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사람이 지켜야 하는 예의 중에는 남의 방을 양해도 없이 벌컥 열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있었다. 개인에게 배당한 막사를 개인이 사용하는 방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남의 막사도 갑자기 불쑥 들어가거나 하지 않는 게 맞았다. 더군다나 채광이나 편리를 위해서라도 낮에는 문이라고 할 법한 쪽을 열린 채로 두는 필리엔의 평소 습관을 생각한다면 그게 닫혀 있을 때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릴리는 별생각 없이 필리엔의 막사에 불쑥 들어갔고, 예상치 못한 장면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좀 지나칠 정도로 상상도 못한 광경이라 릴리는 순간 자기가 뭘 봤는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초를 켜두긴 했지만 낮이어도 막사 내부는 어둑했기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는 탓도 있었다. 

막사 안에는 필리엔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하나 더 있었다. 정체불명의 방문자는 필리엔에게 거의 모습이 가려 있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아주 사적인 거리까지 침범하며 필리엔과 바짝 붙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릴리가 일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들어온 빛 때문인지 아니면 릴리가 낸 인기척을 느낀 건지 필리엔이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보았다.

"헉!"

필리엔이 엉거주춤 몸을 돌리려고 움찔대는 순간, 아름답지만 차가울 정도로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필리엔은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린 단호한 명령 탓에 몸을 돌리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몸짓으로 등을 꿈지럭대더니만 몸을 최대한 돌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겨우 고개만 릴리 쪽을 향했다. 완전 어색해 보였다.

"어어, 릴리가 어쩐 일이에요?"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런데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릴리가 상당히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필리엔이 이유도 없이 웃통을 벗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엔 옆에 있는 사람은 긴 은발의 미소년이었다. 그런 비주얼을 지닌 인물은 물론 대현자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쪽은 몸을 꽁꽁 싸매고 있기는 했지만 릴리가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필리엔의 어깨에 거의 매달렸다 싶을 정도로 붙어있는 것만은 실제 상황이었다.

"세필리아가 저한테 걸어둔 마법을 고치고 있는 겁니다."

마법을 고친다니? 릴리는 슬그머니 두 사람 쪽으로 다가가며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좀 더 차분하게 살폈다. 

처음엔 딱 붙어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접촉 지점은 딱히 없었다. 대현자는 아주 작은 글씨를 읽으려는 것처럼 필리엔의 어깨를 아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 뿐이었다. 릴리는 굳이 저렇게 벗겨놓고 달라붙어서 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는 입을 단속했다.

"많이 어려운…… 일인가 봐요?"

"사람의 육신이라는 건 계속해서 생장하니 까다로울 수밖에 없지요. 그나마 최근엔 성장기가 지나서 좀 낫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골치랍니다. 물론 저로선 그쪽이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할 정도로 까마득히 무지하다는 점이 좀 더 당혹스럽지만 말입니다."

나긋나긋 말하는 꼬락서니가 먹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필리엔을 괴롭히는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줄 능력은 되지만 자신을 먹이는 대마법사에게 한 방 날릴 마음의 준비는 안 되어 있는 릴리가 침묵했다. 다행히 침묵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따가 하면 안 돼요?"

대현자가 시선만 올려서 필리엔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릴리가 보기엔 예쁘기만 한 필리엔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나지 않을지 걱정될 지경이었으나 필리엔은 얼굴 가죽이 따갑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대현자의 시선을 마주하며 어설프게 웃을 뿐이었다.

"벗고 있기 좀 그래서……."

필리엔이 슬쩍 릴리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벗고 있다곤 해도 릴리가 들어온 입구 쪽에서 뒤돌아 있는 탓에 보이는 거라곤 느슨하게 묶어 내린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등 정도였으므로 릴리는 생각이 달랐지만, 필리엔 입장에서는 좀 부끄러울 만도 했다. 불빛을 받아 드러난 맨살이 퍽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건 사실이긴 했다.

