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아름다운 그대의 세상>




1.


지민이는 태어날 때부터 어떠한 소리도, 엄마 목소리도 들어 본적이 없는 아이였음. 여름에 매미가 어떻게 우는지, 비오는 소리는 어떤지.. 그리고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들어 본 적이 없었지.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지민이를 과보호하면서 약하게 키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반 학교를 보냈는데 놀림에, 괴롭힘을 당하고 흙 범벅이 되어서 눈물을 흘리며 들어오는 날이 거의 매일이었다.

아무래도 학업에도 생활에도 지장을 받으니 결국 중, 고등학교 땐 특수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친구들과 지냈고, 대학까지 들어갈 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지민이네 부모님은 형제도 없이 혼자인 지민이 나중에 당신들 없이도 꿋꿋이 살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꾸준하게 지민일 설득해서 결국 대학에 진학하게 된 거.

6년 만에 다시 평범한 아이들과 섞여서 지내게 되니까 설렘 조금,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아니나 다를까 오티를 갔는데 벌써 먼저 인사를 거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치니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쟨 머냐 하고 기분나빠하게 되는데 그 자리엔 옷깃만 스쳐도 친해진다는 사교 왕 태형이도 있었지.

태형인 벌써 온지 30분도 안되어서 친구를 잔뜩 만들어서는 끝나면 플스방 갈까?하고 얘기하다가 가방끈을 잡고 조용히 혼자 강당에 들어서서는 제일 구석자리에 가방 내려놓고 앉는 지민일 자기도 모르게 눈으로 쫓아. 그러다 결국 먼저 다가가서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옆에 누가 우뚝 서있는데도 앉자마자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읽고 있었던 지민인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애들 같았으면 벌써 뭐야 하고 기분나빠하며 가 버렸을텐데 태형인 못 들었나? 가방 좀 치워줘 옆에 앉게- 하고 계속 얘길 하는데 지민인 듣지 못할 뿐더러 사실 누가 옆에 앉아 말을 거는 게 부담스러워서 자기 옆에 가방을 내려 놓은 거였으니 신경쓰지 않고 있었지. 태형인 계속 자길 무시하는 지민이를 의아하게 내려다보다가 금세 그가 읽는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 작가의 책이었다.

태형이랑 지민인 둘 다 문예창작과라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지. 태형이도 그 책을 좋아했거든 그래서 신이 나서 마음대로 지민의 가방을 들어서 자기무릎에 올려놓고 지민이 옆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태형이를 바라보는 지민이. 이거 나도 좋아하는데 어디까지 읽었어? 너무 입모양이 빨라서 그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멍하게 있는 지민이를 보면서도 태형인 지민이의 작은 손을 약간 치우고 책을 들여다보고는 아- 거기구나 응, 나도 다 본 건 아니고 그러면서 혼자 떠들고 와하하 지민의 어깨를 치고 웃기도 하고 그러다 원래 같이 있던 무리들 쪽으로 돌아갔다.

쟤랑 얘기해봤어? 아까 인사 무시하든데 좀 재수 없는 스타일 같아? 하면 태형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야 아니야 쟤 착한 것 같은데? 아, 맞다 이름을 안 물어봤네. 다시 돌아가서 이름이 뭐야 하면 지민이는 얼른 대답하고 싶지만 분명 자기 진짜 목소리를 들으면 당황 할텐데 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쓰던 노란 병아리 모양 필통을 가방에서 꺼내서 톡톡 친다. 약간 번진 까만 네임 펜으로 박지민이라고 써있었지. 그걸 보고 태형인 오케이 하고는 손을 내밀어. 핸드폰을 달라는 거였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 태형이 손위에 올려놓으니 자기 번호를 치고는 김태형 하고 예쁜 이모티콘도 하나 붙여서 저장하고 돌려주는거.



2.


태형이 덕분에 지민인 자기 걱정했던 것보다 괜찮은 하루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고 긴장감이 풀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선 이불 속으로 포옥 들어가고, 어젯밤에 오티 걱정에 잠을 한숨도 못 잔 탓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어.

저녁때가 다되어 일어나서는 핸드폰을 들어보고 저장되어있는 태형이 번호를 보고 화면만 만지작거리다가 당연히 연락할 생각은 못하고 덮어버리고 말겠지. 왜냐면 태형이 프로필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 친구들한테 아예 묻혀서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거든. 친구가 이렇게 많은데 자기같이 걸리적거리는 애랑 친구가 되고 싶을리가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울적해져서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코를 훌쩍이다가 다시 잠에 드는 거.

같은 과니까 당연히 첫 번째 강의 듣는 날 다시 마주치면 태형인 스스럼없이 다가와서는 왜 연락 안했어? 하며 말을 걸어오고 지민은 그냥 입가에 어색한 미소만 띄우겠지.

출석 체크를 하고는 지민인 다른 강의실로 향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강의를 듣는 것이 아무래도 좀 벅차서 청각장애 학생들을 위해서 강의를 실시간으로 기록해서 큰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강의실에서 따로 강의를 들어야했거든. 태형인 자연스럽게 지민이 옆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 걸어봐야겠다고 수업생각보다 지민이랑 떠들 생각부터 하고 있는데 정작 지민이는 가방들고 휙 일어나서는 나가버리는 거. 태형인 그렇게 떠나는 지민이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거렸고, 드디어 일주일째 되던 날 지민이 뒤를 따라나섰다.

지민이가 바쁘게 다른 강의실로 들어서는 걸 보고 그 강의실 문을 열고 지민의 뒷자리에 앉았지. 그날 태형인 처음으로 지민이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렇게 태형인 호기심이 쓸데없이 많았던 탓에 지민이의 대학친구 1호가 되었지.

