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https://soundcloud.com/nguyendorothy/first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나희덕, 푸른 밤



" 하아 ... "

도저히 잠이 오질 않는다. 대체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엉망인 건지. 조금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곤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스탠드를 켜니 그제서야 보이는 시계는 역시 늦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 두 시. 내일 학교 출근도 해야하는데. 얼굴을 쓸어내리니 귓가에 매섭게 내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밖에 비가 저리도 많이 쏟아지니까, 그래서 오늘따라 괜히 기분이 더 이상한 걸까.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더듬더듬, 안경을 쓰고 발걸음을 옮긴 곳은 서재. 불이 밝혀지자, 책상에 올려져 있는 도장판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괜히 한 쪽 마음이 아리다. 비는 역시 핑계였나봐. 언뜻 스쳐 지나가는 얼굴에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 고민을 하다 정신 없이 꽂혀 있는 문제집들 사이에서 편지지 뭉텅이를 꺼내들었다. 하얀 종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복잡한 것도 같고.

그래도, 결국엔 펜을 잡는다.


#




묻고 싶었어.
너도 가끔 나의 부재를 상상했는지,
우리가 함께 보낸 수많은 날들 중 단 한 번이라도 나를 떠올리며 불안함을 느낀 적이 있는지,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는 새벽의 이유가 나였던 날이 있는지.
/하현, 불안




영후, 안녕.선생님이에요. 윤재쌤.

갑자기 편지라니, 너무 뜬금없죠.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랬어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조금 막막하기도 하고요.

이걸 쓰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어째서인지 영후에겐 계속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되더라고요. 감정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더욱.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조급해하거나, 소극적이게 되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거든요. 제대로 된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가 없으니까. 응, 정말 그래요. 항상 선생님이랑 웃고 떠들면서도 뭔가를 꽁꽁 감추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사실은,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겁이 나요. 겨우 여기까지 쓴답시고 버린 편지지가 지금 몇 장 째인지. 책상 위가 조금 엉망이 되어버린 거 있죠.


요즘 들어 기분이 ..., 많이 복잡하네요. 이상해요. 밤엔 잠도 잘 못 잔다고 했잖아요. 덕분에 학교에서 피곤해 죽겠다고. 영후가 걱정하는 얼굴이 지금도 생각나네요. 전엔 안 그랬는데 갑자기 커피를 달고 살아요, 선생님이. 이런 감정의 원인이 뭘까. 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새벽에 끙끙 대는지. 답지 않는 실수가 자꾸만 늘어가는지. 오목조목 따지고 들어서 내가 내린 답은, 영후예요.

미안해요. 아니라고 분명히 말 해줬는데, 마음을 쉽게 접지 못 해서 미안해요. 미련하게 여기까지 끌고 와버린 것도. 사실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이제 그만해야지.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젠 그저 예쁜 학생으로만 생각해야지. 이렇게 한참을 되뇌여도 쉽지가 않더라고요. 영후에겐 별 거 아닌 행동들, 마주 보고 웃거나 손을 잡고 걸을 때면 선생님 마음이 너무나도 어지러웠어요. 선생님이, 학생한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데에서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건, 이렇게 혼란스러운 동시에 계속 품게 되는 기대감. 그냥 단순한 애제자는 아닌 것 같아요. 과연 어떤 선생님이 제자를 이렇게 까지 만나고 싶어하고, 어떻게든 교점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할까요.

하지만 영후가 곁에 없으면 그 땐 정말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어요. 더 다가가기엔 영후가 도망이라도 칠까봐. 반대로 이제 그만 해야지 하면서 벽을 치기도 무섭고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영후 속을 알 수가 없다고.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그런 와중에 형이 되어달라는 말을 들을 땐 영후가 조금 밉기도 했어요. 아, 나는 딱 여기까지구나. 날 그저 형 같이 생각하는 아이에게 더 이상 무얼 바랄 수 있을까. 선생님, 정말 나쁜 사람이죠. 영후는 그저 내가 좋은 선생님이어서, 형과 닮은 사람이어서, 그리 잘 따라준 것인데 속으로는 이런 마음이나 품고 있었으니 말이에요.