릴리는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굳이 가릴 필요까진 없다는 소리를 목구멍 아래로 겨우 돌려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대현자 앞에서까지 할 얘기는 아니었다. 그건 릴리와 필리엔 사이의 굉장히 사적인 이야기니까. 자고로 진짜 숙녀라면 자기 남자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하는 법이지.

마음이 풀어진 릴리는 최대한 무해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가 어찌 됐든 지금 필리엔이 대현자와의 볼일이 아니라 릴리의 방문을 더 우선하지 않았는가. 

대현자가 그런 릴리를 향해 시선을 일별하고 필리엔의 어깨를 호흡 한 번 할 정도로만 더 살핀 뒤에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특유의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저도 이 상황에서 더 할 기분은 안 나는군요. 내일 마저 하는 게 낫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은발의 마법사는 귀공자다운 도도한 태도로 다른 인사도 없이 모두의 시선을 가르며 필리엔의 막사를 나갔다. 릴리가 안녕히 가시라 건네는 인사를 눈으로만 받은 대현자가 완전히 막사에서 나간 뒤에 릴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 고명하신 인사를 만나 저도 모르게 긴장이라도 하는지 대현자와 필리엔과 같이 한 공간에 있으면 릴리는 영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대현자가 조성하는 냉랭한 분위기 때문이거나 릴리의 마음속에 있는 옹졸한 질투심과 소유욕이 너무 큰 탓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이쪽에서도 그리 함께 있고 싶지는 않으니 저렇게 빠져주는 게 다행이긴 했다.

릴리는 황급히 셔츠를 껴입고 있는 필리엔에게 다가가 아직 덜 갖춰 입은 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필리엔의 배와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필리엔이 움찔하며 릴리를 돌아보았지만 그리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릴리는 아예 필리엔의 허리에 팔을 감아 뒤에서 끌어안으며 찰싹 붙었다. 필리엔이 호흡하는 것까지 느껴지는 게 릴리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예전엔 심장에 가까운 곳에 가호를 건다더니 오늘은 심장에서 좀 먼 곳이었네요? 보호 마법을 여러 군데 쓰나요?"

릴리가 슬그머니 손을 올려 필리엔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물론 별로 달라진 느낌이나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대마법사가 눈에 띄지 않게 숨겨놓은 마법을 쉽게 찾아낼 정도로 위대하지 못한 릴리는 그냥 필리엔의 어깨를 주물럭거리기만 했다.

가호를 건다든가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내일 마저 하자는 걸 보니 시간도 제법 걸리는 것 같은데……. 

비록 릴리는 대현자가 본격적으로 마법을 쓰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바가 없기는 하지만 간단한 보호 마법을 거는데 그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거대한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직접 동행하며 이렇게 열심히 할 일인가? 심지어 한 번도 아니고 그렇게 여러 차례 중첩해서 마법을 건다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필리엔, 혹시 엄청나게 심각한 병이라도 있어요?"

필리엔이 옅게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어도 릴리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걸요."

릴리가 말하긴 했지만 지병 같은 건 좀 엉뚱한 소리긴 했다. 어쨌든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릴리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대현자가 필리엔에게 유난스러운 거다. 릴리의 뇌리에 스야가 한 말이 스쳐 지나간 건 릴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확실히 좀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리엔의 부관이었다는 롱겟이라는 자가 오히려 더 화를 내고 씩씩거리며 무슨 작당을 하는지 살피고 있는 스라듀레와 똘마니들도 그냥 넘긴 게 어디 안 가는지 필리엔의 혀는 이번에도 다른 사람을 변호해주느라 바빴다.

"가호를 거는 거랑 비슷하긴 한데……. 오늘 본 건 그냥 보호 마법을 거랑은 좀 다른 거였습니다. 릴리도 알죠? 저한테 세필리아의 마법이 다른 종류도 있다는 거요."

"아, 그럼요. 제가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요."

릴리의 생일 밤에 필리엔과 같이 하늘을 날기까지 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허공을 날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대한 도시 풍경이 예쁘긴 했다만 릴리는 역시 땅에 발을 디딘 채 사는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릴리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비죽거리는 것도 모르고 필리엔이 다른 사람의 사정을 변명해주기 위해 설명을 계속했다.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어릴 때부터 세필리아가 여러 마법을 저한테 줬거든요. 그런데 어릴 때는 금방 자라잖아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검사를 하고 제 상태에 맞게 다시 고쳐줬어요."

