 일이 있어 갔다가 때를 맞춰 오려했지만 갑작스레 몸이 아파 그런 것이니. 알겠느냐?"

  "네, 아버님."

  원의의 다소곳한 말이 나오자 성철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참한 며느리였기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벗이었던 정환의 여식이기에 더욱 애틋하였다.




  난처한 표정의 일월이 불안한 듯 볼 근육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는 원의가 앉아있었다.

  "오랜만이네. 그간 잘 지냈는가?"

  원의가 원숙한 모습으로 일월에게 말을 건네었다.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자네 얼굴 보며 인사하는 것이 맞는 도리인 것 같아 이리 찾아왔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네."

  "아, 아닙니다. 아씨께서... 아니, 마님께서 이리 먼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일월은 송구스러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원의는 자신과 다른 무언가 기품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명의 옆에 있어줄 여인이 되었다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있어줄 수 없었다.

  "아니, 무슨 우리 사이에 마님이라 칭하는가. 그냥 형님이라고 해주게. 나이도 내가 위이고 하니 그리 맞지 않는 말은 아닐 것이니."

  일월은 원의의 화사한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제 두 손을 잡아오는 손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 네, 네. 형님."

  "그래, 그래. 이제 자네도 신분이 평민인데 내게 마님이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네."

  "그런데, 형님, 왜 말투가 갑자기 이렇게 나이가 든 것 같아졌습니까?"

  "으응?"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원의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예전에 재희와 연희 낳기 전에 뵈었을 땐 편히 말씀해주셨는데, 지금은..."

  "지금은?"

  "너무 나이 든 사람처럼 말씀하세요."

  일월은 말하고는 얼른 입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혹시 마님, 아니 형님께 함부로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일월이 조심스레 원의의 눈치를 보며 말하였다. 의외의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원의가 말이 없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는 모습에 일월은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눈만 꿈뻑거렸다.

  "왜...그러십니까?"

  "하하하, 아니, 아니야. 일월이... 아니, 자네는..."

  "제가... 왜요?"

  "아냐, 아냐. 내가 자네한테 당해낼 수가 없겠어."

  "제가요? 형님이?"

  "아아, 그냥... 나를 편하게 대해줘서 좋다는 말이야. 사실, 나도 이 집이 처음이고, 누구에게 어찌 대해야 할 지 배운 것도 없어서 고민하다가 그리한 것인데, 그걸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고맙고, 또 다행이네. 일월이 자네가 이 집에 있어줘서 너무 고맙기만 하네."

  말을 하며 웃고 있는 원의의 눈에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일월은 왠지 마음이 찔리는 듯하였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속이고 있는데, 그런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미안하였다.

  "아... 그게..."

  말을 더듬는 일월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준 힘은 아니었기에 일월은 자연스럽게 원의를 바라보았다. 바라본 시선의 끝엔 무언가 간곡하면서도 비밀스러운 표정의 원의가 보였다.

  "내 그래서 말인데..."

  조심스레 말하는 그녀를 보며 일월은 침을 꼴깍 삼켰다. 무언지 모르겠지만, 뭔가 은밀하게 이야기하려는 듯 원의의 목소리가 꽤 작아져 있었다. 일월은 그녀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눈동자를 마주보며 기다렸다.

  "명이가... 아니, 서방님이... 혹시..."

  "혹시?"

  원의가 말을 잇지 않고 머뭇거리자 일월이 추임새를 넣으며 다음 말을 재촉하였다.

  "서방님이 내게 손을 대지도 않네.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그리 매력이 없는 것인가?"

  진심의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진지하게 묻는 원의의 모습에 잠시 할말을 잃었다가 폭소를 터트렸다.

  "아니, 왜 그러는가?"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제게 그리 물으셔서 뜬금없기에..."

  말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던 일월은 제가 너무 심하게 웃었나 싶어 급히 원의의 눈치를 살폈다.

  "흠흠. 아니, 그게..."

  "아씨, 아니... 형님께서 왜 매력이 없으십니까? 형님만큼 아리따운 분이 또 어디 있다구요. 혹시, 서방님이 그러십니까?"

  원의는 이제 숫제 일월의 코 앞까지 다가와 한손으로 턱을 괴고, 턱을 괸 손의 팔꿈치는 양반다리로 푼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게... 나한테 매력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짐작가는 바가 있지만, 일월은 아는 척할 수 없었다. 

  "아니,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러는 것일 것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다음 날도, 그리고 어제인 그 다음 날밤에도..."

  원의의 끝말에 일월은 긴장한 채로 다음을 기다렸다. 

