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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으로

Into the Fairy tale

 

 

 

아나스트리아는 생경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 시간에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랬어야만 했다. 기묘한 바람이었다. 원래 바람이라는 녀석은 밤과 낮의 온도변화에 따라 동쪽 혹은 서쪽으로 부는 녀석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지는 않는다. 이것은 사관학교 시절에 배운 기본 상식이다. 그렇기에 그를 덮쳐온 바람은 이상했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수십 가지 계기판은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그럴 때마다 아나스트리아 역시도 그의 몸이 이곳저곳으로 쏠리고 부딪히고를 반복했다. 차오르는 구토감 속에서 그는 콕핏의 우측 구석을 보았다. 붉은 바늘은 분명 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나스트리아는 핸들을 움직여 방향이라도 바꿔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실패했다. 콕핏 너머의 시야를 모조리 가리고 있는 거센 모래바람이 그가 탄 ‘레드 스파이어(Red spire)’의 통제권을 완전히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레드 스파이어를 제어하고자 했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레드 스파이어는 바람에 휩쓸려 수십 분, 어쩌면 몇 시간을 표류했다. 아나스트리아는 두 손을 모두 놓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여전히 나침반은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레드 스파이어가 남쪽으로 떠내려 온 거리를 가늠하자면, 이미 그가 날고 있는 하늘 아래는 죽음의 땅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바다에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바람’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세상을 휩쓸었으니까. 그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죽음뿐이다. 바람에 휩쓸린 이상 불시착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이 바람에서 벗어난다 해도 레드 스파이어와 자신의 몸 양쪽 모두 무사한 상태로 착륙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러니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과 반파된 레드 스파이어로 식량도 물도 없이 죽음의 땅과 바다를 헤매다 죽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바람 속을 떠돌지도….


-삐삐삐삐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아나스트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도계를 확인했다. 고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이번엔 속도계를 보았다. 그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나스트리아의 충실한 파트너는 바람에서 빠져나오며 그의 파일럿을 보호한 채 수백 KM를 활강하며 날고 있었다.

 

‘적어도 레드 스파이어 안에서 아사(餓死)하는 죽음은 면했군.’

 

그는 호흡을 불어넣으며 손뼉을 쳤다. 그리곤 빠른 손놀림으로 콕핏 안의 버튼들과 손잡이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아직 바람의 영향권에 있어 레드 스파이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고 있었지만, 운이 좋다면 어떻게든 착륙하여 목숨만은 건질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해볼 일이다. 우선, 살아남아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속도가 줄어야했다. 그에게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삐삐삐삐….

 

경고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아나스트리아는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손잡이는 단단히 고정되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아나스트리아는 이를 드러내며 온 힘을 다했다. 속도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옆에 표시된 고도계만이 점점 그 수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삐삐삐삐삐삐….

 

경고음이 더 빠르게 울렸다. 아나스트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삐삐삐삐삐삐….

 

아나스트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날개에 부딪히는 엄청난 저항이 그의 팔꿈치를 통해 전해져왔다. 그는 기도했다.

 

-삐삐삐삐삐■■■■■

 

온 몸이 발기발기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퍼져나간 굉음은 그의 청각을 마비시켰다. 분명 안전벨트가 그의 몸을 붙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이리저리 부딪히고 찢기며 수도 없이 많은 상처를 만들어갔다. 레드 스파이어 또한 성치 못했다. 처음엔 지면에 닿은 바퀴가, 그다음은 날개가, 꼬리가, 몸체가 차례대로 박살났다. 콕핏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유리 파편이 아나스트리아의 어깨를 강타했다. 마찰열은 그의 몸 곳곳을 그을리게 만들었다. 박살난 레드 스파이어의 파츠들이 그의 몸을 베고 찌르고 두들겼다. 커다란 충격이 덮쳐왔다. 콕핏에서 튕겨져 나와 지면 위로 데굴데굴 굴러간 것이다. 신기하게도 지면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모래? 사막이다. 사막이었기에 내가 죽지 않은 건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신체 중 어느 부위도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숨을 쉴 기력조차 점점 사그라지는 것만 같았다.

 

‘나쁘지 않군, 이런 죽음도. 이 죽음의 땅에서 미아가 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다야….’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고 사고가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조차 마치 남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아나스트리아는 세상이 환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이 점점 감겼다. 아나스트리아는 자신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반쯤 눈꺼풀에 잠겼을 무렵, 아나스트리아는 환각을 보았다. 몇백 년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음이 분명한 불모의 사막에 있을 리 없는 것들이 보였다. 어딜 둘러봐도 모래밖에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커다랗고 새하얀 집. 그리고 달려오는 소녀….

아나스트리아는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읽어주었던 동화책의 내용이었다. 이 멸망해버린 세계 어딘가에는 외로운 소녀가 꽃을 가꾸며 살고 있다고. 그 소녀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고, 그 누구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지만, 만약 어딘가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여행자가 길을 잃고 방황한다면…. 그리고 기나긴 헤맴의 끝에 화원에 도착하여 소녀를 만난다면,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한다고.

 

“화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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