강의가 다 끝나고 지민이가 가방을 챙기고 일어나다가 뒷자리에 앉아있는 태형이를 보고는 놀라서는 왜?? 라고 노트에 적어 보였고 태형이는 펜이랑 노트를 받아들고는 뭐라고 쓸 줄을 몰라 망설였음. 그런 태형이 반응을 보고 잠시 생각은 하던 지민인


[나,  사실은 들을 수 없어 오티때는 그래서 인사를 못했어.]


라고 쓰고 진짜 자기 목소리를 내서 어눌한 발음으로 미안해 하고 두 손을 모아서 고개를 숙이면 태형인 아무렇지도 않게


[응, 그랬구나. 배고프다 밥먹으러가자] 하고 적는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지민이랑 태형이가 친구가 되었는지 지민이가 어떻게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고, 윤기를 만나게 된 것은 2학기 때 되어서였지.


태형인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밴드 동아리에 들게 된 거. 제법 열심히 참여하고 태형이 따라서 지민이도 몇 번 동아리 실에 들락날락했지. 태형이는 지민이가 듣지 못한다는 걸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해서 동아리 실에서 이야기할 때도 바로 옆에 있는데도 문자를 하며 머리를 맞대고 키득거리곤 했다.

하루는 태형이가 강의실에 핸드폰을 놓고 왔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지민이만 남겨두고 동아리 실을 나섰지. 지민인 습관처럼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고, 윤기는 그날이 복학하고 처음 동아리 실에 다시 들린 날이었고.




3.

윤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서 뺑글뺑글 안경을 쓰고 책 읽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는 지민일 발견하고는 자기도 신경 쓰지 않고는 소파에 대자로 드러누워서 잠을 청함.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30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태형이가 돌아오지 않고, 그날이 금요일이니까 동아리 실에 사람들 올 것 같지도 않아서 눈 좀 붙여볼까 하고 읽던 책 들고 계속 그거 들여다보면서 소파에 뒷걸음으로 걸어서 앉았다.

물론 윤기 위에 앉은 꼴이 되어버림.

물컹 하는 느낌에 지민이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하늘로 뛰어오를 듯이 튕겨서 일어났다. 윤기는 모자를 벗으면서 무척 귀찮고 언짢은 표정으로 뭐야.. 하는데 지민이가 진짜 머리가 발이 닿을 정도로 몸을 구부려서 미안하다는 표시를 했다.

윤기는 음악 전공인 예민한 사람이니까 아까 책을 읽느라 자기 들어오는 것도 못 보는 거 보고는 뭐 할 때 엄청 집중하는구나 하고 이해를 하고 말았다.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고, 잠에서 깬 게 좀 언짢지만 지민이가 계속 사과를 하니까 윤기도 아니 됐다 하는데도 지민이는 그 말을 듣지를 못 하고 계속해서 사과를 하는 거.

태형이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 광경을 보고는 얼른 달려와 지민이의 팔을 잡아당기고 나서야 지민인 멈추지.

"누구세요?"

태형이가 노려보면서 그러니까 윤기도

"그러는 너는 누구냐?"

잠시 신경전이 오가고 높은 학번 복학생 선배인거 알고 나서야 다시 사교성 발휘해서 형님 하면서 떠들기 시작한 태형이. 그래도 지민이를 무척이나 당황하고 풀 죽게 만든 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서 은근히 경계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윤기의 피아노 연주를 본 후부터는 태형이는 윤기를 정말 잘 따르게 되었지. 저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없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태형이가 커다란 눈을 반짝 거리면서 형, 형 하고 윤기 꽁무니를 쫓아다니니까 덕분에 태형이가 옆구리에 끼고 다니다 시피 하는 지민이도 윤기를 자주 보게 되었음. 들을 수 없어도 피아노를 치는 윤기의 모습을 입을 와- 벌리고 보고.. 전에는 한 번도 궁금해 본 적이 없었던 피아노 소리가 궁금해져서는


[피아노는 어떤 소리를 내?]

[새벽에 밤새 비오고 난 다음에 아침에 보면 풀잎에서 물방울이 맺혀서 떨어지잖아? 그게 소리가 되는 거야. 피아노는 아주 낮은 소리도 낼 수 있는데, 그 낮은 소리는 내가 뭐 잘못했을 때 예를 들면 술 잔뜩 마시고 새벽 1시에 집에 들어갔을 때 아빠가 김. 태. 형 잠깐 와서 앉아봐라 그럴 때랑 비슷한 느낌이고.. 높고 맑은 소리를 낼 때는 5살짜리 꼬마숙녀가 풍성한 치마를 입고 예쁜 치마를 입었다는 자신감에 가득차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은 가끔 태형이가 말을 아주 독특하게 한다고 때로는 이상하다고도 했지만, 말을 들을 수 없고 느낄 수만 있는 지민이 에게는 태형이는 가슴에 무지개 같은 감정들을 품고 그걸 노트에 빽빽하게 적어 내려 갈 수 있는 멋지고 특별한 사람이었지.

태형이는 지민이가 소리에 대해 물어 볼 때마다 정말 환하게 웃었어. 진심으로 고민하고 잘 설명해주고 싶어서 써내려간 글을 고치고 또 고치고..

지민이는 태형이가 그렇게 자신의 질문에 대답이 되어 줄 글을 쓰는데 열중해 있을 때마다 태형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지. 그리고 먼 훗날 시나리오 작가가 된 태형이는 <네가 들을 수 있는 소리> 라는 단편영화로 꽤 저명한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부분 수상을 하게 되는데 수상 소감을 시작할 때 잠시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고 천천히 더듬더듬 수화로

[지민아, 들리니?]

