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된거같진 않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맥코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위해 팔짱을 꼈다. 마치 자신이 방금 한 질문이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초조하게 입술을 핥는 모습에서 속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다는게 여과없이 드러났다. 맥코이는 놀라움으로 가득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제 얼굴에 쏟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물음에 스팍은 잠시동안 예의라고는 완전히 잊은 벌칸처럼 아주 대놓고 맥코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지난 두 달동안 그는 강의가 끝날때마다 남아서 수업 내용에 관한 질문을 퍼붓던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평소처럼 남아서, 이젠 이 상황이 제법 익숙해졌는지 뒷짐을 지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교관에게 다가가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다. 라피노 종족의 언어 체계에 대한 질문 대신 난데없이 데이트 신청을 받은 스팍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그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으나, 맥코이는 약간 섭섭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그동안 질문 할 때마다 눈빛이라던가 얼굴 표정으로 나름의 신호를 보냈었는데, 커크의 말대로 스팍이 그 신호들을 눈치챘을리가 만무했다.



“....생도의 발언은-”
“데이트 하자는 겁니다.”



혹시나 자신의 데이트 신청이 라피노 행성의 기후와 환경이 그들의 언어 체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토론시간을 갖고 싶다는 요청이 되어버릴까 순간 불안감이 엄습한 탓에, 맥코이는 스팍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빠르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확인 사살이었다. 그의 물음을 나름대로 제 방식대로 해석하며 데이트라는 결론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하던 스팍은, 못을 꽝꽝 박아버리는 맥코이에 입을 꾹 다물었다. 갈색 눈동자가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맥코이의 두 눈을 응시한다. 스팍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거나 이런 저런 계산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한 말이 정말로 진심이냐고, 조금의 장난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심이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피하는 기색 없이 곧게 뻗어오는 묘한 시선에 맥코이는 침을 삼켰다. 예상보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맥코이의 계획을 듣던 커크는, 데이트란 말에 스팍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학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교관과 생도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것은 비논리적이라는 거절을 3초안에 내어놓는다에 위스키 한 병을 걸었던 것이다.



“벌칸 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을 하나 알고 있어서요. 좋아하실 것 같은데.”



맥코이는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스팍이 좋아할만한 레스토랑을 찾기 위해 한달 내내 스타플릿 아카데미 커뮤니티를 비롯해 온갖 곳을 이를 악물고 뒤졌다는 사실은 숨기기로 했다. 그 동안 피눈물 흘려놓고 이제와서 별거 아니라는 척 제안하는 것 쯤이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남자의 눈물 겨운 노력으로 봐줄 수 있지 않겠는가. 스팍은 다시 한 번 침묵했다. 진지하게 맥코이의 제안을 검토하고 있는 듯 했다. 효과가 있었던게 벌칸 음식이라는 단어 쪽인지 자신의 절박한 표정인지 아니면 스팍이 자신에게 갖고 있었을 아주 작은 호감인지 - 사실 마지막일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거라 여겼다 - 알 수 없었지만 맥코이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보단 지금 당장 저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올 대답이 더 중요했다. 지루하고 어렵기 그지 없는 강의 내용 대신, 자신의 데이트 신청에 대한 답. 맥코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수십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지만 역시 실전은 다르다. 고작 데이트 신청 가지고 벌벌 떠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너무 오랜만인 탓일거라고 스스로를 달래기로 했다.



“.......그럼 1900시에 정문에서 만나도록 할까요.”



어라? 꿈에서도 예상못한 대답에 맥코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방금 뭐라고...? 상황 파악을 못한 얼굴로 쳐다보자 스팍의 얼굴도 의문으로 물든다.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데이트 신청하길래 받아줬더만 왜 그런 표정이냐, 하고 묻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맥코이는 헙, 입을 닫았다. 받아줬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은, 안드로이드인가 살아있는 생명체인가 한달에도 열두번씩 생도들 사이에서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그' 스팍 교관이, 자신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줬다. 긴장이 풀리자 얼굴 근육이 눈치없게 들뜬마음을 주체 하지 못하고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맥코이는 웃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래봤자 광대는 하늘 높이 솟아 우주를 뚫고 나갈 지경이었어서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체면은 지켜야겠다 싶어 헛기침을 한번 하고 고개를 들었다. 멀뚱히 쳐다볼땐 언제고 맥코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스팍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부끄러운걸까.



