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

 

아일렌이 뽑은 나무막대기는 깨끗했다. 수도에 남게 된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그녀가 3기사단에 있는 것은 이번 1년뿐이다. 내년 봄이면 자신은 친위대로 들어가게 된다. 친위대에 들어가면 종일 황녀의 옆에 붙어있게 될 테니, 북부는 딱히 갈 일이 없겠지. 북부를 가보지 못한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으나 계획이 어긋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혹시나 걸리면 단장님께라도 말하고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아일렌, 너도 남는 거야?”

“응, 제이나 너도지? 룸메이트 바뀔 일은 없겠네.”

 

“악!”

 

제이나와 아일렌이 서로가 남게 되었다는 사실에 좋아하고 있을 때, 바로 다음 차례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세뮤엘이었다. 그가 든 나무막대기 끝에는 선명하게 빨간 잉크가 묻어있었다. 추운 게 싫다더니. 보통 가장 싫다고 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뽑히게 된다더니, 그 말이 옳았다.

 

“뽑혔나 봐.”

 

“뽑혔네.”

 

세뮤엘은 순식간에 우중충해진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제이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말없이 어깨를 두드렸고, 아일렌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운이 안 따라줘서 뽑힌 것을 어쩌겠나. 그래도 1년 뒤에는 수도로 돌아올 텐데. 에단이 상심한 그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북부도 사람 사는 곳이라 지낼만합니다.”

 

“춥잖아요. 전 추운 건 싫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저건 위로가 아니라 그냥 분통 터지게 만드는 것 아닌가. 아일렌은 에단이 자신만큼이나 위로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뮤엘은 그게 무슨 위로냐며 땅이 푹 꺼지겠다 싶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게 무슨 위로입니까. 아일렌 경, 제이나 경. 저랑 바꿔주실 생각 있어요?”

 

“싫은데.”

 

“나도 사양할게. 어차피 1년이잖아. 다녀와.”

 

편지는 쓸 테니까. 아일렌이 단호하게 거절했고, 제이나도 사양하겠다고 말하며 편지는 쓰겠다고 얘기했다. 너무하다며 괜히 우는 척을 하던 세뮤엘도 이내 착잡한 표정으로 상황을 수긍했다. 3기사단에 들어온 이상 북부에 가는 것은 언젠가는 정해진 일이었다. 다만 정식기사가 된 첫해부터 북부로 가게 될 줄은 예상 못 해서 그렇지.

 

“그래요, 어차피 1년이니까…. 전 3기사단이니까…. 가야겠죠.”

 

“그래그래, 그냥 받아들여. 그럼 송별회도 할 겸, 훈련 끝나고 다 같이 술 마시러 갈까?”

 

“전 좋습니다.”

 

“나,는….”

 

술을 마시러 가자는 제이나의 제안에 아일렌이 주춤했다. 그녀는 저번에 거나하게 취해 결국 제이나에게 업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직 잊지 않았다. 아일렌이 시선을 슬 피하며 대답을 회피하자 세 사람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술은 안 되는데. 아일렌이 뒷걸음질 치자 제이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잡아.”

 

“어딜 갑니까, 아일렌.”

 

“맞아요. 어딜 가려고요?”

 

세뮤엘이 재빠르게 아일렌의 뒤를 막고, 에단이 어딜 가냐며 그녀의 팔을 잡아 그대로 위로 쭉 들어 올렸다. 에단의 키 덕분에 그녀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미치겠네. 에단은 키가 190을 한참 넘었다. 아무리 키가 170을 넘는 그녀라도 에단에게는 대항할 수가 없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은 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아일렌의 두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팔 당기니까 놔.”

 

“도망 안 갈 거지?”

 

“그래, 안 가. 안 간다고.”

 

도망 안 간다는 그녀의 확실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제이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실례했다며 아일렌을 땅에 내려주었다. 굳이 실례했다고 사과하는 이유가 뭐야.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아일렌이 한숨을 쉬었다. 친구를 사귄 것은 좋은데, 어째 날이 갈수록 이들이 자신을 놀리는데 진심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일까. 아일렌이 묘하게 찝찝함을 느끼는 동안 브랜든이 다가왔다.

 

“자,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그런데 아일렌 경은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선배님.”

 

아무것도 아니라며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다른 세 사람이 작게 소리 죽여 웃었다. 의아한 표정을 브랜든을 보고 아일렌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무슨 일인지는 얘기하지 않은 채 마지막 날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아, 저도 이번에 북부에 가니까 세뮤엘 경과 에단 경은 계속 볼 수 있겠네요.”

 

마지막 날의 훈련을 끝마친 브랜든은 세뮤엘과 에단에게 북부로 떠날 때 보자며 인사를 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제이나는 아일렌에게 쓱 다가와 팔짱을 꼈다. 제이나가 팔짱을 끼자 아일렌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도망 안 친다니까. 그녀의 따가운 시선에도 제이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가자!”

 

“가자, 가….”

 

들뜬 제이나와 달리 아일렌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자며 얘기했다. 아일렌은 술을 마시면 순해지는 편이었다. 사고를 치는 것보다야 낫다 싶겠지만, 요새 부쩍 장난기가 늘어난 친구들이 장난을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괜찮겠지. 아마. 아일렌은 오늘은 세뮤엘에게 휘말리지 않겠다며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일렌은 무사히 숙소로 돌아왔다. 제이나한테 업혀서.

 

“... 내가 술 안 먹는다고 했지.”