그렇게 시작해서 지민이를 울려버리고야 말았다는 이야기.




4.


한 달이 지나도록 윤기는 지민이가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진짜 그냥 말이 없는 스타일인가 하고 말았다. 아마도 음악이외에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탓이었으리. 근데 그러면서도 은근히 있는지 없는지 티도 잘 안 나는 지민이가 편안하게 느껴져서 가끔은 동아리실 열고 들어와서 태형이는 없고 지민이만 있어도 불편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먼저 "여- 밥 먹었냐" 하고 묻고는 끄덕 하는 지민이 보고 "그렇구나.“ 하고 소파 가서 앉아서는 이어폰 귀에 꽂고 잠을 청하거나 작곡하거나 그랬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동아리 실에 앉아서 태형이랑 음악얘기, 공연얘기 할 때 한결같이 태형 뒤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지민이에게 눈이 가고 가끔 지민이 쳐다보다가 태형이가 하는 얘기를 놓쳐버리기 시작했다. 관심은 있어도 친해질 기회가 도통 없었는데 그 이유인 즉슨 늘 둘이 같이 있고 지민에게 말을 걸라 싶으면 태형이가 싹둑 잘라버리니까.. 예를 들면 보는 책이 뭘까 뭔데 저렇게 열심히 읽나 싶어서 뭐야? 하고 등 뒤로 다가서면 태형이가 얼른 와서는


"아- 이거 OO작가 책인데 지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에요."


뭐 그런 식으로 자기가 먼저 대답을 해 버리는 거야. 태형이가 그러는데도 이유가 다 있었어. 지민한테 자꾸만 접근하는 같은 과 선배가 있었는데 딱 봐도 그 선배는 지민이 들리지 않는 다는 걸 이용하려는 사람이었거든.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는 유난히 더 지민에게 친절하다던 지, 시답지 않게 수화 조금 알아 와서는 특히나 단합대회 같은 거 있을 때 지민 앞에 자리 잡고 앉아서 수화로 대화를 하니까 여자들은 엄청 스윗하다 하고 이 세상에 없는 남자라고 아주 난리들이었지. 그게 애초에 그 선배가 노린 건데 말이야.

지민인 순수해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고, 사람들이 가끔은 보여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시커먼 속을 가지고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기한테 호감을 보이고 설레는 행동들을 하는 선배한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조금씩 내어 줬지.

그 선배 얘기하는 날도 점점 많아지고 지나가다가 그 선배가 지민이 머리 흐트러뜨리고 싱긋 웃어주면 지민이 볼이 빨갛게 물들어.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그렇게 마주치면 그 날은 가여운 지민이는 밥알을 세다가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강의시간에 쫓겨서 잔반으로 다 버리고 일어나게 되었지.

태형이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게 정말 소름끼치게 싫긴 하지만 태형이도 남 뒤에서 남 흉보는 성격은 못되니까 그냥 조금 무표정으로 지민이가 노트에 써내려가는 얘기 쳐다볼 뿐이었어.


[왜? 무슨 일 있어 태형아?]

[아니~ 그냥 소화가 조금 안 되는 것 같아. 걱정하지 마.]


그렇게 거짓말 하고 통통한 지민이 볼 쭈욱 늘리고는 최선을 다해서 웃어주고 그랬는데 어느 날은 결국 그 선배가 흡연구역에서 동기들이랑 지민이에 대해 하는 소리를 듣고는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지.


"너한테 완전 뻑이 갔던데? 좀만 있음 고백할 것 같지 않냐? 뭐 너만 보면 완전 기집애처럼 그러든데-"
"아 징그럽게 뭔 개소리야. 듣지도 못하는 X신이랑 뭘 하냐고."
"그건 그렇지, 아 그래도 그건 쫌 궁금하지 않냐. 말도 못하는데 막 흥분하고 그럼 어떤 소리 낼지? 내긴 낼 거 아냐?"
"나도 좀 궁금한데 나중에 녹음해서 들려줄까? ㅋㅋㅋ"


선배고 뭐고 태형이가 정신을 놓고 달려들어 싸움이 난거야.


"이게 미쳤나??? 야- 나 14학번이야 새꺄."
"14학번이고 나발이고 사람이 먼저 되라 씹새끼야!!"


1대5라서 태형이가 결국엔 맞기 시작했다. 흡연구역에 구석에서 그거 보고 있었던 동기가 강의실로 뛰어 들어와서는 호들갑을 떨면서 지민이한테 태형이가 너 때문에 싸움 붙어서 엄청 맞고 있다고 하니까 어쩔 줄을 모르고 불안해하다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어. 지민인 정신없이 동아리실로 뛰어갔어. 생각나는 사람이 윤기뿐이었거든. 태형이랑 윤기는 친하니까 그 사람이 꼭 도와줄 거야 그렇게 생각이 들었으니까.

근데 막상 가보니까 윤기는 없었다. 지민이가 어쩌지 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다행이도 조금 있다가 윤기가 강의가 끝나고 하품하면서 동아리실로 들어섰지. 윤기를 보자마자 지민의 눈에선 눈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지고 어눌한 발음으로


"제..발..도와..주세요.." 떠듬떠듬 울면서 얘기해.

윤기는 그제야 지민이의 진짜 목소리를 들었지. 부서질 듯이 연약하면서도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순수한 목소리. 눈이 조금 커졌다가 어..어 그래. 지민이가 손끝을 붙잡았을 때 그 손이 닿은 곳이 너무 뜨거워서 태형이가 있는 곳으로 달리는 내내 내려다 봤다.

