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 된 글입니다(13년도 글).

- 불륜 소재 주의. 사장은 모브 여성과 결혼한 상태. 미래날조.

- 호불호 심하게 갈리는 내용과 소재.






Monster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다. 이 시간에 깨어나는 것이 이제는 습관처럼 굳어졌다. 옆에 잠든 녀석을 한 번 쳐다보고 작은 알람시계를 확인하고 5시 전에 맞춰진 알람을 마구 뒤로 돌려 다시 앤드 테이블 위에 시계를 올려놓은 후 꾸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쓸모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무리 알람 시간을 뒤로 돌려도, 시계를 아예 침실에서 치워버려도 녀석은 언제나 제 시간에 깨어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면 침대 한 켠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텅 비어 있다. 몇 달째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 빈 공간이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양 침대 오른편을 점거하고 있는 정적이 내게는 너무 서글프게 느껴졌다.

뭐 하는거냐. 잠에 취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러면 팔이 스멀거리며 기어올라와 허리를 붙들고 내 몸을 오른쪽으로 돌린다. 그 상태에서 고개를 조금만 들면 졸린 눈과 마주친다. 게슴츠레하게 떠진 파란 눈. 평소에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 느슨한 얼굴이다. 나는 몇 번 몸을 다시 돌리려고 애쓰다가 포기하고 눈을 감아버린다. 그러면 까무룩 잠이 들고 이내 꿈을 꾼다. 그를 만난 후 꿈을 꾸는 일이 늘었다. 꿈을 꾸는 건 잠을 깊게 자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잠을 설치는 일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마음 속 깊숙이 들어차 있는 불안감이 밤 사이의 편안함조차 내게서 빼앗아가고 있다.

꿈은 늘 비슷한 것으로 어딘가로 가라앉아가는 것이다. 가라앉는 곳은 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까맣기도 하고, 파랗기도 하고, 투명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공간 속으로 나는 끊임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다. 가끔은 숨이 막힐 때도 있다. 갑자기 죽을 정도로 숨이 막혀서 수면 위로 올라가려고 손을 뻗고 발버둥을 치지만 수면 가까이까지 올라가고 나면 곧바로 다시 가라앉는다. 꿈 속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물 위를 구경한 적이 없다. 날이 갈수록 꿈을 꾸는 일이 많아지고, 숨이 막히는 일도 잦아졌다. 징벌일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가에 앉은 그가 드레스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다섯 시 반. 그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시선을 느낀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앞 침대가에 앉는다.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긴 손가락이 단추를 끼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단추를 다 채우고 나면 긴 목에 넥타이를 걸어 조인다. 네이비색의 정장 재킷을 걸치고 나면 그는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모레 오지. 일방적인 통보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차림을 다시 한 번 점검한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둔 파란 벨벳 상자를 꺼낸다. 상자를 열면 백금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백금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우면 마지막 관문도 통과다. 언제나 보는 광경이지만 그건 언제나 나를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왼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하던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일련의 행동들이 내게는 현실을 인지하라는 강력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쯤 되면 나는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그가 나갈 때까지 숨죽이고 있는다. 머릿속에는 종일 백금색 반지가 떠돈다. 그러면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는다. 내가 그가 나가는 시간에 눈을 뜨지 못하는 건 그 시간이 이른 시간이어서도 있지만, 그 장면을 보고 싶지 않은 본능이 몸을 억제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불 속에 누워 그와, 왼손에 끼워진 반지와, 간밤의 정사와, 그리고 텔레비전에서나 얼굴을 본 그의 아내를 생각한다. 그리고 늘 하던 생각을 한다.

나는 죄를 지었다.



-



재회는 육 개월 전이었다. 늦은 저녁 누군가가 집 문을 두드렸고, 마침 택배 받을 것이 있어서 나는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그 때 그 문을 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종종 때늦은 후회를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문을 열어버렸고 내 삶은 곧바로 깊은 물 속으로 추락했다.

그의 결혼식을 기억하고 있다. 며칠 동안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장식할 만큼 호화스러운 결혼식이었다. 고교 동창이자 같은 듀얼리스트라는 보잘 것 없는 인연을 방패 삼아 나도 유우기와 함께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 아내는 무슨 유명한 그룹의 외동딸이었고 멋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정숙하고 우아해보이는 미인이었다. 신부의 상징인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자는 일견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 가득찬 행복을 읽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그 옆에 선 남자는 겉으로는 희미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은 도저히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 자신의 생각에 신뢰를 보낼 수는 없었다. 내가 보고 싶은 그의 얼굴을 보았던 것일지도 모르니까.