좋아해요. 그래, 선생님이 요즘 들어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 건, 영후를 아직 까지도 좋아하고 있어서 그런 거였어요. 처음엔 내 유년시절과 많이 닮은 아이여서, 그래서 눈길이 갔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아니에요. 영후를 부정할 수도 없이 좋아해요. 왜냐고 물어보는 건 하지 말아주면 안 될까요. 전에도 말했지만, 이유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영후라서 좋아요. 사고를 쳐서 속을 썩이더라도 결국엔 내 말이면 고분고분 잘 듣는 모습이 예쁘고, 작은 도장 몇 번 받았다고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여기저기 자랑하는 모습도 예뻤어요. 말투에서 부터 작은 행동 하나하나 바꿔가려고 애쓰는 널, 어떻게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영후가 머릿속에서 한 없이 울려요. 눈을 감아도 영후가 보여요. 어떻게 하죠, 선생님.

지난 밤에도 한 말이지만, 부디 영후가 썩은 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건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영후에게 피면 안 된다는 말도, 네 옆에 있으면 봄이 다 죽을 거라는 말도. 선생님이 영후의 봄이 되어줄 수 있는데. 어디 가지 않을 거라고, 아무리 매서운 겨울이 와도 피어나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요. 다시 핀 꽃이 죽기 전에 핀 꽃이랑 다른 애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네게서 피어 있고 싶다는 말, 진심이에요. 예쁘다는 말들도, 앞으로 더 예뻐해줄 거라는 약속들도, 모두. 입 발린 소리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꽃이 피어나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썩은 나무가 아니잖아요. 영후는 선생님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얼마든지 예쁜 꽃들을 피어낼 수 있는 나무이고.


듣고 싶은 대답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없는 마음을 억지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어요. 정말 아니라면, 많이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릴 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만 마음을 정리할게요. 영후의 대답이 어떻든, 그냥 말해줘요. 흐리지 않고, 선명하게. 왜 늦은 밤, 조용한 곳으로 나를 불러냈는지. 서로의 체온을 느껴 가며 잠들었던 밤에도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지. 이번에도 영후의 마음이 아니라고 하면, 그런다면, 선생님이 이 혼란스러운 감정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를 잃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미 선생님 안에는 영후라는 도장이 찍혀버려서, 앞으로도 내 아픈 손가락일 테니까. 언제나 따뜻한 계절로 맞이해줄게요. 다만, 미워하지만 말아줘요. 선생님이 이렇게 마음을 전했다고 해서 날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기적인 부탁이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이것 만큼은.


당장 대답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오래 걸려도 좋아요. 기다릴게요.영후 마음이 어떤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



너는 언제나 내 우주에 있고
너에게도 우주가 있다면
그곳에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안재동, 내 안의 우주





봄 날,




요즘 네가 자꾸 생각나고
잠 안 오는 밤에 너를 계속 찾아.
너한테 무슨 변화만 있어도
나는 자꾸 궁금하고 보고 싶고.
네 말들이
자꾸 신경 쓰이고 그래./ 흔글, 그냥 만나자.



시퍼런 봄의 경중으로 뭉쳐진 목련 봉오리들은 후둑이는 비에 질척이는 진흙바닥으로 그 높이를 잃어버렸다. 서슬로 뒤덮인 잿빛 구름에 소년의 입술은 상흔으로 물들었고, 소년의 봄은 다 죽어버렸고.


선생님, 쌤, 윤재쌤.

새끼는 사내의 편지를 끝까지 읽어 내린다. 한 자도 놓치지 않고. 분명 옆에서 누가 본다면 네가 글도 읽느냐면서 뒷머리 한번 툭툭 건들었겠지. 그간 잠이 오지 않는다는 사내의 말이 생각났다. 나 때문인가, 새끼는 조용한 방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침대도 없는 방, 새끼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듯 이불 위로 눕는다. 쿵, 하고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아플 법 하기도 한데, 새끼는 딱히 아프다는 생각은 하질 못한다. 천장을 가만히 올려본다. 아무런 흔적도 없는, 아니, 아니. 절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만 하는 붉은 흔적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누리끼리한 천장만 소년은 가만히 올려보았다.


내가 내린 답은, 영후에요.