윤기랑 지민이가 도착했을 땐 이미 태형이는 얼굴이 엉망이 되서는 콘크리트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는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지민이는 태형이를 붙잡고 울었다. 왜...왜에..왜!! 소리 내면서. 그제야 태형이는


"쟤네가 심한 소리를 하잖아. 사람이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아냐 사람 아니라 동물한테도 지나가는 개미한테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하고 지민이가 알아 들을 수 없도록 혼잣말을 해. 조금 진정이 될 때까지. 그러다가 눈물로 얼룩이 진 지민이 얼굴을 돌아보고는 이번엔 지민이를 안심시키려고 수화로


[내가 다 이겼어.]


아무도 믿지 않을 얘기를 한다.

지민인 너 지금 수화로 너 죽었다고 얘기했어 바보야- 하고 콩 하고 태형이 머리를 내리치면 태형이가 또 아야야야 하고 엄살을 피워. 지민이는 그런 태형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쿵쾅쿵쾅 아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안심이 되서는 눈을 꼭 감는 거야.




5.

옆에서 두 사람의 애절한 한 때를 지켜보던 윤기는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고 했다. 술자리에 도착해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지민이가 약국에 밴드랑 상처소독약을 사러 갔고, 그 사이 윤기는 태형이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 그럼 태형이가 그러지.

“....그런 거 듣고 참으면 다음에 지민이 얼굴 마주보면서 당당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난 매일 지민이 얼굴보고 얘기하고 싶거든요. 걔가 내 입술을 쳐다보면서 말을 따라하는 게 좋아요. 가끔 너무 빠르고 불분명하다고 투정 부리면서 내 입술 지그시 누르는 것도 귀엽고.. 그런 걸 볼 자격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도 네가 걔 보호자도 아니고 적당히 해라 그러고는 술을 연거푸 들이킨다. 그러면서도 지민이가 사는 세상이 자신이 사는 세상과 얼마나 다를지 생각해보게 되고, 차라리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더 아름답지 않을 까? 라는 어리석은 생각도 해보게 되고.

말은 그렇게 해놓고는 그날 밤 속상한 마음에 먼저 만취한 태형이 택시 태워서 집에 보내고 혼자 갈수 있다며 오늘 고마웠다고 꾸벅 인사하고 비틀비틀 집으로 걸어가는 지민이의 뒤를 쫓았다. 낮이면 그렇다 쳐도 밤에 이렇게 차가 쌩쌩 지나다니는데 사고라도 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인마.. 조심..조심 돌돌!! 나무..


지민인 얼마쯤은 혼자 씩씩하게 잘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한참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 자그마한 손으로 몇 번을 자기 볼을 짝짝 때리고.. 그러다 휘청거리면서 일어나는데 지민이 앞을 쌩하고 지나던 오토바이에 하마터면 치일 뻔했지.

윤기는 후딱 달려와서 지민이의 양팔을 부여잡고 무섭게 다그친다.


“너 큰일 난다 정신 똑바로 안차려!!” 하고.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텐데 말이야.

자기 붙들고 흔드는 윤기를 풀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지민인 윤기의 얼굴에 손을 올려서 톡톡 쳐본다. 뭐라 한마디 헛소리라도 할 법 한데 이아인 도대체 말이 없는 아이었지.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하는 거야. 그러다 팔을 올려서 수화 반, 바디랭귀지 반으로 이야기를 해. 하트모양을 정성스럽게 만들었다가 그걸 소중하게 쓰다듬는 시늉을 하고 촉촉하게 젖은 듯한 눈으로 윤기를 한번 바라봐. 그리고 하트모양을 반으로 쪼개고 그걸 윤기의 가슴에 밀어넣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거.


[ 불쌍하다고 돌아보지 마세요. 그럼 난 마음을 주니까..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민이가 바삐 손을 움직이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자기 가슴에 그 조그만 손을 올리는 그 순간이 윤기의 심장이 처음으로 지민이 에게 반응한 순간이었다. 그 짧은 일련의 과정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거든.

윤기는 술에 취해 자꾸만 눈을 감는 지민이에게 눈 좀 떠봐, 야, 집에 가야지, 집이 어디야 물었다.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뭐하고 있는 거지 하고 머쓱해져서는 머리를 긁적이다 지민이의 재킷 주머니를 더듬더듬해서 전화기를 찾았다. 비밀번호가 걸려있어서 풀 수 있을 리가 만무.

결국 둘러업고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침대에 내려놓고는 자신도 취기가 올라오고 진이 다 빠져서 침대에 기댄 채로 앉아서 잠이 들었어.

지민인 새벽에 눈을 떠 윤기의 뒤통수만 바라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드는데 그날 밤 꿈엔 윤기가 자기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를 만져주고 한참 잠에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민이는 그게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 새벽녘에 목이 타서 눈을 뜬 윤기는 지민이 이불을 다시 고쳐 덮어주고, 끙끙대니까 혹시라도 아프진 않은가 머리도 짚어보고 조심스럽게 재킷도 벗겨주고 한 거지. 그리고 아기처럼 쌕쌕 거리는 숨소리를 내면서 자는 지민이 얼굴도 한참이나 내려다보는데 마음이 이상했어 무언가 자꾸 가슴속에서 울려대니까 혹시 악상이라도 생각나려나? 노트를 들고서 눈을 감는데 그게 아닌지 악상은 떠오르지가 않고 자기 심장 소리만 쿵쿵..쿵쿵 귓가에 들려오는 거.