옛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기분이 어떻느냐고? 단언컨대 세상에서 그보다 더 기분이 더러운 일은 찾기 힘들 것이다. 내가 아직 그에게 미련이 남아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개처럼 벌어도 하룻밤도 잘 수 없을 고급 호텔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을 깨작거리며, 내겐 너무 낯설기만 한 미소를 띄우는 반반한 얼굴을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그 날 먹은 음식들은 집으로 돌아와 전부 토해버렸다. 축 결혼이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기념품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울지는 않았다.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가 시즈카만을 데리고 집을 나갔을 때보다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우는 게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가 나를 떠난 이후 끊임없이 그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고 언제나 그를 그리워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육 개월 전 내 집에 찾아와 대뜸 내게 키스를 퍼부은 그는 그러니까… 내가 자신을 결코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날 밤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마치 그 때로,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 나를 빤히 쳐다보는 파란 눈, 무릎을 잡고 다리를 양쪽으로 잡아당기는 억센 손, 침대 위에서 속삭이는 밀어, 드물게 보여주는 부드러운 표정. 나는 그 날 완전히 휩쓸렸고, 철저하게 그에게 복종했다. 이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였다. 그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고 나는 맨몸을 이불로 감싸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제야 정사 내내 그의 손에서 반짝거렸던 결혼 반지가 기억났다. 집이 고층이었다면 그대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끔찍한 비참함과 자괴감이 나를 덮쳤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지 같은 감정이었다.

그는 그 날 밤 또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굳게 다짐하고 문을 열었다. 이럴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해서 그를 몰아내려고 했다.


- 카이바. 잊어버린 것 같은데 … 우린 헤어졌잖아.


키스하려는 그를 밀어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는 픽 웃으며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 그게 무슨 상관인거냐, 범골?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게 이상한 일인가?
- 하지만 넌, 그러니까….


결혼했잖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이바는 잠시 침묵하고 강제로 내 얼굴을 들리고 입을 맞췄다. 물컹거리는 혀가 내 입 안을 마구 유린하고 빠져나갔다. 거친 숨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 푸른 눈과 마주쳤다. 나를 홀린 그 눈이다.


- 그거야말로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지.


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듯 내게 가까이 오더니 귓불을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


- 내가 너를 이렇게 원하는데 말이야….


확인사살이다. 그는 나를 침대 위로 넘어뜨린 후 왼손에서 반지를 빼서 재킷 안쪽에 넣고 재킷을 던져버렸다. 그의 약지에서 반짝이는 백금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카이바 세토라는 남자는 온전히 내 것인 것 같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마약이었다.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힘든 일이 있었던 날이면 아이처럼 유독 그에게 강하게 매달리곤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찰나의 꿈이자 환상이었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대개 그는 내 곁에 없었다. 그러면 나는 한참을 꿈지럭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밥을 먹으면서, 그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 채널을 틀어놓고 한참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그와 만났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의 일을 말이다. 카이바 세토와 엮이기 시작한 건 열여덟 살 때부터다. 내가 열일곱 살일 때 그는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마저 뉴스거리가 되는 남자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와 내가 관계라는 끈으로 묶이기 시작한 것은 내가 M&A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부터 우리는 최악의 사이였다. DEATH-T부터 시작해서 듀얼리스트 킹덤, 배틀 시티, 그리고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나와 그가 친밀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성격도 가치관도 환경도 맞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심해어와 창공을 나는 새처럼, 한 쪽밖에 없어 박수를 칠 수 없는 손처럼 그렇게 죽을 때까지 평생 마주치지도 교차되지도 않고 살 것만 같았다.

끝까지 평행으로만 달릴 것 같았던 두 선을 순식간에 겹쳐버린 것은 그의 한 마디였다. 또 하나의 유우기가 떠난 후 얼마 되지 않던 때의 일이다. 우리는 옥상에서 만났는데, 그 해 여름 나를 덮친 상실감에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던 내가 옥상에 올라가 처연하게 울기를 반복하던 그 무렵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옥상으로 들어온 그는 내가 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내가 울기를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을 때 대뜸 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나는 그렇게 안긴 채 또 아주 심하게 울었는데, 그것은 절친한 친구를 잃은 설움의 눈물이 아니라 이제부터 심해로 추락할 내 인생에 대한 동정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 울지 마라.


그는 딱 그렇게 한 마디만 던졌다. 그것은 내 삶을 깊은 물 속으로 내던질 불행의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나는 그제야 나와 그가 상당히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이전처럼 그를 적대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은 그의 어린 동생을 보러 간다는 것을 핑계로 그의 집에 놀러가서 그의 근처를 어정거리기도 했다.

우리가 어쩌다가 서로 몸을 섞을 만큼 긴밀한 관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얼굴을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관계였다던가, 재벌과 가난뱅이라는 끔찍한 신분 차이라던가 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우리 두 명 사이에는 있지 않았는가. 나와 그는 둘 다 남자였고,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 통념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관계였다. 허나 열여덟 살의 남자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짓을 아주 당연하게 저지르기 마련이고, 나는 늪가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빠르게 빠져들어갔다.

일순간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들키면 어떡하지. 라는 것이 주였다.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이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를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여동생의 눈이라던가, 내 주위에서 멀어져가는 친구들의 모습들을 생각하면 나는 당장에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는 가끔 나의 걱정들을 그에게 털어놓으며 넌지시 이 관계를 끊어내는 것을 종용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그것이 무슨 대수라는 양 피식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카이바는 이 관계가 폭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때의 나는 그것이, 그가 나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 정도는 얼마든지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런 당당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라고 믿었다. 어린애나 할 법한 유치하고 한심한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이제 여기 오지 마라. 범골.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침대에 드러누워 출근을 준비하는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는 아침 인사를 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어투로 내게 이별을 선고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하게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 헤어지자는 뜻이다.