답. 답이라. 새끼는 느릿하게 눈 감뜬다. 제가 언제부터 누군가의 답이 되는 사람이었던가. 새끼는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뜬다. 알 수 없는 형(形)의 덩어리가 천장에 붕 뜨는 느낌이었다. 저것은 무엇일까. 우리 형? 아니면 지금 나에게 편지를 쓴 당신? 제게 도장을 찍어주고는 그 말간 미소로 웃어준 날, 새끼는 사내의 얼굴에서 그리우면서도 그립지 않은 누군가의 형상이 스쳐 지난 것을 보았다. 물론 애써 모른 척 했지만, 새끼는 알고 있었을 테지. 사내의 얼굴에서 얼핏 보인 형의 모습에 새끼가 가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동경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감정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가족애에서의 애(愛)가 조금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테지. 새끼는 어쩌면 오래오래 생각하고서 사내에게 그리 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형이 되어달라는 말. 당신은 그 말을 듣고 나를 밉게 보았었구나. 새끼는 팔로 제 눈을 가려 덮었다. 그때는 형, 같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히 울린다. 날이 바뀐, 오전 2시 16분. 새벽은 고요하고, 당신의 집과 우리 집 사이의 공간 역시 고요하다. 언제부터 사내를 형 같다고 생각했는지, 또 언제부터 형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또, 또 언제부터 형도, 다른 사람도 아닌, 한윤재라는, 저를 봐주는 당신이라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새끼는 팔이 만들어낸 암흑 사이로 제 입술 잘근 씹는다.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어요.

…글쎄요, 무너질 사람인가. 새끼는 눈 덮어 가린 팔 천천히 내렸다. 밝은 빛이 한번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부셔 눈을 찡그리듯 감았다가 천천히 펴보인다. 무너지는 사람이라. 새끼는 피실이듯 작게 웃음 흘린다. 쌤, 나는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사람인걸요. 쌤도 알잖아요, 이제. 나는 다 잃었어요. 내가 가장 증오하던 아버지도 잃고, 가장 좋아하던 우리 친 형도 잃고, 무엇보다 의욕을 잃고, 내가 이루던 것들을 포기하듯이 잃어버리고. 입술을 잘근 물었다가 놓는다. 아마 사내가 저에게 밀어붙였어도 새끼는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멀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모른 척 하지 않았을까. 제 형의 죽음을 모른 척 하던 것처럼.


부디 영후가 썩은 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건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선생님이 영후의 봄이 되어줄 수 있는데, 어디 가지 않을 거라고, 아무리 매서운 겨울이 와도 피어나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요.

빛 사이로 눈을 천천히 감뜬다. 몸을 옆으로 돌려 눕는다. 썩은 나무. …쌤, 내 봄은 다 죽었어요. 다 뒤졌고요. 죽은 봄에서 나가면 또 다시 죽은 봄이 있을 것만 같아요. 완전 겁쟁이다. 그쵸. 하긴, 그러니까 아빠라는 새끼 죽이지도 못하고 그냥 감옥 보낸 거로 끝났지만요. 그냥 죽였으면 좋았을걸. 그럼 나도 죽지 않았을까요. 다시 죽은 봄을 안 만나도 되지 않았을까요. 새끼는 눈을 느리게 감뜨다가 사내가 준 편지 손에 쥐고는 그 겉 종이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진다.


…내 봄은 다 죽었어요, 쌤. 근데요, 근데. 근데 어디선가 계속 봄이 들어오려고 해요. 무슨 봄인지 쌤은 알아요? 그 정답을 알아요? 죽은 봄이 아니라, 예쁜 꽃이 피어나는, 그런 봄인 것 같아요. 선생님, 정답을 알아요? 알면 알려주세요.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이니까요.
우리 선생님이니까.
영후가 좋아하는, 윤재쌤이니까요.


알면 알려주세요, 쌤이 말하는 썩은 나무가 아닌 예쁜 봄이요.



소년은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다. 어느덧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잠은 오지 않는다. 당신은 제 윗윗층에 몸을 두고 있겠지. 소년은 사내에게 문자 한통을 보낸다.

안잔다는 답이 돌아오자 소년은 겉옷 하나를 챙겨들고는 집 밖을 나선다. 느릿하게 계단 하나하나를 올라가며 당신과 말 하나씩 이어간다. 하얀색 잠옷. 자장가를 불러준다는 당신. 소년은 정말이지 너무도 오랜만에 아이같은 웃음을 낸다. 귀엽다, 윤재쌤.

[ 그럼요 쌤, 저 문 열어주세요. 자장가 듣게. 옷은 갈아입지 말고요. ]

당신이 놀란 얼굴 하고는 문을 급하게 연다. 새끼는 느른하게 웃으며 어리둥절한 얼굴 표정 한 당신 눈 마주한다. 선생님. 영후의 선생님인가. 영후의 윤재쌤. 내 선생님.


너 다 알면서 웃는거지.
네 눈빛에 빠져 나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지켜보다,
결국 구해주러 올 거지.
/ 향돌, 머문 고백



'구해주러 왔네요. 쌤.'

"내가 답이라고 했죠, 쌤."
"…좋아해요. 쌤은 내 답이에요."
"자장가 불러줄거죠?"



☁️🌸☁️🌸☁️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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