  "글쎄, 나한테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거야. 3일 내내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이 말이 돼? 아니, 내가 그렇게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뾰로통한 표정의 원의의 모습에 일월은 웃음을 참고 물었다.

  "서방님이, 형님을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아니, 내 말은... 날 좋아하는 것 같았단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지는 않을거잖아? 아! 아닌가? 내 착각이었나? 아! 맞아, 그때 급제하면 접문해달라고 한 것도 나였지! 아아!"

  머리를 쥐어 잡으며 고개를 파묻는 원의의 모습에 일월은 투기가 일기는 커녕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면서도 찔리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적어도 그 이야기는 명이 직접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니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서방님이 나를... 봐줄까? 내가 싫어진걸까?"

  안아줄까라는 말을 하려다가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 부끄러워 돌려 말하는 원의였다.

  "서...방님이 최근에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그러셨나봅니다. 설마 형님이 싫어서 그러실리가요."

  원의는 최대한 웃음을 참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려 노력하였다. 

  "아니야, 밤에 방에 들어와선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몸 돌려 잠을 자는데 어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시무룩한 표정의 원의에게 일월은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 지 열심히 머릿 속으로 말을 골랐다.

  "아닐 것입니다. 예전부터 제가 보아왔는데, 서방님은 아씨... 아니 형님을 연모하십니다."

  일월의 말에 원의의 눈이 반짝였다.

  "참인가? 참으로 서방님이 나를 연모한다고 하셨나?"

  바짝 들이밀어진 원의의 얼굴에 일월은 잠시 움찔하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 네. 처음엔 제가 투기가 날 정도로 좋아하셨지요."

  원의의 눈이 반짝이며 기뻐하다가 이내 눈 안의 광채가 사라지며 다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왜 나한테 손도 안대는건데... 자네는 아는가? 혹시 어떻게 해야 서방님이 나를... 나를..."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던 원의였다.

  "안아주실 건지..."

  모기 같이 작은 목소리로 기어들어가 듯 말하는 그녀의 말에 일월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건 명이 해결해야 할 듯 했다.

  "아니! 내가 그리 못났는가? 서방님이 거들떠 보지도 않을 정도로?"

  자꾸만 되풀이 되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이를 어찌 해야 할 지 난감한 일월이었다.

  "그러니까, 자네에게 내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밤에 어찌 해야 하는 건가? 내가 너무 목석처럼 있어서 그런건가? 자네는 그래도 나보다 먼저 서방님과... 흠흠!"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날리려는 듯 일월을 바라보는 시선을 은근 피하였다.

  "서방님과 밤시간을 보냈으니... 잘... 알 것 아닌가? 어찌 해야... 서방님이 나를 여인으로 안아줄지..."

  아무래도 답을 주지 않으면 오늘 날이 가도록 제 방에 앉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의 원의였기에 일월은 이를 어찌해야 하나 눈알만 데구르르 굴리고 있었다.

  "이보게..."

  간곡하면서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원의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일월은 한숨 내쉬 듯 말문을 열었다.

  "저기... 그게... 서방님께 사정이 있으셔서 그러시는 것일 겁니다. 그건 저도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서방님이 직접 형님께 말씀드릴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생뚱맞은 대답에 원의는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꿈쩍거렸다.

  "사정이라니? 무슨..."

  "그건 서방님께서 마음의 준비가 되시면 형님께 차차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때는... 부디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화내지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말에 원의는 의아함을 얼굴에 그대로 나타내었다. 지금 밤일에 대해 물어보는데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었다.

  "아니, 그게 밤에 내게 손대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일월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의아함에 갸웃거리던 원의는 이어진 일월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귀를 쫑긋하며 일월이 하는 이야기 하나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진중히 듣고 있었다.

  "형님, 주무실 때 속적삼을 입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그냥 저고리채로 입고 주무십니까?"

  "음... 초야에는 서방님이 저고리를 벗겨주셔서 속적삼을 입고 잤네만, 내가 그게 좀 부끄러워서 말이네. 요즘은 그냥 저고리를 입고 자네."

  짤막한 한숨과 함께 일월은 다른 물음을 물었다.

  "그러면, 치마는요?"

  "치마? 그야... 겉치마는 벗고 자네만. 그건 왜 그러나?"

  "하아... 아씨... 아니, 형님. 속이 비치는 대슘치마(속치마)에 속속곳과 다리속곳만 입으십시오."

  일월의 말에 원의는 얼굴을 다시 붉히며 놀란 듯 물었다.

  "아니! 그러면 속바지는 입지 말라는 것인가? 대슘치마 안에 속바지를 입지 않으면...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지 않겠는가? 아...!"