그것이 질나쁜 농담이라고 생각한 나는 농담하지 말라고 낄낄거리며 웃었지만 그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넓은 방에 귀곡성처럼 내 웃음소리만 몇 번 메아리친 후에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침대에서 맨몸을 일으켜 그를 쳐다보았다. 넥타이를 꽉 조여매고 내 쪽으로 몸을 돌린 그는 내 연인이라기보다는 냉혹한 기업가로 보였다. 지금까지 그를 그런 식으로 본 적은 없었는데.


- 무슨 뜻이야?


멍청한 질문이다. 더 이상 더하고 빼고할 것도 없는 명확한 말이 아닌가. 헤어지자. 이제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이리도 쉬운 말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 몇 번 말해야 알아듣는거냐? 이제 만나지 말자는 뜻이다.
- 왜?


나는 즉각 되물었다. 그는 동정인지 짜증인지 모를 눈빛을 내게로 보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 너와 내가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거냐? 정말 대단한 오만이군.
- ……….
- 좀 더 냉정하게 말해줘야 알까? 네 녀석은 내 인생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사실이기는 했다. 나는 집안도 스펙도 볼 것이 없는 하류인생이었고, 거기다 남자였다. 세계적인 대기업 사장의 옆에 설 사람으로선 부족한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도저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제 와서 갑자기 상황이 바뀐 것도 아니지 않은가. 6년이다. 인생의 1/4를 같이 보낸 상대에게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이별을 고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설득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일방적인 선고로.


- 카이바…….


거기서 그냥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으면 될 것을, 나는 그에게 매달려보려고 했다. 허나 그의 파란 눈은 차가웠고, 6년간 쌓여온 애정이라던가 추억 따위로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그 눈을 보고서도 나는 몇 번 그에게 전화를 걸고 그의 집을 찾아가면서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태도뿐이었다. 몇 번 그런 추한 행동이 반복된 후,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와 말했다.


- 뭘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 추하게 굴지 마.


그는 정말 ‘친절하게도’ 앞으로의 내 삶 정도는 책임져주겠다고 했다. 일을 하지 않아도, 앞으로 무슨 짓을 하고 살아도 죽을 때까지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그는 그렇게 말한 후 한 마디를 덧붙였다.


- 그러니까 그만 내 앞에서 꺼져라.


우리는 그렇게 끝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끝났어야 했다’.




그와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삼 년 후의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를 피해다녔고, 내 삶을 돌봐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작은 공장에 취직해 살고 있었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낡은 우편함에서 이 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청첩장을 발견했을 때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KC마크로 봉해진 청첩장 안에는 그의 결혼식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시종 뉴스에서 요란스럽게 떠들어댔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까지 청첩장을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저에게 아직 약간의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건가. 나는 유우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역시 청첩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유우기는 쾌활한 목소리로 축하할 일이 아니냐며 웃었다. 그래, 축하할 일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식에 참석할지 말지를 두고 저울질을 했는데 결론은 참석하는 쪽으로 났다. 결혼식이라는 명확한 장면을 보고 나면 그에게 남은 미련도 완전히 끊어 없어질 것만 같았다.

결혼식은 호화로웠고 나는 한없이 서글픈 마음과 역겨운 기분을 안고 돌아왔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신부의 모습이나, 내 마음도 모르고 기쁘게 박수를 치는 친구의 모습보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 가장 짜증이 났다.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며 와줘서 고맙다는 식의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고, 심지어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가 조금만 더 내게 말을 걸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신랑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비참했던 결혼식 이후 6개월 만에 우리는 다시 만났다. 관계는 이전보다 더 나빴다. 원래부터 있던 것에 불륜이라는 딱지까지 붙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예전과 똑같았다. 불안해하는 기색이라곤 없다. 그는 한없이 당당했다.

퇴근을 마치고 곧바로 내게로 온 그와 침대에 누워 있을 때의 일이다. 딱딱한 신호음이 울리고 그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지만, 그는 여유롭게 내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전화를 받았다. 바로 옆에 붙어있으니 작게나마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면에 파문이 이는 듯한 차분하고 고요한 목소리는 내가 딱 한 번 본 적 있는 그의 아내다.


“그래…. 그럼 내일이 좋겠군.”


머리카락을 넘어 얼굴. 그는 빈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자연스럽게 저녁 약속을 잡는다. 수화기 너머로 여자가 기쁜 듯 웃는 소리가 들린다. 소녀같은 웃음 소리를 들으면 나는 당장 죽고 싶을 만큼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두고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내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무것도 몰라서 죄책감도 느낄 일 없는 여자가 부럽기도 했다. 또 한 편으로는, 원래는 내 것이었던 남자를 그녀가 빼앗은 것만 같아서 지금의 내 행동은 정당하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얼굴과 목을 넘어 허리께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하나뿐인 그의 동생에게 말할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와 명확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어떻게 나를 쓰다듬으며 아무렇지 않게 아내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


“넌 아무렇지도 않아?”


그가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쪽을 돌아보며 픽 웃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나를 처절하게 버린 남자와 다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괜찮다니 이 얼마나 얼간이 같은 짓인가. 나는 침묵했고 그는 말없이 침대를 나 섰다.