“....그럼 그때 봐요.”
“.....알겠습니다.”



낯간지러운 분위기 대화가 이어졌다. 괜히 목구멍이 간질거려서 맥코이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재빠르게 뒤를 돌아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언뜻 본 스팍의 얼굴에 옅은 푸른빛이 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돌아가 확인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어떤 농담을 던지고 무슨 메뉴를 주문하며 식사 후 어디로 갈지 데이트 계획을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머리는 어떻게 만지고 어떤 옷을 고르고 무슨 양말을 신어야할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제임스 커크는 아직도 그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두 달하고도 일주일 정도 전이었다. 여느때처럼 학기가 시작되었던 날, 커크는 패드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강의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강의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나마 다행인건 평소에 그가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까다로운 과목들이 이번 학기에는 없다는 점이었다. 첫 날인데 끝나고 술이나 한 잔 하러 갈까, 하고 별 의미없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와중에 어디선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췄다. 복도 끝에서 맥코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보통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쪽은 자신이었고 거거에 퉁명스레 핀잔을 주는게 맥코이의 역할이었기에 커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헉헉 대며 다가온 맥코이가 숨을 고르기도 전에 거친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너 이번에 벌칸 교관 새로 왔다는거 알고 있었어?’
‘...벌칸 교관? 아, 그거. 응, 얼마전에 들었는데.’



뜬금없는 질문에 여전히 혼란스러우면서도 커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며칠 전 술루가 지나가는 말로 하프 벌칸 교관의 수업을 듣게되었다고 중얼거리던게 기억이 났다. 벌칸이면 엄청 까다롭겠다 싶어 절대 그 수업은 안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커크의 대답에 맥코이는 화가 난건지 여전히 숨이 찬건지 씩씩대며 욕을 내뱉었다. 젠장! 왜 나만 몰랐던거야? 맥코이의 반응에 커크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본즈, 무슨 일 있는거 아니지? 걱정스런 물음에 답할 생각도 없는건지, 맥코이는 다급하게 커크의 팔을 잡아 끌었다. 도대체 어디 가는거냐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물음을 꾹 삼키고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행정실이었다. 자동문이 스르르 열리자마자 몸을 우겨넣고 안으로 들어간 맥코이가 파란 얼굴에 노란 눈을 가진 행정 직원에게 다짜고짜 건넨말은 이러했다.



‘스팍 교관님 외계 언어학 강의 지금도 신청 가능합니까?’



놀라서 눈이 튀어나오려는 커크를 무시하고 맥코이는 직원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화면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확인하던 직원은 미안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수강 인원이 다 찼네요. ...추가로 신청은 안 되는 건가요? 미안합니다, 수강을 하는 생도가 취소하지 않는 이상 우리 쪽에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건 없어요. ...딱 한 명만, 어떻게 안될까요? ...글쎄, 저희쪽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라서...