  놀라서 일월에게 묻던 원의는 말의 끝에 가서야 왜 그리 이야기했는지 깨달았다.

  "서방님께 술을 드시지 않도록 꼭 간곡히 이야기 하십시오. 또 술을 드시고 그냥 주무시면... 안되니까요."

  일월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였다. 왜 자신이 명과 원의의 밤일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지 모르겠지만, 왠지 바보 같이 서로 뒷모습만 바라보며 빙빙 도는 숨바꼭질을 보는 것도 지쳤다. 이젠 혼인을 한 마당이니, 언제가 되었든 명이 원의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월이었다. 물론, 혼인하기 전엔 이 일을 어찌 말할 것이냐고 명을 닥달하며 대책을 세워보라고 하였지만,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대책은 없는 듯 보였다. 답이 보이지 않을 땐, 정면 돌파가 최선일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냉랭해지는 관계가 되든 아니든.

  일월은 마지막 말 하나를 더 보태었다.

  "그리고, 서방님은..."

  일월의 목소리가 작아지며 원의의 귓가에 소곤대었다.

  "접문(接吻)에 약합니다."

  듣고 있던 원의의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일월은 지금 자신이 뭘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속으로 혼자 삼켰다. 명 하나를 갖고 둘이서 나눠갖는 것도 그런데, 그것이 사내가 아니라 여인인 것이 더 이상한 현실이었으니... 여인 셋이서 서로 얽히고 얽힌 이 상황이 참으로 이상스러우면서도 우스우면서도 착잡하였다.

  "아, 알겠네. 내 오늘 밤 꼭 자네가 말해준대로 한번 해보겠네. 고...고맙네."

  자신의 두 손을 겹쳐서 꼭 잡아오는 원의를 보는 일월의 눈빛과 낯빛에는 착잡함과 초조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이 정도 뿐이라 송구합니다."

  "아니야, 아니네! 내 자네가 있어서 용기를 내어 볼 수 있을 것 같네. 오늘 밤엔... 꼭..."

  원의의 눈에는 초롱초롱하게 결기(決氣)가 가득하였다.

  '휴우... 서방님. 오늘 밤을 어떻게 넘길런지요. 계속 그렇게 피하다간 아무런 일도 되지 않는다고요.'

  답답한 일월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원의는 연신 고맙다고 하며 재희와 연희를 보러 간다고 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일월은 복잡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명은 오늘 밤도 제 사랑방 너머의 안방 문을 바라보며 대청마루에 서성였다. 오늘이 나흘 째였다. 혼인하고 열흘 동안 부부가 한 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오늘도 명은 원의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동안은 계속 술 핑계로 이래저래 잘 빠져나갔지만, 오늘은 또 어찌 이 밤을 보내야 할 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기쁨과 함께 밤을 보내야 하는, 그리고 그녀에게 어떤 핑계로 손을 대지 않아야 할 지, 피하고 싶은 불안감이 함께 공존하였다.

  오늘은... 머리가 아프다고 해볼까.

  아니야, 그건 어제 저녁에 술을 마셔서 머리가 아프다고 써먹었었지.

  그럼, 배가 아프다고 해볼까.

  그래, 요즘 잔치 이후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챙겨주어서 배탈을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그래, 오늘은 배탈이다.


  긴 들숨을 들이쉬고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열린 방문으로 보인 그녀의 모습에 명은 숨을 멈추었다. 창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과 호롱불에 비친 원의의 모습이 마치 다소곳한 정숙한 여인이면서 묘한 색기가 어우러진 요녀(妖女)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방문을 천천히 닫으며 들어오는 명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부...인. 아직 안주무셨습니까? 늦은 시각인데 먼저 주무시지 않고요."

  "서방님이 학문에 열심히 정진 중인데, 어찌 먼저 눈을 붙이겠습니까?"

  자신에게 바짝 원의가 다가오자 명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하였다.

  "하루종일 글공부하느라 피곤할텐데 어서 잠자리에 드시지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원의의 손이 명의 저고리 고름을 풀어내었다. 명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가위자 형태로 모으고는 한발짝 물러섰다.

  "아니... 제가 벗겠습니다. 매번 제 옷시중을 들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찌 그러합니까. 제게도 서방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서.방.님."

  무언가 예전과는 다른 결기와도 같은 박력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명은 아무 대꾸 못하고 그녀의 손이 이끄는대로 겉저고리를 벗었다. 

  속적삼만 입은 채로 얼른 이부자리에 누우려 하자 원의의 손이 명의 손목을 잡았다.