그는 내게 상냥하지 않다. 저 좋을 때 나를 찾아와 실컷 즐기고 나서 떠나갈 뿐이다. 나는 행복하지도 않다. 악몽을 꾸는 일은 늘어나고 있고,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리며 한 순간도 편안할 일이 없다. 이 한없이 천박한 관계를 나는 왜 놓지 못하고 품에 안고 있는걸까.

욕실에서 나온 그는 평소처럼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백금 반지를 왼손에 끼운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 일련의 행위를 바라본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차라리 그가 정말로 천박하고 더러웠다면 이런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카이바 세토라는 남자는 그런 형용사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오랜만에 카이바가 찾아오지 않는 주말이었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죄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그였다. 만나자는 이야기겠지, 라고 생각하고 받은 전화의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 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하는거냐? 집으로 오라고 했다. 저녁 식사 초대 같은거지.』


카이바의 집에 가는 건 한동안 내게 익숙했던 일이다. 그 집의 정원이나 홀은 내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서로의 집에서 만나는 것은 납득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와 다시 만난 이후로도 나는 한 번도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다. 그 화려한 저택에는 그가 있고, 그리고… 그의 아내가 있지 않은가.

거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 무심코 창 밖을 내다보자 거기엔 익숙한 모양새의 검은 리무진이 서 있었다. 와라. 일방적인 선고. 그와 나의 관계는 언제나 이랬다. 질식할 것 같이 답답한 기분을 안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를 보면 이 진득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을까.

저택에는 유우기가 와 있었다. 듀얼리스트들을 초청한 자리라고 말했다. 나는 홀린 듯 유우기에게 이끌려 식사 장소인 홀에 도착했다. 몸에 딱 맞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카이바는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며 고용인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더니 제 뒤쪽을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그의 등 뒤에서 누가 나올지 알 것 같아서 다시 숨이 막혔다.

거기서 나타난 사람은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를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카이바는 천연덕스럽게 아내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그녀는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나랑 자는 게 얼마나 재밌는가에 대한 이야기? 숨겨왔던 비밀이 목구멍을 간질인다. 우리 둘 다 멍청하기 짝이 없다. 카이바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을 보는 듯한 그 눈초리가 원망스럽다. 정부(正婦)와 정부(情婦)의 만남이라. 그에겐 이것이 그저 재미있는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식사는 모래를 씹는 듯했다. 메인 요리로 나온 고기는 고무를 씹는 것처럼 질기고 아무 맛도 없었다.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복도 한중간에 서 있었다. 나는 이 복도를 알고 있다. 그리고 멀지 않게 보이는 화려한 방도 알고 있다. 그 6년간 우리가 주로 시간을 보냈던 공간이다. 이제는 쓰이지 않는 듯 복도도 방문도 낡아보였다.


“추억의 공간이군.”


낯익은 목소리. 그는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말했다. 그에게도 추억인가? 6년간의 세월을 정말 기억하고 있기는 한건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무슨 생각으로 오라고 했어?”


정기적으로 내게 정부의 처지를 각인시키기라도 하고 싶은건가. 그런 거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손에 문신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반지만으로도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아주 잘 알 수 있으니까.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면서 말했다. 별 의미 없는 일이라고. 그저 평범한 저녁 초대일 뿐이라고.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는 대각선으로 보이는 익숙한 방문을 한 번 보고 내 이마에 입을 맞춘 후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고보니 여긴 정말 오랜만이군. 기껏 여기까지 온 김에 추억이라도 되살려볼까?”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담겨져 있는 것인가. 나는 그를 확 밀쳐내며 말했다. 사실 한참 예전에 물었어야 하는 것이다.


“너 날 사랑해?”
“물론이지.”


한 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낯설다.


“날 버렸잖아.”
“그랬지. 넌 내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네 녀석을 싫어한다는 건 아니다.”
“꺼지라고 했잖아.”
“그 때는 그랬어야 했다. 네 녀석이 곁에서 좀 사라져야 했거든.”


지금은 괜찮으니까 마음껏 즐기겠다는 뜻?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눈빛엔 거짓도 가식도 없다. 그는 너무 솔직하다. 자신의 욕망을 숨기는 법이 없다.


“지금은?”
“지금은 상관없다. 네 녀석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한심한 범골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날 만족시킬 수는 있거든. 상황이 변했어. 네 녀석을 곁에 둬도 별 문제가 없다면 내가 널 멀리할 이유가 뭐가 있지?”


거짓을 고하지 않는 점에서 정당하다고 해야하는가. 숨이 턱턱 막힌다. 이런 말을 듣고 있는데도 여기서 뛰쳐나갈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디까지 멍청한 것인가.


“널 만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내가 내뱉은 말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늦어도 한참 늦어버린 후회. 바닥에 낮게 깔리는 후회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너다, 범골. 너를 안고 싶어서 매달리는 건 나잖아?”


내 턱을 손으로 잡고 치켜올린 그가 나지막하게 말을 잇는다.


“넌 날 거부할 수 있잖아. 그렇지? 내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고, 아예 도미노 시티에서 모습을 감추고 사라질 수도 있지.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안 하는 것 뿐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벨을 누를 때 그것을 못들은 체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내게. 나에게.


“이제 와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니. 그건 후회도 뭣도 아니야. 넌 지금도 날 만나지 않을 수 있어.”