난감한 얼굴의 직원과 간절한 표정의 맥코이가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커크는 정신을 놓을 뻔했다. 일단 맥코이가 이미 인원이 다 찬 강의에 자신을 넣어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는 것부터가 말도 안됐다.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 맥코이는 은근히 꼼꼼한 면이 있었고, 듣고 싶은 강의는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짜여진 시간표를 유지 했기 때문에 - 뿐만 아니라 커크의 시간표까지 짜주는 일도 있었다 - 자신을 받아달라고 행정실에서 부탁하는 상황은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거기에 외계 언어학이라니, 이건 정말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우주도 싫어 죽겠는데 내가 왜 외계 언어까지 배워야하냐고 맥코이는 틈만나면 툴툴거렸다. 외계 언어학 클럽의 회계담당을 맡고 있으면서도 정작 강의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커크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이여서, 그들은 외계 언어학 강의를 최대한 미루고 있었다. 심지어 다음 학기에 강의가 쉽고 널널하기로 유명한 안드레아 교관이 고향에서 휴식을 끝내고 돌아온다는 소문이 있었고, 커크와 맥코이는 암묵적으로 그의 강의를 듣기로 약속해둔 상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맥코이는 스팍 교관의 외계 언어학 강의를 신청하는데 성공했다. 밤새도록 빈자리가 나지 않나 패드를 두드려댄 결과였다. 그리고 시뻘겋게 충혈 된 눈을 하고 패드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맥코이의 의중이 하도 궁금한 나머지, 그 옆에 찰싹 붙어 쫑알쫑알 캐물어 대던 커크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냉큼 맥코이를 따라 피터지게 패드를 두드려 강의를 신청해버렸다. 너는 왜 따라오냐는 맥코이의 핀잔에 이래봬도 외계언어학 클럽 회원이라고 자랑할때만해도 커크는 앞으로 있을 일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맥코이의 행동은 상상초월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날 역시나 기대한 만큼 지루하기 짝이 없고 깐깐한 설명에 커크가 하품을 해대는 동안, 맨 앞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 하고 앉은 맥코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로봇처럼 일정한 어조로 강의 평가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교관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맥코이의 이상행동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예습 복습으로도 모자라 강의가 끝날때마다 쪼르르 달려가 질문을 퍼붓는 그를 수상하게 여긴 커크가 두 달 내내 끈질긴 추궁을 한 끝에, 맥코이는 마침내 본심을 털어놓았다. 스팍 교관을 좋아하고 있노라고.



커크는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냐는 둥 원래 그런 취향이었냐는 둥 쓸데없는 질문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인 커크에게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노라 쑥쓰럽게 중얼거리는 맥코이의 모습은 낯설었던 것이다. 혈기왕성한 남녀가 우글거리는 아카데미에서 맥코이는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막지 않고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고 있는 커크와 찰싹 붙어다니면서도 연애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커크는 그가 너무 일찍 연애 결혼 이혼까지 직진으로 경험한 탓에 흥미를 잃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이혼 후에 더 돈독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딱히 전부인에게 미련이 남아있는것도 아닌 것 같아서, 커크는 종종 누구 소개시켜줄까 하고 장난처럼 물었다. 그리고 커크가 물을때마다 맥코이는 감흥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한 톨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은 백퍼센트 진심이었단걸 알고 있었기에 커크는, 비록 맥코이의 '그 사람'이 깐깐하고 악마같고 짜증나는 스팍 교관이라고 해도 기꺼이 축하해줄 의향이 있었다. 더불어 맥코이의 연애를 위해 기꺼이, 제 한 몸 다바칠 의향도 있었다.



잘 되어가고 있으려나. 아무도 없는 기숙사 방에 혼자 남은 커크는 침대위에서 뒹굴거리며 몇 시간 전부터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질문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패드 화면에 나타난 시간은 이미 230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첫 날부터 외박할 생각은 아닐텐데. 맥코이의 첫 데이트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술 마시자는 술루와 스콧의 제안도 거절하고 기숙사에 틀어박힌 보람이 있어야 했다. 커크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굴렀다. 순간 중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든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찌르르 올라오는 아픔에 몸부림칠 시간도 없이 때맞춰 문이 열렸다. 성큼 성큼 걸어들어오는 맥코이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있었다. 어땠어?! 맥코이가 침대에 걸터앉기도 전에 커크는 냉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맥코이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아직도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처럼, 뒷목을 긁적이고, 헛기침을 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게 괜히 눈꼴 시려워서 커크는 투덜거렸다. 좋았냐? 맥코이는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대답했다. 어. 우웩. 커크는 토 하는 시늉을 했다.