그 날 일어나 둘은 같이 밖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헤어졌다. 윤기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지민이에게 잘 들어갔냐고 문잘 보내고 지민인 그걸 보고 마음이 콩닥콩닥 하기 시작해. 간밤에 꾼 꿈이 너무 생생했던 탓이었지. 사실 밥 먹는 동안에도 윤기는 지민일 살피고 조금이라도 목이 막혀하거나 밑반찬 접시가 비면 얼른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고 지민이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표정은 살갑지 않아도 지민인 윤기가 얼마나 배려심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지민인 들리지 않는 대신 몸짓이나 표정으로 남들이 캐치하지 못하는 걸 잘 캐치해 낼 수 있었거든.


‘태형아, 이 사람 좋은 사람 같아.’



6.


두 사람이 하루의 시작과 끝에 문자를 주고받는 일이 늘어갔지.

-지민아
-네?
-그냥
-^^;;

어느새 윤기는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있을 시간이 30초만이라도 있으면 지민이 생각이 났어. 어제 동아리 실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책을 보고 있는 지민이 어깨에 손을 얹으니 지민인 돌아보지 않고 그 손을 꼭 잡고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댔지. 물론 태형인 줄 알고 그렇게 한 거였고, 뒤늦게 그게 윤기의 손인걸 깨닫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지민이가 몇 번이고 사과를 하니 괜히 아무렇지 않을 척 손등으로 지민이 볼을 밀면서 "뭘 그런걸 가지고." 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실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하는 윤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손은 불에 대인 것처럼 뜨거워서 잠시 눈 좀 붙이겠다고 재킷을 뒤집어쓰고 소파에 누워서는 그 재킷 밑으로 한참을 그 손을 주무르며 진정하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렸지. 지민이는 그런 윤기 어깨를 톡톡 치고는 쪽지 한 장을 내밀어.


[죄송해요. 태형인 줄 알았어요.]


윤기는 한참을 그 쪽지를 내려 보다가 태형이 한테는 그러는구나.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윤기 눈에 지민이와 태형이의 특별한 관계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

기말고사 일주일 전 쯤, 동아리 정기 모임에서 유명한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을 소개하면서 시험이 끝나고 다 같이 가기로 하고 그날 모임을 대충 정리 되었지. 다들 시험공부네, 데이트네 바쁘게 돌아가 버리고 마지막으로 가방을 집어 드는 게 윤기였는데, 태형이가 지민이도 모임 끝나고 같이 도서관 가기로 하고 기다리다 잠들어 버렸고 이렇게 된 김에 동아리 실에서 남아서 시험공부를 좀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문단속만 잘하고 가라고 열쇠를 주고 동아리 실을 나섰는데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머니를 더듬더듬 해보다가 이어폰을 안가지고 나온 걸 깨달았지. 그래서 다시 발길을 돌려서 동아리실로 향했는데..

태형이가 잠이 들어 있는 지민이를 한참을 턱을 괴고 바라보다가 그 얼굴이 사랑스러워 보였는지 미소가 만개해서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찍다가 또 찰칵 소리가 나서 화들짝 놀라서 지민이 눈치를 살펴. 카메라 셔터 소리 같은 게 지민이한테 들릴 리가 없으니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는 지민이를 보고는 휴-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볼도 살짝 잡았다 놔보고 그리고 얼굴위로 몇 번 붕붕 손을 흔들어 보고는 살며시 눈을 감고 볼 위에 입술을 맞붙였다 떨어지는 순간을.. 그 순간을 보고야 말았지.

윤기는 더 이상은 훔쳐볼 수 없었다.

그 특별한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처럼 보였다. 윤기는 불가항력처럼 어느 순간부터 지민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버렸지만 자기가 과연 그 둘 사이에 끼어 들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과연 태형이가 가지고 있는 마음 만큼일까? 그만큼 무거울까? 그런 자신이 없었어.

이어폰이 없어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 번도 주의를 기울여 본적이 없는 것들을 보이더라고, 그래서 멍하니 푸른 나뭇잎, 나무 밑으로 자라난 잡초 같은 것들을 바라보다가 멈춰 서서는 귀를 두 손으로 막고는 주변을 둘러봐.

말다툼을 하는 듯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니 뭐가 저렇게 화가 나고 심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멍청히 멈춰서 두 귀를 막고 있는 자신 때문에 멈춰선 게 분한지 빵빵거리는 차를 보면서 아, 이제 보니 자동차라는 게 마치 표정이 있는 것 같이 생겼구나 하고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다. 코뿔소가 심벌인 차는 정말 코뿔소처럼 생겼더라고, 그게 웃겨서는 웃기도 했지. 집 앞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가려다가 유리창에 비춰 보이는 자기 자신은 어깨가 굽고 참 멋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더 이상 마음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 지민이를 보고도 그 아이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못 본 척 지나치고,

뭐하냐,
나와,
같이 영화볼래? 문자를 보내고 싶은 밤이면 밤마다  

지민아,
그냥.
잘 자라.
잘 쉬어라.
좋은 주말 보내.

같은 진부한 말로 덮는 것뿐이었지.


6-2.

태형인 첫 만남 부터 지금까지 줄 곧 변함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지민이를 바라봐왔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다정한 눈빛에 조금의 진심이 더 담기기 시작한 것은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어. 지민이는 눈치가 빠르고, 감정을 읽어내는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으니까 그걸 눈치 채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태형이도 감추려는 계획 따위는 없었고, 사랑을 고백하려고 좋은 시, 좋을 때를 기다릴 만큼 계산적이거나 마음이 진실하지 못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냥 두 사람은 흘러가는 대로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애매한 상황이잖아.


