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자 친구에게!


 

11월이야. 슬슬 날이 추워. 짐 정리를 마치고 묵을 곳을 명확히 하고 나니 전해야 했던 말이 떠올라 편지를 쓰네. 잠은 충분히 자고 있나? 식사를 거르는 일은 없겠지? 너무 많은 일을 무리해서 해결하려 들고 있지는 않은가? 마치 답장을 받은 듯 선명하게 그려지는군. 답하지 않아도 돼. 다 알겠으니. 시시콜콜한 일과 검사를 하려 쓰는 편지는 아니어서.

 

발레리오.

어릴 적부터, 나는 모든 이의 존경을 받고 싶어 하거나 수많은 사람을 구하려 들지는 않았어. 사람을 죽이거나 몰락시키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 아주 평범하고 평화롭게 자랐네. 다만 생각하기를 좋아했고 생각에 많이 괴로워했지. 아주 많고 사소한 것들이 내 사념의 주체가 되었고 어떤 날에는 단 한 순간도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토하고 기절할 만큼 술을 마셨네. 그렇게 청년 시절을 보내며 스물 몇 살부턴가, 서서히 이 습관에서 벗어날 줄 알게 되었는데 그에 따른 변화인지, 나를 이루는 중심이 점차 현재에 머무르기 시작했지. 나름대로 해답을 찾은 거야. 지금 이곳, 이 시간만을 느끼려 했어. 나의 숨, 내 눈에 보이는 것, 나를 보고 웃거나 찡그리는 사람들…….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내 깊은 내면을 회전하는 생각의 띠. 확신할 수 없어 끝내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한없이 왜곡되어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는 일이 더 나를 위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거야. 사실 미래를 상상하라 한다면 기꺼이 상상할 수 있어. 그건 내가 오랫동안, 더 어렸던 시절 해왔던 일이기도 하니까. 상상 속에서 나는 가업을 물려받기도 하고, 장군이 되기도 하고 시인도 되어보았다네. 그런데 내가 꿈꾸는 미래는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


사랑하는 여인과도 마찬가지였어. 길고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을 빗어내릴 때 그녀가 내게 왜 청혼은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 나는 그녀를 아낌없이 사랑했는데,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감정이 그녀만큼 크지 않다고 여겨진 거야. 억울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어. 사실은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미래를 함께하고자 하고 영원을 약속하려 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이라고. 그래서 나도 때로는 간절하지 못한 채 미래를 약속하고 그것을 어겨도 보았네. 언제나 그런 과정으로부터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했을 뿐, 나도 미래를 기약한 적이 있어.

 

알고 있겠지? 사람은, 전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기에, 그 안의 성질도 제각각이야. 대체로 그것을 성격이라고 부르지. 그녀와 나는 단순히 성격이 달랐던 거야. 혹은 가치관이. 세계 어딘가에는 그녀와 사랑의 형태가 일치하는 사람이 존재하겠지. 그 대상이 내가 아니었을 뿐. 난 그것에 대해 오랜 시간을 들여 설명했고, 그녀와 헤어졌어. 우리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 땐 언제나 각자의 진심이 여과 없이 드러났는데도, 결국 이별했네.

 

불확실한 것에 투자하기가 두려워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내가 누군가를 아낌에 있어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약속하는 행위에는 그 어떤 가치도 매겨지지 않는다네. 그렇기에 쉽게 미래를 말하지 않지만, 기꺼이 상대만을 위하여 미래를 약속하기도 했어. 미래는 불확실하니까. 약속한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지켜지지 않음을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 않나. 결코 과거를 소홀히 여기거나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만, 세 가지로 나뉘는 시간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현재가 아니겠어. 때로 상처를 주거나 상처받고, 때로 사랑했던 그 모든 과거에 어떤 귀중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머무르는 곳은 현재이며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있을 수도 있는데,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조금 더 나은 삶’일지 모르는데도 우리는 현재에 묶여있지 않나. 과거와 미래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결국 현재로부터 존재하는 생명이야. 수레바퀴처럼, 우리는 걷고 있네. 결국에 지면을 밟는 모양으로. 매일, 매해 같은 방향으로만 움직여 가까이에서 보았을 땐 아무런 진전이 없어 보임에도 사실 멀쩡히 굴러가고 있을 뿐인 수레바퀴처럼. 그러니 균형을 맞추어야 해, 넘어지거나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자네가 죄를 지었는지는 묻지 않겠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은지도 묻지 않겠어.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자네는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말이야. 멈춰 있지는 않은지, 너무 빠르게 뛰지는 않는지…….