 

다음 날 아침. 오늘도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아일렌에게 제이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 한 잔을 건넸다. 평소에는 고양이 같은 녀석이 취하면 순해지는 게 재밌었다. 아일렌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컵을 받아 물을 들이켜고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번보다 적게 마시긴 해서 숙취는 별로 없다는 것일까.

 

“미안. 일어났으면 나가자. 오늘 첫 임무 배정받는 날이잖아.”

 

“그래, 가자.”

 

나가자는 말에 아일렌은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했다. 에단이랑 세뮤엘은 이틀 동안 준비를 하고 모레 북부로 출발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제이나와 자신은 오늘부터 정식 근무였다. 무슨 임무를 받으려나. 수도에 남은 3기사단이 주로 하는 일은 구호 활동이나, 민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동물 사냥, 분쟁이나 곤란을 겪는 각 지역 파견 등이었다. 어쩌면 하찮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두 사람이 연무장으로 나가자 남아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3기사단 전체의 인원은 세 개의 기사단 중 가장 많았지만, 반 이상이 북부에 가 있는 탓에 수도에 남아있는 인원 자체는 적은 편이었다. 신입 기사들이 모두 왔다는 것을 확인한 단장이 이번 임무에 관해 얘기했다.

 

“보통은 신입들은 구호 활동을 많이 돕는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네. 수도에 마물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어.”

 

수도에 마물이 있다고? 신입 기사들이 술렁였다. 수도는 안전한 지역 아니었나. 아일렌 역시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설마 벌써 미래가 바뀐 것은 아니겠지. 불안한 기사들의 기색을 읽은 단장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보통 마수가 방어벽을 넘어오면 약화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마수들도 원본은 동물이었던 놈들이라, 원본이 온순한 초식 동물이었거나 방어벽을 넘어오면서 마기를 많이 잃은 것들은 좀 사나운 야생동물 급의 위험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 놈들을 잡아다 애완동물로 기르려는 시도가 있는 모양이야. 아무리 약해도 마수는 마수다. 길들이는 건 불가능하고, 기사면 몰라도 민간인이라면 피해를 보고도 남네.”

 

마수는 마수. 아무리 약하다 한들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아무래도 이전에는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기 전에 3기사단이 사건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수도에 마수가 넘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민심이 흔들릴 테니 아예 사건을 조용히 묻은 모양이고. 그렇다면 자신이 당시 사건에 대해 듣지 못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은 정식기사가 되자마자 1황자의 친위대로 들어갔으니까. 아일렌은 큰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제보가 수도에서 들어왔기에, 이 일은 2기사단하고 같이 하게 됐다. 제보에 따르면 불법 투기장이나 경매장 같은 곳에서 상품으로 마수를 내걸고 있다고 하니, 2기사단은 단속과 검거를 맡고 3기사단은 소수로 팀을 짜서 잠입과 마수 처리를 맡는다. 만약 잠입한 곳에 마수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주어지는 통신용 마도구를 써라.”

 

제보를 받았다고는 하나 마수가 어디 어디에 있는지 특정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2기사단과 3기사단이 일일이 단속을 하고 다닌다면 소문이 퍼져 마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숨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3기사단이 팀을 꾸려 불법 투기장과 경매장 등으로 잠입하고, 마수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나면 2기사단을 호출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단속하고 검거하는 것이 이번 작전이었다.

 

신입 기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재미도 없는 구호 활동보다는 낫지 않냐는 사람도 있고, 약하다고는 하나 마수가 수도에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는 기사도 있었다. 제이나는 전자였다. 지급받은 통신용 마도구를 챙긴 제이나는 아일렌과 같은 팀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쉬워했다.

 

“이번에는 같은 팀이 아니네.”

 

“신입 둘만 같은 팀으로 엮을 수는 없을 테니까.”

 

팀은 둘, 혹은 셋 정도의 소수 인원이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면 수상쩍게 보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선배 기사 한 명과 신입 기사 한 명의 조합이었다. 아일렌 역시 통신용 마도구를 챙겼다. 작은 돌처럼 생긴 마도구는 단순한 신호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돌을 두 번 부딪히면 호출 신호가 간다는 말을 들은 아일렌은 자신과 팀이 된 기사를 찾았다.

 

“아, 당신이 아일렌 경이죠?”

 

“아, 네. 안녕하십니까.”

 

두리번거리는 그녀를 본 한 기사가 아일렌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다닌이라 소개한 기사는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이번 일은 잠입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둘은 우선 옷을 갈아입었다. 황실 기사가 입는 제복 차림으로 갔다가는 분명히 들킬 테니까. 아일렌이 옷을 갈아입고 황궁 밖으로 나오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다닌이 품에서 약도를 꺼냈다. 약도를 이리저리 살피던 다닌은 이내 한참을 말이 없더니 약도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 제가 길치라서 그러는데. 이것 좀…. 길을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

 

첫 임무인데, 이번 임무 괜찮을까. 아일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째 다닌이라는 기사는 선배라기에는 그녀보다 어리바리해 보였다. 자신이 숨겨둔 근무경력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약도를 받아든 아일렌은 이내 어딘지 알아챘다. 그녀는 다행히 수도 출신이었다. 모든 길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약도를 보고 찾아갈 정도는 되었다.

 

“제가 아는 길이네요. 갑시다, 선배님.”

 

“네, 가요. 아일렌 경.”

 

이번 임무, 정말 괜찮을까. 아일렌은 어쩐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보통 이런 기분이 들 때면 꼭 일이 꼬이던데. 그녀는 거리를 걸으며 애써 불안한 예감에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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