“뭐 했길래 이제와?”
“그냥, 밥먹고, 산책도 좀 하고.”
“그거 밖에 안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밥 먹다가 라피노족의 문화에 대한 강의를 들어야 했거든.”
“으, 진짜 싫다.”
“생각보다 재밌던데.”
“그러셨겠지. 강의는 안 듣고 얼굴만 쳐다봤을테니까.”
“어, 귀엽더라.”



우웨에에엑. 커크가 다시 한 번 구역질을 해대자 맥코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새삼스럽게 뭘 그러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이었다. 스팍의 얼굴을 떠올리는 모양인지 맥코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도 연애를 안해서 걱정된다는건 취소다. 침대에 앉은 맥코이는 등을 깊숙하게 기댔다. 애꿎은 침대 시트 위에 원을 그리는 손가락에서 흥분이 묻어나왔다. 얼굴에 부드럽게 떠 있는 미소는 또 어떠하고. 커크는 얼굴을 있는대로 구겼다. 너 진짜 짜증난다. 볼멘소리를 내뱉는데도 그러냐는 듯 눈썹만 한 번 살짝 들어올려주고 반응이 없다. 진짜 짜증나. 커크는 맥코이의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야! 그제야 돌아오는 반응이 만족스러워 베개를 뺏어다 끌어안았다. 말해봐, 빨리.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명령 아닌 명령에 맥코이는 반항하는 얼굴을 했다가 곧 표정을 풀었다. 지금 그는 사춘기 소년이 첫 데이트를 하고 온것마냥 흥분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맥코이가 자세를 고쳐 잡자 커크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밤새도록 맥코이가 제 첫 데이트를 자랑스레 늘어놓는 동안, 커크는 구역질을 총 열세번 해야했다.













맥코이는 스팍의 새로운 면을 관찰하는 것 만큼 즐거운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지난 두 달동안 외계 언어학 강의를 들으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스팍을 관찰해왔다. 넓은 강의실 안에 울려퍼지는 낮은 목소리,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바르게 뒷짐을 진 자세와 생도들을 훑어보는 날카로운 눈빛같은 것들. 강의가 끝난 후 남아 질문을 퍼부을 때는 딱딱하고 냉철한 교관에서 한꺼풀 벗겨진 스팍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수업을 들을 때보다 조금 더 가까운거리에서 맥코이는 스팍의 갈색 눈이나 의외로 짧고 통통한 손가락, 눈을 깜빡일때마다 짙게 떨리는 속눈썹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았던 데이트에서 그는 지난 두 달 동안 관찰 한 것보다 더 많은 수확을 얻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때면 살짝 올라가는 눈썹, 긴 소매끝을 무심코 끌어다가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습관등을 볼 때마다 맥코이는 심장이 그대로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무심코 좇고 있었던 스팍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발견 하는 순간들은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와 스팍이 처음 만났던 때로, 그러니까 스팍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렇지만 맥코이의 머릿속에는 선명하게 박혀있는 그 과거의 순간들로.




음식점이 괜찮아서 다행이었지. 맥코이는 복도를 걸으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벌칸 음식점' 이라는 평가 옆에 콕콕 박혀 있는 별 다섯개를 믿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리플리케이터가 만들지 못하는 음식은 없을테지만 맥코이는 인간의 정성이 들어간 진짜 음식과 리플리케이터로 만든 음식은 비교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리플리케이터를 통해 아낄 수 있는 시간과 그 효율성에 대해 읊으리라 생각했던 스팍은, 특수한 경우에는 리플리케이터를 배신하고 레스토랑에서 시간낭비를 한다는 것에 제법 익숙한듯 보였다. 레스토랑에는 다행히도 벌칸이 아닌 손님들은 위한 메뉴도 있었고 맥코이는 음식을 즐기면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커크처럼 유려한 손놀림과 화려한 언변, 황홀한 두 눈으로 상대방의 정신을 쏙 빼놓는 스타일은 아니었어도 맥코이는 기본적으로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맥코이 본인은 알지 못했으나 그런 면모들은 상대방과 단 둘이 있을 경우 큰 영향력을 끼쳤다.




