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떨어트리고 갔는데.."
  
  
  
  
여유로웠던 시간임에도 나는 왜 걸음을 서두르다 못해 뛰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아무 생각을 안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 상으로는 그러하니까.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느낌에 뛰고 있던 다리를 멈추어 세우고 뒤를 돌아봤으니까. 돌아본 곳엔 노트 한 권을 손에 들고는 먼지를 털어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서있었다. 저 노란 노트. 겉표지에 큼지막하게 전.정.국 하고 적혀있는 걸 보아하니 내 것이 분명하다. 웃는 얼굴로 이거 니 거야? 하고 물어보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꺼에요. 하고 또박또박 말을 했었어야 하는데 이상스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으니까.
  
  
  
  
"아..감사..합니다.."
  
  
  
  
건네받은 노트를 품에 끌어안고는 그대로 뒤돌려다가 다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차마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벌려 감사하다는 표시를 했더니 상대방이 활짝. 정말이지 해맑아 보이는 웃음꽃을 피웠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 이미 나를 지나쳐 언덕길을 올라가버린, 내 물건을 주워준 친절한 사람의 뒷모습만을 그 자리에 박혀서 쫓고 있었다. 떨어져버린 심장이 작동을 안 한다.
  
  
  
  
"너, 아까 교문 앞이라더니 왜 이제 와?"
"어...어?.. 어......"
"왜 이래?"
"어......."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면 귀도 안 들리는 걸까. 먹먹함만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일순간의 충격으로 끝날 줄 알았던 그 먹먹함은 꽤나 오랜 시간 유지되고 있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교탁 앞의 선생님이 전정국 몇 페이지 읽어봐-하고 나를 호명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친구들이 정국아, 정국아-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들조차 들리지 않았으니까.
  
  
  
  
도대체 갑자기 몸이 왜 고장 났을까. 이러다 영영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아닐까. 귀를 만지작거리며 걷고 있는데 '야, 그거 아니야!' 하고 귓가에 선명하게 소리가 들어와 박혔다. 어..? 다시 소리가 들리나?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다시 소리가 들릴 새라 집중을 하는데 '그거 아니거든?' 하고 다시 소리가 들어박힌다.
  
  
  
  
"아니야, 바보야!"
".....어?"
  
  
  
  
교무실을 향해 가는 것 같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아니 내 귓가에 분명히 들어와 박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늘 아침에 만났던 내 노트를 주워줬던 사람이다. 저 사람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린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심장이 뛴다. 멈춘 듯 먹먹하던 심장이 다시 일정하게, 아니 조금은 빠르게 쿵쾅거려 이제는 심장소리가 머리를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집에서 족히 30분이나 걸리는 곳까지 온 나는. 배고프지도 않은데 식품 코너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이 과자를 집어 들었다 내려놓기를 수차례. 드디어 이쪽 코너로 들어오는 선배를 발견하고는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지만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흘려버렸다. 제발, 제발 나를 알아봐라. 제발 나를 아는 척 해줘라. 속으로 얼마나 빌었는지. 이미 마음에 담아두었던 과자들이 있는지 중얼거리면서 과자들을 하나 둘 장바구니에 넣고 있는 선배를 바라보면서 애꿎은 손톱만 깨물었다. 아.. 안되겠다.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내 친구라도 못 알아볼 거야. 결심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쉼 호흡을 하면서 번쩍 떴다.
  
  
  
  
이렇게 고개를 들고 지나쳐도 못 알아보면 어쩌지. 내 얼굴 벌써 잊어버렸으면 어쩌지. 뿌셔뿌셔..를 중얼거리며 뿌셔뿌셔를 찾고 있다는 듯 태연하게 걸으면서도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어..? 너 그때. 노란노트!"
"네.. 아..안녕하세요."
"이 근처 살아?"
  
  
  
  
아니요. 저 멀리 살아요-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없이 미소만 걸쳤을 뿐. 무엇보다 지금 선배가 나를 알아봐줘서, 내 노트 색까지 기억해줘서 정말 심장이 날아갈 것 같을 뿐이다. 살 것을 모두 고른 것인지 계산대로 향하는 선배의 뒤를 쫓아갔다. 그거 하나 사는 거야? 그럼 내가 계산해줄게, 줘.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 데.. 하고 당황하는 사이 이미 내 손에서 과자를 앗아간 선배는 내 것까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데 또 멍청하게 입 밖으로 그 소리가 나오질 않아서 또 멍청하게 선배를 보고만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웃던 선배는 그럼 잘 들어가라며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멀어지다 이제는 점이 되어 보이지 않는 선배의 모습에 이제는 내 손아귀에 쥐어있는 뿌셔뿌셔 한 봉을 쳐다볼 뿐이다.
  