릴리는 보이지도 않을 인상을 굳이 구기며 필리엔의 등에 뺨을 꾹 눌렀다. 몸을 눌러서 그런지 목소리가 심술쟁이처럼 나왔다.

"그럼 아까 제가 본 가호 걸기도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거예요?"

"아뇨. 그건……. 사실 최근엔 마법을 사용해 버리는 일이 많다 보니 예전보다 자주 보고 있어요. 쓴 만큼 채워 넣고, 서로 연결된 마법들도 다시 잇고 망가진 거 고치고……. 요즘 세필리아가 저 때문에 고생이었네요.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대현자라지만 남의 남자를 너무 자주 찾는 거 아닌가? 물론 릴리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그런 소리를 바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좋은 의도로 좋은 일 한다는데 어깃장 놓기도 웃기고 말이다. 그런데 대마법사씩이나 되면서 뭐하러 사람 하나한테 무슨 마법을 그렇게나 걸어놓는담. 심지어 그렇게 자주 직접 봐야 하는 거라니 굳이 왜 그런 방식을 썼지?

머릿속으로 그다지 답도 안 나올 생각을 굴리던 릴리가 그냥 필리엔의 등에 기댄 뺨을 비비적거렸다.

"전 잘 모르겠어요. 몰라요. 생각 안 할래요. 어쨌든 중요한 건 이제 방해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지금 세필리아 보고 방해꾼이라고 한 거예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필리엔이 웃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릴리는 굉장히 순도 높은 진심으로 한 소리였다. 릴리가 머리를 들었다. 그대로 턱으로 어깨를 꾹 누르고 고개를 기울여 필리엔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당연하죠. 이제 우리 둘뿐이잖아요."

그렇게까지 하고 나서야 조금 뒤늦게 릴리가 무슨 생각으로 한 소리인지 알아차렸는지 릴리를 돌아보던 필리엔의 해맑은 표정이 슬쩍 무너졌다. 반대로 릴리의 얼굴은 환하게 펴졌다. 

릴리가 필리엔을 붙잡아 자신과 마주하도록 휙 돌린 뒤에 뒤로 밀었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필리엔은 주춤거리며 미는 대로 물러나다가 중간에 정신을 차리고 멈춰 서려고 했다. 하지만 릴리가 다시 한번 떠밀자 다시 뒤로 몇 걸음 더 가고 말았다. 너무 가까워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것도 같았으나 릴리가 그보다 빠르게 따라붙어서 멀어지지는 않았다. 

흥미로운 술래잡기였지만 임시로 만든 막사가 좋아 보아야 막사고 넓어 보아도 막사였다. 뒤로 슬슬 밀려나던 필리엔의 엉덩이에 딱딱한 게 부딪혔다. 필리엔이 저와 부딪힌 책상을 돌아보는 순간에 릴리가 필리엔의 가슴을 누르듯이 밀었다. 필리엔은 어어 하는 사이에 팔꿈치로 책상을 짚으며 위에 반쯤 기대었다. 

필리엔이 뒤로 휘청이는 걸 놓치지 않은 릴리가 필리엔의 가슴을 재차 누르며 재빨리 책상 위로 무릎으로 올라갔다. 지금 상체를 일으켜버리면 릴리가 거꾸로 떨어지며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져 내릴 것이기에 필리엔은 밀어내지도 못하고 책상에 등을 대고 누워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책상 위로 올라가 제 양 다리 사이에 필리엔을 가둔 릴리가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뜬 필리엔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내 앞에서 너무 긴장 푸는 거 아니에요?"




-


오랜 오타쿠 생활을 거치며 깊은 고민 끝에 깨달았습니다. 존대캐가 존대캐인 이유는... 그게 더 삭박아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캐릭터성에 따라 다르지만 이번엔 그렇습니다. 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