맥코이는 스팍과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라피노족의 문화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맥코이는 하프 벌칸으로서 지구에서의 생활이 힘들지 않은지 물었고, 업무는 어떤지, 스타플릿 아카데미 생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것 저것을 물었다. 예외는 물론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생도들이 고도의 학습능력과 탐구력을 겸비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맥코이 생도 역시 매 수업시간마다 예리하고 수준 높은 질문으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스팍이 디저트로 나온 무가당 케이크를 한 스푼 입으로 쏙 집어넣는 동안, 맥코이는 아주 짧게 고민하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모든게 사실 스팍에 대한 호감으로 시작되어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고. 좀 더 솔직해지면 '꼬시려고'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맥코이는 상황에 따라 적당히 고급스러운 어휘를 구사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실 제가 말을 뱉어놓고도 맥코이는 잔뜩 긴장했다. 스팍이 '그동안 날 속여?' 같은 의미를 담은 경멸의 눈빛을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한 탓에 손도 대지 않은 망고 아이스크림은 힘없이 줄줄 녹아내렸다. 스팍은 의외로 경멸의 눈빛도 실망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한참동안 케이크 스푼만 만지작거렸다. 참다 못한 맥코이가 스푼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아무말이라도 건네려던 순간, 스팍은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와 정식으로 교제하고 싶다는 의미입니까? 맥코이는 스팍의 내리깐 두 눈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질문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벌칸의 화법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어떤말을 하든 빙빙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맥코이 는의도치 않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해버린 탓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부질없는 부채질을하다가, 젠장, 하고 습관처럼 중얼거리다가, 뒷목을 긁적거리면서 수긍해버렸다. 예, 뭐, 그렇긴한데...당장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고요, 젠장, 그러니까....그러니까.













좋아하시겠지? 맥코이는 손에 쥔 갈색 봉투를 흘끔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가게에서 직접 사온 샌드위치였다. 혼자 걷기엔 꽤 먼거리였으나 샌드위치를 받은 스팍의 반응을 상상하다보니 지루할 틈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돌아오는 길은 더 짧았다. 혹여나 채소의 물기가 샌드위치의 맛을 떨어트릴까 걱정한 탓에 돌아오는 길에는 공용 트랜스포터를 이용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커크가 들었으면 아주 뒷목을 쥐고 넘어갈 이야기였다. 트랜스포터를 혐오하는 맥코이 덕에 기술의 발전은 이용하고 봐야한다는 커크 역시 먼거리를 땀 흘리며 걸어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야겠군. 맥코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닫힌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얼마지나지 않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고, 문이 자동으로 소리없이 열렸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맥코이를 발견한 스팍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는지 제법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맥코이는 또 서운해졌다. 어젯 밤이 그렇게 별로였나?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물론입니다, 흠. 맥코이는 스팍의 한 마디에 돌연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또 대책없이 스물스물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물론 들어와도 된다고 했으니 뭔가 자신과 그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것은 아닐까 잠깐 들떴다가, 문득 스팍이라면 누구에게나 같은 대답을 건넸으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다른 동료 교관이나 생도, 혹은 그 외의 어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어도 스팍은 똑같이 평탄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내뱉었을게 분명했다. 물론입니다, 라고. 다시 또 급격하게 울적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맥코이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우울한 감정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있는 스팍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언제그랬냐는 듯 스르르 가라앉는다. 그래, 뭐 어쩌겠어.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거지.



“...저녁 드셨어요?”
“...아직 먹지 않았습니다.”
“언제 드실 생각이었어요? 할 일이 많아 보이는데.”



맥코이는 스팍의 패드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어지러운 글자들을 곁눈질로 흘끗 바라보았다. 스팍은 항상 있는 일이라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



“오늘은 업무가 많아 저녁 식사가 계획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잠깐, 뭐라고요?”
“...오늘은 업무량이 많아 저녁식사를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일 많다고 쫄쫄 굶어요?”
“벌칸은 소량의 영양소만 섭취해도 충분히 일상생활을 영위 할 수 있습니다.”