  
  
  
그렇게 심장이 멈추었던 다음 날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엄마의 말소리도 잘 들리고, 선생님 목소리는 물론 친구들의 목소리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달라진 없었다. 다만.. 아주 미묘한 변화를 꼬집어내자면.. 자꾸 내 눈이.. 내 귀가.. 특정 인물에 유독 심하게 반응한다는 것뿐. 나보다 2살 많은 3학년이라 그랬다. 교무실에 자주 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반장 혹은 부반장. 전교회장은 아닌 걸 알고 있으니까.
  
  
  
  
우연히 운동장에서 3학년과 같이 수업을 하게 되었던 날 청소년체조를 열심히 하는 우리와는 달리 3학년 선배들은 자유롭게 발야구를 하고 있었다. 와아------! 하고 큰 탄성이 터져 나오는 걸 보아하니 누가 공을 엄청 멀리 찼나-싶어 바라보니 그 주인공은 그 사람이었다. 역시 지민이 니가 짱이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민인가보다.. 이름이. 왜 이름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을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던 내게 그 소리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지민이. 지민이....
  
  
  
  
이름을 알아내고 나니 생각보다 그 사람에 대해 알아내기가 쉬웠다. 몇 반인지. 어디에 사는지. 나와 연관된 일이 아니면 관심 없던 탓이었는지 몰랐는데 선배는 이미 학교에서 유명 인사였다. 반에 어느 누구든 잡고 물어보면 정보가 술술 터져 나올 지경으로.
  
  
  
  
자주 이용하는 슈퍼는 선배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마트. 주말을 맞이해서 놀러가자는 아이들은 뿌리치고 내가 향한 곳은 **마트였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 발길은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던 것이다. 새벽 6시부터 일어나 갖고 있는 옷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뭘 입을까 끙끙 앓기도 했고.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형이 뿌리는 향수도 몰래 뿌리고는 형이 알게 되면 악을 지를지도 모르는 형이 아끼는 단화도 신고선 발걸음 무겁게 도착한 곳이다, 여기가.
  
  
  
  
두어 시간. 아마.. 그 정도 기다렸던 것 같다. 안에서 기다리면 놓칠까봐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던 시간이. 검은 트레이닝 복을 입은 편안한 차림의 선배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이때다 싶어 그제야 가게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았었으니까.
  
  
  
  
뿌셔뿌셔를 품에 끌어안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건 먹지 말고 보관해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 젠장! 지각이잖아?"
  
  
  
  
눈을 뜬 게 7시 40분. 그러니까 지금 당장 교복을 입고 바로 버스를 타야지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텐데. 차마 이렇게 제멋대로 뻗친 머리로 학교를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샤워기에 머리를 묻었으니까. 분명..... 예전 같았다면 하루쯤 머리 뻗친 거야 뭐 내가 잘 보일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냥 학교가면 그만이지-였는데. 왜일까. 아- 몰라. 시간 없어 죽겠는데 잡생각은 무슨. 샴푸질에 온정신을 쏟아 넣었다.
  
  
  
  
드라이도 포기 할 수가 없었다. 젖은 머리 그대로 밖에 나가면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려 굳어 버릴 테니까. 제멋대로 굳어버릴 머리로 학교를 갈 생각이었다면 머리를 감지도 않았을 거다. 차라리 뻗친 머리 그대로가 그것보다 나으니까. 드라이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눈을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시간 정각 8시. 버스가 5분차가 있던가.. 아.. 없으면.. 택시? 택시가 지금 있긴 있나? 택시 정류장이..
  
  
  
  
결국엔 10분이 다 되서야 집에서 걸음을 옮겼다. 20분까지는 어차피 지금 당장 택시를 탄다고 해도 학교에 도착 못할 시간이다. 어차피 지각인데 그냥 버스를 느긋하게 기다려서 가? 그렇게 치기엔 1교시를 놓쳐버릴 수도 있는 위기가 아닌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택시정류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하아......"
  