꿈을 꾸는 것처럼 의식이 물 속으로 가라앉는다. 숨이 막혀오고 수면 위를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서 끝나야 했었다. 나는 영원히 도미노 시티를 떠났어야 했다. 그 때 문을 열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아예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를 보지 말았어야 했다. 옥상에서 그가 나를 끌어안았을 때 도망쳤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를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끌어안는 그를 밀쳐내고 옥상을 뛰쳐나간다거나, 문을 두드리는 그를 무시하거나, 내게 키스를 퍼붓는 그를 밀어내고 매정하게 현관문을 닫는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내 선택은 언제나 같을 것이었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전적으로 네 녀석의 선택이다. 죠노우치.”


그는 내게 깊게 입을 맞추고 웃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네가 후회할 게 있다면 나를 사랑한 것 뿐이야.”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끌어안았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나는 비로소 매일 밤 꿈 속에서 나를 물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욕망이라는 이름을 한 괴물일 것이다.





10월 24일. P.M 09 : 47.

전면 유리 너머로 도미노 시티의 야경이 발 밑에 깔린다. 불빛이 열맞춰 흐르고 하늘을 뚫을 듯 솟은 마천루의 불빛이 창가에 아른거린다. 개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이 도미노 시티 중심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거대한 건물로, 건물의 윗부분에는 KC라는 마크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뭐 하는거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테이블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은 카이바가 와인병을 따고 있었다. 아직 반쯤 창 너머 풍경에 가 있는 시선은 여전히 KC 마크를 응시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냐.”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앞에 놓인 크리스탈 잔에 짙은 색의 와인이 따라지지만 손을 댈 마음은 없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2인용 정도의 작은 케이크가 놓여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퍽 신선해 보이는 생딸기가 올라간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녀석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는데, 둘 중 누구의 생일이건간에 케이크는 대개 가장 클래식한 이것으로 고르곤 했다. 정작 그는 케이크를 별로 먹지 않았다. 그 작은 배려가 기분 좋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자정이 되기까지 2시간이 조금 더 남았지만 지금이 시작할 때다. 초도 꽂지 않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다가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는 짧은 인사가 돌아오고 내가 직접 케이크를 자른다.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딱 4년만이군.”


스물여덟. 우리가 스물넷에 헤어졌으니 꼭 4년만에 맞는 카이바의 생일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내 접시에 케이크를 옮긴 후 입 안 가득 크림과 딸기를 우겨넣었다.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 아귀처럼 케이크를 집어먹는 나를 그가 한심하다는 양 쳐다보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빵이 목구멍을 막자 목이 메었고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모른 체 했다. 오늘은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커다란 케이크 조각을 목구멍으로 간신히 밀어넣은 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차라리 이 눈 앞의 남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좀 나았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하게 남아 있는 그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을 강타한 톱뉴스였던 호화스러운 결혼식이었다. 행복한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던 신부의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반으로 갈라진 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겹친다. 뒤이어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던 낯선 미소가 떠오르고, 곧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토기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토기를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했다. 방금 먹은 것에서부터 오늘 아침에 먹은 것까지 위장에 남아 있던 모든 것들이 토해져나왔다. 화장실 타일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시 생각이 떠오른다. 이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입가를 닦아내고, 세수를 하고 화장실 거울을 쳐다보았다. 물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게 반짝이는 거울에 초라한 금발이 비친다. 일 년 전보다 배는 나이를 먹은 것 같은 초췌한 얼굴. 원래 이렇게 생긴 얼굴이었나. 문득 고교 시절 친구가 지나가듯 던졌던 농짓거리가 떠올랐다. 넌 얼굴은 반반하니까 누가 얼굴 뜯어먹고 살겠다고 데리고 살 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맞다면 이제 곧 버려질 시간이다.

화장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과 시선이 교차되자마자 독설이 쏟아진다.


“멍청하게 뭘 하는 짓이지, 범골? 내 앞에서 장난이라도 치는거냐?”


장난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관계 자체가 장난이나 다름 없다. 대꾸하지 않고 입가에 묻은 물을 소매로 닦아냈다. 시간은 이제 10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채 2시간도 없다. 10월 25일. 그의 진짜 생일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25일은 내가 아니라 대저택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주어진 날이니까. 몇 번 본 적이 있는 우아한 얼굴을 생각하자 다시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더 이상 게워낼 것도 없는데, 무언가가 또 올라오려고 하는 것을 꾹 참고 손가락을 들어 욕실 쪽을 가리켰다.


“씻을까?”


무응답.


“아니면 그냥?”


손가락은 침실 쪽으로 향했다. 그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표정이 찌푸려졌다. 익숙한 얼굴이다.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딱히 없다.


“그러려고 온 거잖아?”


그는 말이 없었다. 예의 그 날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내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침실로 향했을 뿐이다. 그 행동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잠깐 머뭇거리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침실에는 갓 빤 듯한 부드러운 냄새가 나는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고, 베이지색 커튼 너머로 야경이 내다보였다. 꾸물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가 주저앉았다. 침실에는 시계가 없다. 잠에서 깨어 자명종의 알람을 뒤로 돌려놓을 필요도, 아예 시계를 침실 밖으로 내던져버릴 필요도 없다. 오늘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침대 오른편에 올라앉아있는 정적을 마주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2시간도 남아 있지 않았고, 자정이 지나면 나는 내 집에 돌아가 있을테니까. 서글픔과 자괴감을 품고 있는 정적과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는다. 사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인 내겐 서글프지 않은가.