논리와 이성을 신봉하시더니 그 누구보다 비논리적인 일을 하고 계셨구만. 맥코이는 스팍이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종이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무엇입니까. 스팍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봉투를 찢어 열고 있던 맥코이는 그대로 손을 멈췄다. 그러고보니 상황이 제가 상상한 그림과는 좀 많이 멀어졌다. 사실 일부러 저녁 먹기에 조금 이른 시간에 찾아온것은 맞았다. 업무하는 것도 보고, 자료정리라도 조금 돕다가, 같이 샌드위치나 먹으면서 어젯 밤이 어땠는지 물으며 슬쩍 다음 데이트 이야기를 꺼낼 예정이었는데. 맥코이는 문득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커크가 분명 여러 조언을 늘어놓으면서 뭐라고 신신당부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맥코이는 봉투 안에 얌전하게 들어서 날 잡아잡수쇼 하고 있는 샌드위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제 꼴이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그제야 든 것이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데이트 한 번 한거 가지고 다짜고짜 사무실로 쳐들어와서 한다는 게 저녁 안먹느냐고 달달 볶으면서 강제로 샌드위치를 들이대는 거였다. 대답없는 맥코이가 이상했던지 스팍이 물었다.



“직접 사오신 겁니까?”
“....네, 저녁 안 드셨을 것 같아서.”
“.....”
“같이 드실래요?”
“...저녁 안 드셨습니까?”



이 무슨 괴상한 대화란 말인가. 맥코이는 이상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뻔한 물음과 답에 저도 모르게 픽 미소 지었다가, 스팍이 물끄러미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중얼거렸다. 네, 같이 먹으려 했죠.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봉투를 부산스럽게 정리하다가 이상한 침묵에 고개를 들었다. 스팍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번 본 적이 있는 표정이었다. 맥코이가 처음 데이트 신청을 했던 날, 아무도 없는 강의실 안에서 같이 저녁 먹지 않겠냐고 물었던 그 날. 맥코이의 물음이 정말로 진심인지 알고 싶어하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날을 바짝 세우고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 다른 생도들 같았으면 무섭다고 진저리 쳤을 눈빛이 맥코이는 겁나지 않았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면서, 맥코이는 정말 진심이라고, 진지하게 한 말이니까 믿어달라는 뜻으로 천천히 웃었다. 정말로 스팍에게 눈빛으로 상대방에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얼마든지 그 앞에 서 있을 자신이 있었다. 진심이었으니까. 어젯 밤 얼떨결에 내뱉었던 고백과 같은 말들도. 제가 스팍에게 내뱉었던 말들중, 어느 것 하나도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 없었다. 같이 저녁 먹어요. 맥코이는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다시 한 번 침묵이 흘렀다. 맥코이는 가만히 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시간이 멈춘 것 처럼 고요하던 순간이 끝났다. 멍하니 맥코이를 바라보던 스팍은 황급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맥코이는 진득하게 붙어있던 시선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게 괜히 아쉬워서, 애꿎은 종이봉투만 만지작거렸다. 스팍은 상의 소매를 끌어다가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 행동에 맥코이는 괜히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스팍에게 모두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저 습관이 자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지. 언제부터 그를 바라보았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렇게 단 둘이 마주보고 앉아있는 게 믿기지않아서 자꾸만 심장이 터져나갈 것 처럼 뛰어댄다고. 마침내 스팍이 입을 조그맣게 여는 순간 맥코이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업무를 마무리 한 후에 식사시간을 가져도 괜찮을까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했다. 별로 배고프지 않았으므로 지금 먹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맥코이는 문득 스팍의 패드 화면에 떠 있는 시간을 곁눈질 했다. 언뜻 보기에도 복잡한 화면을 보아하니 업무를 끝내려면 최소 한 두시간은 필요할 것 같았다. 문제는 맥코이에게 중요한 것이 시간은 아니라는 거였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밤을 새자고 해도 얼씨구나 하고 옆에 붙어있을 수 있었지만, 궁금한건 스팍의 생각이었다. 업무를 할 때는 방해받고 싶지 않을게 분명했고, 사무실에 떡하니 앉아있는 상대가 하필 자신의 수업을 듣고 있는 생도라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만약 이 상황을 알게 된 누군가가 마음먹고 꼬투리를 잡으면 충분히 안 좋은 방향으로 오해 받을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맥코이는 이 사무실 바깥에서 스팍의 업무가 끝나길 기다려야했다. 그러나 모든 논리와 이성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팍의 대답은 달랐다.