[종강하면 뭐 할 거야?]

[사진 많이 찍으러 다니고 싶어! 요새 사진에 관심이 가서. 맞다, 바다도 보러 갈 거야.]

[찍어서 현상하면 나 몇 장만 줘~ 네가 찍은 사진 가지고 싶어 ^^* ]

[같이 가면 안 돼?]


지민이는 노트에 열심히 적어내리다가 갑작스러운 말에 그냥 응? 하고 눈을 크게 뜨면서 태형이를 바라봤다. 태형이도 펜을 놓고는 지민이의 손을 잡아. 그리고는-


나는 너랑 바다에 가고 싶어, 같이 가서 네가 있는 풍경을 찍고 싶어,
네 뒤로 갈매기가 날아가는 상상을 하면 벌써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너는 갈매기가 지나는 줄 모르고 사진 찍히는데 열중해 있는데, 갑자기 갈매기 노란 다리가 눈앞을 휙 지나면 네가 놀라서 움찔하면서 머리를 가리겠지? 그게 잔뜩 흔들려서 찍혀선 현상해보면서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는 거야.

태형이가 잔뜩 흥분해서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바다, 갈매기, 풍경 같은 단어들만 알아 들었지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캐치해내기가 힘들었어. 그래도 태형이가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니까 같이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태형이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검지로는 턱을 잡으면서 입모양으로 이야기를 했어.


[빨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 순간이었어. 그 순간이 태형에게 가장 좋은 때, 가장 꾸밈없고 거짓 없이 그 말을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든 때.


좋ㅇ..


지민이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서 눈을 가리는 바람에 정확하게 보지 못했어. 그래서 다시 눈을 찌푸리고는 한번만 더 얘기해달라고 부탁하지.


[못 봤어. 바람 때문에..]


태형이는 자신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지민이 손가락에 입을 맞추면서


"좋아해"


그렇게 얘기했다.



7-1


지민이와 태형이는 시간이 딱 멈춰버린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의 눈만 쳐다보았지. 지민이가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고 땅바닥으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을 때, 태형이는 지민이의 한쪽 손을 깍지를 껴서 잡고는 자신의 가슴에 품는데 엄청나게 급하고 애타게 쿵쿵 뛰는 심장을 느낄 수가 있었지.


"멋없었지?"


자신의 고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날 저녁 내내 태형이는 몇 발자국 가다가 멈춰 서서 자기 머리를 콩하고 때리고 고개를 저어대다 다시 걷고 또 얼마 못가 멈춰 서서 그러는 일을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지민이는 태형이 주먹을 손으로 잡고, 또 머리도 호호하고 불어주고 태형이를 위로했다. 자기 머리를 갸우뚱하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하면 내 머리도 아픈 것 같아. 하지마 응?’
하고 입모양으로 발음을 최대한 또박 또박 하게 하면서 곤란한 표정을 짓지.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해. 안 좋아할 수가 없잖아."


태형이는 그때부터 좋아한다는 고백을 멈출 줄을 몰랐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쪽 눈만 겨우 뜨면서 카톡 방을 찾아서 졸린 강아지가 쿠션을 안고 좋은 아침도 아니고 잘 자라고 인사하는 이모티콘이랑 메시지를 지민이한테 보내.


- 좋은 ㅇㅏ침이아, 오느ㄹ아침도 널 조ㅎ아해


그렇게 오타를 잔뜩 치면서 아침인사랑 좋아한다는 말을 함께 보내면 일찌감치 일어나서 이를 닦다가 문자를 본 지민이는 피식 웃고 답장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강의실에서 만나면 어딘가 초초해 보이는 태형이가 출석체크만 하고 시청각 강의실로 자리를 옮기는 지민이를 쫓아가면서 지민이 손가락 끝만 만지작거려.


"어떻게 손가락도 이렇게 조그맣고 예뻐? 너 너무 예쁘다."


브레이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태형이의 사랑 고백은 멈출 줄을 몰랐고, 지민이는 태형이의 가슴을 떠 밀면서 조용히 하라고 입가에 검지를 대고 쉬잇- 하지. 그리고는 가방을 뒤적뒤적 하더니 반으로 접혀진 A4용지를 꺼내서 내밀었다.


서울 -> 부산
18:00 - 20:35


태형이는 종이를 바라봤다가 지민이를 바라봤다가 번갈아 가면서 몇 번이나 그걸 확인하고는 눈을 비볐다. 지민이는 그런 태형이를 바라보다가 종이 뒤편을 톡톡 쳐. 그제야 태형이가 종이를 돌려서 확인하는데


[바다 보러 가고 싶다면서.. 토요일 날 시간되면 가자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근데 나 밤 바다 보고 싶어]


태형이는 자꾸만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가를 숨기면서 밤에 가면 사진은 못 찍는데 어떻게 할까? 하고 지민이를 놀리고, 지민이는 거절당하는 줄 알고 줬던 종이를 뺏어서 가방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지. 뒤늦게 그게 아니라고 장난친 거라고 그날 삐진 지민이를 달래는데 하루 종일을 쓰면서도 태형이는 마냥 신이 났어.



7-2.


태형이는 동아리 모임으로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보러가고 지민이랑은 저녁에 서울역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태형이와 떨어져 있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서 책도 빌리러 가고, 또 여행 가는데 멀미를 잘하니까 미리미리 태형이한테 짐이 되지 않게 상비약도 챙기러 약국에 갔다가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지.


'어, 윤기 선배네..'