“… 왜 이러고 있는걸까?”


무심코 뱉어낸 말에 내가 입고 있는 남방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던 그의 손이 멈춘다.


“또 그 소리로군.”


질린다는 듯 짧은 숨이 튀어나왔다 사라진다. 셔츠의 단추를 전부 다 풀어놓은 그가 안쪽에 받쳐 입은 누런 티셔츠를 신경질적으로 벗겨내면서 덧붙였다.


“몇 번이나 말했었잖아? 이건 네 녀석의 선택이다.”


그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나라고 말했다. 떠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데도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은 나라고. 자신을 거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역시 나라고. 자괴감, 비참함, 죄책감. 그 끔찍한 감정들의 총체나 다름없는 그를 끌어안고 놓지 않고 있는 것 또한 나이니 모든 잘못은 오롯이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 맞는 말 같기는 했다. 벨을 누르는 익숙한 사람을 모른 체 하고 문을 닫아건다면, 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받지 않는다면, 그렇게 한다면 이 질척한 관계가 청산될 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이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거라는 말이지. 분명 틀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 다른 선택이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만 뺀다면.


“그럼 전부 다 내 잘못이라는 거야?”


푸른 시선. 한없이 이기적인. 그는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듯 얇게 미소지었다.


“네 선택에 따라온 거니까.”


그래, 너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 버리는구나. 편리한 수법이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몸이 뒤로 넘어가고 탄력 좋은 매트리스와 부드러운 시트가 등을 감싼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 찬 기운이 도는 향수 내음,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을 파란 눈…. 이러고 있으면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의 2년짜리 마취제로 평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소년기로.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익숙한 얼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좋아하는, 사랑하는. 그 감정은 현재진행형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모든 것이 예전같지 않다. 어쩌면 그 변화는 단지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더 이상은 온전한 내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 변화는 그 이상이었다. 그의 생일, 그와 하는 섹스가 그렇게 이전만큼 기쁘지 않다. 최소한 작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깨어나서 한 구석이 빈 침대를 바라보며 온갖 끔찍한 감정들에 휘말리기는 했어도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만은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저 꼴사나운 집착과 빛나는 소년기에 대한 미련을 그에 대한 사랑이라고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이 험한 꼴을 당하면서도 그에게 절박하게 매달리는 것을 보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이 절박함조차 내 지저분한 집착이 만들어낸 착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눈을 뜨고 바지 버클을 푸는 길다란 손가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새하얀 천장. 이 호텔에는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허나 그 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고, 나 역시 그 순간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내 기억이 낯설고, 그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보드라운 갈색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에 머리카락이 엉겨들고, 나는 예전에 종종 이런 식으로 그와 의미 없는 장난을 치던 것을 생각했다. 고작 몇 년 전의 일인데도 기억은 안개처럼 뿌옇고 이상할 정도로 서러웠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내 중얼거림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은 답을 쉽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건 너 때문이야. 네가 이 길을 선택했으니까. 결국 내가 멍청이라는 거로군. 픽 웃고 눈을 감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맨살에 차가운 손이 닿는다.



도톰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욕실의 물소리가 그쳤다. 입고 온 점퍼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니 시계의 침은 11시 45분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면 어떻게든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익숙한 저택의 풍경. 커다란 홀과 그가 돌아내려오던 나선형 계단….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그 모습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데리고. 음, 이 생각은 역시 그만 두는 게 좋겠다. 그 여자를 생각할수록 나는 더 우울해지고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눈매와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입가. 그를 다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수시로 그녀를 생각하며, 과연 그가 제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제 아내보다 나를 더 사랑한다고 해도 정작 그가 최후로 선택한 것은 여자가 아닌가. 나는 태어났을 적부터 이미 패배자인 것이다.

욕실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호텔방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를 일러주며 내일 아침에 나가도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빈 호텔에서 숙박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들은 체도 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고 허리가 짜르르하게 아파왔다. 작별 인사는 굳이 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방을 나가는 모습을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았다. 스물네 살 때, 어느 비가 오던 날 낡은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저 모습을 울면서 쳐다봤던 기억이 났다. 별안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급하게 양쪽 눈을 비비고 몸을 돌렸다.

도미노 시티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욕실에 앉아 몸을 적시고 있으니 조금은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나는 답을 내릴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 짓을 그만두고 싶으면서도, 정말로 그만둬 버리면 예전처럼 괜찮지 않은 생활로 돌아갈 것 같아 무서웠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실 지금도 그리 괜찮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건데?”


어떻게 하고 싶은거야. 무슨 선택을 하고 싶은거야. 자문해도 답은 없다. 이대로 그냥 선택하지 않고 흘러가는대로 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몸을 아래로 가라앉히자 머리까지 물 속으로 잠긴다. 투명한 물이 기포를 내뿜으면서 욕조 안을 유영하고 있다. 물 속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그 때문인지 묵혀두었던 생각들이 일시에 떠올라왔다. 5월의 피크닉이라던가, 새벽의 산책이라던가, 한밤중의 수영이라던가 하는 것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양념처럼 끼어들어 생각나는 것. 사랑한다는 고백.