“....괜찮으시다면,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맥코이는 스팍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닌 척 하면서 점점 푸르게 물들고 있는 귀 끝이,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행동이, 다시 소매 끝을 문지르고 있는 손가락이 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반듯한 앞머리에 입 맞추는 대신에, 맥코이는 봉투를 잘 갈무리 해서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맥코이의 행동을 주시하던 스팍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다시 패드로 시선을 돌렸고, 맥코이는 스팍이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게 책상에서 살짝 물러났다. 의자에 등을 깊숙하게 기대고 시간을 떼우기 위해 자신의 개인용 패드를 꺼내들었으나, 화면에 쌓여있는 메세지라던가 일정을 확인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집중 할 수 없었다. 지금 온 신경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최대한 스팍이 앉아있는 쪽을 향해 몸을 바짝 붙이고 숨을 죽이고 있었기에. 맥코이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아무 버튼이나 눌러 새로운 창을 만들어냈다. 화면에는 행성연방에서 주최하는 유명한 전시회의 입장권 예매 내역이 띄워져 있었다. 어제 저녁 스팍이 지나가는 말로 보고싶다고 했던 걸 잠들기 전에 예매해둔 것이었다. 맥코이의 패드 화면은 한참동안이나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스팍도 마찬가지였다.
























“난 도대체 어디가 좋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



커크가 열 일곱번째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맥코이 대신 술루가 직접 커크의 등을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분명 살살 내리쳤는데도 찰싹하고 매서운 소리가 강의실 안에 작게 울려퍼졌다. 이크, 술루가 주위를 살피며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스팍이 과제 제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기에 강의실 맨 뒷줄에 앉아있는 그들에게 신경쓰는 생도들은 없었다. 커크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강단에 서 있는 스팍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과제 내주면서 무슨 논문 수준을 요구하잖아! 커크의 징징거림에도 술루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본인이 좋다는데 뭘 어쩌겠어. 그렇게 중얼거리곤 커크의 옆에 앉아있는 맥코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쵸? 그렇지. 얼씨구. 술루의 물음에 맥코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고 거기에 기가 찬 커크가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다들 미쳤어. 난 내 친구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할 의무가 있다고. 커크가 책을 신경질적으로 뒤적거리면서 투덜거렸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가 친구의 연애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맥코이는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기만 했다.



스팍의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를 나눠먹은 이후로, 맥코이는 그와 자주 데이트라 부를 수 있을만한 시간들을 가졌다. 각종 전시회란 전시회는 모조리 섭렵하고 얼마 없는 벌칸 레스토랑을 모두 방문했다. 달리 할게 없는 날에는 공원을 거닐었다. 스팍은 어두운 공원에 자그맣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를 좋아했다.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천천히 걷다가도 벌레 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맥코이를 신경쓰지 않고 벌레에 집중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괜히 짜증이나 내가 저 벌레보다 못한가, 하고 불평한 적도 있었다. 그게 질투였음을 깨달은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 벌레를 질투하다니. 자괴감에 빠져 머리를 감싸쥔 맥코이를 보며 커크는 재밌다는 듯 킥킥거리고 웃었다.