  "바지도 벗으셔야지요."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허리끈으로 다가오자 명은 얼른 몸을 뒤로 빼내며 허리끈 매듭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니... 이건 제가 하겠습니다."

  명은 마치 불이 활활타는 아궁이 앞에 얼굴을 맞대고 있는 듯 뺨이 화끈거리는 듯 하였다.

  "아닙니다. 이런 건 부인인 저도 충분히 서방님에게 해드릴 수 있는 일입니다. 너무 사양마세요."

  "아, 아닙니다. 부인. 제가... 제가 알아서 벗겠습니다."

  잘 때 겉바지를 입은 채로 자면 불편하기 때문에 당연히 벗고 잤었지만, 늘 그녀가 자리에 누운 뒤에야 옆에서 조심스레 벗고 얼른 이불로 들어갔던 명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집요하게 옷시중을 끝까지 들겠다는 원의가 낯설면서 등에 식은땀이 나는 듯 하였다.

  "서방님..."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 안에 떨림이 있음을 느낀 명은 바지춤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한 손가락으로 건들기만 해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 철렁한 것엔 놀람과 함께 그녀의 자태 속에 아름답고 묘하게 흐르는 색기에 동(動)하는 명의 충동이 같이 들어있었다.

  "제가... 싫은 것입니까? 제 손길이... 제 몸이... 그리고 저라는 여인이... 혼인하고나니 싫어진 것입니까?"

  결국 눈물 방울이 투둑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니,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부인을 싫어하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명은 당황한 듯, 억울한 듯 그녀를 향해 강변하였다.

  "그런데 왜...  왜..."

  울먹거리던 원의가 명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얼결에 그녀를 품에 안은 명은 어색하게 두 팔들고는 어찌할 지 그녀의 등 뒤 공중에서 팔을 움찔거렸다. 결국 제 속적삼 앞섶에 눈물이 적셔지는 것이 느껴지자 두 팔로 그녀의 등을 천천히 감쌌다.

  혼례 이후로 처음으로 닿는 것이었다. 가슴팍에 닿는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심장으로 스며들었나보다. 또 심장이 제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미친 듯이 나대고 있었다.


  - 두근두근.


  워낙 없기도 했지만, 들어오기전 다시 한번 가슴을 잘 둘러 쌌기때문에 비록 속적삼 위에 얼굴을 대고는 있지만 그녀가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래도 걱정은 되어 슬며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제게 얼굴을 마주치도록 살짝 밖으로 밀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그녀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힘을 주어 제 품 안으로 파고 드는 것이 아닌가.

  제 허리를 감싼 원의의 부드러운 팔에 저도 모르게 허리가 찌릿하였다. 아파서가 아니라 말초적인 신경이 허리와 등줄기를 따라 짜릿하게 올라왔다.

  '큰일났네.'

  그 동안 밤마다 잠든 원의 얼굴을 보며 만지고 싶은 욕구, 입술을 훔치고 싶은 욕망, 더 나아가 살을 맞대고 싶은 욕정이 치솟아 올라 그것을 다스리느라 밤새 잠을 설쳤었다. 그간 잘 눌러두었는데 원의가 이리 밀착해오니 그 인내의 끈이 작은 단도로 잘근잘근 잘려져 나갈 듯 불안하였다.

  밀어내도 밀어내지지 않던 그녀의 몸이 살짝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던 그때였다.

  명은 이때다 싶어 그녀를 살짝 떼어내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리 하려고 했는데, 자신이 바라보기도 전에 원의의 입술이 먼저 자신의 입술을 덮쳐왔다.

  명은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입을 맞추었다 떼어낸 그녀가 눈을 들어 명과 눈을 맞추었다.

  "서방님... 제가 싫지 않다면 오늘 저를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말을 마친 원의는 다시 명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입 안쪽 부드러운 속살을 찾아 제 혀를 밀어 넣었다. 급작스러운 원의의 공세에 명은 당황하여 한동안 그녀가 이끄는대로 얌전히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깊은 속으로 탐해오는 그녀의 말캉한 혀에 몇번이나 정신줄을 놓을 뻔하였다.


  이대로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저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까짓것 들키면 어떠랴.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녀의 짜릿한 입맞춤으로 흐릿해지는 판단과 희미해지는 근심을 머릿 속에서 조금씩 밀어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가끔씩 입술과 입술이 잠시 떨어지는 젖은 소리와 함께 습하고 격한 숨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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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흔둑흔~

아... 월요일... 출근인데... ㅜ.ㅜ 원의와 명이땜에 잠을 못자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 빨리 잠들어랏!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초보 작가입니다. 사극 동양풍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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