때로는 애절하고 때로는 강렬했던 그 사랑의 고백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갔을까.


몸을 일으켜 물에 잠긴 머리를 든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이제는 거의 매일같이 나를 찾아오는 꿈 속의 일들을 생각한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면 위라는 것은 여기가 아니었을까. 푹 젖어 가라앉은 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제 그만 대답이라는 것을 해야 할 때가 온 것만 같았다.


25일에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이었다. 매일 밤 나를 괴롭히던 악몽이 오늘만큼은 찾아오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최소한 오늘은 멀쩡한 정신으로 있고 싶었다. 늘 내 발을 잡아당기던 괴물이 조금은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주말 오후에는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가 있다. 점심 시간에 몰려들었던 손님이 빠져나가고 테이블을 닦고 있는데 점원 한 명이 내게 말을 건넸다. 죠노우치, 오늘 기분 좋아보이네. 대꾸하지 않고 미소만 띄웠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저녁 식사까지 마치니 시간이 늦었다. 이 시간엔 아마도 집에 있을 것이다. 오늘은 어쨌든 그의 생일이고, 그는 KC의 사장이니까. 생일을 따위라고 지칭하며 귀찮게 여기는 성격상 그리 오래 파티를 열어두진 않겠지. 핸드폰 시계는 9시 조금 전을 가리키고 있고, 나는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 그의 집 근처 주소를 불렀다. 거리에는 가을 밤의 정취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사방에 불빛이 환했다. 도미노 시티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거대한 집. 익숙한 풍경이 택시 양 옆을 감싸기 시작하자 나는 슬슬 초조해졌다. 이미 머릿속에서 몇 번 시뮬레이션한 일인데도 그랬다. 중학교 때 얻어 들은 미신대로 손바닥에 사람 인 자를 세 번 써서 삼켰다. 물론 긴장감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걷다 보면 정문이 나온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내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그들은 당연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내부 차량을 타고 정원을 가로질러 본저택으로 향했다. 겉보기에 집은 조용하고, 사람들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기사는 대부분 다 돌아갔다면서 유우기의 이름도 입에 올렸다. 무슨 일로 이렇게 늦게 오셨냐는 질문도 함께 왔다. 바쁘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고 웃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받으며 들어선 집은 한적했고, 인기척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손님용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 거대한 홀에 서서 무언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홀에 들어서자 기척을 느끼고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왔다는 소식은 들었겠지만, 직접 얼굴을 보니 느낌이 묘한 것인지 그의 얼굴이 살짝 비틀렸다. 노골적인 불쾌감의 표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안녕, 카이바.”
“… 네 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냐니. 네 생일이잖아? 유우기는 불렀으면서 나는 쏙 빼놓다니 너무하네. 명색이 같은 듀얼리스트에 고교 동기인데.”


그의 표정이 한 번 굳더니 이내 풀린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지?”
“일은 무슨. 생일 축하해주러 왔다니까.”


그건 이미 어제 했잖아. 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얼굴이다. 그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짓더니 근처를 서성이고 있던 고용인 한 명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녀가 황급히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에는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우아한 이브닝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자.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 안녕하세요….”


그의 아내가 나온다는 건 나에게 있어 명백한 축객령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다. 태연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 홀 가장자리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상관 없다. 파티가 다 끝난 때늦은 시간에 와서 당연스럽게 자리를 점거하고 있는 내가 퍽 이상스럽게 느껴졌는지, 여자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자리를 떴다. 우리 집을 열 개는 가져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드넓은 홀에 이제 그와 나만 남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 시간에 여길 온 거냐?”


으르렁대는 말투가 이채롭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대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이었으니까. 하기야 정부(情婦)가 연락도 없이 집으로 들이닥쳤는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는 힘들겠지. 오랜만에 보는 그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묘하게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생일 축하하려고 왔다니까 성질은.”


물론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다. 내 허접한 둘러댐에는 역시나 눈길도 주지 않고 그는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몸을 그대로 관통해버릴 것만 같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한 번 핥고 나서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지 않아?”


아무도 없다곤 하지만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는 뻥 뚫린 넓은 홀. 그 말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저 혼자 감을 잡은 듯 그가 엷게 웃었다.


“거기에서 좀 기다려. 왜 있잖아. 우리 십 년 전에 자주 가던 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열여덟 살 때부터 스물네 살까지 근 6년간을 보냈던 방. 이제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아 낡고 닳아버린 방. 그는 어물거리는 말을 이해한 듯 곧바로 몸을 돌렸다. 천천히 가도 되는데. 라는 내 말은 듣지도 않았다. 키가 훌쩍 큰 형상이 점점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것은 늘 서러웠는데 오늘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떨리기도 하고, 약간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동시에 처음으로 그와의 관계에서 약간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생각에 손이 약하게 떨렸다.