데이트를 한 다음날이면 맥코이는 꼭 저녁거리를 사들고 스팍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약속한 것도 스팍이 부탁한 일도아니었으나 문이 열리면 스팍이 익숙하게 그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괜히 수줍게 인사를 하고나면 맥코이는 가져온 음식은 한구석에 몰아두고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하며 스팍의 업무가 끝나길 기다렸다. 스팍이 그에게 더이상 그 봉투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 것이, 업무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봉투를 끌어다가 그들의 앞에 차려놓는 것이, 맥코이의 몫을 끌어다주면서 자신이 오늘 겪은 일을 조곤조곤 늘어놓는 것이 숨막히게 좋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하프 벌칸이 일상의 일부를 내어주었다는 게, 어느새 자신이 그의 일상에 포함되어 있다는게 벅차서 그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을 지경이었다. 첫 데이트 때 엉겁결에 고백을 해버린 후로 맥코이는 스팍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어떤 사이가 되는건지 섣불리 묻지 않았다. 단 둘이 만나 이야기 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손가락 한 번 스친 적 없었지만 둘 사이엔 그보다 더한 기류가 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맥코이는 강단 위의 스팍과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스팍은 맥코이를 짧게 응시하곤 다시 과제를 설명하는 일로 돌아갔다. 앞자리에 앉지 않은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궁금해 할까, 그것도 아니면 앞에서 귀찮게 하던 얼굴이 사라져서 후련해할까,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아쉬워하고 있을까.



“-그럼 10분간 휴식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설명이 그쳤다. 생도들은 다들 기지개를 하거나 갑자기 떨어진 어마어마한 과제에 질렸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며 엎드렸다. 끄으으. 커크 역시 신음을 내뱉으며 팔을 쭈욱 들어올렸다.



“근데 솔직히 말은 이렇게 해도 저도 궁금하긴해요.”



과제 내용을 받아 적고 있던 술루가 맥코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가? 맥코이는 책을 챙기고 있었다. 예상못한 질문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건지요.”



맥코이는 짖궂게 웃은 술루가 커크에게 눈짓을 하는 것을 확인했다. 커크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술루는 맥코이의 짝사랑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고 아닌척 하면서 은근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눈이 반짝거리는 술루와는 달리 커크는 관심없다는 듯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엎드려 있었다. 성의 없는 손길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그냥, 예쁘잖아.”
“거봐, 내가 물어보지 말라 그랬지.”



입을 떡 벌린 술루가 고개를 저으며 으으, 신음 소리를 내자 커크가 책상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솔직하게 말했는데 왜 난리들이야. 맥코이의 말에 둘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 쏠렸다. 맥코이는 다시 한 번 책을 정리하고 이번에는 자리에서 제대로 몸을 일으켰다.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는 술루가 괜히 눈에 걸려서 왜 웃냐,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신기해서요, 였다. 맥코이는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신기한 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자신도 내가 이런 놈이었구나 하고 신기해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맥코이는 나중에 보자며 대충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고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맨 앞 자리로, 텅 비어서 오늘따라 이상하게 외로워 보이는 자신의 자리를 빨리 채워야했다.



익숙하게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놓고 있자 스팍의 시선이 따라붙는게 느껴진다. 슬쩍 얼굴을 들자 모른척 새침하게 고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자리를 잡은 맥코이는 턱을 괴고 스팍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칼같이 단정한 앞머리도 뾰족한 귀도 동그란 코끝도 얇은 입술도 하루가 갈수록 자꾸 예뻐보이기만 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자신이 원래 연애할 때 이런 스타일이었는지 곰곰히 되짚어 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자 결론은 똑같다. 좋아한다는 것. 저 차가운 얼굴이 흐늘흐늘 풀어져서 다양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딱딱한 목소리가 제법 부드럽게 변하기도 한다는 것. 그 어떤 변명이나 사정도 용납하지 않는 로봇처럼 굴다가도 어린애처럼 소매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 나이먹고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 두근대는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믿었던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리기도 한다는 것. 그 모든게 결국은 지금 강단 위에 서서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은 하프 벌칸에게 귀결 된다는 것.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맥코이는 문득 떠오르는 물음에 혼자 웃다가, 그런대로 평탄하게 흘러가던 인생이 백팔십도 바뀌어버린 그때를 떠올렸다. 스팍을 처음 만났던 날. 스팍은 기억하지 못하는, 춥고 외로웠던 겨울의 도서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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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흔한 잡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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