마스크를 코까지 올려 쓰고 있었지만 왜인지 몰라도 정말 쉽게 알아 볼 수 있었지. 윤기는 앞에서 처방전을 내고는 약국 의자에 등을 깊숙하게 기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딱 봐도 몸이 평상시와 같은 컨디션이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했지. 그래서 지민이는 윤기 옆에 조용히 앉아서는 눈을 감고 있는 윤기 옆모습을 바라본다. 자고 있는 모습을 깨어있는 모습보다 더 많이 마주하니까 익숙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랄까? 햇볕이 내리쬐니 노곤해져서 정말로 잠에 빠져드는 듯한 윤기를 보고 지민이는 혹시 윤기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윤기 대신해서 약사 아저씨 쪽을 꽤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었어.

민윤기씨, 민윤기씨 그렇게 두 번을 부르는 입모양을 보고서야 지민이는 확신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손부터 들어서 윤기가 여기 있음을 표시하지. 그리고 약을 받으러 대신 쫓아가서는 아침에 몇 번, 점심에 몇 번 식후.. 이렇게 설명을 듣는데 아저씨 말하는 게 빠르니까 약간 당황을 해서는 천천히 해달라고 입모양으로 말을 하는 대신 수화를 하고서는 아차 싶어서는 펜이 있나 가방을 뒤적이면서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약사 아저씨가 그런 지민이를 보고는 약간 눈이 커지는 듯 했다가 금세 자상한 눈빛을 하고는 능숙하게 수화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약 봉지 앞에 다 써있다고 알려주고는 새로운 손님이 들어올 때까지 일상적인 얘기를 서로 한참이나 주고받았지. 인사를 하고 약을 다 챙겨서 윤기 쪽을 돌아보니 윤기가 어느새 눈을 뜨고 지민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입모양으로 얘기하다가 너무 멀어서 자기가 무슨 얘기 하는지 분명 못 알아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윤기 옆에 가까이 앉아서는 다시 한 번 말을 한다.


"방금."


사실은 자기 이름 몇 번 부르는 소리에 조금 깨서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약을 받으러 가려고 보니 이미 지민이가 대신 자기 약 받고 있는 걸 보게 되었지. 약사가 빠르게 설명하니까 지민이가 조금 당황하기에 걱정하는데 약사가 수화를 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렇게 수화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니까 지민이 얼굴이 활짝 피더니 무슨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리도 많았는지 막 떠들기 시작하더라는 거. 손을 빠르게 움직이는데 그걸 보고 있으니까 그 조용한 아이가 수다스러워 보이는 거야. 소리도 내지 않고 웃는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아파요?]

"응, 조금"

[그래서 공연 보러 못 갔어요?]

"응."

[아쉽겠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그 덕에 너 보게 됐으니까 아무렴 괜찮지 않나 싶다."

[네?]

"너 은근 시끄럽더라?"

[시끄러워요?]

"응,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참고 살아?"


약사는 지민이 입모양을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보면서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두 번 물어보는 일이 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윤기를 보며 그가 얼마나 지민이에게 집중하고 있는지를 알아챘어. 그리곤 안심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앉아서 그렇게 대화를 이어나갔고 윤기가 기침을 하기 시작하고서야 일어났지. 같이 길을 걸으면서 지민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집 쪽으로 향하고, 윤기는 그런 지민이를 따라 걸었어.


[집이 이쪽이세요? 방향이 같아요?]


하고 지민이가 물으면 윤기는 무조건 그렇다고 그러니까 빨리 걸으라고 하고 약국 봉지 앞뒤로 흔들기만 했지. 지민이가 집 앞에 다 도착해서 다 왔다고 하니까 그럼 들어가라 하고는 손을 흔들었어. 지민이도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가다가 약국에서 받은 목캔디를 자기 주머니에 대강 주워 넣은 것이 생각나서는 목이 아프면 먹으라고 건네주려고 다시 돌아서 윤기를 찾다가 온 길을 다시 걸어 돌아가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지.


다시 돌아가야 되면 왜 이쪽으로 왔을까?
몸이 저렇게 아픈데 괜찮을까?
밥이나 죽은 챙겨 먹었나..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 핸드폰을 들어서 윤기 뒷모습을 보면서 문자를 하지.


-밥은 먹었어요?


윤기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더니 멈춰 서서는 바로 답장을 보내더라.


-시간이 몇 신데 먹었지 인마. 그러는 너는
-저도요 ^^;; 근데 몸 괜찮아요? 많이 아파 보이는데
-별 걸 다 걱정을 한다. 내 걱정하지 말고 쉬어라, 나도 이제 집에 다 와서
-네 선배 ^^


지민이는 윤기가 자기 문자에 성실하게 답장을 하느라 그 자리에 멈춰서 움직이지 못하는걸 알았지. 집에 다 왔다는 거짓말을 하고 자신에게서 온 마지막 답장을 보고서야 느릿하게 움직여 택시를 잡고 올라타는 윤기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이상했어. 찡하기도 하고..왜 집이 이쪽 방향이라는 얘기를 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주머니 속 목캔디만 만지작거리다가 하나를 까서 자기 입에 넣고는 집으로 들어가서는 짐을 쌌다. 사탕을 먹는 내내 목이 텁텁했어. 너무 달아서 그런 걸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러곤 침을 꼴깍 삼키다 미쳐 다 녹이지 못한 사탕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버렸지. 눈물이 핑하고 돌만큼 사탕 조각이 너무 컸어. 그래서 인지 역에서 잔뜩 신이 나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태형이를 볼 때도 그 사탕 조각이 목에 탁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기분이었지.