그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조금 더 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홀을 나서 로비 쪽을 청소하고 있는 메이드 한 명에게 그의 아내에게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다. 그 내용은 심히 단순한 것으로 그저 카이바 녀석에게 생일 선물을 전해줘야 하는데 사정상 소소한 것이어서 직접 전하기가 창피하니 좀 받아다가 대신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내를 거쳐 전달하는 것이 더 창피할 수도 있고, 대단히 이상한 부탁을 하는 남자라고 생각되겠지만 그 고아한 여자는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해도 남편의 오랜 친구-라고 여겨지는-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할 만큼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의아한 소리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메이드에게 꼭 전해달라고 당부의 말을 하고 녀석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불빛도 거의 없는 죽은 복도에서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범골. 무슨 일로 왔는지 이야기나 들어볼까?”
“정말로 생일 축하 하러 온거야. 나 너한테 생일 선물도 안 줬잖아? 선물도 주고, 당일에 축하도 해보고. 좋지 않아?”


그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진다. 바깥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날것의 얼굴.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금방이라도 내 멱살을 잡아챌 것만 같다.


“농담은 그만두고 이야기해라. 내 허락 없이 멋대로 여기 온 걸 내버려둔 것만으로도 이미 자비는 다 베푼 것 같은데 말야.”
“내가 너한테 자비를 구걸해야 하는 사인가?”


뭐, 철저하게 갑과 을의 관계인 우리를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으쓱하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지나간다. 나는 어둠에 젖어 색이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슬퍼졌다.


“왜 이러고 있을까?”


계속 침묵.


“우리 말야.”


내가 몇 번 그에게 물었던 것이고, 언제나 같은 대답이 돌아왔던 바로 그 말이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그는 눈을 감아버렸고,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굳게 닫힌 방문과 낡아빠진 복도를 둘러보았다. 청소도 하지 않는지 먼지가 퍽 두껍게 쌓였다. 내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깨끗하고 귀중한 장소로 남아 있는 곳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강한 괴리감마저 들었다. 어쩌면 그는 이 곳에서의 모든 일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지저분한 채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여기가 소중했다면, 최소한 한 때의 사랑이 담긴 곳이라면 조금 더 이 장소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여기서 뭐 했는지 기억해?”


대답이 없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해?”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단순한 일인데도 대답을 해주지 않는 이유가 뭔지 머리 윗부분을 한 번 뜯어내보고 싶다.


“시답잖은 이야기 하지 말고 본론이나 이야기해.”


이쯤 되면 거의 사랑을 구걸하다시피 하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숙이고 들어가도 개의치 않고 갑질인가. 그래, 윗대가리가 이 정도는 되어야 윗대가리라고 할 만하지.


“너라는 새끼는 진짜 한결같이 최악이구나…. 질렸다, 진짜….”


한숨을 쉬면서 내뱉는 푸념에도 무표정한 반응은, 나를 정말로 질리게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라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정상인 것인데, 최소한 그를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러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묻는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기도 했고, 대놓고 내 잘못이라고 나를 몰아붙이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믿음이라도 있었는데.


“예전에도 여기서 본 적 있지….”


듀얼리스트들을 초청했었던 그 자리. 유우기도 있었고, 듀얼을 거의 그만둔 지금은 얼굴을 잘 알 수 없는 다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고무를 씹는 것 같이 질겼던 음식들을 억지로 삼키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 곳에 있었다.


“사랑해?”


그 때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 주어가 빠진 질문이라도 그는 이해할 터다. 말이 뱉어져나오자 파란 눈이 가늘게 찢어지더니 고개가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지금은 행동이 아니라 말을 원한다. 대충 내뱉는 것이라도, 최소한의 확신이라도 줄 수 있는 한 마디를.

기다려도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린 게 멍청한 거겠지. 나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수긍했다.


“나 너무 힘들어서 이제 그만 하려고. 네가 듣고 싶은 본론은 그거야.”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른다. 빈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나는 이전에도 이 비슷한 말을 꺼낸 적이 있었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울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전과가 있으니 내 말은 그냥 허접한 협박 정도로 들릴 터다. 카이바는 팔짱을 끼고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할 테면 해보라는 눈치다. 나는 앞뒤로 나를 찔러오는 오만한, 그리고 떨리는 시선을 느끼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키스 한 번만 해줘.”
“그러지.”


힘없이 내뱉은 말에 흔쾌히 대답이 돌아온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최악이다. 내 앞으로 다가선 그에게 팔을 뻗어 등을 끌어안았다. 어차피 곧 이 품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는 거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아주 어쩌면, 말이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돌아가고 싶어.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후회는 네 자신에게 해라, 죠노우치. 결국 끝까지 전부 내 잘못인 모양이다.

마른 입술 두 개가 맞닿고, 타액으로 버석거리는 입술이 조금씩 젖어든다. 나는 이제는 경련에 가까울 정도로 떨려오는 시선을 느낀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뜨거워지고, 나는 나와 맞닿아 있는 그의 입술 너머 목구멍에서 일순간 숨이 멈추는 소리가 나는 것을 알았다.

두 시선이 마주치고, 커다랗게 떠진 눈동자가 파란 눈을 향한다. 나는 소리 내어 키스를 끝내고 카이바의 뺨에 쪽 소리를 내면서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가 나를 잠깐 내려다본다. 나는 소리내어 웃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면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이제 더 이상 그 꿈을 꾸지 않을 것 같다는 의미 모를 확신이 들었다. 분노 같기도 하고 당혹감 같기도 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를 향해, 나는 작게, 그러나 아주 명확하게 속삭였다.


“이게 내 생일 선물이야. 생일 축하해, 카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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