 

어째서 크고 작은 여러 순간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지, 발레리오?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과도 같다지만 자네는 축복마저 마다하고 이미 오랜 과거 속에 숨어든 죄에 대해 잊지 않으려 매질하고 있잖나. 죄를 잊었는데, 죄를 잊었다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있어. 속죄를 위하여, 혹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자네를 망가트려선 안 돼. 왜냐하면 자네 또한 자네가 지키고자 하는 인간 중의 하나니까! 죄책에도 책임에도 짓눌리지 말게. 그런 상태야말로 인간을 기어코 진실로부터 도망치게 해, 죄를 잊지 않으려는 집착이 도리어 진실을 마주할 수 없게 하지. 결국은 임시방편으로 자네를 익숙한 불행 안에 구겨 넣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다는 안락함에 빠져들 뿐, 완전히 편해지지도 완전히 불행해지지도 못해.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삶은 생명에게 너무 가혹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죄와 벌에 짓눌려 삶 전체를 교정하려 들지 말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지 않나. 자네는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벌을 주고 있어. 자네가 ‘이 정도면 됐어’ 따위로 생각하는, 자네를 둘러싼 가벼운 안락함과 따스한 일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것들이야. 기억 속에 남아 다른 슬프고 아픈 상처들을 덮게끔 하고 그 위에 딱지가 되어 붙어야 하는 것들―삶에 있어 꼭 필요한 것들이야. 그것들은 기억되어야 할 삶의 일부이며 자네가 간직해야 할 끝난 ‘현재’라네. 이 순간 죄를 짓지 않는 데에 집중하게. 과거에 죄를 지었던 기억,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은 열망. 그렇게 앞뒤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중심을 두고 인간인 자네의 신체가 바라는 안정감에 집중해야만 해. 자네의 발아래 드리우는 그림자, 밟고 있는 대지 따위를 오래 관찰하게. 땅에 비친 그림자의 등이 너무 많은 것을 짊어져 거대하지는 않은지 살펴봐.

 

이봐, 자기 자신을 불행이나 고행에 빠트리는 것으로는 그 무엇도 속죄할 수 없어. 진실한 속죄를 위해서는 자네가 행복해져야만 해. 설령 자네가 수천 명의 무고한 목숨을 죽였거나 선악과를 따 시장에 내다 팔았거나 감히 신의 자리를 넘보았다고 해도, 자네는 속죄와 별개로 행복해질 필요가 있네. 지은 죄가 발레리오라는 인간의 전체에 해당하지 않으며 죄짓지 않은 발레리오의 영역은 분명히 평범한 시민이자 인간이기 때문이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은 정말 고귀하고 중요한 마음가짐이지만 자신을 위해야 할 자리까지 타인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돼……. 발레리오. 제발, 자네를 토막내어 남에게 베풀지는 말게. 그것 또한 결국 한 사람을 향한 폭력이야. 자네는 충분히, 너무 열심히 속죄해왔어. 이탈리아에서 7년을 보냈네, 줄곧 지켜본 내가 하는 말이니 부디 신뢰해주길. 자네는 이미 훌륭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어. 자신을 벌주는 것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판으로 삼는 일도 그만두게. 자네는 일상으로부터 소소한 행복을 찾는 법도 죄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법도 아는 성숙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을 학대하려 하는 의식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 같아. 자신을 태운 불로부터 온기를 얻는 기이한 상황이란 뜻이야.

 

자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처음 이탈리아에 함께 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네. 자네를 돕고 싶었어, 좀 더 건강한 속죄의 삶을 살 수 있게. 자네가 행복과 안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어. 결국 끝까지 자네는 누구도 정한 적 없는 규칙에 묶여 등 위로 채찍을 치는군.

 

그곳은 자네가 난 곳이고, 죽을 곳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앞으로는 일궈낸 기쁨을, 찾아낸 기쁨을 전부 기록하는 것은 어떻겠나? 찾아오는 행복과 행운이 수없이 많은데도, 자네가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이고 옅고 또 짧더군. 좋은 기억을 내면에 저장할 수 없다면 바깥에 저장해 쌓아나가라는 소리야. 활자가 되어 남은 기록은 과거를 쉽게 지우지 못하게끔 하지. 백여 장을 넘길 즈음에는, 내면을 가득 채웠던 질고 탁하고 부정확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떨어져나올 수도 있지 않겠나. 자네는 행복하고 좋았던 감정을 복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발레리오.

언젠가 떠오르거든, 할 말이 생기거든 답장하게. 내가 여기 온 지도 일주일이 넘었는데 그간 가장 많이 한 말은 "고마워요” 뿐이야……. 이탈리아어는 어느 유능한 선생 덕에 쉽게 배웠는데 말이지!

 

정말 두서없이 적었군, 결국 자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이렇게 길게 풀어썼어. 나중에 스페인에 한 번 찾아오게. 그땐 눈 밑이 덜 짙었으면 좋겠어. 그럼 아주 안심될 것 같아. 보고 싶네! 특히 잠들어야 할 시간이 되면 말이야. 익숙한 부피감이 그리워. 이젠 팔짱을 끼고 잠드는 습관이 생겨버렸지 뭔가. 내가 잘 관리했던 침대에는 여전히 주인이 있기를 바라지.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쉽게 잠드는 밤 보내게. 여긴 벌써 새벽 세 시야. 글을 오래 썼더니 드디어 눈이 감기는군…….

 

가볍게 지내게. 가끔은 나를 그리워도 하고. 그래야 답장을 할 테니!



자네의 가장 낭만적인 알파벳, J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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