  
  
  
택시에서 내려 바라본 정문 통로는 아주 텅텅 비어있었다. 흡사 폐교 같은 느낌으로. 으- 그냥 째고 싶다. 정문에 떡하니 지키고 서있는 학주와 선도들의 모습에 걸음을 옮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리걸음은 정말이지 하기 싫은데.
  
  
  
  
"노란노트!"
"..어..?"
"너도 지각이야? 이리와. 정문으로 가면 걸려~.“
 
  
  
  
누군가 뒤에서 나를 툭툭 건드렸다. 뭐지 싶어 돌아보니 그 선배가 아닌가. 놀란 나를 보고는 상대 역시 놀란 표정으로 노란노트라 나를 칭한다. 노란노트. 아마 선배에게 나는 노란노트로라도 각인이 되어 있나보다.
  
  
  
  
선배가 움켜쥔 왼쪽 손목이 뜨거워서 데일지경이었다. 내 시선은 온통 선배에게 잡힌 손목에 닿아있을 뿐이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이쪽 길로 가면 개구멍 있거든. 아마 아는 애는 전교 통틀어서 열 명이 넘질 않을 걸? 그래서 절대 안 걸린다며 신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음에 또 지각하거든 여기로 가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고 하면서.
  
  
  
  
"봐. 바로 건물 보이지?"
"와....."
"곧 수업 시작하겠다. 어서 들어가 봐!"
"저.."
"응?"
"저.. 노란..... 노트 아니고..."
"..어?"
"정국...이요...전..정국."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선배를 향해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다. 시선을 잡아끄는 내 말에 집중하는 선배를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더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는 듯 궁금함에 물든 표정이 시야에 가득 들어찬다. 누구 앞에서 절대 떠는 아이가 아닌데, 나는. 왜 선배 앞에서만 이렇게 말이 한 번에 깔끔하게 나오질 않는 것인지. 침을 꿀꺽 한 번 삼키고는 내 이름을 말했다.
  
  
  
  
아- 이름? 정국이야? 예쁘네? 내 말에 선배는 웃으면서 이름 예쁘다- 말해왔다. 예쁜 이름 아닌데, 라는 내 말에 예쁜데, 왜. 라며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이러다 1교시 놓치겠다며 다시금 손을 흔들고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선배를 멍하니 쳐다봤다. 선배가 잡았던 손목과 쓰다듬은 머리가 후끈거려서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선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한다. 심장의 펌프질에 머리까지 울려서 어지럼증까지 동반되어왔다. 그런 와중에 1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전정국. 어서 교실로 가! 뇌가 명령을 해도 돌같이 굳어버린 발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결국 1교시를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향한 곳은 양호실이다. 무슨 일이냐며 물어오는 양호선생님을 향해 팔목을 걷어 보이며 미친 듯이 후끈거려요. 그렇게 울상을 짓고 말했다. 머리랑 귀가 울려서 멀미가 날 지경이에요.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데 눈물이 찔끔 새어나오고 말았다. 결국 누워서 쉬라는 말에 침대 하나를 자리 잡고 누웠지만 진정이 되질 않는다. 한번 터진 눈물은 이젠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울지? 왜 울어? 너 슬픈 일 있어? 울고 있는 나에게 물어봤지만 모른다는 답뿐이다. 몰라. 나도 모르고 양호 선생님도 모른대. 그 사실에 서러워 더 눈물이 나는 건가보다.
  
  
  
  
퉁퉁 부은 눈으로 교실에 올라가니 담임도 별말이 없었다. 양호실에 있었다는 말도 별 의심 없이 믿어주는 눈치였고. 친구 녀석들이 무슨 일이냐 걱정스레 물어왔지만 별 일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점심때쯤에야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점심을 먹고 운동장을 거니는데 정국아! 하고 그 심장 떨리게 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리는 게 아닌가.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쭈뼛쭈뼛 뒤를 돌았는데 맙소사. 선배가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정국아."
"아...네..."
"밥 먹었어?"
"네? 네...먹고..산책.."
  
  
  
  
그래? 그럼 나랑 산책할까? 친구 녀석들이 걷기 싫다고 저 멀리 떨어진 벤치에 앉아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친구들이 바글바글 옆에 붙어있었다면 선배도 나도 지금처럼 이렇게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걷고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선배는 안 그러죠? 저는 선배만 보면 제가, 제가 아닌 기분이 들어요. 선배도 나를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을 느낄 날이 올까요? 마주친 시선엔 역시나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맑은 눈이 보였다. 선배.. 이런 게 혹시.. 사랑이라는 감정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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