태형이가 기차 안에서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트럼펫을 부는 사람까지 흉내 내면서 그 공연이 얼마나 멋졌는지 최선을 다해서 설명하고 있을 때도,

또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이 들었을 때도,
잠이든 태형이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기분 좋은 장미향 샴푸 냄새를 맡을 때도 그 사탕 조각이 목구멍에 탁 걸려서 넘어가지 않는 것만 같았어. 핸드폰을 꺼내 들어서 낮에 윤기랑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다가 잠깐 그 기분을 잊었지.


-별이 많다


그걸 보고 있는데 새 메시지가 떠서 조금 놀랐어.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라 신기했지. 지민이는 조금 들떠서는


-우리 텔레파시 통했어요. 선배한테 문자 보내려고 나도 보고 있었는데..
-뭐라고 보내려고 했는데?


지민이는 한참을 윤기에게서 온 메시지를 들여다보다가는


-모르겠어요.


하고 답장을 보냈어. 이상하게도 그걸 보내고 나니까 잠깐 사라졌던 것 같았던 목에 걸린 사탕이 이번에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다 가슴에서 멈춰서 내려가지 않는 느낌이더라고. 심장께 걸려서 콕콕- 아프게 찌르는 느낌이었지.


8.


기차에서 내릴 때쯤 돼서는 복잡한 마음도 잊고, 여전히 깊이 잠이든 태형이의 볼을 톡톡 쳐서 잠을 깨웠지.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시원하고 청량한 바닷바람에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었어.


밤이라 그런지 별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여유로운 마음도 생기고..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해변을 따라서 걷다가 태형이가 먼저 지민이 손을 잡았고, 이전에도 가끔 손을 잡았던 적은 있었지만 낯선 공간, 낯선 공기에 답지 않게 긴장해서는 손에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미끄러지는 손을 태형이가 자꾸만 고쳐 잡으니까 지민이는 망설이다가 태형이의 긴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기 손가락을 밀어 넣었어. 놀라서 자신을 돌아보는 태형이의 얼굴을 보면서 말없이 웃었지. 그리고 짧은 시간 태형이 얼굴이 아주 가까이 와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얼떨떨한 기분에 지민이는 깍지를 껴서 잡은 손등으로 자기 볼을 문지르니까 태형인 그게 또 너무 귀여워보여서 이를 다 드러내면서 웃었다.

태형이는 그런 생각을 했어. 스무 살이 이전에도 어설픈 연애 아닌 연애를 해본 적이 있었지만, 스무 살이 넘어서 하는 첫 연애, 첫 여행 모든 것이 이렇게나 아름답고 완벽한데 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스무 살적 시작 됐던 첫 사랑은 어설프고, 많이 아팠다고 입을 모아서 얘기할까? 이런 게 첫 사랑이라면 평생 첫 사랑만 하고 싶은데..

해변 벤치에 앉아서 맥주를 6캔을 사서 한 두 캔만 남기고 다 나눠마시고는 들뜬 기분으로 둘만의 작은 불꽃놀이도 벌이고는 숙소에 돌아왔을 땐 열두시가 넘어있었다.

술 때문인지 얼굴이 붉게 물이든 지민이가 자기 볼을 짝짝 때리면서 씻고 오겠다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세면도구를 찾는데 태형이가 말없이 뒤에서 지민이를 껴안았지. 심장이 어찌나 빠르고 크게 뛰던지 지민이는 어지럼증을 느꼈어.


“너무 완벽하고 좋아서 조금 무서워.”


지민이는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은 태형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면서 태형이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었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태형이가 한마디씩 할 때마다 몸의 울림이 있었고, 울림으로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돌려 안은 태형이가 뚫어져라 집요하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턱을 잡았을 때 그의 입모양은 정확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

이제부터 키스.. 할거야.
놀라지마.
싫으면..
싫어도,
싫어하지 마
그러면 슬플 것 같아.

지민이도 태형이의 오른쪽 눈, 왼쪽 눈 한쪽 씩 눈을 맞추고는-


안 싫어 할 거야 너니까.  


정확한 의사표현에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태형인 바로 지민이의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맞부딪혔지. 이가 부딪혀서는 지민이는 잠시 입을 떼고 검지로 자기 앞니를 만지고 웃다가 웃을 여유가 없이 급한 태형이의 입맞춤에 다시금 눈을 감고 집중하려고 노력했지.

첫 키스는 급하고, 서툴렀지만 뜨겁고 축축해서 황홀한 느낌이었다. 한참을 붙어 있다가 태형이 손이 지민이의 허리 밑으로 한번 지날 때 지민이가 놀라서 딸꾹질을 시작했고, 그게 쉽사리 멈추지 않아서 그제야 두 사람을 떨어져 나왔어.

태형이는 물을 떠다가 지민이에게 먹이며 등을 두들겼고, 그래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서 창피한 마음에 씻겠다고 들어간 지민이는 손가락이 얼굴하고 맞닿았을 때 뽀드득 뽀드득한 느낌이 날 때까지 세수를 하고 상쾌한 비누 향을 풍기면서 나왔다.

두 사람의 밤은 그러고도 한참을 다정한 마음을 속삭이다 잠이 들었지. 태형이는 불을 끄고 누워서는 부끄럽다고 요리조리 피하는 지민이의 허리춤 사이로 계속 손을 집어넣어서 끌어안고는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

그 울림이 자장가 같아서 긴장했던 지민이는 쉽게 잠에 빠져들었지만, 태형이는 아이같이 쌔근대는 지민이 숨소리, 자다가 뒤척이며 돌아 누운 지민이의 옆모습, 통통하게 솟아오른 입술이 오물대는 모습까지 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담느라 한참을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다.    


편안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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